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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좌좌귀산군(佐佐貴山君; 사사키야마노키미)

좌좌귀산군(佐佐貴山君; 사사키야마노키미)
 위와 같다.
 
【주석】
1. 좌좌귀산군(佐佐貴山君)
좌좌기(佐佐貴; 사사키)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근강국(近江國) 포생군(蒲生郡) 소사향(篠笥鄕)에서 유래한 것으로 협협성(狹狹城; 사사키)이라고도 표기한다. 산군(山君)은 원래 이 씨족이 산부(山部) 혹은 산수부(山守部)를 이끄는 반조씨족이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서기』 현종 원년 5월에 한대숙녜(韓袋宿禰)가 압반황자(押磐皇子)의 살해에 연좌되므로 왕릉을 지키는 능호(陵戶)로 삼고 아울러 산을 지키게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때 왜대숙녜(倭袋宿禰)는 누이인 치목(置目)이 압반황자의 유골을 찾는 데 공을 세웠으므로 본성(本姓)인 협협성산군씨(狹狹城山君氏)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사기』안강천황단(安康天皇段)에서는 한대(韓袋)가 좌좌기산군(佐佐紀山君)의 조상이라고 하고 왜대(倭袋)는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왜대가 시변왕(市邊王, 押磐皇子)을 죽였다는 내용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본서기』 의 왜대숙녜는 한대숙녜의 이름에 들어 있는 한(韓), 즉 한반도를 의식하여 조작된 가공 인물로 볼 수 있다. 또한 『고사기』에서는 천한 노파가 시변왕의 유골을 찾는 데 도움을 주었고 유골을 찾아서 능을 만들고 한대의 자식들에게 능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보이므로, 시변왕의 유골 발견과 능의 조영을 계기로 이에 도움을 준 한대 일족이 왕릉(사자키, 사사기)이라는 뜻을 가진 씨명을 갖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족으로는 『속일본기』에 좌좌귀산군친인(佐佐貴山君親人), 좌좌귀산군족인(佐佐貴山君足人), 좌좌귀산공인족(佐佐貴山公人足), 좌좌귀산공유기비(佐佐貴山公由氣比), 좌좌귀산공유하비(佐佐貴山公由賀比)가 보인다. 자세한 것은 좌경 황별(상) 「좌좌귀산공」조(062) 참조.
2. 동상(同上)
『신찬성씨록』완본에는 ‘아배조신동조(阿倍朝臣同祖). 대언명지후야(大彦命之後也).’라고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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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좌귀산군(佐佐貴山君; 사사키야마노키미) 자료번호 : ss.k_0001_0030_012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