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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대춘일조신(大春日朝臣; 오카스가노아소미)

대춘일조신(大春日朝臣; 오카스가노아소미)
 효소천황(孝昭天皇; 가우세우텐노)의 황자 천대언국압인명(天帶彦國押人命; 아마타라시히코쿠니노오시히토노미코토)으로부터 나왔다. 중신(仲臣; 나카노오미)이 집에 천금(千金)을쌓아두고 술지게미를 쌓아올려 담을 만들게 하였다. 대초료천황(大鷦鷯天皇; 오사자키노스메라미코토)[시호는 인덕(仁德; 닌토쿠)이다.]이 그 집에 행차하여 조원신(糟垣臣; 가스가키노오미)이라 부르라고 명하였다. 뒤에 고쳐서 춘일신(春日臣; 가스카노오미)이 되었다. 환무천황(桓武天皇; 간무텐노) 연력(延曆) 20년에 대춘일조신(大春日朝臣; 오카스가노아소미)이라는 성을 받았다.
 
【주석】
1. 대춘일조신(大春日朝臣)
대춘일(大春日; 오카스가)라는 씨명은 율령제 대화국(大和國) 첨상군(添上郡) 춘일(春日; 가스가)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현재 나량현(奈良縣) 나량시(奈良市) 백호사정(白毫寺町) 부근이다. 『일본서기』에는 천무천황(天武天皇) 13년(684)11월에 대삼륜군(大三輪君; 오미와노키미) 이하 총 52씨에게 조신 성을 줄 때 (대)춘일신, 대택신(大宅臣), 속전신(粟田臣), 소야신(小野臣) 등 화이(和珥)계 6씨가 조신 성으로 개성하였다. 춘일씨 본류 일족은 이미 천무천황 13년에 조신으로 개성하였기 때문에, 연력 20년(801)에 조신 성을 받아 『신찬성씨록』에 수록된 대춘일조신은 본계가 아닌 방계 일족이다.
춘일씨의 최초 본거지는 현재 나량현 천리시(千里市) 화이(和爾; 와니) 지역이었고, 북쪽의 춘일 지역(현재 나량시 백호사정 부근)을 본거지로 삼으면서 씨명을 춘일이라 칭하였다. 춘일씨를 중심으로 대택, 속전, 소야 등 많은 씨족이 ‘와니씨(和珥氏・和邇氏・丸邇氏・丸氏)’를 칭하며 의제적인 동족집단을 광범위하게 형성한 것으로 간주된다.
대춘일조신 일족으로는 『속일본기』에 나오는 인물로 화동(和銅) 2년(709) 정월 병인조에 종6위하에서 종5위하(極位)로 승진한 대춘일조신적형(大春日朝臣赤兄)과 양로(養老) 7년(723) 정월 병자조의 종5위하(극위) 대춘일조신가주(大春日朝臣家主), 신귀(神龜)원년(724) 2월 임자조에 정6위상에서 종5위하(극위)로 승진한 대춘일조신과안(大春日朝臣果安), 신호경운(神護慶雲) 원년(767) 정월 경오조에 정6위상에서 외종5위하(극위)로 승진한 대춘일조신오백세(大春日朝臣五百世), 연력(延曆) 9년(7909) 7월 무자조에 종5위하(극위) 관노정(官奴正)에 임명된 대춘일조신청족(大春日朝臣淸足) 등이 있다.
평안(平安) 초기 이후의 대춘일씨 일족은 대부분은 학예 관계자로서 나타난다. 대춘일조신영웅(大春日朝臣穎雄)은 『홍인사기(弘仁私記)』 서(序)에 의하면 대춘일조신영웅은홍인(弘仁) 4년(813)의 일본기 강연에 참석한 수업자의 한 사람이며, 대외기(大外記)에 보임된 인물이다. 또 대춘일조신진야마려(大春日朝臣眞野麻呂)는 제형(齋衡) 3년(856) 원년 정월 이전부터 정관(貞觀) 4년(862) 정월 사이에 역박사(曆博士)로 재임하였고, 정관 2년(860)에는 음양두(陰陽頭)에도 취임하였다. 『일본문덕천황실록(日本文德天皇實錄)』 천안(天安) 원년(857) 정월 병진조에는 진야마려(眞野麻呂)까지 그 일족이 5세대에 걸쳐 역술(曆術)을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정관 7년(865) 5월 16일 병신조에는 대춘일조신택주(大春日朝臣宅主)가 감해유차관(勘解由次官)에 임명되었고, 『일본삼대실록』 정관 11년(869) 4월 13일 경자조에는 정6위상 대춘일조신안영(大春日朝臣安永)이 행좌소사(行左少史)에 보임된 기록이 보인다. 대춘일조신안수(大春日朝臣安守)는 『일본삼대실록』에는 정관 14년에 소외기(少外記), 존문발해객사(存問渤海客使), 영객사(領客使), 좌대사(左大史)에, 원경 3년(879) 정월 7일 정유조에는 감해유차관(勘解由次官)에 임명된 기록이 보인다. 대춘일조신안명(大春日朝臣安名)은 원경 원년(877)에 소외기, 존문발해객사를, 원경 5년(881) 대외기(大外記)를, 대춘일조신선도(大春日朝臣善道)는 원경 6년(882)에 대학조(大學助)를 역임하는 등 학자나 외교계, 학술계 관인을 배출하였다. 또 안영, 안수, 안명 등은 안(安) 자를 이름에서 공유하고 있어 근친자로 보인다.
