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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귤조신(橘朝臣; 다치바나노아소미)

귤조신(橘朝臣; 다치바나노아소미)
 감남비진인(甘南備眞人; 가무나비노마히토)과 조상이 같다. 민달천황(敏達天皇; 비타츠)의 황자인 난파황자(難波皇子; 나니하노미코)의 아들이 증종2위(贈從二位) 율외왕(栗隈王; 구루쿠마노미코)이다. 그 아들은 치부경(治部卿) 종4위하 미노왕(美努王; 미노노미코)이다. 미노왕이 종4위하 현견양숙녜동인(縣犬養宿禰東人; 아가타노이누카히노스쿠네아즈마히토)의 딸 증정1위(贈正一位) 현견양귤숙녜삼천대(縣犬養橘宿禰三千代; 아가타노이누카히타치바나노스쿠네미치요) 대부인(大夫人)과 혼인하여, 좌대신(左大臣) 제형(諸兄; 모로에), 중궁대부(中宮大夫) 좌위숙녜(佐爲宿禰; 사위노스쿠네). 증종2위(贈從二位) 모루여왕(牟漏女王; 무로노오호키미)을 낳았다. 여왕(女王)이 증태정대신(贈太政大臣) 등원방전(藤原房前; 후지하라노후사사키)에게 시집가서 태정대신(太政大臣) 영수(永手; 나가테), 대납언(大納言) 진순(眞楯; 마타테) 등을 낳았다. 화동(和銅) 원년(708) 11월 기묘(己卯)에 대상회(大嘗會)가 있었고, 25일 계미의 곡연(曲宴)에서 귤숙녜(橘宿禰; 다치바나노스쿠네)라는 성을 대부인에게 내렸다. 천평(天平) 8년(736) 12월 갑자(甲子)에 참의(參議) 종3위행좌대변(行左大辨) 갈성왕(葛城王; 가츠라기노미코)에게 귤숙녜제형(橘宿禰諸兄; 다치바나노스쿠네모로에)라는 이름을 내렸다.
 
【주석】
1. 귤조신(橘朝臣)
귤(橘)이라는 씨명은 원명천황(元明天皇)이 현견양삼천대(縣犬養三千代)에게 귤을 내린 일에서 비롯되었다. 『속일본기』 천평(天平) 8년(736) 11월 병술조에 의하면, 화동(和銅)원년(708)에 원명천황의 대상제(大嘗祭) 때 삼천대(三千代)가 이를 도왔고 대상제가 끝난 후 연회에서 지극한 충성심을 칭찬하는 뜻으로 귤을 주면서 아울러 귤숙녜(橘宿禰)라는 성을 내렸다는 내용이 보인다. 다시 천평승보(天平勝寶) 2년(750)에 귤숙녜제형에게 귤조신이라는 성을 내렸다(『속일본기』). 일족으로는 귤숙녜좌위(橘宿禰佐爲)와 귤숙녜나량마려(橘宿禰奈良麻呂), 귤조신궁자(橘朝臣宮子), 귤조신진질(橘朝臣眞姪) 등이 있다.
2. 감남비진인(甘南備眞人)
좌경(左京) 황별(상) 「감남비진인」 조(008) 참조.
3. 민달천황(敏達天皇)
제30대 천황(재위 572~585)으로 흠명천황(欽明天皇)과 석희황녀(石姬皇女) 사이에서 태어났다.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과 역어전행옥궁(譯語田幸玉宮)에 거처하였으며, 흠명천황의 유언에 따라 임나 부흥을 꾀하려고 백제와 협의를 거듭하였으나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소아마자(蘇我馬子)가 절을 짓고 부처를 섬기자 역병이 발생하였고, 이에 민달천황이 불교를 금지하고 절을 불태웠다. 『신찬성씨록』 완본에는 ‘정중창태주부천황시민달(渟中倉太珠敷天皇諡敏達) 황자난파왕지후야(皇子難波王之後也)’로 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4. 난파황자(難波皇子)
좌경(左京) 황별(皇別) 「노진인(路眞人)」 조(006) 난파왕 참조.
