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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상모야조신(上毛野朝臣; 가미츠케노노아소미)

상모야조신(上毛野朝臣; 가미츠케노노아소미)
 하모야조신(下毛野朝臣; 시모츠케노노아소미)과 조상이 같으며, 풍성입언명(豐城入彦命; 도요키이리히코노미코토)의 5세손 다기파세군(多奇波世君; 다카하세노키미)의 후손이다. 대박뢰유무천황(大泊瀨幼武天皇; 오하츠세와카타케노수메라미코토)[시호는 웅략(雄略; 유랴쿠)이다.] 때 노하군(努賀君; 누카노키미)의 아들 백존(百尊; 하쿠손)의 딸이 아이를 낳아 사위 집에 갔다가 밤이 되어 귀가하였다. 응신천황(應神天皇; 오우진텐노)의 능 주변에서 말을 탄 사람을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을 바꾸고 헤어졌다. 다음날 바꾼 말을 보니 흙으로 만든 말이었다. 이로 인하여 성을 능변군(陵邊君; 미사자키베노키미)이라붙였다. 백존의 아들이 덕존(德尊; 도쿠손), 손자가 사라(斯羅; 시라)이다. 황극천황(皇極天皇; 구와우교쿠텐노) 때 하내(河內) 산하(山下; 야마시모)의 토지를 하사하고, 문서를 잘 해독하므로 전변사(田邊史; 다나베노후히토)라는 성을 주었다. 보자칭덕효겸황제(寶字稱德孝謙皇帝) 천평승보(天平勝寶) 2년에 상모야공(上毛野公; 가미츠케노키미)으로 개성(改姓)하였다. 금상(今上) 홍인(弘仁) 원년에 다시 조신(朝臣; 아소미)으로 개성하였다. 『속일본기』와 일치한다.
 
【주석】
1. 상모야조신(上毛野朝臣)
상모야(上毛野; 가미츠케노)라는 씨명은 율령제 상야국(上野國; 가미츠케노쿠니)의 지명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은 현재 군마현(群馬縣)에 해당된다. 『일본서기』 천무천황 13년(684) 11월 무신삭조에 상모야군(上毛野君)을 비롯한 52씨에게 조신이라는 성을 주었다고 적혀 있다. 좌경 황별(하)의 상모야조신은 위에 기록되어 있듯이, 홍인 원년(810)에 조신 성을 받은 씨족으로 본류 씨족이 아니다. 본류의 상모야조신씨는 우경 황별(상)의 상모야조신이다.
2. 하모야조신(下毛野朝臣)
『일본서기』 숭신천황 48년 4월 병인조에 “풍성명(豐城命, 豐城入彦命)에게 동국(東國)을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는 상모야신(上毛野臣; 가미츠케노노오미), 하모야신(下毛野臣; 시모츠케노노오미)의 조상이다.”라고 적혀 있다. 『고사기』에서도 풍목입일자명(豐木入日子命; 도요키이리히코노미코토)이 상모야군, 하모야군 등의 조상이라고 적고 있다.
3. 풍성입언명(豐城入彦命)
『일본서기』에서는 어간성입언오십경식천황(御間城入彦五十瓊殖天皇)으로 적고 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는 제10대 천황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사기』에는 어진목입일자인혜명(御眞木入日子印惠命) 미마기이리비고(美麻紀伊理毗古), 『상륙국풍토기(常陸國風土記)』에는 미만귀천황(美萬貴天皇; 미마키노스메라미코토)이라고 적혀 있다. 『고사기』숭신천황단과 『일본서기』 숭신천황 48년 4월 무신삭 병인조에서 상모야군(上毛野君)과하모야군(下毛野君)의 시조라고 기술되어 있다.
