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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자치통감장편

태종(太宗)이 고려에 사신을 보냄

  • 날짜
    979년 1월 (음)(太平興國 4年(979) 正月 丁亥)
  • 출전
    卷20 太平興國 4年(979) 正月 丁亥
태자중윤(太子中允)주 001
각주 001)
太子中允 : 북송의 관직. 원래 당대에는 동궁의 관직으로 둔 태자중사인이 변한 것이다. 북송에는 처음에 문신의 階官(寄祿官)의 하나로 사용되어 品位는 正5品下였다. 신종의 원풍개혁으로 通直郎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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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사인원(直舍人院)주 002
각주 002)
直舍人院 : 북송의 관직. 황제의 詔令을 기초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것으로 지제고와 직사인원이 있었는데, 직사인원은 他官으로 翰林學士院에 임명받았으면서도 學士職을 제수받지 못한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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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張洎)주 003
각주 003)
張洎 : 934~997. 五代 宋初의 관인. 滁州 全椒(현재 안휘성 소속) 사람. 字는 偕仁이다.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고 고전에 통달했다. 南唐에서 進士가 되었고 관직이 中書舍人, 淸輝殿學士에 이르렀다. 남당 멸망 후 북송에 귀부하여 太子中允에 제수되었고, 태종 즉위 후 知相州, 知譯經院, 判大理寺, 翰林學士 등 관직을 역임했다. 문체가 유려하고 황제의 비위를 잘 맞추어 태종의 총애를 받았다. 至道 元年(995)에 參知政事가 되고, 다음해(996) 탕구트의 李繼遷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靈州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포기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그 다음해(997) 刑部侍郞으로 좌천되었다가 얼마 후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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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저작좌랑(著作佐郎)주 004
각주 004)
著作佐郎 : 북송의 관직. 曹魏 明帝 시기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역할은 國史를 다루는 著作郎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晋 元康 연간에 秘書省에 소속되어 인원은 8명이 배정되었으며 佐著作郎이라 칭하기도 했다. 北魏 시기에는 品秩이 從5品上이었다. 北齊는 2명을 두었고, 北周에는 著作中士 4명이 있었다. 唐代에는 著作局에 佐郎 4명을 두었고, 開元 연간에 2명으로 감축했다가 龍朔 연간에는 명칭을 司文郎으로 바꾸었다가 이후 다시 되돌렸다. 북송은 당대의 제도를 이어받아 著作佐郎의 品位는 초기에 從6品上이었다가 元豊新制 후 正8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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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사관(直史館)주 005
각주 005)
直史館 : 북송 전기의 관직으로, 館職의 하나였다. 國史와 日曆의 修撰을 담당하여 위상이 높아 官階를 뛰어넘어 제수되기도 하였다. 신종의 원풍 개혁으로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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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華陽)주 006
각주 006)
華陽 : 북송의 지명. 縣의 명칭으로 唐代 乾元 元年(758)에 蜀縣을 개칭하여 설치했다. 치소는 현재 四川 成都市 舊城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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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중정(勾中正)주 007
각주 007)
勾中正 : 929~1002. 五代 宋初의 관인. 益州 華陽(현재 四川 成都 소속) 사람. 字는 坦然. 흔히 句中正으로 쓴다. 後蜀의 進士로 崇文館校書郞, 相府從事를 역임했다. 북송에 귀부하여 曹州錄事參軍, 直史館, 著作郞을 역임했다. 字學과 古文에 조예가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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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고려에 사신으로 가도록 명했다.

  • 각주 001)
    太子中允 : 북송의 관직. 원래 당대에는 동궁의 관직으로 둔 태자중사인이 변한 것이다. 북송에는 처음에 문신의 階官(寄祿官)의 하나로 사용되어 品位는 正5品下였다. 신종의 원풍개혁으로 通直郎으로 바뀌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直舍人院 : 북송의 관직. 황제의 詔令을 기초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것으로 지제고와 직사인원이 있었는데, 직사인원은 他官으로 翰林學士院에 임명받았으면서도 學士職을 제수받지 못한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3)
    張洎 : 934~997. 五代 宋初의 관인. 滁州 全椒(현재 안휘성 소속) 사람. 字는 偕仁이다.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고 고전에 통달했다. 南唐에서 進士가 되었고 관직이 中書舍人, 淸輝殿學士에 이르렀다. 남당 멸망 후 북송에 귀부하여 太子中允에 제수되었고, 태종 즉위 후 知相州, 知譯經院, 判大理寺, 翰林學士 등 관직을 역임했다. 문체가 유려하고 황제의 비위를 잘 맞추어 태종의 총애를 받았다. 至道 元年(995)에 參知政事가 되고, 다음해(996) 탕구트의 李繼遷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靈州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포기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그 다음해(997) 刑部侍郞으로 좌천되었다가 얼마 후 병으로 죽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著作佐郎 : 북송의 관직. 曹魏 明帝 시기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역할은 國史를 다루는 著作郎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晋 元康 연간에 秘書省에 소속되어 인원은 8명이 배정되었으며 佐著作郎이라 칭하기도 했다. 北魏 시기에는 品秩이 從5品上이었다. 北齊는 2명을 두었고, 北周에는 著作中士 4명이 있었다. 唐代에는 著作局에 佐郎 4명을 두었고, 開元 연간에 2명으로 감축했다가 龍朔 연간에는 명칭을 司文郎으로 바꾸었다가 이후 다시 되돌렸다. 북송은 당대의 제도를 이어받아 著作佐郎의 品位는 초기에 從6品上이었다가 元豊新制 후 正8品이 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直史館 : 북송 전기의 관직으로, 館職의 하나였다. 國史와 日曆의 修撰을 담당하여 위상이 높아 官階를 뛰어넘어 제수되기도 하였다. 신종의 원풍 개혁으로 없어졌다. 바로가기
  • 각주 006)
    華陽 : 북송의 지명. 縣의 명칭으로 唐代 乾元 元年(758)에 蜀縣을 개칭하여 설치했다. 치소는 현재 四川 成都市 舊城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勾中正 : 929~1002. 五代 宋初의 관인. 益州 華陽(현재 四川 成都 소속) 사람. 字는 坦然. 흔히 句中正으로 쓴다. 後蜀의 進士로 崇文館校書郞, 相府從事를 역임했다. 북송에 귀부하여 曹州錄事參軍, 直史館, 著作郞을 역임했다. 字學과 古文에 조예가 깊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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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太宗)이 고려에 사신을 보냄 자료번호 : jt.k_0002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