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진인(三國眞人; 미쿠니노마히토)
삼국진인(三國眞人; 미쿠니노마히토)
시호 계체(繼體; 게이타이)의 황자 완자왕(椀子王; 마로코노미코)의 후손이다. 『일본서기』에 의거하여 부기하였다.
【주석】
1. 삼국진인(三國眞人)
삼국(三國; 미쿠니)이라는 씨명은 지명에서 유래한다. 『일본서기』 계체(繼體) 즉위 전기에 ‘삼국판중정(三國坂中井)’이 보인다. 이곳은 율령제 시대에는 월전국(越前國) 판정군(坂井郡)이 된다. 지금의 복정현(福井縣) 판정군(坂井郡) 삼국정(三國町)이다.
『일본서기』 천무(天武) 13년(684) 10월 기묘삭조에서 진인 성을 사성한 13씨 중에 삼국공이 보이므로 삼국진인의 옛 성은 공(公)임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 계체 원년 3월 계유조에서는 계체천황의 비 삼미군견목위(三尾君堅木楲)의 딸 왜원(倭媛)이 낳은 둘째 아들 완자황자(椀子皇子)가 삼국공의 조상이라고 적고 있다.
한편 『고사기』 응신천황단에서는 응신천황의 아들 약야모이오왕(若野毛二俁王; 와카누케후타마타노오호키미)가 식장진약중비매의 여동생 백사목이려변(百師木伊呂變; 모모시키이로베)과 결혼하여 낳은 의부부저왕(意富富杼王; 오호호토노오호키미)의 후손으로 삼국군(三國君)을 들고 있다.
『선대구사본기(先代舊事本紀)』 의 신황본기(神皇本紀) 응신(應神)천황조에서는 응신천황의 손자 약소사이오황자왕(若沼笥二俁皇子王; 와카누케후타마타노미코노미코토)이 삼국군 등의 조상이라고 적고 있으나, 같은 책의 제황본기(帝皇本紀) 계체천황조에서는 계체천황의 아들 완자황자가 삼국공의 조상이라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삼국공씨 일족으로 삼국공마려(三國公麻呂)가 보인다. 그는 대화(大化) 5년(649) 3월 무진조에서 창산전대신(倉山田大臣)이 중대형황자를 죽이려 하였다고 소아신일향(蘇我臣日向)이 밀고하자 효덕천황이 이를 확인하기 위해 파견한 사람 중에 보인다. 그는 백치 원년 2월 갑신조에서는 백치 발견을 축하하는 의식에서 백치가 탄 가마를 들고 가는 네 명 중의 한 명으로 등장하였다. 효덕 조정의 중신 중 한 명이었다.
삼국진인씨 일족으로는 『일본서기』 천무 14년(685) 9월 신유조에 삼국진인우족(三國眞人友足)이 보인다. 천무천황이 대안전(大安殿)에 나가 왕경(王卿)들과 함께 정원에서 박희(博戱)를 관람하고 상하 의복을 사여한 10명 중의 한 명으로 등장하였다.
『속일본기』에는 삼국진인인족(三國眞人人足), 삼국진인대포(三國眞人大浦), 삼국진인광정(三國眞人廣庭), 삼국진인천국(三國眞人千國), 삼국진인백족(三國眞人百足), 삼국진인광견(三國眞人廣見) 등의 관위 승진 기사가 보여 이들이 중앙의 율령 관인으로 활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문서에서는 천평(天平) 3년(731) 2월 26일자 「월전국정세장(越前國正稅帳)」(『대일본고문서』 1-428)에서 판정군의 대령(大領)으로 삼국진인모(三國眞人某)라는 이름이 보이며 보귀(寶龜) 11년(780) 4월 3일자 「월전국판정군사해(越前國坂井郡司解)」(『대일본고문서』 6-603)에서는 대령 삼국진인정승(三國眞人淨乘)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삼국진인씨 일족이 월전국 판정군에서도 재지 호족으로서 군사(郡司)를 역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三國; 미쿠니)이라는 씨명은 지명에서 유래한다. 『일본서기』 계체(繼體) 즉위 전기에 ‘삼국판중정(三國坂中井)’이 보인다. 이곳은 율령제 시대에는 월전국(越前國) 판정군(坂井郡)이 된다. 지금의 복정현(福井縣) 판정군(坂井郡) 삼국정(三國町)이다.
『일본서기』 천무(天武) 13년(684) 10월 기묘삭조에서 진인 성을 사성한 13씨 중에 삼국공이 보이므로 삼국진인의 옛 성은 공(公)임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 계체 원년 3월 계유조에서는 계체천황의 비 삼미군견목위(三尾君堅木楲)의 딸 왜원(倭媛)이 낳은 둘째 아들 완자황자(椀子皇子)가 삼국공의 조상이라고 적고 있다.
