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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중심가고분군

中心街墓
  • 저필자
    표영관
  • 시대
    고구려/진(晉)
  • 원소장처
    요녕성 본계시 본계만족자치현 소시진 중심가(中國 遼寧省 本溪市 本溪滿族自治縣 小市鎭 中心街)
  • 시대
    고구려
  • 유형
    무덤
입지
본계현 소시진 장강로 중앙에 위치
유적개관
1986년에 2기의 석축묘를 정리하였는데, 연도, 현실, 감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목관의 흔적도 일부 있었다.
유물개관
토기, 철기, 관정 등
참고문헌
「北方文物」2001-2
해설
본계만족자치현의 현소재지(縣所在地)인 소시진의 중심가에서 발견된 고분이다.
1960년 중심반점(中心飯店) 호텔 지하에서 두 개의 고분을 확인하였으나, 발굴하지 못하였고, 1986년 호텔 개축 당시 구제발굴을 진행하였다.
두 고분의 모두 봉토석실분으로 보이며 20여m의 간격으로 나란히 위치한다. 유형은 약간 차이가 있으나, 동일시기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특히 1960년대에 소시진에서 많은 유물과 함께 발굴된 소위 소시진묘(小市晉墓)와 형식과 축조 방법이 매우 유사하였다. 당시 소시진묘는 중국학자들에 의해서 진(晉)의 고분이라 특정되었는데, 소시중심가고분이 발굴되면서 현재는 이 두 고분과 함께 고구려고분으로 보는 견해가 주도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묘실의 축조유형의 경우 집안(集安) 일대의 고구려 봉토석실묘에서 다수 보이는 형식이 확인되었다.
또 1호 무덤에서는 묘실의 동쪽과 서쪽 두 벽면에서 감실 흔적이 확인되었다. 이는 집안일대의 고구려 고분에서는 사례가 없으나, 평양일대와 한반도 내에서 발견된 고구려고분에서는 많은 수가 확인되는 유형이다. 이외에도 고구려 묘제로 볼 수 있는 특징들이 확인된다. 때문에 소시중심가 고분 및 기왕에 조사된 소시진묘는 모두 고구려인이 이 지역에 진출한 이후 기존문화와 결합하여 생긴 무덤양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기원전 38년 무렵 부여(夫餘)로부터 나온 주몽이 환인(桓仁) 일대에서 고구려를 개국한 이후부터 줄곧, 고구려는 요동의 진출을 두고 중국 세력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게 되었다.
고구려가 요하 유역까지 진출한 시기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385년에 고국양왕(故國壤王)이 현도군과 요동군을 함락한 바가 있으나 이는 5개월에 그친 일시적인 일이고, 대체로 광개토왕대에 들어 402년 숙군성 공격, 404년 요서 공격 등을 통해 고구려의 요하 유역진출이 가능해 진 것으로 파악된다. 또 본계 지역에 고구려 유적이 나타난다는 것은 곧, 고구려가 요동으로 진출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계는 고구려의 요동진출의 첫 교두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요동 진출로는, 반대로 중국세력의 침입로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일찍부터 고구려는 요동에서 국도(國都)에 이르는 주요 교통로에 방어시설을 설치하였는데, 이 지역의 유적들도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소시중심가고분도 404년 고구려의 요동 점유를 전후한 시점에 축조되었다고 보이며, 고구려의 치열한 요동확보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중요유적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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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가고분군 자료번호 : isea.d_0002_0010_0100_003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