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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서안평(西安平)을 침략하자 관구검(毌丘儉)이 격파함

[조]위 정시 연간(240~248)에 [고구려가] 요[동]의 서안평주 001
번역주 001)
遼西安平 : 『三國志』 東夷傳·『隋書』 高麗傳에는 ‘遼西安平’이 아니라 ‘西安平’으로 되어 있다. 『後漢書』 郡國志에 의하면 安平國은 冀州에 속하고, 西安平은 幽州 遼東郡에 속하였다. 역대로 요서군에는 안평현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는 요동군의 서안평현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三國志』와 『梁書』 高句麗傳에는 ‘遼’자가 없다. 丹東市 동쪽으로 靉河가 압록강에 합류하는 곳의 靉河尖村에는 애하첨고성으로 불리는 토성이 있다. 이곳에서 ‘安平樂未央’ 銘의 와당 등이 나왔기에 서안평현성으로 본다(曹汛,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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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침입해 왔는데, 유주자사 관구검(?~255)주 002
번역주 002)
毋丘儉 : 河東 聞喜(지금의 山西省 聞喜縣) 출신으로, 荆州刺史 등 여러 고위관직을 거쳐, 魏明帝 青龍 3年(235)에 幽州刺史 度遼將軍 使持節 護烏丸校尉에 제수되어, 조위의 동북방 경략을 담당하였다. 237년에 司馬懿와 함께 公孫淵을 멸하고, 이어서 244년·245년 2회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함으로써 조위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였다. 한편, 일찍부터 毋丘儉의 성씨가 毋丘(무구)인지 毌丘(관구)인지는 논란이 많았는데, 대체로 毌丘(관구)로 읽어 왔다. 그런데 최근 中國 山西省 太原市 山西省藝術博物館 소장 〈毋丘氏造像碑〉를 통해 毌丘(관구)가 아니라, 毋丘(무구)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田中俊明, 2014)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그 성씨는 山東省 曹縣 남부의 古地名인 毌丘에서 비롯되었으므로, 관구검으로 읽어야 한다는 비판(이승호, 2015)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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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격파되었다.주 003
번역주 003)
清 光緒 32年(1906)에 輯安縣城 西北쪽의 板岔嶺 도로 정비 및 공사 과정에서 〈毌丘儉紀功碑〉의 일부가 발견되었다(王國維, 1975). 비편의 발견 시점에 대해서는 1904년(金毓黻, 1941), 1905년(池內宏, 1938), 1906년(王國維, 1975) 등으로 각기 다르게 전하고 있는데, 발견 당시의 정황을 면밀하게 추적한 田中俊明에 의해 비석은 1906년에 발견되었음이 확인되었다(田中俊明, 2008). 구체적인 정벌 시점과 관련해, 비문에서는 “正始三年(242) 高句麗反 … 六年(245) 五月旋”이라고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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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위궁)의 현손은 을불리이고,주 004
번역주 004)
乙弗利 : 『三國史記』에 따르면 제15代 美川王이다. 『三國史記』에서는 美川王의 諱를 ‘乙弗’ 또는 ‘憂弗’이라 했고, 『三國遺事』 王歷에는 ‘瀀弗’로 되어 있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東川王 憂位居의 子는 中川王이고, 손은 西川王이며, 증손은 烽上王이다. 美川王 乙弗은 서천왕의 아들인 古鄒加 咄固의 子이므로, 동천왕의 玄孫인 셈이다. 그에 비해, 山上王 位宮에게는 현손이 아닌 來孫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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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불]리의 아들은 쇠주 005
번역주 005)
