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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전해 준 우리문화

한민족의 일본 이동과 교류

한민족이 일본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시기는 멀리 기원전 7-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 중에서도 대부분의 이주는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5-7세기 사이에 이루어졌다. 기원전 3세기는 일본의 야요이(弥生時代)시대 전반기이고 한반도에서는 삼한시대 초기에 해당한다. 고대에 일본으로 이동한 외래 민족을 일본에서는 귀화인(歸化人)이라고 불렀다. 여기에는 중국과 다른 지역에서 건너간 사람들도 일부 포함되나 귀화인 중에는 한민족이 주를 이루었다. 일본에서 사용되는 ‘귀화’라는 용어는 일본의 지배자, 즉 왕을 흠모한다는 왕화(王化)사상을 담고 있어 외래 민족을 멸시하고 일본인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황국사관(皇國史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귀화인보다 도래인(渡來人)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반도도래인이라는 용어가 적합하다는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등장했으며 현재에는 도래인이라는 표기가 널리 쓰이고 있다.
일본으로 건너간 한민족은 당시 선진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고대 일본의 생산력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일찍이 벼 농법이 한민족에 의해 전수된 것을 시작으로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 아메노히보코)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천일창 일행과 신라 도래인 하타(秦)씨족이 제철, 농업, 관개시설 확충 및 도기 제작 등 산업 개발을 주도했고 왕인(王仁)과 백제 왕족 후손들이 학문과 군사, 관료 분야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주 001
각주 001)
권태명, 『한민족이 주도한 고대 일본문화』, 시대정신,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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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사람들이 처음에 어떻게 오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약 7,000여 년 전부터 양 지역 간의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서 왕래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마도에서 불과 53km 떨어진 부산의 동삼동·조도(朝島) 패총위치과 울산 서생포위치 등에서 발견되는 일본의 죠몬(繩文) 토기 조각과 흑요석 등과 대마도위치나 큐슈 북부와 서부 지역에서 발견되는 한반도의 융기문 토기, 빗살무늬 토기, 결합식 낚싯바늘 등이 근거가 된다. 특히 소바타식(曾畑式) 토기는 한반도 빗살무늬 토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다.주 002
각주 002)
요시노 마코토, 『동아시아 속의 한일 2천년사』, 책과 함께,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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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박사 묘_일본 오사카부 히라가타시
왕인박사 묘 입구_일본 오사카부 히라가타시
왕인박사 묘 전경_일본 오사카부 히라가타시
왕인박사 전시관_전라북도 영암군
왕인박사 묘비(복원품)_전라북도 영암군
왕인박사상_전라북도 영암군
왕인박사 관련 유적(성천)_전라북도 영암군
왕인박사 추정도_전라북도 영암군
왕인학당_전라북도 영암군
왕인석상(모형)_전라북도 영암군
천인천자문비석_전라북도 영암군
일본 내 왕인박사 유적지도_전라북도 영암군

  • 각주 001)
    권태명, 『한민족이 주도한 고대 일본문화』, 시대정신, 2012. 바로가기
  • 각주 002)
    요시노 마코토, 『동아시아 속의 한일 2천년사』, 책과 함께, 2004.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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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일본 이동과 교류 자료번호 : iskj.d_0002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