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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길전련(吉田連; 기치타노무라지)

길전련(吉田連; 기치타노무라지)
 대춘일조신(大春日朝臣; 오카스가노아소미)과 조상이 같으며, 관송언향식도천황(觀松彦香殖稻天皇; 미마츠히코카에시네노스메라미코토)[시호는 효소(孝昭; 가우세우)이다.]의 황자 천대언국압인명(天帶彦國押人命; 아메타라시히코쿠니오시히토노미코토)의 4세손 언국즙명(彦國葺命; 히코쿠니노부쿠노미코토)의 후손이다. 일찌기 기성서리궁(磯城瑞籬宮; 시키노미즈카키노미야)의 어간성입언천황(御間城入彦天皇; 미마키이리히토노스메라미코토)시대에 임나국(任那國; 미마나노쿠니)에서 “신(臣)의 나라 동북에 세 개의 기문(己汶)[상기문(上己汶), 중기문(中己汶), 하기문(下己汶)이다.]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땅의 넓이가 300리이고 토지와 인민이 풍족합니다. 신라국과 서로 다투어 피차 이곳을 통치하는 것이 불가합니다. 전투가 계속되어 백성이 안심하고 살 수 없습니다. 신은 (천황이) 군사를 파견하여 이 땅을 다스리게 하여 귀국의 부(部)로 삼기를 청하옵니다.”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크게 기뻐하여 군경에게 명하여 파견할 만한 사람을 아뢰라고 하였다. 경들이 “언국즙명의 손자 염수진언명(鹽垂津彦命; 시호타리츠히코노미코토)는 머리 위에 혹이 있어 세 갈래로 갈라진 소나무와 같으며,[이로 인해 송수군(松樹君)이라고 불렀다.] 그 길이가 5척이다. 힘은 무리 중에 뛰어나며 성격도 용맹하다.”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염수진언명을 파견하였다. 명을 받들어 진수하였다. 그 당시에 재(宰; 미코토모치)를 길(吉; 기치)이라고 불렀다. 이로 인해 그 후손의 성을 길씨(吉氏; 기치우지)라고 불렀다. 아들 종5위하 지수(知須; 치스) 등은 나량경(奈良京) 전촌리하(田村里河; 다무라노사토노카하)에 거주하였다. 이로 인해 천새국압개풍앵언천황(天璽國押開豐櫻彦天皇; 아메시루시쿠니오시하루키토요사쿠라히코노스메라미코토)[시호는 성무(聖武; 샤우무)이다.] 신귀(神龜) 원년에 길전련(吉田連; 기치타노무라지)이라는 성(姓)[길은 본성, 전은 거주하는 지명에서 취한 것이다.]을 받았다. 금상(今上) 홍인(弘仁) 2년에 고쳐서 숙녜(宿禰)라는 성을 받았다. 『속일본기』와 합치된다.
 
【주석】
1. 길전련(吉田連)
완문에서는 길(吉; 기치)이라는 씨명은 효소천황 시대라고 기재되어 있지만, 『일본서기』에 길씨가 처음 보이는 것은 천지천황(天智天皇) 10년(671) 정월 시월조에 기재된, 667년근강(近江)로 천도한 이후 왜국으로 이주한 백제 지배층을 대상으로 한 서위 기사에 나오는 길대상(吉大尙)이다. 『속일본기』 신귀(神龜) 원년(724) 5월 신미조에는 종5위상 길의(吉宜)와 길지수(吉智首)가 함께 길전련(吉田連; 기치타노무라지)이라는 성을 받았다고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길전씨는 원래 길씨임을 알 수 있다.
