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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판전숙녜(坂田宿禰; 사카타노스쿠네)

판전숙녜(坂田宿禰; 사카타노스쿠네)
 식장진인(息長眞人; 오키나가노마히토)과 조상이 같다. 응신(應神; 오우진)의 황자(皇子) 치정모이파왕(稚渟毛二派王; 와카누케후타마타노미코)의 후손이다. 천정중원영진인천황(天渟中原瀛眞人天皇; 아마노누나하라오키노마히토텐노)[시호는 천무(天武; 덴무)이다.]의 시대에 출가하여 불도에 들어가 법명(法名)을 신정(信正; 신샤우)이라고 한 자가 근강국(近江國; 아후미노쿠니) 사람 규본공전호(槻本公轉戶; 츠키모도노키미쿠루베)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석촌(石村)을 낳고, 어머니의 씨성을 따라 규본공(槻本公)이라고 하였다. 그 아들은 외종5위하 노(老; 오유)이고, 그 아들은 종5위상 나테마려(奈 麻呂; 나테마로)이고, 그 다음은 종5위하 풍성(豐成; 토요나리), 풍인(豐人; 토요히토) 등이다. 황통미조천황(皇統彌照天皇; 아마츠히츠키이야테라스텐노)[시호는 환무(桓武; 간무)이다.]의 연력(延曆) 22년에 숙녜(宿禰)라는 성을 내렸다. 이에 아버지의 뜻을 그리워하여 할아버지가 생장한 곳의 이름을 따서 규본(槻本)을 고쳐서 판전숙녜(坂田宿禰; 사카타노스쿠네)를 내렸다. 금상(今上)의 홍인(弘仁) 4년에 나저마려 등과 같이 조신(朝臣)이라는 성으로 고쳐 하사하였다.
 
【주석】
1. 판전숙녜(坂田宿禰)
판전(坂田; 사카타)이라는 씨명은 근강국(近江國) 판전군(坂田郡)이라는 지명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의 자하현(滋賀縣) 미원시(米原市) 일대이다.
판전숙녜(坂田宿禰)의 원래 씨성은 규본공(槻本公)이었는데, 먼저 숙녜(宿禰)라는 성을 받아 규본숙녜(槻本宿禰)가 되었고, 다시 규본이라는 씨명을 고쳐 판전숙녜가 되었다.
2. 식장진인동조(息長眞人同祖)
식장진인(息長眞人)는 좌경(左京) 황별(皇別)의 「식장진인」 조(001) 참조. 판전숙녜씨의 조상으로 나타나는 신정(信正)은 식장씨(息長氏)를 칭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 응신(應神)
『신찬성씨록』 완본에는 ‘응신(應神)’ 앞에 ‘예전천황시(譽田天皇諡)’라는 5글자가 있었을 것이다. 응신은 예전별존(譽田別尊), 예전별천황(譽田別天皇), 태중천황(胎中天皇), 품타화기명(品陀和氣命), 대병화기명(大鞆和氣命), 품태천황(品太天皇), 범모도화희왕(凡牟都和希王) 등 다양한 별칭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응신이 실재한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정상광정(井上光貞)은 이름에 작위적인 요소가 없고 『일본서기』 등의 기록과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이 대응된다는 점에서 실재한 최초의 천황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송서』에 보이는 왜5왕 중 찬(讚)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초까지 실재하였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강전영홍(岡田英弘)은 응신의 5세손으로 왕위에 오른 계체(繼體)의 조상신일 뿐이라고 하여 실재를 부정하였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서 인덕천황(仁德天皇)의 행적과 중복되는 점을 들어, 응신과 인덕이 동일인물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4. 치정모이파왕(稚渟毛二派王)
응신천황의 아들로 치야모이파왕(稚野毛二派王), 치정모이기황자(稚渟毛二岐皇子), 약소모이오왕(若沼毛二俁王), 약야모이오왕(若野毛二俁王) 등으로 표기한다. 좌경(左京)황별(皇別)의 「식장진인(息長眞人)」 조(001) 치정모이오왕(稚停毛二俁王) 참조.
