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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길비조신(吉備朝臣; 기비노아소미)

길비조신(吉備朝臣; 기비노아소미)
 대일본근자언태경천황(大日本根子彦太瓊天皇; 오야마토네코히코후토니텐노)[시호는 효령(孝靈)이다.]의 아들 치무언명(稚武彦命; 와카타케히코노미코토)의 후손이다.
 
【주석】
1. 길비조신(吉備朝臣)
길비(吉備; 기비)라는 씨명은 길비국(吉備國)이라는 일본 고대에 존재하였던 지방 국가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길비국은 지금의 강산현(岡山縣) 전역과 광도현(廣島縣)의 동부, 향천현(香川縣) 도서 지역, 병고현(兵庫縣) 서부 일대에 걸쳐 있는 영역을 지배하였으며, 대화(大和), 출운(出雲), 축자(筑紫)에 버금가는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유적인 조산고분(造山古墳)과 작산고분(作山古墳)이라는 대형 전방후원분이다. 길비국은 율령제하에서 비전(備前)·비중(備中)·비후(備後)·미작(美作) 등으로 분할되었다.
길비조신의 본래 성은 신(臣)이었다. 그런데 길비국의 지배층은 길비의 하도신(下道臣)과 상도신(上道臣)이며, 그 밖에 향옥신(香屋臣)·삼야신(三野臣)·입신(笠臣)·원신(苑臣) 등이 있다. 『국조본기(國造本紀)』에 의하면 길비 지방에는 길비씨(吉備氏) 아래 대백씨(大伯氏), 상도씨(上道氏), 삼야씨(三野氏), 하도씨(下道氏), 가야씨(加夜氏·賀陽氏·賀夜氏), 향옥씨(香屋氏), 입신씨(笠臣氏), 소전씨(小田氏)가 있다고 하였다. 이 조항의 길비조신도 길비신에서 길비조신이 된 것이 아니라, 하도신(下道臣)의 후예인 하도조신(下道朝臣)이 개성한 것이다.
길비신이라는 호칭은 하도신·상도신 등의 총칭이기도 하며, 길비신은 길비 지역의 지배세력이므로, 광의의 조상에 해당하는 인물로 길비하도신전진옥(吉備下道臣前津屋, 『일본서기』 웅략기 7년 8월조)을 들 수 있다. 동시에 『일본서기』 의 다른 전승에서는 길비국조(吉備國造)인 길비신산(吉備臣山)이라는 인물도 보인다. 이 길비하도신전진옥과 길비신산은 동일하게 대화왕권의 통제에 반발한 인물로 전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전진옥의 경우는 어린 여자를 대화왕권에 속한 사람으로 삼고, 성인 여자를 자기 사람으로 삼아 싸우게 하였는데, 어린 여자가 이기자 칼을 뽑아 그녀를 죽였다고 한다. 다시 작은 수탉을 대화왕권의 닭으로 삼고 나서 털을 뽑고 날개를 자르고, 큰 수탉을 자기 닭으로 삼고 쇠발톱을 달아서 싸우게 하였는데, 역시 작은 닭이 이기자 죽였다. 이에 대화왕권의 대왕이 물부(物部) 병사 30명을 보내서 전진옥과 그 일족 70인을 죽였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일본서기』에는, 길비상도신전협(吉備上道臣田狹, 『일본서기』웅략기 7년 시세조)이라는 인물이 역시 대화왕권의 대왕에 대하여 복종하지 않았다는 전승을 전하고 있다. 전협(田狹)은 이른바 임나국사(任那國司)로 보이며, 그 아들인 제군(弟君)은 백제에 파견되었다. 또한 이른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행군원수(行軍元帥)의 한 사람인 길비신소리(吉備臣小梨, 『일본서기』웅략기 8년 2월조), 정신라장군(征新羅將軍)으로 전하는 길비신미대(吉備臣尾代, 『일본서기』 웅략기 23년 8월 병자조)도 상도신 계열의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전협이 대왕 웅략에게 반의를 품게 된 것은 자신의 처인 치원(稚媛)을 웅략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일본서기』 웅략기 7년 시세조). 전협의 처인 치원은 이름을 알 수 없는 길비상도신(吉備上道臣) 일족의 딸로 전한다(『일본서기』 웅략기 원년 3월조). 전협은 치원으로부터 형군(兄君)과 제군(弟君)을 낳았으며, 형제 중 아우인 제군은 백제로 건너가서 본국에 대하여 모반하려는 뜻을 품었기 때문에 그 처인 장원(樟媛)에게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일본서기』 웅략기 7년 시세조), 형인 형군은 대왕 웅략이 죽었을 때 그의 어머니 길비치원(吉備稚媛)과 함께 왕자 성천(星川)의 반란에 가담하였다가 역시 죽음을 당했다(『일본서기』 청녕기 즉위전기, 웅략기 23년 8월조). 이때 길비상도신 일족은 왕자 성천을 구하기 위하여 40척의 배를 이끌고 출발하였으나 이미 왕자 성천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귀환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왕 청녕은 길비상도신이 관장하던 산부(山部)를 몰수하였다고 한다(『일본서기』 청천기 즉위전기, 웅략기 23년 8월). 또한 『일본서기』 흠명기(欽明紀)에 보이는 길비신(吉備臣, 흠명기 2년 4월조·5년 3월조·5년 11월조)이라는 이름이 보이는데, 이른바 임나일본부와 관련된 인물인 점에서 길비상도신 일족일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일본서기』에 보이는 길비신은 대부분 길비상도신 일족이고, 길비하도신전진옥 이외에 길비하도신(吉備下道臣) 일족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685년에 하도신은 조신(朝臣)의 성을 받았다(『일본서기』 천무기 13년 11월 무신삭조). 이 사성을 통하여 하도신은 하도조신(下道朝臣)이 되었다. 하도조신에 대해서는 하기의 「하도조신」 조(080)참조.
