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東夷)의 역사와 특성
「왕제(王制)」주 001
번역주 001)
에 이르기를, “동방은 이(夷)주 002 「王制」: 『禮記』의 篇名이다. 여기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사방의 외민족인 東夷·西戎·南蠻·北狄을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방은 夷라 하는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문신을 하며, 불로 음식을 지어먹지 않는다. 남방은 蠻이라 하는데, 이마에 문신을 새기고 다리를 엇갈리게 하고 다니며, 불로 음식을 지어먹지 않는다. 서방은 戎이라 하는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가죽으로 옷을 지으며, 쌀밥을 먹지 않는다. 북방은 狄이라 하는데, 짐승의 깃과 털로 옷을 짓고 동굴에서 살며, 쌀밥을 먹지 않는다(東方曰夷, 被髮文身, 有不火食者矣. 南方曰蠻, 雕題交趾, 有不火食者矣. 西方曰戎, 被髮衣皮, 有不粒食者矣. 北方曰狄, 衣羽毛穴居, 有不粒食者矣).” 이와 같은 四夷에 관한 「王制」편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중국인들은 중국은 문명국가이고, 외민족들은 야만적이라는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번역주 002)
라 한다.”고 하였다. 이(夷)는 뿌리이니, [이(夷)가] 어질고도 살리기를 좋아하는 것이 [마치] 만물이 땅에 뿌리를 내려 자라나오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다는] 말이다주 003 夷: 商代의 甲骨文에 人方·夷方 등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중국의 동방에 거주하던 종족으로 보인다. ‘夷’는 문자상으로 보아도 ‘東方’, ‘활을 맨 大人’, ‘仁’ 등의 뜻이 있다. 이것은 『說文解字』의 “夷, 東方之人, 从大从弓.” 및 “東方从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이라는 기록과 『說文通訓定聲』의 “夷, 字亦作正, 與古文仁同.”이라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秦·漢代에는 東夷·西戎·南蠻·北狄의 구별이 생기면서 夷는 동방을 대표하는 종족이 되었다.
이러한 ‘東夷’에 대해서, 원래 중국의 서북부에 거주하던 동이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한 갈래는 산동반도 쪽으로 들어가고, 다른 한 갈래는 다시 동진하여 요동 지방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논설이 있다(金庠基, 1974). 이러한 견해에 대해 산동 지역의 동이와 한반도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했던 동이를 동일한 선상으로 보았던 인식에는 『후한서』, 「동이전」의 序에서 양자를 동일 계열 집단으로 기재한 사실에 근거한다고 하면서, 이는 역사적 오류로 파악하고 있다(李成珪, 1991). 先秦時期 산동 지역에 거주했던 동이와 漢代 이후 만주~한반도~일본열도에 거주하던 동이가 글자상의 일치성 외에 양자가 동일 집단이었다는 근거는 없다.
이러한 ‘東夷’에 대해서, 원래 중국의 서북부에 거주하던 동이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한 갈래는 산동반도 쪽으로 들어가고, 다른 한 갈래는 다시 동진하여 요동 지방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논설이 있다(金庠基, 1974). 이러한 견해에 대해 산동 지역의 동이와 한반도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했던 동이를 동일한 선상으로 보았던 인식에는 『후한서』, 「동이전」의 序에서 양자를 동일 계열 집단으로 기재한 사실에 근거한다고 하면서, 이는 역사적 오류로 파악하고 있다(李成珪, 1991). 先秦時期 산동 지역에 거주했던 동이와 漢代 이후 만주~한반도~일본열도에 거주하던 동이가 글자상의 일치성 외에 양자가 동일 집단이었다는 근거는 없다.
번역주 003)
. 그러므로 [이(夷)의] 천성이 유순하고, 도리로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군자국과 불사(不死)의 나라라는 [이름이] 있기에 이르렀다주 004 ‘柢’: ‘柢’에 대해서 淸代 경학가인 惠棟은 『風俗通』에서 ‘觝’로 기재했다고 한다(『後漢書集解』: 惠棟曰, 風俗通作觝. 又風俗通云, 萬物觝觸地而出). 『風俗通』이라는 문헌은 중국 後漢 말의 應劭가 편찬한 것으로 『風俗通義』이라고도 한다. 唐나라 이전의 목록에는 30권으로 되어 있었으나, 宋나라 이후 10권으로 전해져 왔다. 또 원본에는 「皇覇」·「正失」·「愆禮」·「過譽」·「十反」· 「聲音」·「窮通」·「祀典」·「怪神」·「山澤」·「姓氏」의 11편이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姓氏」편이 빠졌다. 각 편은 몇 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각 항목을 해설하고 있는데, 모두 당시 일반인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으려고 사물을 고증한 것이다(『後漢書集解』).
原註 이 내용이 『風俗通』에 보인다. 集解: 惠棟은 “『風俗通』에서는 ‘觝’으로 기재하였다. 또 『風俗通』에서는 ‘萬物이 땅에 닿아서 나온다.’고 하였다.”라고 말하였다.
原註 이 내용이 『風俗通』에 보인다. 集解: 惠棟은 “『風俗通』에서는 ‘觝’으로 기재하였다. 또 『風俗通』에서는 ‘萬物이 땅에 닿아서 나온다.’고 하였다.”라고 말하였다.
번역주 004)
. 이(夷)에는 아홉 종류가 있는데주 005 君子·不死之國: 『山海經』의 「海外東經」편에 있는 내용인데, 다음과 같다. “君子國은 그[奢比國] 북쪽에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며 짐승을 잡아먹는다. 두 마리의 큰 호랑이를 옆에 놓고 부린다. 그 나라 사람들은 사양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다. 薰華草가 있는데, 아침에 나서 저녁에 시든다. 일설에는 肝楡尸의 북쪽에 있다고도 한다(君子國在其北, 衣冠帶劒食獸, 使二大虎在旁. 其人好讓不爭. 有薰華草朝生夕死, 一曰在肝楡之尸北).” 그리고 『山海經』, 「海外南經」편에는 “죽지 않는 사람이 그(交脛國) 동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몸빛이 검으며, 장수를 누려 죽지 않는다. 일설에는 穿禫國東의 동쪽에 있다고 한다(不死民, 在其東(交脛國東), 其爲人黑色, 壽不死. 一曰在穿禫國東).”라고 하였다.
한편 『說文解字』에서 “동방은 대의를 따르니, 大人이라 한다. 夷의 풍속은 인자한데, 인자한 사람은 오래살기에 ‘君子國·不死之國’이란 (말이 있게) 되었다(東方从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고 하였고, 『括地圖』에서는 “君子國의 백성들은 사양하기를 좋아해서 군자국이 되었다(君子民好讓, 古爲君子國).”고 하였으며, 『外國圖』에서는 君子國을 “琅邪(山東省 臨沂 付近)에서 삼만 리 떨어진 곳이다(去琅邪三萬里).”고 하였다(『山海經』; 『說文解字』).
