중신지비련(中臣志斐連; 나카코마노시히노무라지)
중신지비련(中臣志斐連; 나카코마노시히노무라지)
천아옥명(天兒屋命; 아메노코야네노미코토)의 11세손 뇌대신명(雷大臣命; 이카츠오미노미코토)의 아들 제자(弟子)의 후손이다. 6세손 의부내고련(意富乃古連; 오호노코노무라지)은 웅략천황(雄略天皇) 대 사람이다. 동이(東夷) 중에 항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모두 강력하여 조정의 군대를 막아내었다. 그래서 의부내고련이 갑주를 다섯 겹으로 입고 적진으로 달려가 관군을 수고롭지 않게 하고 하루아침에 오랑캐를 멸하였다. 천황이 그 공적을 기뻐하여 폭대련(暴代連; 아라테노무라지)라는 이름으로 고치도록 하였다.
【주석】
1. 중신지비련(中臣志斐連)
중신지비련은 중신씨의 지족(枝族)이다. 지비(志斐; 시히)는 지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
중신지비련씨는 『속일본기』 화동 2년(709) 6월 을사조에 처음 보인다. 축전국(筑前國) 도군(島郡)의 소령(少領) 종7위상 중신부가비(中臣部加比)에게 중신지비련(中臣志斐連)을 사성하였다고 적고 있다. 축전국 도군을 근거지로 하는 중신지비련씨의 옛 씨성이 중신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속일본기』 신귀(神龜) 2년(725) 춘정월 경오조에서는 대초위하(大初位下) 한인법마려(漢人法麻呂; 아야히토노노리마로)에게 중신지비련(中臣志斐連)을 사성하였다고 적고 있다. 도래계인 한인(漢人) 중에도 중신지비련을 사성받은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신지비련은 중신을 생략하고 지비련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속일본기』 양로(養老)5년(721) 춘정월 갑술조에서는 정8위상 실비련삼전차(悉斐連三田次; 시히노무라지미타수키)가 산술(笇術)에 뛰어나 사범이 되는 사람으로서 시(絁) 10필(疋), 사(糸) 10구(絇), 포(布) 20단(端), 초(鍬) 20구(口)를 원정천황(元正天皇)에게 사여받았다. 『가전(家傳)』 하(下)에서도 지비련삼전차가 신귀(神龜) 연간(724~729)에 역산(曆算)에 뛰어난 사람으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제자들에게 『속일본기』 천평(天平) 2년(730) 3월 신해조에는, 박사들이 나이가 많아 가르칠 수 없게 되면 그들의 학업을 이을 수 없게 되므로 제자를 기르도록 하였는데, 지비련삼전차가 지비련저양(志斐連猪養; 시히노무라지)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칠요반력(七曜頒曆)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보인다. 지비련저양은 중신지비저감(中臣志斐猪甘)으로도 표기되는데 천평보자(天平寶字) 5년(761)경에 음양윤(陰陽允)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본조서적목록(本朝書籍目錄)』에서는 ‘추기경(樞機經)’이 음양료(陰陽寮) 종8위하 지비련저양(志斐連猪養)이 편찬한 역(曆)이라고 적고 있다. 좌백유청은 지비련저양과 지비련삼전차의 자손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 밖에 중신지비련국수(中臣志斐連國守)가 『유취국사(類聚國史)』권10 잡제(雜祭)연력(延曆) 16년(797) 7월 병술조에 정6위상 음양박사로 활약하고 있다.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에서는 정관(貞觀) 7년(865)에 중신지비련춘계(中臣志斐連春繼; 나카토미노시히노무라지하루츠구), 원경(元慶) 5년(881)에 중신지비련안선(中臣志斐連安善; 나카토미노시히노무라지야스요시), 인화(仁和) 2년(886)에 중신지비련광수(中臣志斐連廣守; 나카토미노시히노무라지히로모리) 등이 천문박사로 등장하고 있다.
중신지비련은 중신씨의 지족(枝族)이다. 지비(志斐; 시히)는 지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
중신지비련씨는 『속일본기』 화동 2년(709) 6월 을사조에 처음 보인다. 축전국(筑前國) 도군(島郡)의 소령(少領) 종7위상 중신부가비(中臣部加比)에게 중신지비련(中臣志斐連)을 사성하였다고 적고 있다. 축전국 도군을 근거지로 하는 중신지비련씨의 옛 씨성이 중신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속일본기』 신귀(神龜) 2년(725) 춘정월 경오조에서는 대초위하(大初位下) 한인법마려(漢人法麻呂; 아야히토노노리마로)에게 중신지비련(中臣志斐連)을 사성하였다고 적고 있다. 도래계인 한인(漢人) 중에도 중신지비련을 사성받은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신지비련은 중신을 생략하고 지비련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속일본기』 양로(養老)5년(721) 춘정월 갑술조에서는 정8위상 실비련삼전차(悉斐連三田次; 시히노무라지미타수키)가 산술(笇術)에 뛰어나 사범이 되는 사람으로서 시(絁) 10필(疋), 사(糸) 10구(絇), 포(布) 20단(端), 초(鍬) 20구(口)를 원정천황(元正天皇)에게 사여받았다. 『가전(家傳)』 하(下)에서도 지비련삼전차가 신귀(神龜) 연간(724~729)에 역산(曆算)에 뛰어난 사람으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제자들에게 『속일본기』 천평(天平) 2년(730) 3월 신해조에는, 박사들이 나이가 많아 가르칠 수 없게 되면 그들의 학업을 이을 수 없게 되므로 제자를 기르도록 하였는데, 지비련삼전차가 지비련저양(志斐連猪養; 시히노무라지)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칠요반력(七曜頒曆)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보인다. 지비련저양은 중신지비저감(中臣志斐猪甘)으로도 표기되는데 천평보자(天平寶字) 5년(761)경에 음양윤(陰陽允)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본조서적목록(本朝書籍目錄)』에서는 ‘추기경(樞機經)’이 음양료(陰陽寮) 종8위하 지비련저양(志斐連猪養)이 편찬한 역(曆)이라고 적고 있다. 좌백유청은 지비련저양과 지비련삼전차의 자손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 밖에 중신지비련국수(中臣志斐連國守)가 『유취국사(類聚國史)』권10 잡제(雜祭)연력(延曆) 16년(797) 7월 병술조에 정6위상 음양박사로 활약하고 있다.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에서는 정관(貞觀) 7년(865)에 중신지비련춘계(中臣志斐連春繼; 나카토미노시히노무라지하루츠구), 원경(元慶) 5년(881)에 중신지비련안선(中臣志斐連安善; 나카토미노시히노무라지야스요시), 인화(仁和) 2년(886)에 중신지비련광수(中臣志斐連廣守; 나카토미노시히노무라지히로모리) 등이 천문박사로 등장하고 있다.
2. 천아옥명(天兒屋命)
좌경 신별(상) 「등원조신」 조(336) 천아옥명 참조.
좌경 신별(상) 「등원조신」 조(336) 천아옥명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