釗 : 『三國史記』의 제16代 故國原王을 가리킨다. 『三國史記』에서는 고국원왕의 諱를 ‘斯由’ 혹은 ‘劉’라고 하였다. 『晉書』·『北史』·『資治通鑑』등에서는 ‘釗’로 썼고, 『梁書』에만 ‘劉’로 되어 있는데, 자형이 유사하여 생긴 오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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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데, [북위] 열제(탁발예궤, 재위: 329~335, 337~338)주 006
번역주 006)
烈帝 : ‘烈皇帝’의 약칭으로, 北魏의 道武帝 拓跋珪가 伯祖父 拓跋翳槐에게 추존한 諡號이다. 拓拔紇那가 즉위한 325년 이래, 代가 後趙를 끊임없이 공격해 국경을 유린하자, 後趙의 石륵은 당시 후조에 망명해 있던 탁발예궤를 代로 귀국시켰고, 탁발흘나가 後趙를 공격하기 위해 성락을 비운 사이, 탁발예궤가 성락을 차지하였다. 탁발흘나는 회군하여 탁발예궤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했고, 329년, 탁발예궤가 왕위에 올랐다. 335년, 부족민의 변란을 틈타 탁발흘나가 돌아와 성락을 함락시키고, 탁발예궤를 몰아냈다. 탁발예궤는 후조로 도망하였다가, 石호의 도움으로 자객을 보내 탁발흘나를 암살하고, 337년 다시 성락에 입성하여 복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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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에 모용씨와 서로 공격하였다.주 007
번역주 007)
慕容廆(269~333)·慕容皝(297~348)과의 사이에서 있었던 전투를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三國史記』·『資治通鑑』에 慕容廆에 이어 등극한 慕容皝은 탁발예궤(열제)가 사망한 이후인 咸康 5年(339)에 처음 고구려를 침공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晉書』에서는 이 일을 ‘咸康 3年(337)’이라고 하였으므로, ‘열제’ 시기에 해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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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4년(342)주 008
번역주 008)
『三國史記』·『晉書』에서는 慕容皝의 침공을 각각 ‘故國原王 12年’과 ‘咸康 8年’ 즉 342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建國’은 拓跋翳槐를 이어 代의 군주가 된 拓跋什翼犍(재위 : 338~376)의 연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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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전연의] 모용원진(모용황, 재위: 337~348)주 009
번역주 009)
慕容元眞 : 元眞은 前燕을 건국한 慕容皝의 字이다. 모용외의 3남으로 321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33년에 모용외가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 초에는 慕容瀚·慕容仁·慕容昭와 대립하였으나, 336년 모용부의 지배권을 확립한 후, 337년 燕王을 자칭하며 전연을 건국하였다. 341년에 고구려를 공격하여 환도성을 함락시켰고, 346년에는 세자인 慕容儁을 시켜 부여를 공격하고 부여의 玄王과 백성 5만 명을 포로로 잡아 전연으로 끌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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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남쪽의 협소한 [길로] 들어가주 010
번역주 010)
『資治通鑑』에는 ‘남도는 좁고 험한(南道險狹)’으로 ‘북도는 평탄하고 넓은(北道平闊)’이라 하여 南·北道의 존재와 지형적 특징을 기재하고 있다. 이들 경로에 대한 견해는 다양한데,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遼陽에서 太子河 산간로를 거슬러오는 경로를 남도, 渾河를 거쳐 蘇子河 연안로로 이어지는 경로를 북도로 보는 견해이다(今西春秋, 1935 ; 田中俊明, 1997 ; 임기환, 1998). 둘째 혼하를 거슬러오다가 혼하와 소자하의 합류점에서 소자하로 빠져 集安에 이르는 길을 남도, 합류점에서 혼하 상류로 계속 직진하다가 通化에서 남쪽으로 진로를 바꿔 집안에 이르는 길을 북도로 보는 견해이다(箭內亙, 1913 ; 손영종, 1989 ; 여호규, 1995 ; 공석구, 2007). 셋째 혼하에서 소자하로 들어와서 新賓縣 旺淸門鎭에서 남도와 북도의 경로 갈라진다는 견해이다(王綿厚·李健才,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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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저주 011
