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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난파기촌(難波忌寸; 나니하노이미키)

난파기촌(難波忌寸; 나니하노이미키)
 대언명(大彦命; 오히코노미코토)의 후손이다. 아배씨(阿倍氏; 아헤노우지)의 먼 조상인 대언명은 기성서리궁어우천황(磯城瑞離宮御宇天皇; 시키노미즈가키노미야니아메노시타시로시메시시스메라미코토) 대에 하이(蝦夷; 에미시)를 다스리도록 파견되었을 때 토전(兔田; 우다)의 묵판(墨坂; 스미사카)에 이르러 홀연 젖먹이[嬰兒; 와쿠고]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즉시 버려진 젖먹이를 찾아낸 대언명이 크게 기뻐하며 유모를 수소문하다가 토전제원원(兔田弟原媛; 우다노오토하라히메)이라는 사람을 발견하였다. 그가 젖먹이를 옆에 끼고 “잘 키워 장성하면 공을 세워 보답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성인이 되어 찾아오자 대언명이 자식으로 삼고 사랑스럽게 보살폈다. 이 사람을 득언숙녜(得彦宿禰; 이히코노스쿠네)라고 부른다. 이설도 있다.
 
【주석】
1. 난파기촌(難波忌寸)
난파(難波; 나니하)라는 씨명은 율령제하 난파국에서 유래한다. 난파기촌의 옛 씨성은 난파길사이고, 『일본서기』에 의하면 웅략 14년 4월에 난파길사일향향자(難波吉士日香香子)의 자손이 대초향부길사(大草香部吉士)를 사성받았다. 그 후 천무 10년(681) 정월 정축조에는 초향부길사대형(草香部吉士大形)이 난파련을 사성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천무 14년 6월에는 난파련이 기촌 성을 사성받았다. 난파기촌씨의 본거지는 섭진국 동생군(東生郡, 東成郡; 히가시나리군)으로 현재 오사카만 중앙에 남북으로 돌출된 상정(上町) 지역의 동부(서부는 서생군)를 가리킨다. 이곳은 ‘난파대군(難波大郡)’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일찍이 해외 문물이 들어오던 대외 창구이자 한반도계 이주민들이 다수 거주하던 곳이다. 한편 동생군의 생(生)이 ‘나리’라고 불리게 된 이유를 백제어에서 그 유래를 찾기도 한다. 즉 웅진(熊津)의 백제 때 이름이 구마나리(久麻那利)이며, 나루를 뜻하는 나리를 모방하여 상정 지역을 동측의 나루라는 의미에서 이름 붙였다는 것이다.
난파기촌씨 일족으로는, 기촌을 사성받은 이후의 일족으로 『속일본기』 경운(慶雲) 3년(706) 10월 임오조에 섭진국 출신의 난파기촌빈족(難波忌寸濱足)이 종8위상에서 1계를 승진하고 있다. 또한 천평보자 4년(760) 11월 18일자 「동대사삼강첩(東大寺三綱牒)」(『대일본고문서』 4-452)의 난파기촌빈승(難波忌寸濱勝)은 동생군의 의대령(擬大領)으로 정8위상이었다. 특히 『일본후기』 홍인(弘仁) 4년(813) 2월 을미조의 하내국 출신 종8위상 난파기촌씨주(難波忌寸氏主)와 섭진국 출신 정6위상 난파기촌선인(難波忌寸船人)이 각각 숙녜를 사성받고 있는데, 이들이 『신찬성씨록』 편찬 단계에서 난파기촌에 대한 계보를 제출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보면 본조에 난파숙녜가 아닌 난파기촌으로 제시한 것은 난파기촌에 대한 자료가 이미 홍인 4년 2월 이전에 제출되었음을 시사한다. 난파기촌선인은 천평보자 4년(760) 11월 18일자 「동대사삼강첩(東大寺三綱牒)」(『대일본고문서』3-17)에는 길지선인(吉志船人)으로 나온다.
2. 아배씨원조대언명(阿倍氏遠祖大彦命)
대언명(大彦命)은 『고사기』에 대비고명(大毘古命)으로도 나온다. 효원천황의 맏아들이며 개화천황(開化天皇)의 형으로 전한다. 어머니는 울색미명(鬱色謎命)이며, 숭신천황(崇神天皇) 때 북륙도(北陸道)를 평정하였다고 한다. 『일본서기』 효원기 7년 2월조에는 아배신(阿倍臣), 선신(膳臣), 아폐신(阿閉臣), 사사성산군(沙沙城山郡), 축자국조(筑紫國造), 월국조(越國造), 이하신(伊賀臣) 7씨족의 시조로 전한다.
3. 기성서리궁어우천황어세(磯城瑞離宮御宇天皇御世)
『신찬성씨록』 완본에는 ‘천황’ 다음에 ‘시숭신(諡崇神)’이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다. 숭신은 『고사기』와 『일본서기』 의 제10대 천황이다.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의 주인공으로 미마키이리히코(御間城入彦)는 임나(任那, 彌摩那)에서 대화로 들어온 왕이라고 한다. 이후 일본 학계에서는 숭신을 실재한 최초의 왕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삼륜산(三輪山) 기슭에 자리잡은 숭신에서 새로운 왕조가 개시되었다고 보고 이를 ‘이리왕조’, ‘삼륜왕조’라고 이름 붙이기도 한다.
기성서리궁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숭신 3년 9월조에 보이고, 『대화지(大和誌)』에는 삼륜촌(三輪村) 동남쪽, 지기어현신사(志紀御縣神社) 서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은 현재 나량현 앵정시 금옥(金屋) 부근이다.
4. 하이(蝦夷)
‘에미시’ 혹은 ‘에비스’라 칭한다. 고대 일본열도 동북부 지역에 거주하며 통일국가의 지배에 저항하면서 그 지배권 밖에 존재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편 대언명이 동국(東國) 지방에 파견되었다는 전승은 『고사기』 숭신천황단과 『일본서기』 숭신 10년 9월조에도 보이지만, 모두 하이와 관련된 내용은 전하고 있지 않다.
5. 토전묵판(菟田墨坂)
토전의 묵판은 나량현(奈良縣) 우타군(宇陀郡) 진원정(榛原町) 추원(萩原)의 서쪽에 있는 언덕으로, 대화 지역 중앙부와 이세 지역을 연결하는 요충지상에 있다. 『일본서기』신무 즉위전기, 숭신 9년 3월조, 웅략 7년 7월조에 관련 기사가 보인다.
6. 토전제원원(菟田弟原媛)
여기에만 보여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토전 지방 호족의 딸로 여겨진다. 토전이라는 씨명을 가진 호족은 『일본서기』 황극 2년(643) 11월조의 토전제석(菟田諸石), 『일본서기』대화(大化) 원년(645) 9월조의 토전박실고(菟田朴室古) 등이 보인다.
7. 득언숙녜(得彦宿禰)
여기에만 보여 자세히 알 수 없다.
8. 이설병존(異說竝存)
여기서 이설이란 『고사기』 중애천황단에 보이는 난파길사(難波吉師)의 선조인 이좌비(伊佐比) 전승, 『일본서기』 신공황후 섭정 원년 2월의 오십협모(五十狹茅) 전승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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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기촌(難波忌寸; 나니하노이미키) 자료번호 : ss.k_0001_0030_0130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