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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하모야조신(下毛野朝臣; 시모츠케노노아소미)

하모야조신(下毛野朝臣; 시모츠케노노아소미)
 숭신천황(崇神天皇; 스진텐노)의 황자 풍성입언명(豐城入彦命; 도요키이리히코노미코토)의 후손이다. 『일본기』와 합치된다.
 
【주석】
1. 하모야조신(下毛野朝臣)
하모야(下毛野; 시모츠케노)라는 씨명은 율령제 하야국(下野國; 시모츠케국)이라는 국명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은 현재 회목현(栃木縣)이다. 『일본서기』 천무천황(天武天皇) 13년(684) 11월 무신삭조에 하모야군(下毛野君; 시모츠케노노키미)을 비롯한 52씨에게 조신(朝臣)이라는 성을 주었다고 적혀 있으므로, 하모야조신의 옛 성은 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모야군이라는 씨명을 가진 사람은 사서에는 보이지 않지만, 『신찬성씨록』 좌경 황별(하)의 대망공(大網公)조에 하모군나량(下毛君奈良)과 하모군진약(下毛君眞若)이 게재되어 있다.
하모야조신 일족으로는 『일본서기』 지통천황 3년(689) 10월 신미조의 직광사(直廣肆)하모야조신자마려(下毛野朝臣子麻呂; 시모츠케노노아소미코마로)가 있다. 자마려는 고마려(古麻呂; 고마로)라고도 쓴다. 『속일본기』 문무천황 4년(700) 6월 갑오조에 직광삼(直廣參, 정5위하 상당) 하모야조신고마려(下毛野朝臣古麻呂; 시모츠케노노아소미코마로)가 율령 찬정의 공으로 녹을 받았다. 대보율령 찬정 사업의 실무 책임자로 평가되고 있다. 대보 2년(702) 5월에는 조정(朝政)에 참의(參議)하고 뒤에 병부경, 식부경(式部卿)을 거쳐 화동 2년(709) 12월에 죽었다. 이때 식부경 대장군(大將軍) 정4위하(극위)였다. 또 대보 원년(701) 7월 임진조에는 종7위하 하모야조신석대(下毛野朝臣石代), 양로(養老) 4년(720) 9월 무인조에는 좌경량(左京亮) 종5위하(극위) 하모야조신석대가 지절정이부장군(持節征夷副將軍)직에 임명되었다고 적혀 있다.
하모야조신석대가 지절정이부장군(持節征夷副將軍)직에 임명되었다고 적혀 있다. 다만 하모야조신석대는 『속일본기』 경운(慶雲) 4년(707) 3월 경신조에 하모야천내조신(下毛野川内朝臣)으로 개성해 줄 것을 요청하여 이를 허가받았다고 적혀 있지만, 이후 『속일본기』 영귀(靈龜) 원년(715) 정월 계사조와 양로(養老) 4년(720) 9월 무인조에도 여전히 하모야조신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속일본기』 양로(養老) 5년(721) 6월 신축조에는 종5위하(극위) 하모야조신충마려(下毛野朝臣虫麻呂)가 원외소보(員外少輔) 임명 기록이 보이고, 천평(天平) 8년(736) 정월 신축조에는 외종5위하 하모야조신대족(下毛野朝臣帶足)이 종5위하로 승진한 기록이 확인된다. 하모야조신도마려(下毛野朝臣稻麻呂)는 보귀(寶龜) 2년(771) 11월에 산위(散位) 종4위로 죽었다고 적혀 있고, 보자 8년(764) 10월 계미조에는 종5위상 하모야조신다구비(下毛野朝臣多具比)가 원강수(遠江守)에 보임된 기록이 보인다. 보귀 8년(777) 정월 무인조에는 하모야조신선족(下毛野朝臣船足)이 종5위하로 고취정(鼓吹正)에 부임했다고 적혀 있고, 대동(大同) 원년(806) 2월 무술조에는 하모야조신년계(下毛野朝臣年繼)가 종5위상으로 관노정(官奴正)에 보임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또 『속일본기』연력(延曆) 2년(783) 3월 무술조에는 종5위하 길미후횡도(吉彌侯横刀), 정8위하 길미후야수마려(吉彌侯夜須麻呂)가 모두 하모야조신 성을 받았고, 외정8위상 길미후간인(吉彌侯間人)과 총마려(總麻呂)는 하모야공(下毛野公)으로 개성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와 같이 하모야조신 중에는 예전의 성이 길미후씨인 사람도 포함되어 있어 원래 하모야조신씨와 구별하기가 어렵다. 길미후부와 하모야씨의 관계에 관해서는 좌경 황별(하) 「길미후부(吉彌侯部)」 조(109) 참조.