原註 『山海經』에서 “君子國에서는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며, 짐승을 잡아먹고, 두 마리의 무늬 있는 범을 곁에 두고 부린다.”고 하였다. 『外國圖』에서는 “琅邪와는 3만 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또 『山海經』에서는 “‘죽지 않는 사람(不死人)’이 交脛의 동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몸빛이 검고, 장수를 누려 죽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모두가 동방에 있다. 集解: 惠棟은 말하길, 『括地圖』에서 “君子國의 백성들은 사양하기를 좋아해서 君子國이 되었다.”고 하였다. 『說文』에서 “東夷는 대의를 따르는 大人이다. 夷의 풍속은 인자한데, 인자한 사람은 오래살기에 ‘君子國·不死之國’이란 [말이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한편 『說文解字』에서 “동방은 대의를 따르니, 大人이라 한다. 夷의 풍속은 인자한데, 인자한 사람은 오래살기에 ‘君子國·不死之國’이란 (말이 있게) 되었다(東方从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고 하였고, 『括地圖』에서는 “君子國의 백성들은 사양하기를 좋아해서 군자국이 되었다(君子民好讓, 古爲君子國).”고 하였으며, 『外國圖』에서는 君子國을 “琅邪(山東省 臨沂 付近)에서 삼만 리 떨어진 곳이다(去琅邪三萬里).”고 하였다(『山海經』; 『說文解字』).
原註 『山海經』에서 “君子國에서는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며, 짐승을 잡아먹고, 두 마리의 무늬 있는 범을 곁에 두고 부린다.”고 하였다. 『外國圖』에서는 “琅邪와는 3만 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또 『山海經』에서는 “‘죽지 않는 사람(不死人)’이 交脛의 동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몸빛이 검고, 장수를 누려 죽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모두가 동방에 있다. 集解: 惠棟은 말하길, 『括地圖』에서 “君子國의 백성들은 사양하기를 좋아해서 君子國이 되었다.”고 하였다. 『說文』에서 “東夷는 대의를 따르는 大人이다. 夷의 풍속은 인자한데, 인자한 사람은 오래살기에 ‘君子國·不死之國’이란 [말이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번역주 005)
, 견이주 006·우이주 007·방이주 008·황이주 009·백이·적이·현이·풍이·양이를 말한다주 010 九夷: 東夷의 아홉 종류를 九夷라고 하는데, 본문에 나오는 九夷 중 일부는 존재 여부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九夷의 구분에는 본문에서 열거한 방법 이외에, 『論語疏』와 『爾雅』, 「釋地」의 ‘玄菟·樂浪·高麗·滿飾·鳧更·索家·東屠·倭人·天鄙’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九夷의 九는 多數의 의미로 해석되며, 후인이 이 九의 數를 맞추기 위하여 畎夷·于夷·方夷 등 여러 夷族 명칭을 들여놓았는데, 이는 일종의 附會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다(金庠基, 1974).
原註 『竹書紀年』에서는 “后芬發 즉위 3년에 九夷가 왔다.”고 하였다.
原註 『竹書紀年』에서는 “后芬發 즉위 3년에 九夷가 왔다.”고 하였다.
번역주 010)
. 그런 까닭에 공자는 구이(九夷)[의 땅]에 거처하고 싶어 하였다주 011 畎夷 … 陽夷: 이 밖에 『竹書紀年』·『逸周書』·『呂氏春秋』·『史記』·『漢書』 등의 문헌에 畎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에 관한 여러 기록들이 있다.
“帝泄 21년에 畎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에게 명하였다(后泄二十一年, 命畎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竹書紀年』 卷上 帝泄); “帝發 원년 乙酉일에 즉위하였다. 여러 夷들이 왕궁에 손님으로 왔다. 다시 거느리던 자들을 上池에 모이게 하였다(元年乙酉, 帝卽位. 諸夷賓于王門, 再保墉會于上池).”(『竹書紀年』 卷上 帝發); “仲丁 6년에 藍夷를 정벌하였다(六年, 征藍夷).”(『竹書紀年』 卷上 仲丁); “良夷는 在子를 바쳤다. 在子의 몸은 幣의 모습이고, 얼굴은 사람 모습이다(良夷在子, 在子幣身人首).”(『逸周書』 卷第7 王會解 第59); “太公望은 東夷의 선비이고, 太公望은 河內 사람이다(太公望, 東夷之士也, 太公望, 河內人也).”(『呂氏春秋』 卷第14 孝行覽 第2 本味); “三苗가 수차례 난을 일으켰다. 이에 舜은 돌아와 帝(堯임금)에게 共工을 幽陵에 유배보내기를 청하여, 北狄을 변하게 하였다. 驩兜를 崇山으로 추방하여, 南蠻을 변하게 하였다. 三苗를 三危로 옮기어 西戎을 변하게 하였다. 鯀을 羽山에서 사형에 처하여 東夷를 변하게 하였다. 네 가지 죄로써 천하가 모두 복종하였다(三苗數爲亂. 於是舜歸而言於帝, 請流共工於幽陵, 以變北狄. 放驩兜於崇山, 以變南蠻. 遷三苗於三危, 以變西戎. 殛鯀於羽山, 以變東夷. 四辠而天下咸服).”(『史記』 卷1 五帝本紀 第1); “禹는 冀州에서부터 [치수사업을] 시작하였다. 冀州에서 먼저 壺口山(황하가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입구)을 다스렸고, 梁山과 岐山을 잘 다스렸다. [다시] 太原을 닦고, 太嶽山의 남쪽까지 이르렀다. 또 覃懷를 성공적으로 다스린 후, 漳河에 이르렀다. 이곳 冀州의 토질은 희고 부드러워서 세금의 등급으로 상급이었으나, 그 밭은 중급이었다. 常水와 衛水가 물길대로 흐르고, 大陸澤도 잘 다스렸다. 鳥夷의 공물은 가죽옷이었는데, [공물은] 碣石山을 끼고 바다로 들어왔다(禹行自冀州始. 冀州旣載壺口, 治梁及岐. 旣脩太原, 至于嶽陽. 覃懷致功, 至於衡漳. 其土白壤. 賦上上錯, 田中中, 常衛旣從, 大陸旣爲. 鳥夷皮服. 夾右碣石, 入于海).”(『史記』 卷2 夏本紀 第2); “成王이 이미 東夷를 정벌하니, 息愼이 와서 하례를 올렸다. 이에 왕이 榮伯으로 하여금 ‘賄息愼之命’을 짓게 하였다(成王旣伐東夷, 息愼來賀, 王賜榮伯, 作賄息愼之命).”(『史記』 卷4 周本紀 第4); “靈王 3년(기원전 538) 6월에 紂王이 黎山에서 會盟을 가졌는데, 東夷가 반란을 일으켰다(靈王三年六月, 紂爲黎山之會, 東夷叛之).”(『史記』 卷40 楚世家 第10); “元朔 원년(기원전 128) 가을에 東夷의 薉君 南閭 등 28만 명이 항복해 오니, 蒼海郡을 설치하였다(元朔元年秋, 東夷薉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漢書』 卷6 武帝紀 第6).
原註 『竹書紀年』에서는 “后泄(帝泄. 夏나라 10대 임금) 21년에 畎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에게 명을 내렸다. 后相(帝相. 夏나라 5대 임금) 즉위 2년에 黃夷를 정벌하였다. 7년에 于夷가 와서 복종하여 조공했다. 뒤에 少康이 즉위하자 方夷가 와서 손님으로 머물렀다.”고 하였다.