4. 다기파세군(多奇波世君)
『일본서기』 인덕천황 53년 5월조에는 상모야군(上毛野君; 가미츠케노노키미)의 조상 죽엽뢰(竹葉瀨; 다카하세)라고 적혀 있다. 『홍인사기(弘仁私記)』 의 서문에는 도래계 씨족의 이른바 ‘출자개변(出自改變)’ 사례를 거론할 때 제시되는 대표적인 서적인 『제번잡성기』에 “일본에서 파견된 장군인 상야공죽합(上野公竹合)의 자손에 해당하는 사수미(思須美)와 화덕(和德)이 인덕조(仁德朝)에 백제에서 내조하여 전변사(田邊史), 상모야공(上毛野公), 지원조신(池原朝臣), 주길조신(住吉朝臣) 등의 조상이 되었다.”라는 주가 달려 있다. 다기하세(多奇波世; 다카하세)와 죽합(竹合; 다카하세)은 『일본서기』 의 상모야군의 조상 죽엽뢰(竹葉瀨; 다카하세)를 가리킨다. 다기파세군은 좌경 황별(하) 「주길조신(住吉朝臣)」 조(100)와 「지원조신(池原朝臣)」 조(101), 「상원공(桑原公)」 조(105), 「천합공(川合公)」 조(106), 「상장수(商長首)」 조(108)에 보인다.
5. 대박뢰유무천황어세(大泊瀨幼武天皇御世) …… 시토마야(是土馬也)
『일본서기』 웅략천황 9년 7월 임진삭조에 유사한 기록이 보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내국(河內國; 가후치노쿠니)이 ‘비조호군(飛鳥戶郡; 아스카베노코호리) 사람 전변사백손(田邊史伯孫; 다나베노후비토하쿠손)의 딸은 고시군(古市郡; 후루이치노코호리)의 사람 서수가룡(書首加龍; 후미노오비토카리요우)의 아내가 되었다. 백손(伯孫)의 딸이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사위 집에 가서 축하하고 달밤에 돌아왔다. 봉류구(蓬蔂丘; 이치비코노오카)의 예전릉(譽田陵; 호무타노미사사기) 아래에서[봉류는 이치비코(伊致寐姑)라고 읽는다.] 붉은 준마를 탄 사람을 만났다. 그 말이 때로 용이 날아오르는 것처럼 갑자기 높이 솟아오르고 갑자기 뛰어올라 기러기처럼 놀랐다. 기이한 몸은 산봉우리처럼 생겼고, 특이한 모습이 뛰어났다. 백손이 나아가 살펴보고 마음에 들었다. 이에 타고 있는 푸른빛을 띤 백마를 채찍질해서 머리를 가지런히 하고 고삐를 나란히 하였다. 그러나 곧 붉은 말이 뛰어올라 먼지를 일으키며 쏜살같이 달려가서 사라졌다. 이에 푸른빛을 띤 백마가 뒤쳐졌는데, 말이 늦어서 다시 좇아갈 수 없었다. 그 말을 탄 사람은 백손이 원하는 바를 알고 곧 멈추어 말을 바꾸고 서로 인사하며 헤어졌다. 백손은 준마를 얻어서 매우 기뻐하며 달려가 마구간으로 들어갔다. 안장을 풀고 말에게 먹이를 주고 쉬게 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에 붉은 준마가 변하여 흙으로 빚은 말로 변해 있었다. 백손이 이상하게 여기고 되돌아가 다시 예전릉에 찾아가서 그곳에서 흙으로 만든 말들 사이에 자기 말이 있는 것을 보고 자기 말과 바꾼 흙으로 빚은 말을 그곳에 두었다고 합니다’라고 보고하였다.”
* 『일본서기』 웅략천황 9년 7월 임진삭조
“河內國言, 飛鳥戶郡人田邊史伯孫女者, 古市郡人書首加龍之妻也. 伯孫聞女産兒, 往賀聟家, 而月夜還. 於蓬蔂丘譽田陵下, [蓬蔂, 此云伊致寐姑.] 逢騎赤駿者. 其馬時濩略, 而龍翥. 欻聳擢, 而鴻驚. 異體蓬生, 殊相逸發. 伯孫就視, 而心欲之. 乃鞭所乘驄馬, 齊頭竝轡. 爾乃, 赤駿超攄絶於埃塵, 驅騖迅於滅沒. 於是, 驄馬後而怠足, 不可復追. 其乘駿者, 知伯孫所欲, 仍停換馬, 相辭取別. 伯孫得駿甚歡, 驟而入廐. 解鞍秣馬眠之. 其明旦, 赤駿變爲土馬. 伯孫心異之, 還覓譽田陵, 乃見驄馬, 在於土馬之間. 取代而置所換土馬也.”