한편 『고사기』 응신천황단에서는 응신천황의 아들 약야모이오왕(若野毛二俁王; 와카누케후타마타노오호키미)가 식장진약중비매의 여동생 백사목이려변(百師木伊呂變; 모모시키이로베)과 결혼하여 낳은 의부부저왕(意富富杼王; 오호호토노오호키미)의 후손으로 삼국군(三國君)을 들고 있다.
『선대구사본기(先代舊事本紀)』 의 신황본기(神皇本紀) 응신(應神)천황조에서는 응신천황의 손자 약소사이오황자왕(若沼笥二俁皇子王; 와카누케후타마타노미코노미코토)이 삼국군 등의 조상이라고 적고 있으나, 같은 책의 제황본기(帝皇本紀) 계체천황조에서는 계체천황의 아들 완자황자가 삼국공의 조상이라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삼국공씨 일족으로 삼국공마려(三國公麻呂)가 보인다. 그는 대화(大化) 5년(649) 3월 무진조에서 창산전대신(倉山田大臣)이 중대형황자를 죽이려 하였다고 소아신일향(蘇我臣日向)이 밀고하자 효덕천황이 이를 확인하기 위해 파견한 사람 중에 보인다. 그는 백치 원년 2월 갑신조에서는 백치 발견을 축하하는 의식에서 백치가 탄 가마를 들고 가는 네 명 중의 한 명으로 등장하였다. 효덕 조정의 중신 중 한 명이었다.
삼국진인씨 일족으로는 『일본서기』 천무 14년(685) 9월 신유조에 삼국진인우족(三國眞人友足)이 보인다. 천무천황이 대안전(大安殿)에 나가 왕경(王卿)들과 함께 정원에서 박희(博戱)를 관람하고 상하 의복을 사여한 10명 중의 한 명으로 등장하였다.
『속일본기』에는 삼국진인인족(三國眞人人足), 삼국진인대포(三國眞人大浦), 삼국진인광정(三國眞人廣庭), 삼국진인천국(三國眞人千國), 삼국진인백족(三國眞人百足), 삼국진인광견(三國眞人廣見) 등의 관위 승진 기사가 보여 이들이 중앙의 율령 관인으로 활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문서에서는 천평(天平) 3년(731) 2월 26일자 「월전국정세장(越前國正稅帳)」(『대일본고문서』 1-428)에서 판정군의 대령(大領)으로 삼국진인모(三國眞人某)라는 이름이 보이며 보귀(寶龜) 11년(780) 4월 3일자 「월전국판정군사해(越前國坂井郡司解)」(『대일본고문서』 6-603)에서는 대령 삼국진인정승(三國眞人淨乘)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삼국진인씨 일족이 월전국 판정군에서도 재지 호족으로서 군사(郡司)를 역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시계체(諡繼體)
좌백유청(佐伯有淸)은 『신찬성씨록』 완본에는 ‘시(諡)’ 자 앞에 ‘남대적천황(男大迹天皇)’ 이라는 글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좌백유청(佐伯有淸)은 『신찬성씨록』 완본에는 ‘시(諡)’ 자 앞에 ‘남대적천황(男大迹天皇)’ 이라는 글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3. 완자왕(椀子王)
『일본서기』 계체(繼體) 원년 3월 계유조에 계체천황의 비 삼미군견목위(三尾君堅木楲)의 딸 왜원(倭媛)이 낳은 둘째 아들 완자황자(椀子皇子) 삼국공의 조상이라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 계체(繼體) 원년 3월 계유조에 계체천황의 비 삼미군견목위(三尾君堅木楲)의 딸 왜원(倭媛)이 낳은 둘째 아들 완자황자(椀子皇子) 삼국공의 조상이라고 적고 있다.
4. 의일본기부(依日本紀附)
『일본서기』 천무(天武) 13년(684) 10월 기묘삭조에서 진인 성을 사성한 13씨 중에 삼국공이 보이고, 『일본서기』 계체 원년 3월 계유조에서는 계체천황의 비 삼미군견목위(三尾君堅木楲)의 딸 왜원(倭媛)이 낳은 둘째 아들 완자황자(椀子皇子)가 삼국공의 조상이라고 적고 있는 것을 보고 황별에 삼국진인씨에 관한 내용을 넣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 천무(天武) 13년(684) 10월 기묘삭조에서 진인 성을 사성한 13씨 중에 삼국공이 보이고, 『일본서기』 계체 원년 3월 계유조에서는 계체천황의 비 삼미군견목위(三尾君堅木楲)의 딸 왜원(倭媛)이 낳은 둘째 아들 완자황자(椀子皇子)가 삼국공의 조상이라고 적고 있는 것을 보고 황별에 삼국진인씨에 관한 내용을 넣었다는 것이다.