“帝泄 21년에 畎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에게 명하였다(后泄二十一年, 命畎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竹書紀年』 卷上 帝泄); “帝發 원년 乙酉일에 즉위하였다. 여러 夷들이 왕궁에 손님으로 왔다. 다시 거느리던 자들을 上池에 모이게 하였다(元年乙酉, 帝卽位. 諸夷賓于王門, 再保墉會于上池).”(『竹書紀年』 卷上 帝發); “仲丁 6년에 藍夷를 정벌하였다(六年, 征藍夷).”(『竹書紀年』 卷上 仲丁); “良夷는 在子를 바쳤다. 在子의 몸은 幣의 모습이고, 얼굴은 사람 모습이다(良夷在子, 在子幣身人首).”(『逸周書』 卷第7 王會解 第59); “太公望은 東夷의 선비이고, 太公望은 河內 사람이다(太公望, 東夷之士也, 太公望, 河內人也).”(『呂氏春秋』 卷第14 孝行覽 第2 本味); “三苗가 수차례 난을 일으켰다. 이에 舜은 돌아와 帝(堯임금)에게 共工을 幽陵에 유배보내기를 청하여, 北狄을 변하게 하였다. 驩兜를 崇山으로 추방하여, 南蠻을 변하게 하였다. 三苗를 三危로 옮기어 西戎을 변하게 하였다. 鯀을 羽山에서 사형에 처하여 東夷를 변하게 하였다. 네 가지 죄로써 천하가 모두 복종하였다(三苗數爲亂. 於是舜歸而言於帝, 請流共工於幽陵, 以變北狄. 放驩兜於崇山, 以變南蠻. 遷三苗於三危, 以變西戎. 殛鯀於羽山, 以變東夷. 四辠而天下咸服).”(『史記』 卷1 五帝本紀 第1); “禹는 冀州에서부터 [치수사업을] 시작하였다. 冀州에서 먼저 壺口山(황하가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입구)을 다스렸고, 梁山과 岐山을 잘 다스렸다. [다시] 太原을 닦고, 太嶽山의 남쪽까지 이르렀다. 또 覃懷를 성공적으로 다스린 후, 漳河에 이르렀다. 이곳 冀州의 토질은 희고 부드러워서 세금의 등급으로 상급이었으나, 그 밭은 중급이었다. 常水와 衛水가 물길대로 흐르고, 大陸澤도 잘 다스렸다. 鳥夷의 공물은 가죽옷이었는데, [공물은] 碣石山을 끼고 바다로 들어왔다(禹行自冀州始. 冀州旣載壺口, 治梁及岐. 旣脩太原, 至于嶽陽. 覃懷致功, 至於衡漳. 其土白壤. 賦上上錯, 田中中, 常衛旣從, 大陸旣爲. 鳥夷皮服. 夾右碣石, 入于海).”(『史記』 卷2 夏本紀 第2); “成王이 이미 東夷를 정벌하니, 息愼이 와서 하례를 올렸다. 이에 왕이 榮伯으로 하여금 ‘賄息愼之命’을 짓게 하였다(成王旣伐東夷, 息愼來賀, 王賜榮伯, 作賄息愼之命).”(『史記』 卷4 周本紀 第4); “靈王 3년(기원전 538) 6월에 紂王이 黎山에서 會盟을 가졌는데, 東夷가 반란을 일으켰다(靈王三年六月, 紂爲黎山之會, 東夷叛之).”(『史記』 卷40 楚世家 第10); “元朔 원년(기원전 128) 가을에 東夷의 薉君 南閭 등 28만 명이 항복해 오니, 蒼海郡을 설치하였다(元朔元年秋, 東夷薉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漢書』 卷6 武帝紀 第6).
原註 『竹書紀年』에서는 “后泄(帝泄. 夏나라 10대 임금) 21년에 畎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에게 명을 내렸다. 后相(帝相. 夏나라 5대 임금) 즉위 2년에 黃夷를 정벌하였다. 7년에 于夷가 와서 복종하여 조공했다. 뒤에 少康이 즉위하자 方夷가 와서 손님으로 머물렀다.”고 하였다.
번역주 011)
. 故孔子欲居九夷也: 본문은 『論語』, 「子罕」편에 나오는데, 『漢書』, 「지리지」에 관련된 내용이 있다. “殷나라의 道가 약해지자 箕子는 朝鮮으로 갔다. 그 백성들에게 禮義, 田蠶과 베 짜는 것을 가르쳤다. 樂浪朝鮮 백성들은 ‘犯禁八條’가 있었다. 살인을 하면 죽여서 갚고, 상해를 입히면 곡식으로 배상하였으며, 도둑질을 하면 남자는 奴로 삼고 여자는 婢로 삼았다. 스스로 죄를 씻고 풀려나고자 하면 오십만을 주어야 한다. 비록 면제되어 평민이 되더라도 풍속에 오히려 차별을 하여 서로 혼인하려 하지 않아서, 그 백성들은 끝내 서로 도둑질하지 않고 문을 닫지도 않으며, 여인들은 정숙하고 신실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 그래서 孔子는 道가 행해지지 않음을 슬퍼하여, 뗏목을 바다에 띄워 九夷에 [가서] 살고자 하는 까닭이 있었으니, 그렇지 않겠는가?(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差之, 嫁取無所讐,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 不淫, … 故孔子悼道不行,設浮於海,欲居九夷,有以也夫)”(『論語』; 『漢書』).
原註 集解: 惠棟이 말하길, “『論語疏』에서 九夷를 元莬, 樂浪, 高麗, 滿飾, 鳧臾, 索家, 東屠, 倭人, 天鄙라고 한다.”고 하였다.
原註 集解: 惠棟이 말하길, “『論語疏』에서 九夷를 元莬, 樂浪, 高麗, 滿飾, 鳧臾, 索家, 東屠, 倭人, 天鄙라고 한다.”고 하였다.
옛날 요임금이 희중(羲仲)에게 명하여 우이에 살게 하였다. [이곳을] 양곡이라고도 하니주 012, [여기에서] 해가 솟아나오기 때문이다주 013. 하후씨주 014 태강주 015이 덕을 잃으니, 이인(夷人)이 비로소 배반하였다주 016. 소강주 017 이후로부터 대대로 왕의 교화를 입어, 마침내 왕궁을 방문하여 그들의 음악과 춤을 바쳤다주 018.
걸(桀)이 포학하니, 여러 이(夷)가 국내로 침입해왔다. 은나라의 탕왕이 역성혁명하여 [여러 이(夷)]를 정벌하고 평정하였다주 019. 중정주 020에 이르러 남이(藍夷)주 021가 침략을 시작하였다주 022. 이로부터 때로는 복종하고 때로는 배반하기를 300여 년을 하였다. 무을주 023
번역주 023)
에 이르러 [나라가] 쇠퇴하고 피폐해지자, 동이가 점차 강성해져 마침내 회수와 대산 지방으로 나누어 옮겨와, 점차 중국 내지에 들어와 살았다주 024. 武乙: 商나라의 25대 왕으로 庚丁의 아들이다. 이때 商나라는 亳을 떠나서 河北으로 천도하였다. 武乙에 대해서 그의 폭정을 짐작하게 하는 일화가 전해온다. 武乙은 가죽주머니에 피를 가득 채워 걸어놓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 밑을 걸어가게 하여 활로 가죽주머니를 쏘아서 피를 뒤집어쓰게 했다고 하는데, 이를 ‘射天’이라 한다. 일종의 자신의 무력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거나 하늘과 투쟁하는 모습을 과시하는 행동이다. 후대에는 포악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武乙은 어느날 사냥하러 나갔다가, 벼락을 맞고 죽어 아들 太丁이 즉위하였다(『史記』, 「殷本紀」).