6. 노하군(努賀君)
노하군은 여기에만 보이는 인물이다.
7. 백존(百尊)
『일본서기』 웅략 9년 7월 임진삭조에 기록된 전승에는 비조호군(飛鳥戶郡; 아스카베노코호리) 사람 전변사백손(田邊史伯孫; 다나베노후비토하쿠손)이라고 적혀 있어 백존은 백손이라고도 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조호군은 현재 대판부(大阪府) 백원시(柏原市) 남부와 우예야시(羽曳野市) 남동부에 해당한다.
8. 아녀(阿女)
좌백유청(佐伯有淸)은 아녀가 백존의 딸이라고 보고 있지만, 고유명사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 『일본서기』 웅략천황 9년 7월 임진삭조에는 비조호군(飛鳥戶郡) 사람 전변사백손(田邊史伯孫)의 딸이 고시군(古市郡; 후루이치노코호리) 사람 서수가룡(書首加龍; 후미노오비토카리요우)의 아내가 되었다고 적혀 있다. 고시군은 남하내군 지역이다. 이곳은 현재 우예야시(羽曳野市)의 중앙부 석천(石川) 지역이다.
9. 응신천황어세(應神天皇御世)
좌백유청(佐伯有淸)은 『신찬성씨록』 완본에서는 ‘응신(應神)’ 앞에 ‘예전천황시(譽田天皇諡)’라는 5글자가 있고, ‘응신’ 다음에 ‘천황(天皇)’이라는 2글자는 없었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10. 토마(土馬)
일본 고대 고분에 말 모양의 토우(土偶)가 부장되는 경우가 있었다. 응신릉(應神陵)의 외제(外堤)에서도 식륜(埴輪)으로 사용된 토마(土馬)가 출토되었으며, 배총(陪塚)인 환산고분(丸山古墳)에서도 금동제 마구가 출토되었다. 응신릉은 현재 대판부(大阪府) 우예야시(羽曳野市) 예전(譽田)의 예전어묘산고분(譽田御廟山古墳)으로 추정되고 있다.
11. 능변군(陵邊君)
능변군은 여기에만 보인다. 『일본서기』에 없는 이야기인데, 상모야공이라는 공성을 가지기 위해 군성을 받은 이야기를 조작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12. 덕존(德尊)
덕존은 『일본서기』 웅략천황 9년 7월 임진삭조에 기재된 전승에서는 ‘덕손’으로 나온다. 『일본서기』 안한천황(安閑天皇) 원년 5월조에 백제인 하부(下部) 수덕(脩德) 적덕손(嫡德孫)이 보인다. 하부는 백제 5부 가운데 하나이며, 수덕은 『주서(周書)』에 기록된 백제 16관등에는 보이지 않는다. 시덕(施德)이나 장덕(將德)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적덕손은 적(嫡)이 성이고, 이름이 덕손(德孫)이다. 『일본서기』 현종(顯宗) 3년 시세조의 백제인 적막이해(適莫爾解) 등과 같은 성씨를 가진 인물이라고 추정된다.
13. 사라(斯羅)
사라는 여기에만 보인다. 하내국 황별 「지미련」 조(297)에 보이는 신라(新羅; 시라)와 동일 인물이라 추정하기도 하지만, 지미련조에는 신라(新羅)가 흠명천황 시대에 도해한 것으로 적혀 있다. 웅략천황 시대의 사람이라고 기재된 백존(백손)의 손자 사라가 황극조에 전변사 성을 받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또 전변사와 지미련이 계보상 동족을 칭한다고 해도, 전자는 다기세군(죽엽뢰, 죽합)의 후손이고 후자는 다기파세군의 아우 전도공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계통이 다른 것으로 이해된다.
