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전조신(粟田朝臣; 아와타노아소미)
속전조신(粟田朝臣; 아와타노아소미)
대춘일조신(大春日朝臣; 오카스가노아소미)과 조상이 같으며 천족언국인인명(天足彦國忍人命; 아메타라시히코쿠니오시히토노미코토)의 후손이다. 『일본기』와 합치한다.
【주석】
1. 속전조신(粟田朝臣)
속전(粟田; 아와타)이라는 씨명은 율령제 산성국(山城國) 애탕군(愛宕郡)의 속전(粟田)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곳은 현재 경도시(京都市) 복견구(伏見區)속전구(粟田口) 일대에 해당된다. 『일본서기』 천무천황(天武天皇) 13년(684) 11월에 속전신(粟田臣)이 조신 성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속전신 일족으로는 『일본서기』 추고천황(推古天皇) 19년(611) 5월 5일조의 속전세목신(粟田細目臣), 백치(白雉) 원년(650) 2월 갑신조의 원일조하 때 꿩이 들어 있는 가마를 든 속전신반충(粟田臣飯蟲), 백치 4년(653) 5월 임술조의 견당사로 파견된 도관(道觀)등이 있다. 도관은 백치 4년 5월 임술조 분주에 춘일속전신백제(春日粟田臣百濟)의 아들이라고 적혀 있다. 천무천황 10년(681) 12월 계사조에는 소금하(小錦下, 664~685년에 일본에서 사용된 관위 26계 중 12위)를 받은 속전신진인(粟田臣眞人)이 보인다.
속전조신 일족으로는 『일본서기』 지통천황(持統天皇) 3년(689) 정월 임술조의 준인(隼人) 174인과 아울러 베 50상(常), 소가죽 6매, 사슴가죽 50매를 바친 축자대재(筑紫大宰) 속전진인조신(粟田眞人朝臣)이 보인다. 『속일본기』 화동(和銅) 4년(711) 9월 병자조에는 군영을 세우고 병고를 지키는 일과 관련하여 종5위하(極位) 속전조신필등(粟田朝臣必登) 등을 장군으로 삼았다고 적혀 있다. 또 『속일본기』 천평(天平) 19년(747) 11월 병자조에는 종5위상(극위) 비중수(備中守)에 임명된 속전조신마양(粟田朝臣馬養)이 보인다. 천평승보(天平勝寶) 6년(754) 4월 경오조에는 소납언(少納言)에 보임된 종5위하(극위) 속전조신인성(粟田朝臣人成)이 보이고, 보귀(寶龜) 7년(776) 3월 신해조에는 중무소보(中務少輔)에 임명된 종5위하(극위) 속전조신인성, 천평보자(天平寶字) 2년(758) 8월 경자삭조에 무위에서 외종5위하(극위)로 승진한 속전조신제자(粟田朝臣諸姊), 천평보자 5년(761) 정월 임인조에 재궁장관(齋宮長官)에 임명된 종5위하(극위) 속전조신족인(粟田朝臣足人)이 보인다. 또 속전조신응수(粟田朝臣鷹守)는 천평신호(天平神護) 2년(766)11월 정사조의 정6위상에서 외종5위하로 승진한 뒤 보귀 3년(773) 4월 경오조에는 정5위하 위문좌(衛門佐) 겸 갑비수(甲斐守)를 역임하였고, 『일본후기』 대동(大同) 원년(806)4월 계유조에 산위(散位) 종4위하(극위)로 죽었다[卒]고 적혀 있다. 보귀 3년(771) 11월 정축삭조에 조서대사(造西大寺) 원외차관(員外次官)에 임명된 속전조신공족(粟田朝臣公足)이 보인다. 『일본후기』 연력(延曆) 18년(799) 6월 기축조에는 종5위하(극위) 치부소보(治部少輔)에 임명된 속전조신입록(粟田朝臣入鹿)이 보이고, 연력 24년(805) 10월 갑인조에는 정6위상으로 승진한 입당 유학생 무위 속전조신포전마려(粟田朝臣飽田麻呂)가 보인다. 그는 홍인(弘仁) 6년(815) 정월 임오조에 종5위하(극위)로 제릉두(諸陵頭) 겸 풍후개(豐後介)에 임명되었다.
천평보자 3년(759) 7월 정유조에 속전신도마려가 조신 성을 받은 기록이 보이고, 천평보자 8년(756) 정월 을사조에는 속전조신도마려로 나온다. 천평신호 원년(765) 3월 계사조에 조신성을 받은 인물로는 속전신을뢰, 속전신진뢰, 속전신비태인, 속전신지수 등 4인이 있다.