5. 율외왕(栗隈王)
율전왕(栗前王)이라고도 하며, 『일본서기』천지(天智) 7년(668)에 후대의 대재부(大宰府) 장관에 해당하는 축자솔(筑紫率)에 임명되었으며, 임신의 난 당시에 대해인황자(大海人皇子, 후의 天武天皇)가 좌백련남(佐伯連男)을 보내어 병사를 일으킬 것을 요구하였으나, 축자국(筑紫國)은 외적을 막기 위해 바다를 지키는 곳이라고 하여 거절하였다. 천무천황 4년(675)에 병정관장(兵政官長)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 죽었다.
6. 미노왕(美努王)
삼야왕(三野王), 미노왕(彌努王), 미노왕(美弩王), 미노왕(美奴王)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었다. 임신의 난 때 대해인황자 측이 병력을 동원할 것을 요구했을 때 아버지인 율외왕을 칼을 차고 지켰다. 천무(天武) 10년(681) 3월에는 천도황자(川島皇子) 등과 함께 제기(帝紀) 및 상고제사(上古諸事)를 기정(記定)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또한 천무 13년(684) 2월에는 도읍을 정하기 위하여 삼야왕(三野王)을 신농(信濃)에 보내어 지형을 보도록 하였고, 같은 해 4월에 신농국(信濃國)의 지도를 바쳤다는 내용이 보인다. 지통(持統) 8년(694)에는 축자대재솔(筑紫大宰率)에 임명되었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좌경대부(左京大夫), 섭진대부(攝津大夫), 치부경(治部卿)을 지냈으며, 화동(和銅) 원년(708)에 죽었다.
7. 현견양숙녜삼천대(縣犬養宿禰三千代)
현견양씨(縣犬養氏)는 둔창(屯倉)을 관리하는 반조씨족(伴造氏族)이다. 현견양대려(縣犬養大侶)가 임신의 난 때 대해인황자(大海人皇子)를 근시하였고 천무(天武) 12년(683)에 숙녜(宿禰)라는 성을 받았다. 삼천대(三千代)는 현견양씨가 바친 씨녀(氏女)로 생각된다. 처음에는 민달천황(敏達天皇)의 후손인 미노왕과 결혼하여 갈성왕(葛城王, 후의 橘諸兄), 좌위왕(佐爲王, 후의 橘佐爲), 모루여왕(牟漏女王)을 낳았고, 다시 등원불비등(藤原不比等)의 후처가 되어 광명자(光明子)를 낳았다. 원명천황의 대상제 때 귤씨를 사성받아 귤씨의 시조가 되었다. 영귀(靈龜) 2년(716)에 딸인 안숙원(安宿媛, 후의 光明皇后)이당시 황태자였던 수황자(首皇子, 후의 聖武天皇)의 비가 되었고, 양로(養老) 원년(717)에 종3위에 올랐으며, 양로 5년(721)에 궁인(宮人)로서는 최고 관위인 정3위에 올랐다. 같은 해 원명천황이 위독하자 출가하였으며 천평(天平) 5년(733)에 죽었다. 천평보자(天平寶字) 4년(760)에 정1위 대부인(大夫人)에 추증되었다.
원명천황과의 밀접한 관계를 통하여 등원불비등이 정치적 권력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만엽집』에는 신호(神護) 4년(727)에 광명자가 아들을 낳았을 때 삼천대가 지은 것으로 생각되는 현견양명부(縣犬養命婦)의 노래가 전하며, 법륭사(法隆寺)에는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불상으로 전해지는 아미타삼존상이 있다.
8. 중궁대부(中宮大夫) 좌위숙녜(佐爲宿禰)
미노왕과 삼천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이름은 좌위왕(佐爲王)이다. 천평(天平) 8년(736)에 형인 갈성왕과 함께 외가의 성인 귤숙녜라는 씨성을 칭하게 되었다(橘宿禰佐爲). 좌위가 중궁직(中宮職)의 장관인 중궁대부에 임관한 기사는 『속일본기』 등에 보이지 않으나, 천평 9년(737)에 중궁대부 겸 우병위솔(右兵衛率) 정4위하 귤숙녜좌위가 죽었다는 기사가 있으므로 죽을 당시에 중궁대부였음을 알 수 있다. 좌위의 딸인 성무천황(聖武天皇)의 부인(夫人) 고나가지(古那可智)에게는 천평승보(天平勝寶) 9년(757)에 광강조신(廣岡朝臣)이라는 성이 주어졌다.