14. 황극어세(皇極御世)
좌백유청(佐伯有淸)은 『신찬성씨록』 완본에서는 ‘시(諡)’ 앞에 ‘천풍재중일족희천황(天豐財重日足姬天皇)’이라는 9글자가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이하의 전승은 『일본서기』에는 보이지 않는다.
15. 이해문서(以解文書) 위전변사(爲田邊史)
문서를 잘 해독하여 전변사가 되었다는 것은 전변사(田邊史; 다나베노후히토)의 씨성 유래에 관한 설명이다. 조정에 소속되어 문필과 기록 임무를 담당한 사부(史部; 후비토, 후미히토)를 가리키는 말이다. 6세기 중반부터 후반기에 도래계의 지식인을 결집해서 편성한, 문필과 기록의 임무에 종사한 집단이다. 거의 한반도 제국으로부터 이주한 사람들로 구성되고, 그 활동 범위는 외교를 비롯한 문서 실무를 필요로 하는 각 행정 부문에 미쳤다. 동문씨(東文氏)의 지족과 서문씨(西文氏)를 반조(伴造)로 하고, 동(東; 야마토)과 서(西; 가와치)의 후미비토로 구분하여 직무를 담당하였다. 후비토에 임명된 씨족은 70씨에 가까운데, 율령제하에서도 지속적으로 학자, 문인, 고승을 배출하고 일본의 식자층을 대표하는 지위를 점하고 있고, 각 관사의 실무 관료로서 율령행정기구의 근간을 지탱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16. 전변사(田邊史)
『홍인사기(弘仁私記)』 의 서문에는 당시 조정과 세간에 존재한 씨성 관련 서적과 문건이 기재되어 있다. 그 가운데 사찬서인 『제번잡성기(諸蕃雜姓記)』 는 도래계 씨족의 이른바 ‘출자개변(出自改變)’ 사례를 거론할 때 제시되는 대표적인 서적이다. 『제번잡성기』에는 “일본에서 파견된 장군인 상야공죽합(上野公竹合)의 자손에 해당하는 사수미(思須美)와 화덕(和德)이 인덕조(仁德朝)에 백제에서 내조하여 전변사(田邊史), 상모야공(上毛野公), 지원조신(池原朝臣), 주길조신(住吉朝臣) 등의 조상이 되었다.”라는 주가 달려 있다. 이 분주에 의거하면 전변사는 원래 황별의 상모야씨와 관계없는 백제계 도래씨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변사씨의 본거는 전변폐사적(田邊廢寺蹟)이 있는 하내국(河內國) 안숙군(安宿郡)자모향(資母鄕) 일대로 현재 대판부 백원시(栢原市) 국분정(國分町) 전변(田邊) 부근에 해당된다.
전변사 일족으로는 『일본서기』 백치(白雉) 5년(654) 2월조에 전변사조(田邊史鳥)가 압사(押使) 대금상(大錦上) 고향사현리(高向史玄理), 대사(大使) 소금하(小錦下) 하변신마려(河邊臣麻呂; 가하헤노오미마로) 아래에서 판관으로 도당(渡唐)하였다. 『속일본기』문무천황(文武天皇) 4년(700) 6월 갑오조의 전변사백지(田邊史百枝)와 전변사수명(田邊史首名)은 율령 찬정의 공으로 녹을 받았다. 또 천평승보(天平勝寶) 2년(750) 3월 무술조에는 중위(中衛) 원외소장(員外少將) 종5위하(극위) 전변사난파(田邊史難波) 등이 상모야군(上毛野君) 성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속일본기』 천평승보(天平勝寶) 원년(749)8월 계해조에는 종6위상에서 외종5위하로 승서된 전변사광빈(田邊史廣濱)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전변사조는 백치 5년 2월에 전변사백지 및 전변사수명은 모두 율령 찬정에 참가하여 문무천황 4년 6월 17일에 녹을 받았다. 전변사조의 견당 판관, 백지와 수명의 대보율령 찬정은 문서 해독에 능한 전변사씨의 씨족적 성격과 관련된 것이다.