번역주 011)
木底 : 木底城을 말하는데, 遼寧省 新賓縣 木奇鎭이 明代의 요충지였고 목저와 음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이곳에 목저성이 있었다고 본다(箭內亙, 1913). 여기에 南陜을 남도의 기점으로 해석하고 혼하와 소자하의 합류지점이 그곳에 해당한다고 여겨, 목기진 일대의 여러 성곽 중 하나라고 보기도 한다(여호규, 1995). 한편 남도를 태자하 노선이라고 보아 高儉地山城이나 구로성을 목저성으로 보는 이해도 있다(田中俊明, 1997 ; 임기환, 1998 ; 공석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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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싸워 쇠의 군사를 크게 깨뜨리고 승기를 타고 계속 달려가 마침내 환도주 012
번역주 012)
丸都 : 清 光緒 32年(1906)에 輯安縣城 西北쪽의 板岔嶺 도로 정비 및 공사 과정에서 〈毌丘儉紀功碑〉의 일부가 발견되었으므로(王國維, 1975), 丸都는 지금의 집안시 산성자산성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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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들어가니, 쇠는 홀로 말을 타고 도망쳤다.주 013
번역주 013)
이에 대해서는 『資治通鑑』 卷97에 상세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將擊高句麗 高句麗有二道 其北道平闊 南道險狹 衆欲從北道 翰曰 虜以常情料之 必謂大軍從北道 當重北而輕南 王宜帥銳兵從南道擊之 出其不意 丸都不足取也 別遣偏師從北道 縱有蹉跌 其腹心已潰 四支無能爲也 皝從之 十一月 皝自將勁兵四萬出南道 以慕容翰·慕容覇爲前鋒 別遣長史王寓等將兵萬五千出北道以伐高句麗 高句麗王釗果遣弟武帥精兵五萬拒北道 自帥羸兵以備南道 慕容翰等先至 與釗合戰 皝以大衆繼之 左常侍鮮于亮曰 臣以俘虜蒙王國士之恩 不可以不報 今日臣死日也. 獨與數騎先犯高句麗陣 所嚮摧陷 高句麗陳動 大衆因而乘之 高句麗兵大敗 左長史韓燾斬高句麗將阿佛和度加 諸軍乘勝追之 遂入丸都 釗單騎走 輕車將軍慕輿埿追獲其母周氏及妻而還 會王寓等戰於北道 皆敗沒 由是皝不復窮追 遣使招釗 釗不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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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원진은 쇠의 아버지(미천왕, ?~331) 묘를 파헤쳐서 그 시신을 [수레에] 싣고, 아울러 그의 어머니와 아내, 진귀한 보물과 남녀 5만여 명을 약탈하였으며, 그 궁실을 불사르고 환도성을 헐어버리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쇠가 사신을 보내고 내조하려 하였는데 원수들에게 가로막혀,주 014
번역주 014)
해당 기록의 ‘원수’와 관련해서는 다른 사서에서 찾기 어렵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고구려가 모용황의 귀환 이후, 고국원왕 13년(343), 19년(349), 25년(355)에 전연에 사신을 보냈지만, 사신의 파견이 가로 막혔다는 기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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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힘으로는 이를 수가 없었다. 쇠는 이후에 백제에게 살해당하였다.

  • 번역주 001)
    遼西安平 : 『三國志』 東夷傳·『隋書』 高麗傳에는 ‘遼西安平’이 아니라 ‘西安平’으로 되어 있다. 『後漢書』 郡國志에 의하면 安平國은 冀州에 속하고, 西安平은 幽州 遼東郡에 속하였다. 역대로 요서군에는 안평현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는 요동군의 서안평현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三國志』와 『梁書』 高句麗傳에는 ‘遼’자가 없다. 丹東市 동쪽으로 靉河가 압록강에 합류하는 곳의 靉河尖村에는 애하첨고성으로 불리는 토성이 있다. 이곳에서 ‘安平樂未央’ 銘의 와당 등이 나왔기에 서안평현성으로 본다(曹汛, 1980).바로가기
