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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거지공(車持公; 구루마모치노키미)

거지공(車持公; 구루마모치노키미)
 상모야조신(上毛野朝臣; 가미츠케노노아소미)과 조상이 같으며 풍성입언명(豐城入彦命; 도요키이리히코노미코토)의 8세손 사협군(射狹君; 이사노키미)의 후손이다. 웅략천황(雄略天皇; 유랴쿠텐노) 때에 어가[乘輿; 미쿠루마]를 바쳤다. 그래서 거지공(車持公; 구루마모치노키미)이라는 성을 주었다.
1. 거지공(車持公)
거지공이라는 씨명은 어가[乘輿; 미쿠루마]를 바치는 일과 관련된 일을 담당한 거지부(車持部)를 관장하였기 때문에 유래한 씨명이라 추정된다. 거지공은 섭진국 황별 「거지공」 조에도 게재되어 있다.
거지공 일족으로는 『일본서기』 이중천황(履中天皇) 5년 10월 갑자조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거지군(車持君; 구루마모치노키미)가 보인다. 『공경보임(公卿補任)』 대보(大寶)원년(701) 등원조신불비등(藤原朝臣不比等)조와 『공경보임』에 기재된 불비등(不比等)의 주석(尻付)에 거지군국자(車持君國子; 구루마모치노키미구니코, 등원불비등[藤原不比等; 후지와라노후히토]의 외할아버지) 및 그의 딸 여지고낭(與持古娘; 요시코노이라츠메)이 있다. 『공경보임』에는 불비등에 관해 산과전변사대우등가(山科田邊史大遇等家)에서 양육되어서 사(史)라고 칭해졌다고 적혀 있다. 불비등이 상모야씨와 동족이라 칭하는 전변사대우(田邊史大遇) 등의 집에서 양육되어서 사(史), 즉 불비등(不比等; 후히토)이라고칭해졌다는 전승에 따르면, 중신겸족(中臣鎌足)과 불비등(不比等)이 상모야씨의 동족이라고 칭하는 씨족과 밀접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불비등의 어머니인 여지고낭의 아버지 거지국자군도 상모야씨와 동족이라고 칭한 거지공씨 일족일 가능성이 높다.
거지공(군)의 조신 사성에 관해서는 『일본서기』 천무천황 13년(684) 11월 무신삭조에 “거지군을 비롯한 모두 52씨에게 조신이라는 성을 주었다”라고 적혀 있다. 또 『속일본기(續日本紀)』 천평 9년(737) 정월 신유조에는 정8위하 거지군장곡(車持君長谷)에게 조신이라는 성을 주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신찬성씨록』 섭진국 황별에도 거지공의 본계를 싣고 있지만, 조신 성의 거지씨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2. 상모야조신동조(上毛野朝臣同祖)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원경(元慶) 원년(877) 12월 25일 신묘조에는 “좌경인(左京人) 종5위하 행찬기개(行讃岐介) 도숙녜어유(都宿禰御酉) 등이 조신 성을 받았다고 적혀 있고, 조상이 어간성입언오십경식천황(御間城入彦五十瓊殖天皇) 이후에 상모야(上毛野), 대야(大野), 지전(池田), 좌미(佐味), 거지조신(車持朝臣)과 조상이 같다”라고 적혀 있다.
군마군에는 『상야국신명장(上野國神名帳)』군마군서부지부(群馬郡西部之部)에 의하면 거지명신(車持明神)과 거지약어자명신(車持若御子明神)이 보인다. 전자는 군마현 군마군 진명정(榛名町) 십문학(十文學) 우간장(芋干場), 옛 이름 구류마촌(久留馬村)에 진좌한 거지신사에 해당된다. 예전부터 그 진좌지를 ‘구류마촌’이라 불렀기 때문에 진명정 주변에 상모야씨와 동족이라 주장하는 거지공씨의 본거지가 있었다고 간주된다.
『화명유취초(和名類聚抄)』에는상총국(上總國) 장병군(長柄郡)에 거지향(車持鄕)이 있고, 상야국(上野國) 군마군(群馬郡) 군마향(群馬郷)에 “구류말국(久留末國; 구루마노쿠니)을 나누어 동서 2군으로 삼았다”라는 주가 달려 있다. 군마는 예전부터 ‘구루마’라고 불린 것이다. 등원궁적 출토 목간에 ‘상모야국거평(上毛野國車評)’이라 쓰인 것이 출토되었다(『등원궁목간(藤原宮木簡)(1-83)』). 따라서 거지부는 상총, 상야 등의 동국에도 설치되었고 상모야씨 일족이 상모야 지방에 설치된 거지부의 반조였으므로 본조에 보이는 거지공씨가 성립된 것이다.
3. 풍성입언명(豐城入彦命)
풍성입언명은 숭신천황의 아들로, 『고사기』 숭신천황단과 『일본서기』 숭신천황 48년 4월 무신삭 병인조에 상모야군(上毛野君)과 하모야군(下毛野君)의 시조라고 기술되어 있다. 풍성입언명에 관해서는 좌경 황별(하)의 「하모야조신」 조(097) 풍성입언명 참조.
4. 사협군(射狹君)
여기에만 보이는 인명이다.
5. 웅략천황어세(雄略天皇御世)
좌백유청(佐伯有淸)은 『신찬성씨록』 완본에는 ‘대박뢰유무천황시(大泊瀨幼武天皇諡)’라는 8글자가 있었고, ‘웅략’ 다음의 ‘천황(天皇)’이라는 2글자는 없었다고 설명하였다. 이하 사성 전승은 어가 공진에 관한 내용만을 기록하고 있지만, 『일본서기』 웅략천황 2년10월 병자조에는 “사냥꾼[行夫]을 쉬게 하고 수레와 말을 정비하였다”라고 적혀 있고, 5년 2월조에는 “천황이 곧 황후와 수레를 타고 돌아왔다”라고 적혀 있다. 본조 거지공의 씨명 유래 전승은 웅략기에 처음으로 수레 관련 기록이 보이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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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공(車持公; 구루마모치노키미) 자료번호 : ss.k_0001_0030_0070_0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