9. 모루여왕(牟漏女王)
미노왕과 삼천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무루왕(無漏王)이라고도 표기하였다. 『법륭사류기자재장(法隆寺流記資財帳)』에 천평(天平) 8년(736)에 화형백동경(花形白銅鏡) 1면을 기진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등원방전(藤原房前)과 결혼하여 영수(永手)와 진순(眞楯)을낳았다.
10. 등원방전(藤原房前)
등원불비등(藤原不比等)의 둘째 아들(681~737)로 참의(參議) 민부경(民部卿) 등을 지냈으며, 사후에 정1위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추증되었다. 등원북가(藤原北家)의 시조이며 등원북경(藤原北卿)이라고도 하였다. 부인은 미노왕의 딸인 모루여왕(牟漏女王)이고 아들로는 등원영수(藤原永手, 714~771), 등원진순(藤原眞楯, 715~766), 등원어순(藤原御楯, ? ~764)이 있고, 딸로는 성무천황의 부인이 된 북전(北殿)이 있다. 혈연적으로 성무천황의 외삼촌이었으며, 조정 내에서도 원정천황(元正天皇) 사후에 내신(內臣)이 되어 성무천황을 보필하는 지위에 있었다.
11. 영수(永手)
등원방전(藤原房前)의 둘째 아들(714~771)로 중납언, 식부경, 대납언, 우대신, 좌대신 등을 지냈고, 천평보자(天平寶字) 8년(764) 혜미압승(惠美押勝)의 난 때 효겸천황(孝謙天皇) 측에서 활약하여 정3위 대납언(大納言)에 임명되었다. 도경(道鏡)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 태정관(太政官)의 선두에 있었다. 칭덕천황(稱德天皇)이 죽은 후 백벽왕(白壁王, 후의 光仁天皇)을 옹립하는 데 힘썼고 그 공로로 정1위에 서위되었으며, 사후에 태정대신에 추증되었다. 『공경보임』에 화동(和銅) 7년(714)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으며, 보귀(寶龜) 2년(771)에 58세로 죽었다. 『속일본기』에 실린 그의 훙전(薨傳)에서는 효겸천황 때 승려 도경(道鏡)이 권세를 떨칠 때 영수가 사직을 안정시킨 공이 많았다고 하였다.
12. 진순(眞楯)
등원방전(藤原房前)의 셋째 아들(715~766)로 원래 이름은 팔속(八束)이었다. 성무천황(聖武天皇)에게 그 재능을 인정받아 빠른 승진을 거듭하였으며, 천평(天平) 20년(748)에 참의(參議)에 올랐다. 등원중마려(藤原仲麻呂)의 난 때 효겸상황(孝謙上皇) 측에서 활약하여 정3위 수도대장(授刀大將)에 임명되었다. 『속일본기』 의 훙전에는 그의 도량이 넓고 깊다고 하였다. 대화수(大和守), 참의(參議), 대재수(大宰帥), 대납언(大納言), 식부경(式部卿) 등을 지냈으며, 천평신호(天平神護) 2년(766)에 52세로 죽었다.
13. 갈성왕(葛城王)
미노왕과 삼천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후의 귤숙녜제형(橘宿禰諸兄; 684~757)이다. 『공경보임』에는 천무(天武) 13년(684)에 태어났으며, 민달천황(敏達天皇)의 아들 난파왕(難波王)의 4세손이라고 하였다. ‘민달천황-난파왕-율외왕(栗隈王)-미노왕(美努王)-갈성왕’으로 이어지는 계보로 보아 갈성왕은 5세왕에 해당하여 황친(皇親)의 범위에 있었으나, 스스로 신하의 신분을 갖고자 하여 천평(天平) 8년(734)에 귤숙녜(橘宿禰)라는 씨성을 받았다. 다시 천평승보(天平勝寶) 2년(750)에는 조신(朝臣)이라는 성을 받았다. 최종 관직은 좌대신이었으며, 천평보자(天平寶字) 원년(757)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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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조신(橘朝臣; 다치바나노아소미) 자료번호 : ss.k_0001_0030_0060_0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