무왕이 주(紂)를 멸하자주 025, 숙신이 와서 석노와 호시를 바쳤다주 026. 관숙과 채숙이 주(周)나라를 배반하고 또 이적을 불러 꾀어내니, 주공이 그들을 정벌하여 마침내 동이를 평정하였다주 027. 강왕주 028 시기에 숙신이 다시 왔다주 029
번역주 029)
. 뒤에 서이(徐夷)주 030가 참람하게 왕호를 칭하더니, 이에 구이(九夷)를 이끌고 종주(宗周)를 정벌하려 서쪽으로 황하에 이르렀다주 031. 康王之時, 肅愼復至: 『漢書』, 「武帝紀」에 “周나라의 成王과 康王 때는 형벌을 버려두고 사용하지 않았고, 덕이 鳥獸에까지 미쳐서 가르침이 四海에 통하였으니, 海外의 肅脊·北發·渠授·氐·羌이 찾아와서 복종하였다(周之成康, 刑錯不用, 德及鳥獸, 敎通四海, 海外肅脊北發渠授氐羌徠服).”라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숙신과 관련한 중국 고대 문헌에서 그들의 특산물인 楛矢와 石砮를 中國에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國語』, 「魯語」를 보면 옛날 周 武王이 商나라를 정복하고 九夷에 길이 통하자 百蠻으로 하여금 각각 그 禮物을 貢納케 하였는데, 이때에 肅愼이 楛矢·石砮를 바쳤다는 것이다(‘肅愼氏之矢’와 관련한 고사가 『國語』, 「魯語」편과 『竹書紀年』, 「武王 名發」과 『史記』, 「孔子世家」에도 있다). 西周 武王代에 肅愼이 楛矢와 石砮를 헌상한 이후 동방의 이민족이 헌상한 물품 중에 楛矢와 石砮가 자주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들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중원에 聖王이 나타나면 四夷가 來貢하였다는 中華思想에 의한 전승으로 보인다(오현수, 2013).
목왕은 그 기세가 바야흐로 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방의 제후들을 나누어[주고], 서언왕주 032
번역주 032)
에게 명하여 그들을 주관토록 했다주 033 徐偃王: 서언왕에 대한 기사는 『史記』·『韓非子』·『竹書紀年』 등에도 나타나지만, 『博物志』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설화는 “徐夷 군주의 궁인이 임신하여 알을 낳자, 상서롭지 못하다 여겨 물가에 버렸다. 한 홀어미에게 개가 있어 이름을 鵠倉이라 하였는데, 버려진 알을 얻어 입에 물고는 홀어미에게 돌아갔다. 홀어미가 알을 뒤집어 까며 따뜻하게 하니, 마침내 작은 아이가 되었다. 나면서부터 한쪽으로 기우는 까닭에 이름을 ‘偃’이라 하였다. 궁인이 이를 듣고서 다시 아이를 취하였다. 아이가 장성하니, 자리를 물려받아 徐夷의 군후가 되었다(徐君宮人, 娠而生卵, 以爲不祥, 棄之水濱, 獨狐母有犬, 名鵠倉, 獵於水濱, 得所棄卵, 啣以來歸, 獨狐母以爲異, 覆煖之, 遂 成兒, 生時正偃, 故以爲名, 徐君宮中間之, 乃更錄取, 長而仁智, 襲君徐國).”고 한다. 尸子에서는 “偃王은 근육이 있으나 뼈가 없었기 때문에 偃이라고 하였다.”라고도 한다. 徐偃王의 출생과 관련한 卵生說話와 弓矢에 대한 기록은 朱蒙說話와 그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東夷 사회에서 행해지던 동일한 설화의 원형에서 분파된 것(金庠基, 1974)으로 보기도 한다(나경수, 1995).
번역주 033)
. [서]언왕은 황지(潢池)의 동쪽에 거처하였는데, 땅이 사방 5백 리였고주 034 행실이 어질고 의로워, 육지에서 조공한 곳이 36국이었다. 原註 『博物志』에서 말하길, “徐夷 군후의 궁인이 임신하여 알을 낳자, 상서롭지 못하다 여겨 물가에 버렸다. 한 홀어미에게 개가 있어 이름을 鵠倉이라 하였는데, 버려진 알을 얻어 입에 물고는 홀어미에게 돌아갔다. 홀어미가 알을 뒤집어가며 따뜻하게 하니, 마침내 작은 아이가 되었다. 나면서부터 한쪽으로 기우는 까닭에 이름을 ‘偃’이라 하였다. 궁인이 이를 듣고서 다시 아이를 취하였다. 아이가 장성하니, 자리를 물려받아 徐夷의 군후가 되었다.”고 하였다. 尸子는 “偃王은 근육이 있으나, 뼈가 없었기 때문에 偃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集解: 惠棟이 말하길, “『竹書紀年』에서 이르길, ‘穆王 6년 봄에 徐偃王이 아들을 낳아 來朝하자, 命을 주어 伯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목왕이 뒤에 천리마 녹이가 끄는 수레를 얻었다주 035. 이에 조부(造父)주 036에게 [그 수레를] 몰고 초나라에 가서 서이(徐夷)를 정벌하라는 명을 전하게 하니, [조부(造父가)] [초(楚)나라에] 하루 만에 이르렀다주 037. 이때에 초나라 문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언국을 멸하였다주 038. [서]언왕은 어질었으나 권위가 없었고 다른 이와 싸우는 것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패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북쪽으로 팽성 무원현의 동산 아래까지 달아났는데, 백성으로 그를 따라간 자가 만여 명이었다. 이로 인하여 그 산을 이름하여 서산(徐山)이라 하였다주 039
번역주 039)
. 原註 武原縣의 옛 성은 지금의 泗州 下邳縣 북쪽에 있다. 徐山은 그 동쪽에 있다. 『博物志』에서 말하길, “徐王은 요사하고 기이하며 범상치가 않았다. 武原縣의 동쪽 십리에 가면 徐山의 석실 제사 터를 볼 수 있다. 偃王이 陳나라와 蔡나라 사이에 물길을 파서 통하게 하였다. 붉은 활과 붉은 화살을 얻으니, 자기가 하늘의 상서를 얻었다 하여 자칭 偃王이라 했다. 穆王이 이를 듣고서, 使者로 하여금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가서 하루 만에 이르러, 楚나라가 (偃國을) 정벌하게 하였다. 偃王은 성품이 인자하여 차마 싸우지 못하고, 楚나라에 패하여 북쪽으로 달아나니, (바로) 이산이다.”라고 하였다.
