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천조신(石川朝臣; 이시카하노아소미)
석천조신(石川朝臣; 이시카하노아소미)
효원천황(孝元天皇; 가우구웬텐노)의 황자(皇子) 언태인신명(彦太忍信命; 히코후츠오시노마코토노미코토)의 후예이다. 『일본기』와 합치한다.
【주석】
1. 석천조신(石川朝臣)
석천(石川)이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하내국(河內國) 석천(石川)이라는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다. 현재의 대판부(大阪府) 우예야시(羽曳野市) 부전림시(富田林市)와 하내장야시(河內長野市) 일대이며, 이 지역에는 대화천(大和川)과 합류하는 석천이 흐르고 있다.
석천조신의 일족으로는 『일본서기』 천무천황(天武天皇) 14년(685) 9월 무오조의 석천조신충명(石川朝臣蟲名)을 비롯하여 『속일본기』 문무천황(文武天皇) 2년(702) 7월 계미조의 석천조신소로(石川朝臣小老), 화동(和銅) 원년(708) 3월 병오조의 석천조신석족(石川朝臣石足), 천평(天平) 7년(735) 4월 무신조의 석천조신년족(石川朝臣年足) 등 다수가 보인다.
석천조신은 원래 소아신(蘇我臣)에서 분화된 씨족이다. 소아신씨의 시조가 소아석하숙녜(蘇我石河宿禰)로 전하며 그는 무내숙녜(武內宿禰)의 아들이며 하내국(河內國) 석천 지역에서 태어났으므로 석천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후에 종아(宗我, 蘇我)의 큰 집과 종아숙녜(宗我宿禰)라는 씨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元慶 원년 12월 27일 계사조). 『일본서기』 민달천황(敏達天皇) 13년(584) 시세(是歲)조에 소아마자숙녜(蘇我馬子宿禰)가 석천의 저택에 불전을 만드니 불법의 단서가 이로부터 만들어졌다고 하여, 소아마자(蘇我馬子)도 석천에 저택을 가지고 있는 등 밀접한 관련을 보인다. 소아마자의 손자이자 산전사(山田寺)를 건립한 것으로 유명한 소아창산전석천마려(蘇我倉山田石川麻呂)의 이름에도 석천이 들어 있다.
소아신이 석천조신으로 씨명을 바꾼 것은 임신(壬申)의 난 당시 소아신적형(蘇我臣赤兄)과 소아신과안(蘇我臣果安)이 천지천황(天智天皇)의 아들인 대우황자(大友皇子) 측에 가담한 사실과 천무천황 10년(681) 3월에 제기(帝紀) 및 상고제사(上古諸事)를 기정(記定)하도록 한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천무 진영에 맞섰던 조상들의 씨명을 그대로 쓰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2. 효원천황(孝元天皇)
좌경 황별(상) 「아배조신(阿倍朝臣)」 조(054) 효원천황 참조.
3. 언태인신명(彦太忍信命)
『일본서기』에서는 효원천황(孝元天皇)의 아들로 무내숙녜(武內宿禰; 다케시우치노스쿠네)의 조부라고 하였다. 『고사기』 효원천황단에서는 비고포도압지신명(比古布都押之信命)이라고 표기하였고 건내숙녜(建內宿禰; 다케시우치노스쿠네)의 아버지라고 하였다. 무내숙녜는 9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중 소하석하숙녜(蘇賀石河宿禰)가 소아신(蘇我臣), 천변신(川邊臣) 등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언태인신명의 이름은 산성국 황별 「적신(的臣)」 조(195), 「여등련(與等連)」 조(196), 「출정신(出庭臣)」 조(198), 대화국 황별 「내신(內臣)」 조(212), 「아기나군(阿祇奈君)」 조(239), 섭진국 황별 「판본신(坂本臣)」 조(238), 하내국 황별 「소하(蘇何)」 조(276) 등에 보인다.
4. 일본기합(日本紀合)
『일본서기』 천무천황(天武天皇) 13년(684) 11월 무신삭조에 석천신(石川臣)에게 조신(朝臣)이라는 성을 하사하였다는 내용이 보이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