속전신(조신) 일족은 학문 분야와 대외관계 직무에서 활약한 인물이 많다. 춘일속전신백제의 아들 도관은 등원겸족(藤原鎌足)의 장자인 정혜(定惠) 등과 함께 입당한 학문승이다. 『속일본기』 화동 7년(714) 11월 경술조에서 속전조신필등(인)은 영신라사 우부장군에 임명되었고, 천평 2년(725) 3월 신해조의 속전조신마양은 한어(중국어)를 가르쳤다고 적고 있다. 또 『속일본기』 천평보자 8년(764) 7월 갑인조에는 博多(하타다)에 신라사 김재박(金才伯) 등 91명이 도착하자 내조(來朝) 이유를 묻기 위해 대재부(大宰府, 율령제 축전국[筑前國] 축자군[筑紫郡], 현재 복강현[福岡縣] 대재부시[太宰府市])에 외종5위하 수도대위(授刀大尉) 속전조신도마려, 우소변(右少弁) 기우양(紀牛養; 기노우시카이)등을 문신라입조유사(問新羅入朝由使)로 파견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일본후기』 연력 24년(805) 10월 갑인조에는 속전조신포전마려가 입당유학생에, 뒤에 『속일본후기』 승화 원년(834) 3월 정묘조에서는 송당인 입경사에 임명되었다. 『입당구법순례기』에 의하면 제17차 견당사 중에 도당록사(渡唐錄事)로서 이름이 빠진 속전씨가 있다. 그는 속전조신대웅이라 추정된다.
속전(粟田; 아와타)이라는 씨명은 율령제 산성국(山城國) 애탕군(愛宕郡)의 속전(粟田)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곳은 현재 경도시(京都市) 복견구(伏見區)속전구(粟田口) 일대에 해당된다. 『일본서기』 천무천황(天武天皇) 13년(684) 11월에 속전신(粟田臣)이 조신 성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속전신 일족으로는 『일본서기』 추고천황(推古天皇) 19년(611) 5월 5일조의 속전세목신(粟田細目臣), 백치(白雉) 원년(650) 2월 갑신조의 원일조하 때 꿩이 들어 있는 가마를 든 속전신반충(粟田臣飯蟲), 백치 4년(653) 5월 임술조의 견당사로 파견된 도관(道觀)등이 있다. 도관은 백치 4년 5월 임술조 분주에 춘일속전신백제(春日粟田臣百濟)의 아들이라고 적혀 있다. 천무천황 10년(681) 12월 계사조에는 소금하(小錦下, 664~685년에 일본에서 사용된 관위 26계 중 12위)를 받은 속전신진인(粟田臣眞人)이 보인다.
속전조신 일족으로는 『일본서기』 지통천황(持統天皇) 3년(689) 정월 임술조의 준인(隼人) 174인과 아울러 베 50상(常), 소가죽 6매, 사슴가죽 50매를 바친 축자대재(筑紫大宰) 속전진인조신(粟田眞人朝臣)이 보인다. 『속일본기』 화동(和銅) 4년(711) 9월 병자조에는 군영을 세우고 병고를 지키는 일과 관련하여 종5위하(極位) 속전조신필등(粟田朝臣必登) 등을 장군으로 삼았다고 적혀 있다. 또 『속일본기』 천평(天平) 19년(747) 11월 병자조에는 종5위상(극위) 비중수(備中守)에 임명된 속전조신마양(粟田朝臣馬養)이 보인다. 천평승보(天平勝寶) 6년(754) 4월 경오조에는 소납언(少納言)에 보임된 종5위하(극위) 속전조신인성(粟田朝臣人成)이 보이고, 보귀(寶龜) 7년(776) 3월 신해조에는 중무소보(中務少輔)에 임명된 종5위하(극위) 속전조신인성, 천평보자(天平寶字) 2년(758) 8월 경자삭조에 무위에서 외종5위하(극위)로 승진한 속전조신제자(粟田朝臣諸姊), 천평보자 5년(761) 정월 임인조에 재궁장관(齋宮長官)에 임명된 종5위하(극위) 속전조신족인(粟田朝臣足人)이 보인다. 또 속전조신응수(粟田朝臣鷹守)는 천평신호(天平神護) 2년(766)11월 정사조의 정6위상에서 외종5위하로 승진한 뒤 보귀 3년(773) 4월 경오조에는 정5위하 위문좌(衛門佐) 겸 갑비수(甲斐守)를 역임하였고, 『일본후기』 대동(大同) 원년(806)4월 계유조에 산위(散位) 종4위하(극위)로 죽었다[卒]고 적혀 있다. 보귀 3년(771) 11월 정축삭조에 조서대사(造西大寺) 원외차관(員外次官)에 임명된 속전조신공족(粟田朝臣公足)이 보인다. 『일본후기』 연력(延曆) 18년(799) 6월 기축조에는 종5위하(극위) 치부소보(治部少輔)에 임명된 속전조신입록(粟田朝臣入鹿)이 보이고, 연력 24년(805) 10월 갑인조에는 정6위상으로 승진한 입당 유학생 무위 속전조신포전마려(粟田朝臣飽田麻呂)가 보인다. 그는 홍인(弘仁) 6년(815) 정월 임오조에 종5위하(극위)로 제릉두(諸陵頭) 겸 풍후개(豐後介)에 임명되었다.