여왕이 무도하니, 회이가 들어와 침구하였다주 040
번역주 040)
. 왕이 괵중에게 명하여 그들을 정벌토록 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선왕이 다시 소공에게 명하여 정벌토록 하여 그들을 평정하였다주 041 王無道, 淮夷入寇: 西周의 10대 왕으로 이름은 胡라 하며, 夷王의 아들이다. 西周는 7대 懿王 이래로 국내외로 불안했는데, 厲王代에 이르러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이에 厲王은 彘(山西省 霍汾縣)로 도망가서 14년 뒤에 죽었는데, 그 14년간을 共和行政期라고 한다. 淮夷는 先秦時代 河南省 남부와 湖北省 및 安徽省 서부에 있던 민족이다. 夷王는 厲王 때에 이르러 西周의 세력이 쇠퇴함에 따라 伊水·洛水 등에 침입하여 西周와 크게 부딪혔다. 당시의 정황은 『後漢書』, 「西羌傳」(夷王衰弱, 荒服不朝, 乃命虢公, 率六師伐太原之戎.)과 『史記』, 「秦本紀」(周厲王無道, 諸侯或叛之, 西戎叛王室, 滅犬丘大駱之族.) 및 敔殷銘(夷王代)·虢仲盨銘(厲王代)에서 엿볼 수 있다.
번역주 041)
. 그리고 유왕이 음란[했던 시기]에 이르러서는, 사이(四夷)가 번갈아 침구하였다. 宣王: 西周의 11대 왕으로 이름은 靜이라 하며, 厲王의 아들이다. 그는 대외 정벌에 힘을 쏟고 西周를 중흥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詩經』, 「大雅」 〈江漢〉편의 淮夷, 〈常武〉편의 徐戎, 〈韓奕〉편의 북방 韓侯에 대한 이야기와 師衰殷銘·兮甲盤銘 등의 銘文에서 알 수 있다.
原註 『毛詩』의 序에서 “『詩經』의 江漢이라는 시는 尹吉甫가 宣王을 찬미한 것이다. (宣王은) 능히 쇠퇴해진 나라를 일으키고 난리를 평정하였다. 召公에게 명하여 淮夷를 평정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시에서 “江水와 漢水가 넘실거리니, 병사들 발걸음 씩씩하네. 안이한 것도 아니요, 노니는 것도 아니라네. 淮夷가 와서 (西周의 땅을) 탐하니, 왕이 召虎에게 명했네. 사방을 법식으로 다스려, 우리 강토를 밝혔네.”라고 하였다.
原註 『毛詩』의 序에서 “『詩經』의 江漢이라는 시는 尹吉甫가 宣王을 찬미한 것이다. (宣王은) 능히 쇠퇴해진 나라를 일으키고 난리를 평정하였다. 召公에게 명하여 淮夷를 평정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시에서 “江水와 漢水가 넘실거리니, 병사들 발걸음 씩씩하네. 안이한 것도 아니요, 노니는 것도 아니라네. 淮夷가 와서 (西周의 땅을) 탐하니, 왕이 召虎에게 명했네. 사방을 법식으로 다스려, 우리 강토를 밝혔네.”라고 하였다.
진나라가 육국을 병합하니, 회이와 사이(泗夷)가 모두 흩어져 민호가 되었다주 042
번역주 042)
. 진섭이 거병하고 천하가 붕궤되자, 연나라 사람 위만이 재난을 피해 조선으로 가서주 043 그 나라에서 왕 노릇하였다. [그로부터] 백여 년이 지나, [전한(前漢)] 무제가 [그 나라를] 멸하였다. 이때에 동이가 비로소 상경과 통하였다. 秦幷六國 …: 秦나라는 齊·楚·燕·韓·魏·趙나라를 차례로 격파하여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를 세웠다. 이때 秦始皇은 淮水와 泗水 유역의 東夷 집단을 漢族 사이에 분산시켜 民戶로 삼았고, 이때부터 중국 내지의 東夷 집단은 역사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후한서』의 찬자인 范曄은 淮水·泗水의 東夷가 秦·漢나라의 民戶로 편제된 사실을 기록한 뒤, 衛滿朝鮮의 흥망 등을 열거한 것은 중국 내지의 東夷 집단이 사라진 뒤로 東夷의 稱이 널리 滿洲·韓半島 일대에 분포된 종족에게로 옮겨 붙게 된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서영수 주편, 1987).
왕망이 제위를 찬탈하자, 맥인이 변경을 침구하였다주 044
번역주 044)
. 건무주 045 초에 [맥인이] 다시 와서 조공하였다. 당시 요동태수 제융주 046은 위세가 북방을 떨게 하였고, 명성이 바다 멀리까지 퍼졌다. 이에 예·맥·왜·한이 만 리 [밖]에서 조공을 바쳐와주 047 장제와 화제 이후로는 사신을 보내 빙문(聘問)하며 막힘없이 통하였다. 영초에 어려운 일이 많게 되자주 048, 비로소 침구해 들어왔다. 환제와 영제가 실정하니, 이로부터 점점 잦아지게 되었다. 王莽: 前漢代에 孝元皇后의 甥이다. 平帝를 弑害하고, 孺子 嬰을 옹립하여 정치의 실권을 장악한 후, 劉嬰을 폐하여 제위를 찬탈하여 新國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그 법령이 가혹하여 반란이 사방에서 일어났고, 대외정책도 실패하여 주변민족들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貊人이 변경에 침입했다는 기록은 본문 이외에도 『한서』, 「王莽傳」와 『후한서』·『삼국지』, 「고구려전」 등에 실려 있다.
原註 『前漢書』에서 “王莽이 고구려 병사를 징발하여 胡를 정벌하려는데, (고구려가) 행하고자 않으니, 郡縣이 강박하였다. (고구려의 병사) 모두가 도망하여 障塞를 빠져나와 법을 어기고 침구하였다. 州郡이 허물을 高句麗侯 騶에게 돌리니, 嚴尤가 貉人이 법을 어기고 騶가 거병하는 것을 따르지 않은 것이니, 이를 마땅히 위안해야 한다고 상주했다.”고 하였다.
原註 『前漢書』에서 “王莽이 고구려 병사를 징발하여 胡를 정벌하려는데, (고구려가) 행하고자 않으니, 郡縣이 강박하였다. (고구려의 병사) 모두가 도망하여 障塞를 빠져나와 법을 어기고 침구하였다. 州郡이 허물을 高句麗侯 騶에게 돌리니, 嚴尤가 貉人이 법을 어기고 騶가 거병하는 것을 따르지 않은 것이니, 이를 마땅히 위안해야 한다고 상주했다.”고 하였다.
