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신찬성씨록

대중신조신(大中臣朝臣; 오나카토미노아손)

대중신조신(大中臣朝臣; 오나카토미노아손)
 등원조신(藤原朝臣; 후지하라노아손)과 같은 조상이다.
 
【주석】
1. 대중신조신(大中臣朝臣)
대중신조신씨의 옛 씨성은 중신조신(中臣朝臣)이다. 『속일본기』 신호경운(神護景雲) 3년(769) 6월 을묘조에 “신어(神語)에 대중신(大中臣)이라는 말이 있다. 중신조신청마려(中臣朝臣淸麻呂, 702~788)는 두 번 신기관(神祇官)에 임명되어 그 직무를 받들어 실수가 없었다. 그래서 (청마려에게) 씨성 대중신조신을 사여하기로 하겠다.”라고 적고 있어, 중신조신청마려가 769년에 칭덕천황으로부터 대중신조신을 사성받았음을 알 수 있다. 『가전(家傳)』 상(上)에서는 대대로 천지를 제사지내는 일을 관장하면서 사람과 신 사이를 서로 화목하게 하였으므로 그 씨를 대중신이라 부르도록 하였다고 적고 있다.
중신조신청마려는 중신조신의미마려(中臣朝臣意美麻呂, ? ~711)와 다치비아기량(多治比阿岐良)의 아들이다. 의미마려는 등원겸족의 6촌으로 겸족의 양자가 되었고, 겸족의 딸 두매낭(斗賣娘)과 결혼하였다. 669년 겸족이 죽었을 때 겸족의 유일한 아들 불비등은 열한 살이었다. 의미마려는 650년대 전반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측되어 불비등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 불비등이 성년이 될 때까지 등원씨의 씨상(氏上)의 지위에 있었을 것이다.
등원불비등은 천무천황 대인 685년에 등원조신이라는 씨성을 사여받았고, 지통천황 대인 688년에 판사로 임명되었다. 698년에 불비등과 그 자손을 제외한 등원조신씨는 다시 중신조신씨를 칭하라는 명을 받아 중신조신씨를 칭하게 되었다. 그 후 의미마려는 699년에 주전사(鑄錢司)의 장관으로 임명되고, 702년에 정5위상으로 승진하였다. 705년에는 좌대변(左大辨)으로 임명되고, 원명천황(元眀天皇) 대인 708년에는 신기백(神祇伯)과 중납언(中納言)으로 임명되었다. 711년에 정4위상으로 승진한 후 그해 윤6월에 죽었다.
청마려(淸麻呂)는 의미마려의 일곱째 아들로, 성무천황(聖武天皇) 대부터 환무천황(桓武天皇) 대까지 6대에 걸쳐 관인으로 활약하면서 정2위, 우대신까지 승진하여 중신씨 중에서 가장 고위 관인이 되었고, 769년에 대중신조신이라는 씨성을 받아 대중신조신씨의 조상이 되었다. 생모 미상의 그의 둘째 아들 대중신조신자로(大中臣朝臣子老, ? ~789)는 칭덕천황(稱德天皇)과 광인천황(光仁天皇), 환무천황 대에 관인으로 활약하여 정4위하 참의(參議), 궁내경(宮內卿), 신기백까지 역임하고 죽었다.
청마려의 정실은 다치비고나녜(多治比古奈禰, 多治比子姊)로, 칭덕천황 대와 광인천황, 환무천황 대에 여관(女官)으로 내리(內裏)에서 근무하면서 환무천황 대에 상시(尙侍), 종2위까지 승진하였다. 그녀가 낳은 대중신제어(大中臣諸魚, 743~797)는 청마려의 넷째 아들로 광인천황과 환무천황 대에 관인으로서 활약하였다. 789년에 의붓형 자로가 죽은 후 참의와 신기백이 되었고, 근위대장, 병부경과 좌대변을 겸직하고 정4위상까지 승진하였다.
대중신제어의 처 대화희자(大和姬子)도 시어머니 다치비고나녜와 마찬가지로 환무천황의 여관으로 내리에서 근무하였다. 최종 관직은 전시(典侍)였다. 대중신제어가 또 다른 처 대화소상자(大和小常子)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대중신조신백자(大中臣朝臣百子)는 평성천황(平城天皇)의 어식소(御息所; 미야스토코로)가 되었다.
청마려는 본인뿐만 아니라 내리에서 천황 측근에서 근무한 처와 며느리의 활약으로 다른 중신조신씨와 차별화하는 대중신이라는 씨명을 사여받았던 것이다.
2. 등원조신(藤原朝臣)
좌경 신별(상) 「등원조신」 조(336) 참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대중신조신(大中臣朝臣; 오나카토미노아손) 자료번호 : ss.k_0001_0040_00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