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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환도산성/산성자산성

丸都山城/山城子山城
  • 저필자
    권순홍(성균관대학교 박물관)
  • 시대
    고구려
  • 위치
  • 원소장처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吉林省 通化市 集安市)
  • 시대
    고구려
  • 유형
규모
둘레: 6,951m
입지
통구하에 인접하여 위치, 계곡을 끼고 있음
유적개관
고구려 도성으로,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잘 남아있는 성벽은 높이가 5m 이상이며, 여장과 돌구멍이 확인되는 곳도 있다. 문지는 5곳이며, 남문은 옹성이다. 성 내부에는 궁전지, 요망대, 저수지 등이 있으며, 고분도 확인되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궁전지 등은 재정비되었다.
유물개관
와당, 귀면와, 기와, 찰갑편 , 동촉, 철솥, 토기, 자기 등
참고문헌
「丸都山城」, 2004
해설
집안시에서 북쪽으로 2.5km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석축 산성으로, 대체로 북쪽의 지세가 험준하며 남쪽에 경사가 완만한 평탄지와 산비탈이 형성되어 있는데, 가장 높은 북쪽 봉우리는 해발 652m이다. 동북서 삼면의 외곽은 자연절벽이나 가파른 산비탈이고, 통구하에 잇닿은 남쪽 일부구간도 수직절벽인 천혜의 요새지이다. 산성은 자연적인 지세를 따라 성벽을 축조하였는데, 동벽 1,716m, 북벽 1,009m, 서벽 2,440m, 남벽 1,786m로서 전체 둘레는 6,951m에 달한다. 평면은 불규칙한 타원형인데, 맞은편 산에서 둥그스름한 외형을 잘 관찰할 수 있다. 산성자산성은 국내성의 군사방어성이었던 환도성으로 비정되는데, 말 그대로 ‘둥근 모양의 도성’이라는 뜻이다. 국내 천도 직후에 쌓았다는 위나암성을 환도성과 동일시하여 산성자산성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명확한 논거는 없다.
1900년대부터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현황 조사가 이루어졌다. 1962년에는 길림성 박물관을 통해 현황 조사 및 실측 작업 등이 이루어졌고, 2001년부터 2003년까지는 길림성 문물고고연구소 등이 산성의 전체 측량을 실시하였으며 궁전지, 장대, 문지 등을 발굴조사 하였다. 2004년 국내성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대대적인 정비와 복원이 이루어졌는데, 최근에는 성벽 전체에 대한 대대적인 추가 정비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계곡을 끼고 축조된 포곡식산성으로, 동벽의 남단과 서벽의 북단 그리고 북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잔존 높이는 5m 이상이다. 내외벽은 쐐기형 돌을 사용하여 퇴물림 방식으로 가지런하게 겉쌓기를 하였다. 그리고 쐐기형 돌 안쪽에 길쭉한 북꼴돌을 끼워넣고 잔돌로 빈틈을 채워 견고하게 속쌓기를 하였다. 동벽 남단은 23단에 이르는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서벽 북단과 북벽 서단에도 높이 5m에 이르는 성벽이 남아 있다. 최근 북벽과 서벽에서 성벽을 보축한 흔적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남벽 동단을 포함한 일부 구간에서는 성가퀴가 확인되었는데, 성가퀴의 폭은 0.73~1m, 잔존 높이는 0.78~1.3m이다. 또한 성가퀴 안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돌구멍이 남아 있다. 이러한 돌구멍의 존재는 이미 1930년대부터 주목했는데, 지금까지 동벽 남단에서 20여개를 확인했으며 북벽과 서벽에서도 확인되었다. 돌구멍의 모양은 대체로 방형으로 길이 0.2~0.3m, 너비 0.15~0.25m, 깊이 0.3~0.8m 전후이다. 성문은 남문 3개, 동문 1개, 북문 2개, 서문 1개로 총 7개가 있다. 이 일대는 ‘凹’자형지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자연지세를 활용하여 남문 좌우의 성벽을 안쪽으로 네모나게 오므라들게 쌓고 그 중앙에 성문을 설치하여 장방형 옹성구조를 만들었다. 문길 좌우에 장방형 평대를 쌓았는데, 이 부근에 문루에 사용했을 기와와 와당편이 많이 흩어져 있다. 또한 평대 바깥에는 본래 자갈이 퇴적되어 있었는데, 옹성(甕城)의 흔적이다. 2003년 남문지 일대를 조사하여 성문과 성벽의 축조방식을 확인하고, 배수구 4개를 새롭게 발견했다.