* 『선대구사본기(先代舊事本紀)』
『구사기(舊事紀)』, 『구사본기(舊事本紀)』 로도 표기한다. 천지개벽부터 추고천황(推古天皇)까지 역사를 기술한 역사서이다. 전10권으로 신대(神代) 본기, 신기(神祇) 본기, 천신(天神) 본기, 지기(地祇) 본기,천손(天孫) 본기, 황손(皇孫) 본기, 천황(天皇) 본기, 신황(神皇) 본기, 제황(帝皇) 본기, 국조(國造) 본기로 구성되었다.
서문에서는 추고천황의 명을 받들어 성덕태자(聖德太子)와 소아마자(蘇我馬子) 등이 저술했다고 적고 있어서, 이를 근거로 평안(平安) 중기에서부터 강호(江戶) 중기까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으로,『고사기』와 『일본서기』 보다 더 중시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강호 시대 후기에 국학자(國學者) 다전의준(多田義俊)과 이세정장(伊勢貞丈) 등은 이 책에 807년에 저술된 『고어습유(古語拾遺)』에서 인용된 부분이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위서(僞書)로 보았다.
이 책은 『고어습유』에 인용된 부분이 보이는 점에서 대동(大同) 연간(806~810) 이후에 저술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서문에서 추고대에 이 책이 만들어진 것으로 적고 있는 것은 조작되었다.
그런데 『석일본기(釋日本紀)』에 인용된 승평(承平) 연간(931~938)의 일본기강연사기(日本紀講筵私記)에 처음 『선대구사본기』 가 보인다. 일본기강연사기에 의하면 승평 연간의 강의에서 박사(博士) 시전부공망(矢田部公望)은 자신의 스승 등원춘해(藤原春海)가 『고사기』 가 최초의 사서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면서 ‘상궁태자(上宮太子)가 편찬한 선대구사본기 10권’이 최초의 사서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선대구사본기』 는 대동 연간 이후 승평 연간 이전에 서술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저자는 물부씨(物部氏) 관련자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헤이안 시대 초기의 명법박사(明法博士)로 물부씨의 후예인 흥원민구(興原敏久, 788~849)가 유력시되고 있다. 천손 본기에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보이지 않는 물부씨의 오래된 전승이 보이며, 국조 본기도 오래된 자료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구사기(舊事紀)』, 『구사본기(舊事本紀)』 로도 표기한다. 천지개벽부터 추고천황(推古天皇)까지 역사를 기술한 역사서이다. 전10권으로 신대(神代) 본기, 신기(神祇) 본기, 천신(天神) 본기, 지기(地祇) 본기,천손(天孫) 본기, 황손(皇孫) 본기, 천황(天皇) 본기, 신황(神皇) 본기, 제황(帝皇) 본기, 국조(國造) 본기로 구성되었다.
서문에서는 추고천황의 명을 받들어 성덕태자(聖德太子)와 소아마자(蘇我馬子) 등이 저술했다고 적고 있어서, 이를 근거로 평안(平安) 중기에서부터 강호(江戶) 중기까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으로,『고사기』와 『일본서기』 보다 더 중시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강호 시대 후기에 국학자(國學者) 다전의준(多田義俊)과 이세정장(伊勢貞丈) 등은 이 책에 807년에 저술된 『고어습유(古語拾遺)』에서 인용된 부분이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위서(僞書)로 보았다.
이 책은 『고어습유』에 인용된 부분이 보이는 점에서 대동(大同) 연간(806~810) 이후에 저술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서문에서 추고대에 이 책이 만들어진 것으로 적고 있는 것은 조작되었다.
그런데 『석일본기(釋日本紀)』에 인용된 승평(承平) 연간(931~938)의 일본기강연사기(日本紀講筵私記)에 처음 『선대구사본기』 가 보인다. 일본기강연사기에 의하면 승평 연간의 강의에서 박사(博士) 시전부공망(矢田部公望)은 자신의 스승 등원춘해(藤原春海)가 『고사기』 가 최초의 사서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면서 ‘상궁태자(上宮太子)가 편찬한 선대구사본기 10권’이 최초의 사서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선대구사본기』 는 대동 연간 이후 승평 연간 이전에 서술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저자는 물부씨(物部氏) 관련자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헤이안 시대 초기의 명법박사(明法博士)로 물부씨의 후예인 흥원민구(興原敏久, 788~849)가 유력시되고 있다. 천손 본기에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보이지 않는 물부씨의 오래된 전승이 보이며, 국조 본기도 오래된 자료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