길씨 일족은 『일본서기』 천지천황 10년(671) 정월 시월조에 의약 부분에 재능을 가진 인물로 기재된 길대상과 『속일본기』 양로(養老) 3년(719) 정월 임인조의 길지수, 양로 5년(721) 정월 갑술조의 종5위하 길의 등이 있다. 특히 길의에 관해서는 『속일본기』문무천황(文武天皇) 4년(700) 8월 을축조에서 혜준(惠俊)이라는 법명을 가진 승려의 기예를 활용하기 위하여 환속을 명하고, 길의라는 씨명을 주었다고 적혀 있다. 길의는 원래 그의 씨명이었을 것이다. 『속일본기』 양로 5년(721) 정월 갑술조에 길의가 의약 부분에서 포상을 받았다고 기재되어 있으므로, 그가 의약 부문에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길전련씨 일족으로는 신귀 원년에 길전련으로 개성한 길전련의(吉田連宜)와 길전련지수(吉田連智首)가 있다. 『속일본기』 천평 10년(738) 윤7월 계묘조에 종5위하(극위) 길전련의가 전약두(典藥頭)에 보임된 기록이 보인다. 또 『속일본기』 연력 3년(784) 8월 을축조에는 길전련계원(吉田連季元)이 외종5위하(극위) 이두수(伊豆守)에 임명된 기록이 보인다. 『일본후기(日本後紀)』 홍인(弘仁) 2년(811) 9월 을미조에는 숙녜로 개성된 우경인(右京人) 정6위상 길전련궁마려(吉田連宮麻呂)가 보인다. 이 외에 천평 20년(748) 10월8일자 「황후궁직첩(皇后宮職牒)」(『대일본고문서』 3-123)에 길전련형인(吉田連兄人) 등이 보인다.
2. 대춘일조신(大春日朝臣)
대춘일조신(大春日朝臣)에 관해서는 위의 「대춘일조신」 조(087) 참조.
3. 관송언향식도천황(觀松彦香殖稻天皇)
『일본서기』 의 제7대 효소천황(孝昭天皇)을 가리킨다. 제2대 수정천황(綏靖天皇)부터 제9대 개화천황(開化天皇)까지는 소위 결사(缺史) 8대라고 불리는 천황으로, 실재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좌경 황별(하) 「대춘일조신」 조(087) 효소천황 참조.
4. 천대언국압인명(天帶彦國押人命)
효소천황(孝昭天皇)의 황자이다. 『일본서기』에는 천족언국압인명(天足彦國押人命; 아마타라시히코쿠니오시히토노미코토), 『고사기』에는 천압대일자명(天押大日子命; 아메오시타라시히코노미코토)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 모두 사적(事績)에 관한 기재는 없다. 『일본서기』 효소천황 6년 봄 정월 정해삭 경자조에는 “천족언국압인명은 화이신(和珥臣; 와니노오미) 등의 시조이다.”라고 기재되어 있고, 『고사기』 효소천황단에는 춘일신(春日臣), 대택신(大宅臣) 등 15씨의 조상이라고 적혀 있다. 좌경 황별(하) 「대춘일조신」 조(087) 천대언국압인명 참조.
5. 언국즙명(彦國葺命)
『일본서기』 숭신(崇神) 10년 9월 임자조와 수인천황(垂仁天皇) 25년 2월 갑자조에는 화이신(和珥臣; 와니노오미)의 조상 언국즙(彦國葺; 히코쿠니후쿠)이라는 인명이 기재되어 있다. 『고사기』 숭신천황단에는 환이신(丸邇臣; 와니노오미)의 조상 일자국부구명(日子國夫玖命; 히코쿠니후쿠노미코토)과 동일인임을 알 수 있다. 『신찬성씨록』에는 우경 황별(하)의 「진야신(眞野臣, 天足彦國押人命의 3세손 彦國葺命의 후손)」 조, 「화이부(和邇部, 천족언국압인명의 3세손 언국즙명의 후손)」 조, 산성국 황별의 「속전조신(粟田朝臣, 천족언국압인명의 3세손 언국즙명의 후손)」 조, 「엽률(葉栗, 언국즙명의 후손)」 조 등에 언국즙명이 보인다.
6. 기성서리궁(磯城瑞籬宮) 어우어간성입언천황(御宇御間城入彦天皇)
숭신천황을 가리킨다. 좌백유청은 『신찬성씨록』 완본에는 ‘천황(天皇)’ 다음에 ‘시숭신(諡崇神)’이라는 3글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7. 임나국(任那國)
임나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가야(加耶), 가야(伽耶), 가라(加羅) 등으로 표기되는 지역이다. 『일본서기』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과 함께 일본의 번국(蕃國)으로 등장한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는 특정국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 가야 제국을 총칭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임나의 동북에 기문이 위치하고 그 지역이 신라와 쟁투하는 지역이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임나의 위치는 기문보다 훨씬 서남부에 위치한 것이 된다.