  • 번역주 002)
    毋丘儉 : 河東 聞喜(지금의 山西省 聞喜縣) 출신으로, 荆州刺史 등 여러 고위관직을 거쳐, 魏明帝 青龍 3年(235)에 幽州刺史 度遼將軍 使持節 護烏丸校尉에 제수되어, 조위의 동북방 경략을 담당하였다. 237년에 司馬懿와 함께 公孫淵을 멸하고, 이어서 244년·245년 2회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함으로써 조위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였다. 한편, 일찍부터 毋丘儉의 성씨가 毋丘(무구)인지 毌丘(관구)인지는 논란이 많았는데, 대체로 毌丘(관구)로 읽어 왔다. 그런데 최근 中國 山西省 太原市 山西省藝術博物館 소장 〈毋丘氏造像碑〉를 통해 毌丘(관구)가 아니라, 毋丘(무구)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田中俊明, 2014)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그 성씨는 山東省 曹縣 남부의 古地名인 毌丘에서 비롯되었으므로, 관구검으로 읽어야 한다는 비판(이승호, 2015)이 있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清 光緒 32年(1906)에 輯安縣城 西北쪽의 板岔嶺 도로 정비 및 공사 과정에서 〈毌丘儉紀功碑〉의 일부가 발견되었다(王國維, 1975). 비편의 발견 시점에 대해서는 1904년(金毓黻, 1941), 1905년(池內宏, 1938), 1906년(王國維, 1975) 등으로 각기 다르게 전하고 있는데, 발견 당시의 정황을 면밀하게 추적한 田中俊明에 의해 비석은 1906년에 발견되었음이 확인되었다(田中俊明, 2008). 구체적인 정벌 시점과 관련해, 비문에서는 “正始三年(242) 高句麗反 … 六年(245) 五月旋”이라고 언급하였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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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乙弗利 : 『三國史記』에 따르면 제15代 美川王이다. 『三國史記』에서는 美川王의 諱를 ‘乙弗’ 또는 ‘憂弗’이라 했고, 『三國遺事』 王歷에는 ‘瀀弗’로 되어 있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東川王 憂位居의 子는 中川王이고, 손은 西川王이며, 증손은 烽上王이다. 美川王 乙弗은 서천왕의 아들인 古鄒加 咄固의 子이므로, 동천왕의 玄孫인 셈이다. 그에 비해, 山上王 位宮에게는 현손이 아닌 來孫이 된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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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釗 : 『三國史記』의 제16代 故國原王을 가리킨다. 『三國史記』에서는 고국원왕의 諱를 ‘斯由’ 혹은 ‘劉’라고 하였다. 『晉書』·『北史』·『資治通鑑』등에서는 ‘釗’로 썼고, 『梁書』에만 ‘劉’로 되어 있는데, 자형이 유사하여 생긴 오기일 것이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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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烈帝 : ‘烈皇帝’의 약칭으로, 北魏의 道武帝 拓跋珪가 伯祖父 拓跋翳槐에게 추존한 諡號이다. 拓拔紇那가 즉위한 325년 이래, 代가 後趙를 끊임없이 공격해 국경을 유린하자, 後趙의 石륵은 당시 후조에 망명해 있던 탁발예궤를 代로 귀국시켰고, 탁발흘나가 後趙를 공격하기 위해 성락을 비운 사이, 탁발예궤가 성락을 차지하였다. 탁발흘나는 회군하여 탁발예궤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했고, 329년, 탁발예궤가 왕위에 올랐다. 335년, 부족민의 변란을 틈타 탁발흘나가 돌아와 성락을 함락시키고, 탁발예궤를 몰아냈다. 탁발예궤는 후조로 도망하였다가, 石호의 도움으로 자객을 보내 탁발흘나를 암살하고, 337년 다시 성락에 입성하여 복위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慕容廆(269~333)·慕容皝(297~348)과의 사이에서 있었던 전투를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三國史記』·『資治通鑑』에 慕容廆에 이어 등극한 慕容皝은 탁발예궤(열제)가 사망한 이후인 咸康 5年(339)에 처음 고구려를 침공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晉書』에서는 이 일을 ‘咸康 3年(337)’이라고 하였으므로, ‘열제’ 시기에 해당할 수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三國史記』·『晉書』에서는 慕容皝의 침공을 각각 ‘故國原王 12年’과 ‘咸康 8年’ 즉 342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建國’은 拓跋翳槐를 이어 代의 군주가 된 拓跋什翼犍(재위 : 338~376)의 연호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9)