2. 대일본근자언태경천황(大日本根子彦太瓊天皇)
효령천황(孝靈天皇)이다. 『신찬성씨록』 완본에는 천황(天皇)이라는 글자 아래 시효령(諡孝靈)이라는 세 글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고사기』 효령천황단(孝靈天皇段)에서는 대왜근자일자부두이명(大倭根子日子賦斗邇命)은 흑전여호궁(黑田廬戶宮)에서 천하를 다스렸다고 하였다. 『일본서기』 효령천황 즉위전기(卽位前紀)에 대일본근자언태경천황(大日本根子彦太瓊天皇)은 일본족언국압인천황(日本足彦國押人天皇, 孝安天皇)의 태자이며 어머니는 천족언국압인명(天足彦國押人命)의 딸 압원(押媛)이라고 하였다. 형제로는 『고사기』에 대길비제진명(大吉備諸進命)의 이름이 보인다.
그가 거처한 궁은 종래에 산자락에 있었던 궁들과 달리 대화분지의 중앙에 있었다. 즉위한 지 2년 되는 해에 기성현주(磯城縣主) 대목(大目)의 딸인 세원명(細媛命)을 황후로 삼았고 언국견존(彦國牽尊, 후의 孝元天皇)을 낳았다. 또한 춘일천유조산향원(春日千乳早山香媛)과 왜국향원(倭國香媛) 등을 비로 삼았고, 그들과의 사이에서 숭신천황(崇神天皇) 때 사도장군(四道將軍)으로 활약한 언오십협근언명(彦五十狹芹彦命)과 질병 치유 및 반란 진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왜적적일백습희명(倭迹迹日百襲姬命)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밖의 행적은 거의 없는 전설적인 인물이며, 씨족의 계보를 천황과 연결시키기 위해서 효령천황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3. 치무언명(稚武彦命)
『일본서기』에서는 치무언명(稚武彦命), 『고사기』에서는 약일자건길비진일자명(若日子建吉備津日子命)과 약건길비진일자명(若建吉備津日子命), 다른 문헌에서는 약무언명(若武彦命) 등으로 나타난다. 『일본서기』에서는 제7대 효령천황(孝靈天皇)의 아들로 길비신(吉備臣)의 원조(遠祖)로 전하고, 『고사기』에서는 길비하도신(吉備下道臣)과 입신(笠臣)의 조상이라고 하였다.
한편 『신찬성씨록』에서는 이 조항에서 좌경 황별인 길비조신이 그의 후손이라고 하였고, 하도조신(下道朝臣)이 길비조신과 동조관계이며 치무언명의 손자 길비무언명(吉備武彦命)의 후손이라고 하였고, 우경 황별의 입조신(笠朝臣)이 치무언명의 후손이라고 하였고, 입신(笠臣)이 입조신과 동조관계이며, 치언무명의 손자 압별명(鴨別命)의 후손이라고 하였고, 길비신(吉備臣)이 치무언명의 손자 어우별명(御友別命)의 후손이라고 하였고, 진발부(眞髪部)가 치무언명의 아들 길비무언명(吉備武彦命)의 후손이라고 하였고, 노원공(廬原公)이 입조신과 동조관계인데, 치무언명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고사기』에 의하면, 길비상도신(吉備上道臣)의 조상인 대길비진일자명(大吉備津日子命)과 길비하도신의 조상인 약일자건길비진일자명은 이모형제 간이며, 두 형제 때에 이르러 상도신과 하도신으로 분기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서기』에서는 어우별(御友別)의 맏아들 도속별(稻速別)이 하도신의 시조가 되고, 둘째 아들 중언(仲彦)이 상도신과 향옥신의 시조가 되고, 제언(弟彦)이 삼야신의 시조가 되고, 어우별의 동생 압별(鴨別)이 입신의 시조가 되고, 어우별의 형 포응별이 원신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였다.(응신기 22년 9월 경인조).
아마도 길비신과 동족이라고 주장하는 여러 씨족의 계보 원형은 앞의 『일본서기』에 보이는 계보 전승이 가장 오래되었을 것이고, 길비신을 중심으로 하는 씨족이 모두 치무언명을 시조로 삼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하도신의 시조인 도속별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중심씨족은 하도신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하도신씨가 전진옥(前津屋)의 반란 전승에서 보듯이 대화왕권과 갈등을 일으키면서, 그 중심씨족이 상도신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상도신씨의 경우는 전협(田狹)이나제군(弟君)의 전승에서 알 수 있듯이 대화왕권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대화왕권에 반감을 품은 제군을 죽인 그의 처 장원(樟媛)이나 홍계왕(弘計王)을 즉위시키는 과정에서 기여한 공로가 있는 길비신처럼 대화왕권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인물도 있었다. 이처럼 상도신 일족이 대화왕권과 관계를 강화하면서 하도신을 중심으로 한 씨족 계보로부터 분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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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비조신(吉備朝臣; 기비노아소미) 자료번호 : ss.k_0001_0030_0060_0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