『일본문덕천황실록』 제형 3년(856) 8월 정유조에는 대학박사 종5위상(極位) 춘일신웅계(春日臣雄繼)가 대춘일조신성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또 춘일조신택성(春日朝臣宅成)은 정관 원년(859) 2월 9일 을미조에는 대초위하(大初位下)로 발해통사(渤海通事)에 임명된 이후 원경 원년(877) 2월 3일 을사조에 정6위상(극위)으로서 발해통사로 임명되는 등, 정관 원년부터 원경 원년 사이에 여러 차례 발해통사에 임명되었다. 최하층 대초위하의 위계에서 외종5위하까지 승진하였다. 웅계는 씨성이 춘일신이라 표기되어 있고, ‘대(大)’ 자가 없기 때문에 대춘일씨와는 본래 계통이 다르거나 방계 출신자로 학술적인 자질과 직능에 따라 본류인 대춘일씨 일족에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 『홍인사기(弘仁私記)』
나라[奈良]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 중기에 걸쳐 궁정에서 『일본서기』 강독회가 열렸다. 『일본서기사기(日本書紀私記)』 는 양로(養老) 5년(721), 홍인(弘仁) 3년(812), 승화(承和) 10년(843), 원경(元慶) 2년(878), 연희(延喜) 4년(904), 승평(承平) 6년(936), 강보(康保) 2년(965) 등 7회의 강독회에 관한 기록을 가리킨다. 현존본으로는 갑을병정(甲乙丙丁) 4종이 알려져 있다. 갑을병본은 수호(水戸) 창고관(彰考館)에 전해진 것이므로 창고관본이라 칭한다. 창고관은 강호(江戸) 시대에 상륙국(常陸國) 수호번(水戸藩; 미토번)이 『대일본사(大日本史)』 를 편찬하기 위해 만든 수사국(修史局)이다. 이 가운데 갑본을 홍인 강독회에 관한 사기(私記)라는 점에서 『홍인사기』 라고 부르고 있다.
2. 효소천황(孝昭天皇)
『일본서기』 권제4에 수록된 제7대 천황으로, 제2대 수정천황(綏靖天皇)부터 제9대의 개화천황(開化天皇)까지는 구체적인 사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결사(缺史) 8대라고 부르며 실재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천황들이다. 좌백유청(佐伯有淸)은 『신찬성씨록』 완본에서는 ‘효소(孝昭)’ 앞에 ‘관송언향식도천황시(觀松彦香殖稻天皇諡)’라는 아홉 글자가 있고, ‘효소’ 다음의 ‘천황(天皇)’이라는 2글자는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3. 천대언국압인명(天帶彦國押人命)
효소천황(孝昭天皇)의 황자이다. 『일본서기』에는 천족언국압인명(天足彦國押人命; 아마타라시히코쿠니오시히토노미코토), 『고사기』에는 천압대일자명(天押大日子命; 아메오시타라시히코노미코토)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 모두 사적(事績)에 관한 기재는 없다. 『일본서기』 효소천황 6년 봄 정월 정해삭 경자조에는 “천족언국압인명은 화이신(和珥臣; 와니노오미) 등의 시조이다.”라고 기재되어 있고, 『고사기』 효소천황단에는 춘일신(春日臣), 대택신(大宅臣) 등 15씨의 조상이라고 적혀 있다.
4. 중신(仲臣)
일문(逸文) 중신신(中臣臣; 나카토미노오미)조에는 “관송언향식도천황(觀松彦香殖稻天皇; 미마츠히코카에시네노스메라미코토)[시호는 효소(孝昭)이다.]의 황자, 천족언국압인명(天足彦國押人命; 아메타라시히코쿠니오시히토노미코토)의 7세손 점착대사주(鏩着大使主; 다카네츠키노오미)의 후손이다.”라고 적혀 있다.