[한나라가] 중흥한 이후로부터 사이(四夷)가 와서 복종하였다. 비록 때때로 끊어지고 배반하기도 했으나, 사자와 역인(譯人)은 끊이지 않았다주 049
번역주 049)
. 그래서 그 나라들의 습속과 풍토를 대략 기록할 수 있었다. 동이는 대략 모두 한 지역에 붙박이로 살며,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기를 좋아한다. 어떤 이들은 고깔을 쓰고 비단을 입고, 그릇은 조두를 쓴다. 이른바 중국이 예법을 잃으면 사이(四夷)에게서 구한다고 하는 것이다주 050. 무릇 만·이·융·적을 통틀어 사이(四夷)주 051라고 부르는 것은 공·후·백·자·남을 모두 제후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原註 集解: 劉攽이 말하길, “‘使者와 譯人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살펴보면, 郵驛은 中國에 있고, 四夷에는 통할 수 없는 것이다. 『前漢書』로부터 모두 ‘使譯’이라고 말하는데, ‘使’는 使者이고, ‘譯’은 譯人이다. 그러므로 합해서 ‘使譯’이라고 쓴다. 이 책속에는 ‘使譯’이라고 쓴 곳이 있어서 분명 후인이 알지 못해서 망령되이 고쳤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何焯이 말하길, “「西域傳」을 살펴보면, 논찬에서 ‘여러 郵驛을 要害地에 설치하고, [使者가] 命을 전하러 驛으로 달리니, 한동안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한즉, 西域은 모두 (명령을) 받은 자를 보호하니, 역시 郵驛이 있다. 단 四夷가 使者와 譯人을 갖출 수 없으니, 마땅히 『前漢書』와 같이 ‘譯’이라고 따를 뿐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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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1)
「王制」: 『禮記』의 篇名이다. 여기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사방의 외민족인 東夷·西戎·南蠻·北狄을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방은 夷라 하는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문신을 하며, 불로 음식을 지어먹지 않는다. 남방은 蠻이라 하는데, 이마에 문신을 새기고 다리를 엇갈리게 하고 다니며, 불로 음식을 지어먹지 않는다. 서방은 戎이라 하는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가죽으로 옷을 지으며, 쌀밥을 먹지 않는다. 북방은 狄이라 하는데, 짐승의 깃과 털로 옷을 짓고 동굴에서 살며, 쌀밥을 먹지 않는다(東方曰夷, 被髮文身, 有不火食者矣. 南方曰蠻, 雕題交趾, 有不火食者矣. 西方曰戎, 被髮衣皮, 有不粒食者矣. 北方曰狄, 衣羽毛穴居, 有不粒食者矣).” 이와 같은 四夷에 관한 「王制」편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중국인들은 중국은 문명국가이고, 외민족들은 야만적이라는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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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2)
夷: 商代의 甲骨文에 人方·夷方 등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중국의 동방에 거주하던 종족으로 보인다. ‘夷’는 문자상으로 보아도 ‘東方’, ‘활을 맨 大人’, ‘仁’ 등의 뜻이 있다. 이것은 『說文解字』의 “夷, 東方之人, 从大从弓.” 및 “東方从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이라는 기록과 『說文通訓定聲』의 “夷, 字亦作正, 與古文仁同.”이라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秦·漢代에는 東夷·西戎·南蠻·北狄의 구별이 생기면서 夷는 동방을 대표하는 종족이 되었다.
이러한 ‘東夷’에 대해서, 원래 중국의 서북부에 거주하던 동이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한 갈래는 산동반도 쪽으로 들어가고, 다른 한 갈래는 다시 동진하여 요동 지방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논설이 있다(金庠基, 1974). 이러한 견해에 대해 산동 지역의 동이와 한반도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했던 동이를 동일한 선상으로 보았던 인식에는 『후한서』, 「동이전」의 序에서 양자를 동일 계열 집단으로 기재한 사실에 근거한다고 하면서, 이는 역사적 오류로 파악하고 있다(李成珪, 1991). 先秦時期 산동 지역에 거주했던 동이와 漢代 이후 만주~한반도~일본열도에 거주하던 동이가 글자상의 일치성 외에 양자가 동일 집단이었다는 근거는 없다. -
번역주 003)
‘柢’: ‘柢’에 대해서 淸代 경학가인 惠棟은 『風俗通』에서 ‘觝’로 기재했다고 한다(『後漢書集解』: 惠棟曰, 風俗通作觝. 又風俗通云, 萬物觝觸地而出). 『風俗通』이라는 문헌은 중국 後漢 말의 應劭가 편찬한 것으로 『風俗通義』이라고도 한다. 唐나라 이전의 목록에는 30권으로 되어 있었으나, 宋나라 이후 10권으로 전해져 왔다. 또 원본에는 「皇覇」·「正失」·「愆禮」·「過譽」·「十反」· 「聲音」·「窮通」·「祀典」·「怪神」·「山澤」·「姓氏」의 11편이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姓氏」편이 빠졌다. 각 편은 몇 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각 항목을 해설하고 있는데, 모두 당시 일반인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으려고 사물을 고증한 것이다(『後漢書集解』).
原註 이 내용이 『風俗通』에 보인다. 集解: 惠棟은 “『風俗通』에서는 ‘觝’으로 기재하였다. 또 『風俗通』에서는 ‘萬物이 땅에 닿아서 나온다.’고 하였다.”라고 말하였다. -
번역주 004)
君子·不死之國: 『山海經』의 「海外東經」편에 있는 내용인데, 다음과 같다. “君子國은 그[奢比國] 북쪽에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며 짐승을 잡아먹는다. 두 마리의 큰 호랑이를 옆에 놓고 부린다. 그 나라 사람들은 사양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다. 薰華草가 있는데, 아침에 나서 저녁에 시든다. 일설에는 肝楡尸의 북쪽에 있다고도 한다(君子國在其北, 衣冠帶劒食獸, 使二大虎在旁. 其人好讓不爭. 有薰華草朝生夕死, 一曰在肝楡之尸北).” 그리고 『山海經』, 「海外南經」편에는 “죽지 않는 사람이 그(交脛國) 동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몸빛이 검으며, 장수를 누려 죽지 않는다. 일설에는 穿禫國東의 동쪽에 있다고 한다(不死民, 在其東(交脛國東), 其爲人黑色, 壽不死. 一曰在穿禫國東).”라고 하였다.
한편 『說文解字』에서 “동방은 대의를 따르니, 大人이라 한다. 夷의 풍속은 인자한데, 인자한 사람은 오래살기에 ‘君子國·不死之國’이란 (말이 있게) 되었다(東方从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고 하였고, 『括地圖』에서는 “君子國의 백성들은 사양하기를 좋아해서 군자국이 되었다(君子民好讓, 古爲君子國).”고 하였으며, 『外國圖』에서는 君子國을 “琅邪(山東省 臨沂 付近)에서 삼만 리 떨어진 곳이다(去琅邪三萬里).”고 하였다(『山海經』; 『說文解字』).
原註 『山海經』에서 “君子國에서는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며, 짐승을 잡아먹고, 두 마리의 무늬 있는 범을 곁에 두고 부린다.”고 하였다. 『外國圖』에서는 “琅邪와는 3만 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또 『山海經』에서는 “‘죽지 않는 사람(不死人)’이 交脛의 동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몸빛이 검고, 장수를 누려 죽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모두가 동방에 있다. 集解: 惠棟은 말하길, 『括地圖』에서 “君子國의 백성들은 사양하기를 좋아해서 君子國이 되었다.”고 하였다. 『說文』에서 “東夷는 대의를 따르는 大人이다. 夷의 풍속은 인자한데, 인자한 사람은 오래살기에 ‘君子國·不死之國’이란 [말이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 번역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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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10)
畎夷 … 陽夷: 이 밖에 『竹書紀年』·『逸周書』·『呂氏春秋』·『史記』·『漢書』 등의 문헌에 畎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에 관한 여러 기록들이 있다.