17. 보자칭덕효겸황제(寶字稱德孝謙皇帝)
『속일본기(續日本紀)』 천평보자(天平寶字) 2년(758) 8월 경자삭조에 ‘삼가 존호를 올려서 폐하를 보자칭덕효겸황제라고 부르고, 황태후를 천평응진인정황태후(天平應眞仁正皇太后)라고 부르고자 합니다.”라는 표문이 적혀 있다. 이러한 존호 사용은 등원중마려(藤原仲麻呂)의 당풍화 정책 중 하나였다.
18. 천평승보이년(天平勝寶二年)
『속일본기』 천평승보 2년(750) 3월 무술조에 “중위(中衛) 원외소장(員外少將) 종5위하 전변사난파(田邊史難波) 등에게 상모야군(上毛野君)이라는 성을 내렸다.”라고 적혀 있다.
19. 상모야공(上毛野公)
상모야군(공)씨로는 『속일본기』 천평보자 8년(764) 9월 경신조에 정6위상에서 외종5위하(극위)로 승진한 상모야공석롱(上毛野公石瀧), 보귀 5년(775) 3월 갑진조에는 외종5위하(극위) 상모야공식마려(上毛野公息麻呂)가 주방수(周防守)에 보임된 기록이 보인다. 『일본기략』 연력 13년 8월 기축조에는 주계두(主計頭) 종5위하(극위) 상모야공대천(上毛野公大川)이 보이고, 연력 5년(786) 10월 갑자조의 위문대위(衛門大尉) 겸 서시정(西市正) 외종5위상(극위) 상모야공아인(上毛野公我人), 『유취국사(類聚國史)』 권99 서위(敍位) 대동(大同) 4년(809) 9월 갑진삭조의 상모야공영인(上毛野公穎人)이 보이고, 『유취국사』 권66 훙졸(薨卒) 홍인 12년(821) 8월 신사조에는 『신찬성씨록』 찬자 가운데 한 사람인 상모야공영인의 졸전이 기재되어 있는데 상모야공대천(上毛野公大川)이 영인의 아버지라고 기재되어 있다.
20. 홍인원년(弘仁元年)
『일본후기』 홍인 원년조에는 상모야공(군)의 조신 사성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신찬성씨록』 찬자 가운데 한 사람인 상모야공영인(上毛野公穎人)의 사례를 보면 『유취국사』 권99 서위 대동 4년(809) 9월 갑진삭조까지는 상모야공영인이라 기재되어 있지만, 『일본후기』 홍인 원년(810) 9월 무신조부터는 상모야조신영인(上毛野朝臣穎人)으로 나온다. 따라서 조신 성 사성은 대동(大同) 5년(홍인 원년) 정월에서 8월 사이일 것이므로 상모야공(군)에서 조신으로 개성된 것은 홍인 원년임에 틀림이 없다. 『일본후기』 의 홍인 원년조는 탈루(脫漏)된 부분이 존재하므로 이 부분에 조신 성 사성 기사가 기재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일본후기』 홍인 원년 9월 무신조에는 외종5위하 상모야조신영인이 종5위상을 받고 귀순의 공으로 상을 받았다고 적혀 있으므로, 이른바 ‘약자(藥子)의 변(變)’ 때에 평성(平城) 상황 쪽에 귀순한 공에 의거하여 조신 성을 받은 것이라면 위의 조신 성 사성에 관한 내용은 뒤에 기록된 것이 된다.
21. 속일본기합(續日本紀合)
이 부기는 『속일본기』 천평승보 2년(750) 3월 무술조에 “중위(中衛) 원외소장(員外少將)종5위하 전변사난파 등에게 상모야군이라는 성을 내렸다.”라고 적혀 있는 사성 기사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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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모야조신(上毛野朝臣; 가미츠케노노아소미) 자료번호 : ss.k_0001_0030_0070_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