5. 법명신정(法名信正)
신정(信正)이라는 인물의 실제 이름은 알 수 없다. 남연조신연명(南淵朝臣年名)의 훙전(薨傳)에 의하면 연명(年名)은 좌경인(左京人)인데 대화수(大和守) 종4위하 나저마(奈氐麿)의 손자인데, 본성(本姓)은 식장진인(息長眞人)이었으나, 중간에 외척(外戚)의 성을 사용하여 규본공(槻本公)이 되었는데, 후에 판전(坂田)으로 고쳤다고 하였다(『扶桑略記』元慶 元年 4월 8일 己卯條). 『공경보임(公卿補任)』 · 『이려파자류초(伊呂波字類抄)』 의 기록 등을 종합해 보면, 원래 식장씨(息長氏)였는데 외척의 성을 따라 규본공이 되었다가, 다시 판전으로 고쳤다가, 연명에 이르러 남연(南淵)이라는 씨명을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6. 규본공전호(槻本公轉戶)
여기에만 보인다. 근강국(近江國)의 규본씨(槻本氏)에 대해서는 다음의 규본공(槻本公)참조.
7. 석촌(石村)
여기에만 보인다.
8. 규본공(槻本公)
규본(槻本)이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섭진국(攝津國) 서성군(西成郡) 규본향(槻本鄕)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규본씨가 근강국(近江國)에 다수 거주하고 있으므로, 근강국 지역에도 규본이라는 지명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규본공(槻本公)이라는 씨성은 이 조에만 보인다. 공(公)이라는 성(姓) 이외에는 규본촌주(槻本村主)·규본련(槻本連)이 있다.
9. 노(老)
월전국(越前國) 족우군(足羽郡)의 군사로서 의주장(擬主帳) 무위(無位) 규보공로(槻本公老)가 보인다(天平神護 2년 9월 19일자 「越前國足羽郡司解」, 『대일본고문서』 5-542). 778년에 정6위상으로부터 외종5위하가 되었고(『續日本紀』 寶龜 9년 정월 계해조), 같은 해에 우병위좌(右兵衛佐)에 임명되었다(『續日本紀』 寶龜 9년 3월 병진조). 그는 정상황후(井上皇后)와 타호친왕(他戶親王)의 무고(巫蠱)를 고변하여 환무(桓武)의 즉위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類聚國史』 卷79, 賞功, 延曆 22년 정월 임술조).
10. 나테마려(奈 麻呂)
규본공로(槻本公老)의 아들로 환무(桓武) 때인 797년에 외종5위하의 관위로 내장조(內藏助)에 서임되었다(『日本後紀』 延曆 16년 2월 을축조). 799년에 장문수(長門守)가 되었고(『日本後紀』 延曆 18년 정월 갑술조), 803년에 아버지 노(老)의 공로를 인정받아 종5위하가 되었으며, 씨성도 규본공(槻本公)에서 판전숙녜(坂田宿禰)로 바뀌었다(『想聚國史』권79, 賞功, 延曆 22년 정월 임술조). 평성(平城) 때인 808년에 정5위하가 되고(『類聚國史』 권99, 叙位, 大同 3년 정월 정미조), 809년에 조동사장관(造東寺長官)에 임명되었다(『日本後紀』 大同 4년 2월 기미조). 810년에 약자(藥子)의 변이 발생하면서 종4위하 대화수(大和守)에 임명되었다(『日本後紀』 弘仁 원년 9월 정미조). 818년에 종4위하로 죽었다(『日本紀略』 弘仁 9년 2월 무오조). 나저마려가 조신이라는 성을 칭하게 된 것은 813년에 숙녜를 조신으로 고친 이후이다.
나저마려의 아들로는 남연조신홍정(南淵朝臣弘貞)과 남연조신영하(南淵朝臣永河, 『日本文德天皇實錄』 天安 元年 10월 丙子條)가 있다. 영하의 아들로 남연조신연명이 있다(『扶桑略記』 元慶 원년 4월 기묘조).
11. 풍성(豐成)
규본공나저마려(槻本公奈 麻呂)의 아우로 803년에 나저마려와 함께 숙녜라는 성을 받았다(『類聚國史』 卷79, 賞功, 延曆 22년 정월 임술조).
12. 풍인(豐人)
규본공나저마려(槻本公奈 麻呂)의 아우로 803년에 나저마려와 함께 숙녜라는 성을 받았다(상동).
13. 사판전숙녜(賜坂本宿禰)
나저마려(奈 麻呂)를 비롯한 형제들이 규본숙녜(槻本宿禰)라는 씨성을 고쳐 판전숙녜(坂田宿禰)가 된 시기는 규본숙녜가 된 803년 이후 판전숙녜로 나타나는 808년 사이로 생각할 수 있다(『類聚國史』 卷99, 叙位, 大同 3년 정월 정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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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전숙녜(坂田宿禰; 사카타노스쿠네) 자료번호 : ss.k_0001_0030_0060_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