5. 춘일신(春日臣)
춘일씨(春日臣)는 첨상군(添上郡) 춘일향(春日鄕) 주변을 본거로 한 씨족으로 5세기 후반 이래 웅략(雄略), 인현(仁賢), 민달(敏達) 3대 왕의 왕비를 낸 집안이다. 천무조의 조신(朝臣) 사성 기사에서 와니계 6씨 가운데 첫 번째에 위치하고 있고, 춘일 앞에 대(大) 자를 붙여 대춘일이라 기록한 것으로 보더라도 당시 명문으로 대우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 웅략 원년 3월[是月]조에는 3명의 비를 세웠는데 그 가운데 춘일화이신심목(春日和珥臣深目; 가스가노와니노오미후카메)의 딸 동녀군(童女君)이 춘일대낭황녀(春日大娘皇女; 가스가노오이라츠메노히메미코)를 낳았다고 한다. 춘일화이신심목은 『고사기』 웅략천황단에는 보이지 않지만, 환이좌도기신(丸邇佐都紀臣; 와니노사츠키노오미)의 딸인 원저비매(袁杼比賣; 오도히메)와 혼인하기 위해 천황이 춘일(春日; 가스가)에 행차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므로 환이좌도기신의 딸인 원저비매가 춘일 지역에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태전량(太田亮; 오오타 아키라)이 쓴 『성씨가계사전(姓氏家系辞典)』에 수록된 「화이계도(和邇系圖)」 에는 좌도기신의 보주(譜注)에 ‘심목신(深目臣)’이라 기재되어 있다. 『일본서기』 웅략천황 원년 3월조의 춘일화이신심목이라는 이름과 일치한다. 다만 『고사기』가 좌도기신의 딸을 원저비매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일본서기』 는 심목의 딸 이름을 동녀군이라 적고 있다. 〈화이씨계도〉에는 동녀군이 좌도기신의 딸이라 적혀 있다. 이것은 〈화이씨계도〉가 좌도기신과 화이신심목을 동일인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또 〈화이씨계도〉에서는 좌도기신의 아우 인화신(人華臣)의 보문(譜文)에 “인덕천황이 중신가에 행차하여……조원신이라 칭해졌고 이를 고쳐 춘일신이라 하였다.”라는 『신찬성씨록』 의 내용과 같은 전승이 기록되어 있다. 인화신은 보주에 일운 중신(仲臣)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신찬성씨록』 미정잡성 우경 중신신조 일문에 점착대사주의 아들로 중신이라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만 다른 사람인 듯하다.
6. 환무천황(桓武天皇)
환무천황(737~806)은 781년부터 806년까지 재위했는데, 천지천황(天智天皇)의 후손인 광인천황(光仁天皇)의 아들로서 광인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모친은 백제에서 도래한 화사씨(和史氏)의 딸이다. 환무천황 스스로 자신의 모친이 백제계임을 밝힐 정도로 그가 도래계 자손임을 강조하였다. 왕경을 조영하여 평안(平安)으로 천도하였고, 동북지방의 하이(蝦夷) 정벌을 완성하였다. 새롭게 율령격식을 정비하고 이를 시행하여 8세기의 율령제를 수정하고 지방 정치의 쇄신을 도모하는 등 율령정치 재건을 위해 힘쓴 천황으로 평가되고 있다.
시호는 황통미조천황(皇統彌照天皇; 아마츠히츠기이야테라스스메라미코토), 일본근자황통미조존(日本根者皇統彌照尊; 야마토네코아마츠히츠기이야테라스스메라미코토)이다. 환무천황에 관해서는 『신찬성씨록』 서(序)의 황통미조성명(皇統彌照聖明)조와 좌경 황별(상)「양잠조신(良岑朝臣)」 조(046) 황통미조천황 참조.
7. 연력이십년(延曆廿年) 사대춘일조신성(賜大春日朝臣姓)
연력 20년(801)에 대춘일조신의 사성은 춘일조신씨가 대춘일조신으로 개성된 것을 가리킨다. 다만 현존 『일본후기(日本後紀)』에 연력 19년(800)에서 연력 22년(803)까지의 기록이 빠져 있기 때문에 연력 20년(801)에 대춘일조신이라는 성을 받은 것이 어떤 씨족인지는 알 수 없다. 『신찬성씨록』 편찬을 전후한 시기의 대춘일조신씨로는 대춘일조신청족(大春日朝臣淸足), 대춘일조신어성(大春日朝臣魚成), 대춘일조신영웅(大春日朝臣頴雄) 등이 육국사에서 확인된다. 이들 가운데 대춘일조신청(정)족은 『속일본기』 연력 8년(789) 정월 기유조에 대춘일조신의 씨성을 칭하고 있음이 확인되므로 연력 20년의 사성과는 관계가 없다. 대춘일조신어성과 대춘일조신영웅은 『홍인사기(弘仁私記)』 서(序)에서 대외기(大外記) 정6위상 대춘일조신영웅의 분주에 “왕자 대대언국압인명(大帶彦國押人命)의 후손, 종5위하 어성(魚成)의 첫째 아들이다.”라고 적혀 있으므로 부자관계임을 알 수 있다. 활동 시기를 고려하면 이들이 연력 20년에 대춘일조신의 씨성을 받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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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춘일조신(大春日朝臣; 오카스가노아소미) 자료번호 : ss.k_0001_0030_007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