“帝泄 21년에 畎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에게 명하였다(后泄二十一年, 命畎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竹書紀年』 卷上 帝泄); “帝發 원년 乙酉일에 즉위하였다. 여러 夷들이 왕궁에 손님으로 왔다. 다시 거느리던 자들을 上池에 모이게 하였다(元年乙酉, 帝卽位. 諸夷賓于王門, 再保墉會于上池).”(『竹書紀年』 卷上 帝發); “仲丁 6년에 藍夷를 정벌하였다(六年, 征藍夷).”(『竹書紀年』 卷上 仲丁); “良夷는 在子를 바쳤다. 在子의 몸은 幣의 모습이고, 얼굴은 사람 모습이다(良夷在子, 在子幣身人首).”(『逸周書』 卷第7 王會解 第59); “太公望은 東夷의 선비이고, 太公望은 河內 사람이다(太公望, 東夷之士也, 太公望, 河內人也).”(『呂氏春秋』 卷第14 孝行覽 第2 本味); “三苗가 수차례 난을 일으켰다. 이에 舜은 돌아와 帝(堯임금)에게 共工을 幽陵에 유배보내기를 청하여, 北狄을 변하게 하였다. 驩兜를 崇山으로 추방하여, 南蠻을 변하게 하였다. 三苗를 三危로 옮기어 西戎을 변하게 하였다. 鯀을 羽山에서 사형에 처하여 東夷를 변하게 하였다. 네 가지 죄로써 천하가 모두 복종하였다(三苗數爲亂. 於是舜歸而言於帝, 請流共工於幽陵, 以變北狄. 放驩兜於崇山, 以變南蠻. 遷三苗於三危, 以變西戎. 殛鯀於羽山, 以變東夷. 四辠而天下咸服).”(『史記』 卷1 五帝本紀 第1); “禹는 冀州에서부터 [치수사업을] 시작하였다. 冀州에서 먼저 壺口山(황하가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입구)을 다스렸고, 梁山과 岐山을 잘 다스렸다. [다시] 太原을 닦고, 太嶽山의 남쪽까지 이르렀다. 또 覃懷를 성공적으로 다스린 후, 漳河에 이르렀다. 이곳 冀州의 토질은 희고 부드러워서 세금의 등급으로 상급이었으나, 그 밭은 중급이었다. 常水와 衛水가 물길대로 흐르고, 大陸澤도 잘 다스렸다. 鳥夷의 공물은 가죽옷이었는데, [공물은] 碣石山을 끼고 바다로 들어왔다(禹行自冀州始. 冀州旣載壺口, 治梁及岐. 旣脩太原, 至于嶽陽. 覃懷致功, 至於衡漳. 其土白壤. 賦上上錯, 田中中, 常衛旣從, 大陸旣爲. 鳥夷皮服. 夾右碣石, 入于海).”(『史記』 卷2 夏本紀 第2); “成王이 이미 東夷를 정벌하니, 息愼이 와서 하례를 올렸다. 이에 왕이 榮伯으로 하여금 ‘賄息愼之命’을 짓게 하였다(成王旣伐東夷, 息愼來賀, 王賜榮伯, 作賄息愼之命).”(『史記』 卷4 周本紀 第4); “靈王 3년(기원전 538) 6월에 紂王이 黎山에서 會盟을 가졌는데, 東夷가 반란을 일으켰다(靈王三年六月, 紂爲黎山之會, 東夷叛之).”(『史記』 卷40 楚世家 第10); “元朔 원년(기원전 128) 가을에 東夷의 薉君 南閭 등 28만 명이 항복해 오니, 蒼海郡을 설치하였다(元朔元年秋, 東夷薉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漢書』 卷6 武帝紀 第6).
原註 『竹書紀年』에서는 “后泄(帝泄. 夏나라 10대 임금) 21년에 畎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에게 명을 내렸다. 后相(帝相. 夏나라 5대 임금) 즉위 2년에 黃夷를 정벌하였다. 7년에 于夷가 와서 복종하여 조공했다. 뒤에 少康이 즉위하자 方夷가 와서 손님으로 머물렀다.”고 하였다. -
번역주 011)
故孔子欲居九夷也: 본문은 『論語』, 「子罕」편에 나오는데, 『漢書』, 「지리지」에 관련된 내용이 있다. “殷나라의 道가 약해지자 箕子는 朝鮮으로 갔다. 그 백성들에게 禮義, 田蠶과 베 짜는 것을 가르쳤다. 樂浪朝鮮 백성들은 ‘犯禁八條’가 있었다. 살인을 하면 죽여서 갚고, 상해를 입히면 곡식으로 배상하였으며, 도둑질을 하면 남자는 奴로 삼고 여자는 婢로 삼았다. 스스로 죄를 씻고 풀려나고자 하면 오십만을 주어야 한다. 비록 면제되어 평민이 되더라도 풍속에 오히려 차별을 하여 서로 혼인하려 하지 않아서, 그 백성들은 끝내 서로 도둑질하지 않고 문을 닫지도 않으며, 여인들은 정숙하고 신실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 그래서 孔子는 道가 행해지지 않음을 슬퍼하여, 뗏목을 바다에 띄워 九夷에 [가서] 살고자 하는 까닭이 있었으니, 그렇지 않겠는가?(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差之, 嫁取無所讐,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 不淫, … 故孔子悼道不行,設浮於海,欲居九夷,有以也夫)”(『論語』; 『漢書』).
原註 集解: 惠棟이 말하길, “『論語疏』에서 九夷를 元莬, 樂浪, 高麗, 滿飾, 鳧臾, 索家, 東屠, 倭人, 天鄙라고 한다.”고 하였다. - 번역주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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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乙: 商나라의 25대 왕으로 庚丁의 아들이다. 이때 商나라는 亳을 떠나서 河北으로 천도하였다. 武乙에 대해서 그의 폭정을 짐작하게 하는 일화가 전해온다. 武乙은 가죽주머니에 피를 가득 채워 걸어놓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 밑을 걸어가게 하여 활로 가죽주머니를 쏘아서 피를 뒤집어쓰게 했다고 하는데, 이를 ‘射天’이라 한다. 일종의 자신의 무력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거나 하늘과 투쟁하는 모습을 과시하는 행동이다. 후대에는 포악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武乙은 어느날 사냥하러 나갔다가, 벼락을 맞고 죽어 아들 太丁이 즉위하였다(『史記』, 「殷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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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王之時, 肅愼復至: 『漢書』, 「武帝紀」에 “周나라의 成王과 康王 때는 형벌을 버려두고 사용하지 않았고, 덕이 鳥獸에까지 미쳐서 가르침이 四海에 통하였으니, 海外의 肅脊·北發·渠授·氐·羌이 찾아와서 복종하였다(周之成康, 刑錯不用, 德及鳥獸, 敎通四海, 海外肅脊北發渠授氐羌徠服).”라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숙신과 관련한 중국 고대 문헌에서 그들의 특산물인 楛矢와 石砮를 中國에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國語』, 「魯語」를 보면 옛날 周 武王이 商나라를 정복하고 九夷에 길이 통하자 百蠻으로 하여금 각각 그 禮物을 貢納케 하였는데, 이때에 肅愼이 楛矢·石砮를 바쳤다는 것이다(‘肅愼氏之矢’와 관련한 고사가 『國語』, 「魯語」편과 『竹書紀年』, 「武王 名發」과 『史記』, 「孔子世家」에도 있다). 西周 武王代에 肅愼이 楛矢와 石砮를 헌상한 이후 동방의 이민족이 헌상한 물품 중에 楛矢와 石砮가 자주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들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중원에 聖王이 나타나면 四夷가 來貢하였다는 中華思想에 의한 전승으로 보인다(오현수,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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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주 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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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32)
