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신찬성씨록

등미진인(登美眞人; 도미노마히토)

등미진인(登美眞人; 도미노마히토)
 시호 용명(用明; 요우메이)의 황자 내목왕(來目王; 구메노미코)에서 나왔다. 『속일본기』와 합치한다.
 
 
【주석】
1. 등미진인(登美眞人)
등미(登美; 도미)라는 씨명은 『속일본기』 화동(和銅) 7년(714) 11월 무자조에 보이는 ‘등미향(登美鄕)’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다. 이곳은 율령제의 대화국(大和國) 첨하군(添下郡)에 속하는 곳이다. 현재 나량현(奈良縣) 생구시(生駒市) 북부에서 나량시(奈良市) 서단부에 해당하는 곳이다.
『속일본기』 연력(延曆) 10년(791) 7월 기묘조에 의하면, 소납언(少納言) 종5위하 정월왕(正月王)이 생전에 자신과 네 아들, 네 딸에게 등미진인 성을 사여해 달라고 요청하려고 하다가 죽었다. 정월왕의 사후에 환무천황(桓武天皇)이 정월왕의 아들 등진왕(藤津王) 등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들에게 등미진인 성을 사여하였다.
등미진인씨 일족으로는 등미진인등진 이외에 그의 아들 등미진인직명(登美眞人直名)이 『유취국사』에 보인다.
2. 시용명(諡用明)
좌백유청(佐伯有淸)은 『신찬성씨록』 완본에는 ‘시(諡)’ 자 앞에 ‘귤풍일천황(橘豐日天皇)’이라는 글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3. 내목왕(來目王)
구미왕(久米王; 구메노미코)라고도 표기한다.
『고사기』 용명천황단에서는 용명천황이 배다른 여동생 간인혈태부왕(間人穴太部王)과결혼하여 상궁지구호풍총이명(上宮之廐戶豐聰耳命)과 구미왕(久米王)을 낳았다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 용명천황 원년 정월 임자삭조에서는 혈수부간인황녀(穴穗部間人皇女)를 황후로 세웠는데, 그녀가 낳은 4남 1녀 중에서 첫째가 구호황자(廐戶皇子), 둘째가 내목황자(來目皇子)라고 적고 있다.
내목왕의 후손으로는 산촌왕(山村王)이 있었음을 『속일본기』 신호경운 원년(767) 11월계해조의 산촌왕 훙전을 통해 알 수 있다. 산촌왕은 치부경(治部卿)과 좌병위독(左兵衛督), 대화수(大和守), 참의를 역임하고 칭덕천황 대에 종3위의 관위까지 올라갔으며, 767년에 46세로 죽었다. 이 훙전에서 산촌왕이 용명천황의 황자 구미왕(久米王)의 후손이라고 적고 있다. 『공경보임(公卿補任)』 천평보자 8년(764) 「산촌왕」 조에서는 산촌왕이 양로 6년(722)생이므로 구미왕이 죽은 지 120년이 된다고 적고 있다.
4. 속일본기합(續日本紀合)
『속일본기』 연력 10년(791) 7월 기묘조에서 환무천황 조정의 정월왕의 아들 등진왕(藤津王) 등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들에게 등미진인 성을 사여한 것을 가리킨다.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등미진인(登美眞人; 도미노마히토) 자료번호 : ss.k_0001_0030_0010_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