동벽 남단의 성문은 1930년대까지도 잘 남아 있었다. 문길 좌우에 평대가 있고, 바깥쪽에는 성문을 감싼 옹성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동쪽 북문도 비교적 잘 남아 있었는데 바깥에 8~9개의 계단이 있었다고 한다. 2002년에 발견한 남벽 서단의 성문은 만보정고분군으로 나아가는 통로에 위치했다. 문길 동측의 성벽을 성문 앞을 감싸도록 꺾어서 쌓아 옹성구조를 만들었고, 문길에는 판석을 깔았다. 이때 발견한 서벽 남단의 성문은 길이 5.25m, 너비 3.6m인데, 옹성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궁전터는 동벽 안쪽 산기슭의 평지에 자립 잡고 있다. 외형상 남북으로 기다란 3층 계단식 평지이다. 1층과 3ㅤㅌㅡㅇ 대지의 폭이 비교적 좁은 반면, 2층 대지는 넓은 편이다. 이곳에서는 20세기 전반부터 크고 작은 초석 수십개가 확인되었고, 고구려 시기의 붉은 색 기와편을 비롯하여 인동문, 연화문, 수면문 등의 와당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에 일찍부터 궁전터로 주목을 받았다. 2001~2003년에 궁전터 전체를 발굴했다. 인공으로 조성한 4층 대지에서 11기의 건물지를 확인했다. 궁전터 전체를 담장으로 감쌌는데, 동벽 91m, 서벽 96m, 북벽 75m, 남벽 70m 등 둘레는 332m이다. 서벽에 문지가 2개 있고, 그 바깥에 깃발을 세웠던 시설이 있다. 부속시설까지 포함하면 남북길이 95.5m, 동서 너비 86.5m로서 약간불규칙한 장방형이다. 각 대지는 남서북쪽에 석축을 쌓아 조성했는데, 동측에는 인공 배수로를 설치했다. 1층과 2층 대지 사이에 광장이 있고, 그 북쪽에는 2칸짜리 방형 건물지가 있다. 각 대지마다 건물 1~3기를 조영했는데, 3층 대지에는 길이 84.5m인 건물 1기만 지었다. 2층 대지 남쪽에서 8각 건물지 2기가 확인되었는데, 특수한 용도로 추정된다. 각 건물지에서는 각종 건축자재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그 중에는 ‘소형(小兄)’이라는 고구려 관등명이 새겨진 기와편도 있었다. 다만 구들 등의 난방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두 차례나 불탔던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발굴자들은 246년 조위군, 342년 전연군의 환도성 함락과 연관시켜 파악했다. 그렇지만 5~6세기의 와당이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연대는 더욱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남문에서 북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높은 대지에 장대가 있다. 궁전터 앞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뒤쪽에는 병영터가 있다. 무너져 있던 장대를 2003년에 정밀 발굴했다. 그 결과 잘 다듬은 쐐기형 돌로 가지런하게 축조한 장방형 석대로 밝혀졌다. 석대 규모는 길이 6.7m, 너비 4.5m, 잔고 4.5m이다. 석대 북측에서 계단을 2개 발견했다. 석대 주변에 기와편과 와당이 산재한 것으로 보아 기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올라서면 남쪽으로 통구하 연안과 국내성 일대를 한눈에 관찰할 수 있다.
장대 북쪽 22.6m거리에 병영터로 보이는 건물지가 있다. 서쪽은 가파른 낭떠러지로 아래쪽으로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는데, 1930년대에는 돌로 쌓은 축대가 있었다. 본래 20여개의 초석이 있었는데, 2003년도에 조사한 결과 18개의 초석이 남북 16m, 동서 9m 범위에 3열로 분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1930년대 조사시에는 초석주변에 기와편이 무수히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대체로 장대를 지키던 병사들이 주둔했던 건물지로 추정된다. 그밖에 서북 모서리에 망대로 추정되는 시설이 있다.
산성자산성은 계곡을 감싸고 있어 수원이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서북 모서리와 동쪽 산기슭에 샘이 있는데, 이들은 작은 개울을 이루어 흐르다가 남문 근처에서 합류하여 통구하로 흘러든다. 장대 동남쪽에는 ‘음마지(飮馬池)’라 불리는 저수지가 있다. 북측에 석축 축대가 있었으나 많이 매몰되었다. 2003년에 발굴한 결과 돌로 쌓은 원각 방형의 저수지로 지표 아래 2m의 암석층에서 물이 솟아나고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남문지 일대에서 배수구와 더불어 우물이 확인되었다.
성 내부에는 고구려 시기의 고분도 다수 분포되어 있다. 2003년도 조사에서 모두 38기의 고분을 확인했다. 서쪽 산기슭과 궁전터 뒤쪽 산기슭에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다. 38기 가운데 30기는 무기단 적석총이고, 6기는 방단 적석총이다. 궁전터 서남측과 서북측에는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이 각기 1기씩 있다. 대부분 많이 파괴되었으며, 아직까지 별다른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종래 궁전터 앞에 있는 석실봉토분은 환도산성의 폐기시점과 관련하여 많은 주목을 받아 왔다. 한편 산성 바깥에는 통구하를 따라 산성하고분군이 열을 지어 조성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산상왕 2년(198)에 ‘환도성을 쌓았다’, 13년(209)에는 ‘환도로 이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동천왕 20년(246)에는 유자자사 무구검에 의한 공격으로, 21년(247)에는 ‘환도성이 파괴되자 도성으로 삼을 수 없어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묘사를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국원왕 12년(342)에는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았고, 가을에는 다시 환도성으로 옮겼으나, 전연의 모용황이 침입하여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궁실을 불태웠으며 환도성을 허물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전한다.
중국 학계에서는 환도산성의 소위 ‘궁전지’는 342년 환도성 함락과 더불어 소실 및 폐기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환도산성의 궁전지에서 출토된 연화문와당과 유사한 모티브의 와당이 6세기대로 편년되는 연천 호로고루에서 발견되었고, 동일한 형태의 양이부호 역시 5세기 중후반의 남한 내 여러 고구려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다. 또한 6세기대 문헌기록에서 여전히 환도성의 명칭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4세기대 권운문와당이나 구획선이 있는 연화문와당 대신 5세기 후반에 출현하는 구획선 없는 연화문와당이 다수 발견된다는 점에서 현재의 궁전지는 6세기대 즉, 평영 천도 이후에 조영된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반면 궁전지에서 출토된 와당을 5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광개토왕 17년(407)에 축조된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다만 성곽을 처음 축조한 연대는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20세기 초부터 많은 학자들이 산성자산성을 조사했고, 특히 2000~2003년 중국 정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성 안팎을 대대적으로 발굴했지만, 4세기 이전의 유물은 거의 출토되지 않았다. 산성자산성의 축조시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향후 더욱 정밀한 고고조사를 시행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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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도산성/산성자산성 자료번호 : isea.d_0002_0010_0060_0040_1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