徐偃王: 서언왕에 대한 기사는 『史記』·『韓非子』·『竹書紀年』 등에도 나타나지만, 『博物志』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설화는 “徐夷 군주의 궁인이 임신하여 알을 낳자, 상서롭지 못하다 여겨 물가에 버렸다. 한 홀어미에게 개가 있어 이름을 鵠倉이라 하였는데, 버려진 알을 얻어 입에 물고는 홀어미에게 돌아갔다. 홀어미가 알을 뒤집어 까며 따뜻하게 하니, 마침내 작은 아이가 되었다. 나면서부터 한쪽으로 기우는 까닭에 이름을 ‘偃’이라 하였다. 궁인이 이를 듣고서 다시 아이를 취하였다. 아이가 장성하니, 자리를 물려받아 徐夷의 군후가 되었다(徐君宮人, 娠而生卵, 以爲不祥, 棄之水濱, 獨狐母有犬, 名鵠倉, 獵於水濱, 得所棄卵, 啣以來歸, 獨狐母以爲異, 覆煖之, 遂 成兒, 生時正偃, 故以爲名, 徐君宮中間之, 乃更錄取, 長而仁智, 襲君徐國).”고 한다. 尸子에서는 “偃王은 근육이 있으나 뼈가 없었기 때문에 偃이라고 하였다.”라고도 한다. 徐偃王의 출생과 관련한 卵生說話와 弓矢에 대한 기록은 朱蒙說話와 그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東夷 사회에서 행해지던 동일한 설화의 원형에서 분파된 것(金庠基, 1974)으로 보기도 한다(나경수,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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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33)
原註 『博物志』에서 말하길, “徐夷 군후의 궁인이 임신하여 알을 낳자, 상서롭지 못하다 여겨 물가에 버렸다. 한 홀어미에게 개가 있어 이름을 鵠倉이라 하였는데, 버려진 알을 얻어 입에 물고는 홀어미에게 돌아갔다. 홀어미가 알을 뒤집어가며 따뜻하게 하니, 마침내 작은 아이가 되었다. 나면서부터 한쪽으로 기우는 까닭에 이름을 ‘偃’이라 하였다. 궁인이 이를 듣고서 다시 아이를 취하였다. 아이가 장성하니, 자리를 물려받아 徐夷의 군후가 되었다.”고 하였다. 尸子는 “偃王은 근육이 있으나, 뼈가 없었기 때문에 偃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集解: 惠棟이 말하길, “『竹書紀年』에서 이르길, ‘穆王 6년 봄에 徐偃王이 아들을 낳아 來朝하자, 命을 주어 伯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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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39)
原註 武原縣의 옛 성은 지금의 泗州 下邳縣 북쪽에 있다. 徐山은 그 동쪽에 있다. 『博物志』에서 말하길, “徐王은 요사하고 기이하며 범상치가 않았다. 武原縣의 동쪽 십리에 가면 徐山의 석실 제사 터를 볼 수 있다. 偃王이 陳나라와 蔡나라 사이에 물길을 파서 통하게 하였다. 붉은 활과 붉은 화살을 얻으니, 자기가 하늘의 상서를 얻었다 하여 자칭 偃王이라 했다. 穆王이 이를 듣고서, 使者로 하여금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가서 하루 만에 이르러, 楚나라가 (偃國을) 정벌하게 하였다. 偃王은 성품이 인자하여 차마 싸우지 못하고, 楚나라에 패하여 북쪽으로 달아나니, (바로) 이산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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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40)
王無道, 淮夷入寇: 西周의 10대 왕으로 이름은 胡라 하며, 夷王의 아들이다. 西周는 7대 懿王 이래로 국내외로 불안했는데, 厲王代에 이르러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이에 厲王은 彘(山西省 霍汾縣)로 도망가서 14년 뒤에 죽었는데, 그 14년간을 共和行政期라고 한다. 淮夷는 先秦時代 河南省 남부와 湖北省 및 安徽省 서부에 있던 민족이다. 夷王는 厲王 때에 이르러 西周의 세력이 쇠퇴함에 따라 伊水·洛水 등에 침입하여 西周와 크게 부딪혔다. 당시의 정황은 『後漢書』, 「西羌傳」(夷王衰弱, 荒服不朝, 乃命虢公, 率六師伐太原之戎.)과 『史記』, 「秦本紀」(周厲王無道, 諸侯或叛之, 西戎叛王室, 滅犬丘大駱之族.) 및 敔殷銘(夷王代)·虢仲盨銘(厲王代)에서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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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41)
宣王: 西周의 11대 왕으로 이름은 靜이라 하며, 厲王의 아들이다. 그는 대외 정벌에 힘을 쏟고 西周를 중흥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詩經』, 「大雅」 〈江漢〉편의 淮夷, 〈常武〉편의 徐戎, 〈韓奕〉편의 북방 韓侯에 대한 이야기와 師衰殷銘·兮甲盤銘 등의 銘文에서 알 수 있다.
原註 『毛詩』의 序에서 “『詩經』의 江漢이라는 시는 尹吉甫가 宣王을 찬미한 것이다. (宣王은) 능히 쇠퇴해진 나라를 일으키고 난리를 평정하였다. 召公에게 명하여 淮夷를 평정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시에서 “江水와 漢水가 넘실거리니, 병사들 발걸음 씩씩하네. 안이한 것도 아니요, 노니는 것도 아니라네. 淮夷가 와서 (西周의 땅을) 탐하니, 왕이 召虎에게 명했네. 사방을 법식으로 다스려, 우리 강토를 밝혔네.”라고 하였다. - 번역주 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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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44)
王莽: 前漢代에 孝元皇后의 甥이다. 平帝를 弑害하고, 孺子 嬰을 옹립하여 정치의 실권을 장악한 후, 劉嬰을 폐하여 제위를 찬탈하여 新國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그 법령이 가혹하여 반란이 사방에서 일어났고, 대외정책도 실패하여 주변민족들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貊人이 변경에 침입했다는 기록은 본문 이외에도 『한서』, 「王莽傳」와 『후한서』·『삼국지』, 「고구려전」 등에 실려 있다.
原註 『前漢書』에서 “王莽이 고구려 병사를 징발하여 胡를 정벌하려는데, (고구려가) 행하고자 않으니, 郡縣이 강박하였다. (고구려의 병사) 모두가 도망하여 障塞를 빠져나와 법을 어기고 침구하였다. 州郡이 허물을 高句麗侯 騶에게 돌리니, 嚴尤가 貉人이 법을 어기고 騶가 거병하는 것을 따르지 않은 것이니, 이를 마땅히 위안해야 한다고 상주했다.”고 하였다. - 번역주 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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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註 集解: 劉攽이 말하길, “‘使者와 譯人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살펴보면, 郵驛은 中國에 있고, 四夷에는 통할 수 없는 것이다. 『前漢書』로부터 모두 ‘使譯’이라고 말하는데, ‘使’는 使者이고, ‘譯’은 譯人이다. 그러므로 합해서 ‘使譯’이라고 쓴다. 이 책속에는 ‘使譯’이라고 쓴 곳이 있어서 분명 후인이 알지 못해서 망령되이 고쳤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何焯이 말하길, “「西域傳」을 살펴보면, 논찬에서 ‘여러 郵驛을 要害地에 설치하고, [使者가] 命을 전하러 驛으로 달리니, 한동안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한즉, 西域은 모두 (명령을) 받은 자를 보호하니, 역시 郵驛이 있다. 단 四夷가 使者와 譯人을 갖출 수 없으니, 마땅히 『前漢書』와 같이 ‘譯’이라고 따를 뿐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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