천평보자 3년(759) 7월 정유조에 속전신도마려가 조신 성을 받은 기록이 보이고, 천평보자 8년(756) 정월 을사조에는 속전조신도마려로 나온다. 천평신호 원년(765) 3월 계사조에 조신성을 받은 인물로는 속전신을뢰, 속전신진뢰, 속전신비태인, 속전신지수 등 4인이 있다.
속전신(조신) 일족은 학문 분야와 대외관계 직무에서 활약한 인물이 많다. 춘일속전신백제의 아들 도관은 등원겸족(藤原鎌足)의 장자인 정혜(定惠) 등과 함께 입당한 학문승이다. 『속일본기』 화동 7년(714) 11월 경술조에서 속전조신필등(인)은 영신라사 우부장군에 임명되었고, 천평 2년(725) 3월 신해조의 속전조신마양은 한어(중국어)를 가르쳤다고 적고 있다. 또 『속일본기』 천평보자 8년(764) 7월 갑인조에는 博多(하타다)에 신라사 김재박(金才伯) 등 91명이 도착하자 내조(來朝) 이유를 묻기 위해 대재부(大宰府, 율령제 축전국[筑前國] 축자군[筑紫郡], 현재 복강현[福岡縣] 대재부시[太宰府市])에 외종5위하 수도대위(授刀大尉) 속전조신도마려, 우소변(右少弁) 기우양(紀牛養; 기노우시카이)등을 문신라입조유사(問新羅入朝由使)로 파견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일본후기』 연력 24년(805) 10월 갑인조에는 속전조신포전마려가 입당유학생에, 뒤에 『속일본후기』 승화 원년(834) 3월 정묘조에서는 송당인 입경사에 임명되었다. 『입당구법순례기』에 의하면 제17차 견당사 중에 도당록사(渡唐錄事)로서 이름이 빠진 속전씨가 있다. 그는 속전조신대웅이라 추정된다.
2. 대춘일조신동조(大春日朝臣同祖)
대춘일(大春日; 오카스가)이라는 씨명은 대화국(大和國) 첨상군(添上郡) 춘일(春日; 가스가)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현재 나량현(奈良縣) 나량시(奈良市) 백호사정(白毫寺町) 부근이다. 『일본서기』에는 천무천황(天武天皇) 13년(684) 11월에 대삼륜군(大三輪君; 오미와노키미) 이하 총 52씨에게 조신 성을 줄 때 (대)춘일신, 대택신(大宅臣), 속전신(粟田臣), 소야신(小野臣) 등 화이(和珥)계 6씨가 조신 성으로 개성하였다고 적혀 있다.
대춘일(大春日; 오카스가)이라는 씨명은 대화국(大和國) 첨상군(添上郡) 춘일(春日; 가스가)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현재 나량현(奈良縣) 나량시(奈良市) 백호사정(白毫寺町) 부근이다. 『일본서기』에는 천무천황(天武天皇) 13년(684) 11월에 대삼륜군(大三輪君; 오미와노키미) 이하 총 52씨에게 조신 성을 줄 때 (대)춘일신, 대택신(大宅臣), 속전신(粟田臣), 소야신(小野臣) 등 화이(和珥)계 6씨가 조신 성으로 개성하였다고 적혀 있다.
3. 천족언국인인명(天足彦國忍人命)
효소천황(孝昭天皇)의 황자이다. 『일본서기』에는 천족언국압인명(天足彦國押人命; 아마타라시히코쿠니오시히토노미코토), 『고사기』에는 천압대일자명(天押大日子命; 아메오시타라시히코노미코토)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 모두 사적(事績)에 관한 기재는 없다. 『일본서기』 효소천황 6년 봄 정월 정해삭 경자조에는 “천족언국압인명은 화이신(和珥臣; 와니노오미) 등의 시조이다.”라고 기재되어 있고, 『고사기』 효소천황단에는 춘일신(春日臣), 대택신(大宅臣) 등 15씨의 조상이라고 적혀 있다. 좌경 황별(하) 「대춘일조신」 조(087) 천대언국압인명 참조.
효소천황(孝昭天皇)의 황자이다. 『일본서기』에는 천족언국압인명(天足彦國押人命; 아마타라시히코쿠니오시히토노미코토), 『고사기』에는 천압대일자명(天押大日子命; 아메오시타라시히코노미코토)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 모두 사적(事績)에 관한 기재는 없다. 『일본서기』 효소천황 6년 봄 정월 정해삭 경자조에는 “천족언국압인명은 화이신(和珥臣; 와니노오미) 등의 시조이다.”라고 기재되어 있고, 『고사기』 효소천황단에는 춘일신(春日臣), 대택신(大宅臣) 등 15씨의 조상이라고 적혀 있다. 좌경 황별(하) 「대춘일조신」 조(087) 천대언국압인명 참조.
4. 일본기합(日本紀合)
『일본서기』 천무천황(天武天皇) 13년(684) 11월에 속전신(粟田臣)이 조신 성을 받았다는 사성 기사와 합치한다는 의미이다.
『일본서기』 천무천황(天武天皇) 13년(684) 11월에 속전신(粟田臣)이 조신 성을 받았다는 사성 기사와 합치한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