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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자치통감장편

고려국왕 왕치(王治)가 거란 침약에 대한 출병 요청

  • 날짜
    994년 6월 (음)(淳化 5年(994) 6月 庚戌)
  • 출전
    卷36 淳化 5年(994) 6月 庚戌
고려국왕(高麗國王) 왕치(王治)[성종(成宗)]가 사신 원욱(元郁)주 001
각주 001)
元郁 : 생몰년 미상. 고려의 관인. 본문에 따라 994년에 송으로 사신을 다녀온 것 외에는 다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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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면서 거란(요)주 002
각주 002)
契丹 : 본래 중국 동북의 서남부를 흐르는 遼河 상류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몽골계의 한 부족으로 4세기 중엽부터 역사무대에 등장한다. 5세기 후반에는 고구려의 압박을 피해 遼西 지방으로 남하해 정착한다. 당대에는 松漠都督府가 이곳에 설치되면서 당의 치하에 들어간다. 907년에 당이 망하자 거란 8부를 통합한 耶律氏의 阿保機가 916년 스스로 天可汗이라 칭하고 上京臨潢府를 수도로 한 세습제의 거란국을 선포한다. 국호는 태조 아보기 때 ‘거란’으로 시작했으나, 아들 태종 때 遼로 개명하였다. 전성기(400만 인구에 160만 대군)인 6대 성종 때는 ‘대거란’으로 바꾸었다가 8대 도종 때는 다시 ‘요’로 복원한다. 거란은 以漢制漢의 전략을 쓰면서도 중국의 문물제도를 수용해 활용하고, 유목사회와 농경사회의 이중구조를 효율적으로 조화시켰으며, 변방무역도 활발하게 추진했다. 문화면에서는 표의문자인 大字와 표음문자인 小字를 창제하는 등 기발한 이념과 정책을 독창적으로 추구해 한때 중국 북방 일원을 장악했다. 서구에서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거란의 音寫인 ‘키타이’(Kitai), 또는 ‘캐세이’(Cathay)로 중국을 지칭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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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국경을 침략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황제가 이적(夷狄)들이 서로 공격하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고, 북변(北邊)이 겨우 평온해 졌으니 가볍게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고 하였다.

  • 각주 001)
    元郁 : 생몰년 미상. 고려의 관인. 본문에 따라 994년에 송으로 사신을 다녀온 것 외에는 다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바로가기
  • 각주 002)
    契丹 : 본래 중국 동북의 서남부를 흐르는 遼河 상류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몽골계의 한 부족으로 4세기 중엽부터 역사무대에 등장한다. 5세기 후반에는 고구려의 압박을 피해 遼西 지방으로 남하해 정착한다. 당대에는 松漠都督府가 이곳에 설치되면서 당의 치하에 들어간다. 907년에 당이 망하자 거란 8부를 통합한 耶律氏의 阿保機가 916년 스스로 天可汗이라 칭하고 上京臨潢府를 수도로 한 세습제의 거란국을 선포한다. 국호는 태조 아보기 때 ‘거란’으로 시작했으나, 아들 태종 때 遼로 개명하였다. 전성기(400만 인구에 160만 대군)인 6대 성종 때는 ‘대거란’으로 바꾸었다가 8대 도종 때는 다시 ‘요’로 복원한다. 거란은 以漢制漢의 전략을 쓰면서도 중국의 문물제도를 수용해 활용하고, 유목사회와 농경사회의 이중구조를 효율적으로 조화시켰으며, 변방무역도 활발하게 추진했다. 문화면에서는 표의문자인 大字와 표음문자인 小字를 창제하는 등 기발한 이념과 정책을 독창적으로 추구해 한때 중국 북방 일원을 장악했다. 서구에서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거란의 音寫인 ‘키타이’(Kitai), 또는 ‘캐세이’(Cathay)로 중국을 지칭하게 되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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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왕 왕치(王治)가 거란 침약에 대한 출병 요청 자료번호 : jt.k_0002_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