8. 기문(己汶)
기문이라는 지명은, 『일본서기』 계체 7년 6월조에 백제의 가야 지역에 대한 진출에 관해 기술한 것으로 이해되는 기문(己汶)과 대사(帶沙) 문제와 함께 논의되고 있다. 기문을 감문(甘文)으로 대사를 다사(多沙)로 비정하는 경우와 기문을 남원(南原)이나 임실(任實), 대사를 하동(河東)으로 비정하는 설이 제시되었다. 근래에는 『양직공도(梁職貢圖)』에 상기문(上己文)이 보이고 『한원(翰苑)』에 인용된 『괄지지(括地志)』에 “기문하(基汶河)가 백제국의 남산(南山)에서 발원한다.”라는 기사를 근거로 기문은 낙동강이 아니라 섬진강이라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전라북도 남원, 장수, 임실, 순천, 광양, 여수 등지에 있던 소국(小國)의 이름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9. 귀국(貴國)
길전련조에 기록된 귀국과 신국(臣國)이라는 표현은 『일본서기』 의 임나(=번국)관에 기반을 둔 것이다. 『일본서기』 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 51년 3월조에 분주로 인용된 『백제기』와 응신천황 8년조에 인용된 『백제기』에 귀국이 보인다. 귀국을 ‘상대편의 나라’를 가리키는 용어로 볼 것인지 아니면 ‘존귀한 나라’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해석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진전좌우길(津田左右吉)은 백제인이 자국의 기록에 왜(倭)를 귀국(貴國)이라고 쓸 리가 없다는 점을 이유로 『백제기(百濟記)』에 『일본서기』편자의 손이 가해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백제기』 의 편자가 왜에 보일 것을 고려하여 처음부터 귀국(貴國)으로 표기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10. 염수진언명(鹽垂津彦命)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 승화(承和) 4년(837) 6월 기미조에는 우경인 종5위상 길전숙녜서주(吉田宿禰書主)와 고세(高世) 등이 흥세조신(興世朝臣)이라는 성을 받았다고 하며, 그 시조인 염승진은 대왜인(大倭人)으로 국명(國命)을 받아 삼기문 땅에 가서 거주하였는데, 염수진의 8세손 달솔(達率; 백제 16관위의 제2위) 길대상과 소상 등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일본에 내조하였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화이계도(和邇系圖)」 에서는 언국즙명(彦國葺命)의 아우 을국즙명(乙國葺命)의 아들로 염승진언명(鹽乘津彦命)을 기재하고 있고, 그 보문(譜文)에서는 “숭신천황 65년 7월에 명을 받고 임나국에 주둔하여 삼기문 지역에서 거주하였다. 길전숙녜, 흥세조신의 조상이다.”라고 적고 있다.
11. 종오위하지수(從五位下知須)
지수는 『속일본기』 신귀(神龜) 원년(724) 5월 신미조의 “종5위상 길의(吉宜)와 종5위하 길지수(吉智首)가 함께 길전련이라는 성을 받았다.”라고 적혀 있고, 『회풍조(懷風燥)』에는 출운개(出雲介)를 역임한 지수(智首)가 남긴 시 1수가 기재되어 있다.
12. 나량경전촌리하(奈良京田村里河)
『춘일신사문서(春日神社文書)』(2-93)에 수록된 「대안사단미병전수주진장(大安寺段米竝田數注進狀)」에 전촌하(田村河)가 보인다. 전촌리하의 하(河)는 전촌리가 좌보천(佐保川)과 고천(菰川)을 포함한 지역에 존재한 것을 나타낸다.
13. 홍인이년(弘仁二年) 개사숙녜성야(改賜宿禰姓也)
『일본후기』 홍인 2년(811) 9월 을미조에 “우경인 정6위상 길전련궁마려(吉田連宮麻呂)등이 숙녜라는 성을 받았다.”라고 적혀 있으므로 『일본후기』와 합치된다.
14. 속일본기합(續日本紀合)
『속일본기』 신구 원년(724) 5월 신미조에 종5위상 길의(吉宜)와 종5위하 길지수(吉智首)가 함께 길전련이라는 씨성을 받았다고 적혀 있는 사성 기사와 합치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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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전련(吉田連; 기치타노무라지) 자료번호 : ss.k_0001_0030_0070_0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