    慕容元眞 : 元眞은 前燕을 건국한 慕容皝의 字이다. 모용외의 3남으로 321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33년에 모용외가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 초에는 慕容瀚·慕容仁·慕容昭와 대립하였으나, 336년 모용부의 지배권을 확립한 후, 337년 燕王을 자칭하며 전연을 건국하였다. 341년에 고구려를 공격하여 환도성을 함락시켰고, 346년에는 세자인 慕容儁을 시켜 부여를 공격하고 부여의 玄王과 백성 5만 명을 포로로 잡아 전연으로 끌고 왔다.바로가기
  • 번역주 010)
    『資治通鑑』에는 ‘남도는 좁고 험한(南道險狹)’으로 ‘북도는 평탄하고 넓은(北道平闊)’이라 하여 南·北道의 존재와 지형적 특징을 기재하고 있다. 이들 경로에 대한 견해는 다양한데,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遼陽에서 太子河 산간로를 거슬러오는 경로를 남도, 渾河를 거쳐 蘇子河 연안로로 이어지는 경로를 북도로 보는 견해이다(今西春秋, 1935 ; 田中俊明, 1997 ; 임기환, 1998). 둘째 혼하를 거슬러오다가 혼하와 소자하의 합류점에서 소자하로 빠져 集安에 이르는 길을 남도, 합류점에서 혼하 상류로 계속 직진하다가 通化에서 남쪽으로 진로를 바꿔 집안에 이르는 길을 북도로 보는 견해이다(箭內亙, 1913 ; 손영종, 1989 ; 여호규, 1995 ; 공석구, 2007). 셋째 혼하에서 소자하로 들어와서 新賓縣 旺淸門鎭에서 남도와 북도의 경로 갈라진다는 견해이다(王綿厚·李健才, 1990).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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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木底 : 木底城을 말하는데, 遼寧省 新賓縣 木奇鎭이 明代의 요충지였고 목저와 음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이곳에 목저성이 있었다고 본다(箭內亙, 1913). 여기에 南陜을 남도의 기점으로 해석하고 혼하와 소자하의 합류지점이 그곳에 해당한다고 여겨, 목기진 일대의 여러 성곽 중 하나라고 보기도 한다(여호규, 1995). 한편 남도를 태자하 노선이라고 보아 高儉地山城이나 구로성을 목저성으로 보는 이해도 있다(田中俊明, 1997 ; 임기환, 1998 ; 공석구, 2007).바로가기
  • 번역주 012)
    丸都 : 清 光緒 32年(1906)에 輯安縣城 西北쪽의 板岔嶺 도로 정비 및 공사 과정에서 〈毌丘儉紀功碑〉의 일부가 발견되었으므로(王國維, 1975), 丸都는 지금의 집안시 산성자산성으로 추정된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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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해서는 『資治通鑑』 卷97에 상세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將擊高句麗 高句麗有二道 其北道平闊 南道險狹 衆欲從北道 翰曰 虜以常情料之 必謂大軍從北道 當重北而輕南 王宜帥銳兵從南道擊之 出其不意 丸都不足取也 別遣偏師從北道 縱有蹉跌 其腹心已潰 四支無能爲也 皝從之 十一月 皝自將勁兵四萬出南道 以慕容翰·慕容覇爲前鋒 別遣長史王寓等將兵萬五千出北道以伐高句麗 高句麗王釗果遣弟武帥精兵五萬拒北道 自帥羸兵以備南道 慕容翰等先至 與釗合戰 皝以大衆繼之 左常侍鮮于亮曰 臣以俘虜蒙王國士之恩 不可以不報 今日臣死日也. 獨與數騎先犯高句麗陣 所嚮摧陷 高句麗陳動 大衆因而乘之 高句麗兵大敗 左長史韓燾斬高句麗將阿佛和度加 諸軍乘勝追之 遂入丸都 釗單騎走 輕車將軍慕輿埿追獲其母周氏及妻而還 會王寓等戰於北道 皆敗沒 由是皝不復窮追 遣使招釗 釗不出”바로가기
  • 번역주 014)
    해당 기록의 ‘원수’와 관련해서는 다른 사서에서 찾기 어렵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고구려가 모용황의 귀환 이후, 고국원왕 13년(343), 19년(349), 25년(355)에 전연에 사신을 보냈지만, 사신의 파견이 가로 막혔다는 기록은 없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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