2. 숭신천황(崇神天皇)
일본식 시호는 어간성입언오십경식천황(御間城入彦五十瓊殖天皇; 미마키이리히코이니에노스메라미코토)이다. 숭신천황은 8세기 후반에 제정된 중국식 시호이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등장하는 제 10대 천황으로 재위 기간은 68년으로 『일본서기』 의 기년에 따르면 기원전 97년~기원전 30년이지만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일본서기』에는 어간성입언오십경식천황(御間城入彦五十瓊殖天皇), 어간성존(御間城尊; 미마키노미코토), 어조국천황(御肇國天皇; 하츠쿠니시라스스메라미코토)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고사기』에는 어진목입일자인혜명(御真木入日子印恵命; 미마키이리히코이니에노미코토), 소지초국어진목천황(所知初國御眞木天皇; 하츠쿠니시라시시미마키노스메라미코토), 『풍토기』에는 미만귀천황(美萬貴天皇; 미마키노스메라미코토)이라고 적혀 있다. 숭신천황은 10대 천황인데도 ‘최초로 국을 다스린 천황’이라는 의미를 지닌 어조국천황(御肇國天皇), 소지초국지어진목천황(所知初國之御眞木天皇)이라고 불렸다. 최초의 천황인 신무천황(神武天皇)도 시어천하지천황(始馭天下之天皇; 하츠쿠니시라스스메라미코토)이라고 불리므로 양자의 관계에 주목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여러 가지 학설이 존재하지만, 숭신(崇神)이 실질적인 대화(大和)정권의 시조인데, 천황가(天皇家)의 기원을 더욱 올려 잡기 위해 신무천황(神武天皇)을 만들어냈다는 설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좌백유청(佐伯有淸)은완본에서는 ‘숭신(崇神)’ 앞에 ‘어간성입언오십경식천황시(御間城入彦五十瓊殖天皇諡)’라는 12글자가 있고, ‘숭신’ 다음에 ‘천황(天皇)’이라는 2글자가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3. 풍성입언명(豐城入彦命)
『일본서기』에서는 어간성입언오십경식천황(御間城入彦五十瓊殖天皇)으로 적고 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는 제10대 천황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사기』에는 어진목입일자인혜명(御眞木入日子印惠命) 미마기이리비고(美麻紀伊理毗古), 『상륙국풍토기(常陸國風土記)』에는 미만귀천황(美萬貴天皇; 미마키노스메라미코토)이라고 적혀 있다. 『고사기』숭신천황단과 『일본서기』 숭신천황 48년 4월 무신삭 병인조에 상모야군(上毛野君)과하모야군(下毛野君)의 시조라고 기술되어 있다.
4. 일본기합(日本紀合)
『일본서기』 천무천황 13년 11월 무신삭조에 하모야군(下毛野君; 시모츠케노노키미)을 비롯한 모두 52씨에게 조신이라는 성을 주었다고 적혀 있는 사성 기사와 합치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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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야조신(下毛野朝臣; 시모츠케노노아소미) 자료번호 : ss.k_0001_0030_0070_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