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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동이전

한(韓)의 문화와 역사

한에는 세 종족(種)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이요, 둘째는 진한이요, 셋째는 변진이다주 001
번역주 001)
原註 王會汾이 말하기를, “晉書와 梁書의 두 책에서는, 모두 弁韓으로 적었는데, 마땅히 따라 고쳐야 한다.”고 하였다. 이하에서는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다.’고 이르렀는데, 弁辰 또한 弁韓의 訛傳이다. 惠棟이 말하기를, “魏志(「魏書」, 「東夷傳」)에는 弁韓이라고 적혀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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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한은 서쪽에 위치하며 54국이 있다. 그 북쪽은 낙랑과, 남쪽은 왜와 접하고 있다. 진한은 동쪽에 위치하며 12국이 있다. 그 북쪽은 예맥과 접하고 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위치하며 역시 12국이 있다. 그 남쪽 역시 왜와 접하고 있다. 무릇 78국인데, 백제(伯濟)는 그 가운데 한 나라이다. 큰 것은 1만여 호이며, 작은 것은 수 천 가로 이루어졌다.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위치하며 땅은 사방 4천여 리이고,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진국주 002
번역주 002)
진국: 『삼국지』에는 단지 “진한은 옛 辰國이다.”라고만 표현하였다. 종래에 위의 기록을 근거로 한강 유역 이남 지역에서는 하나의 문화적인 통일성을 가진 정치체로서 辰國이 존재하였다가 위만조선의 멸망 이후 유이민이 진국사회로 들어오면서 그것이 삼한으로 분립하였다고 본 견해가 있었다(이현혜, 1984). 진국의 실체에 대해서 사료의 해석과 그 성격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史記』, 「朝鮮列傳」에 나오는 “眞番旁衆國”[武英殿本·金陵局本]이라는 표현이 주목된다. 반면에 일본 교토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百納本 등에서는 이를 “眞番旁辰國”이라고 달리 표기하고 있다. 진번의 위치에 대하여 논란이 분분하지만, 황해도 일대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다. 전자의 판본을 따르면, 한강 유역과 그 이남 지역에 衆國, 즉 여러 나라[國]가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후자의 판본을 따르면, 그 지역에 위만조선과 병립하였던 진국이라고 불리는 하나의 국가체가 존재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기원 1세기 후반경에 班固가 찬술한 『漢書』, 「朝鮮傳」에는 “眞番과 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려고 하였다.”고 전하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서 인용한 『위략』에는 “(우거왕 때에) 朝鮮相 歷谿卿이 右渠에게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으로 갔다.”고 전한다. 후한시대의 반고와 위나라 사람인 魚豢이 고조선 멸망 이전에 진번 또는 고조선 곁에 진국이 존재하였다고 이해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眞番旁辰國’이 옳은 표기였을 것이다(이현혜, 1984). 아마도 후대에 이것을 교감하는 과정에서 辰國을 衆國으로 잘못 표기하면서 혼란이 발생한 것이 아닐까 한다.
진국의 중심지에 대하여 현재 진번의 故地인 황해도 근처의 한강 하류 지역으로 이해하는 견해(노중국, 1987)와 전라·충청 지역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양립하고 있다. 한강 하류 지역에서는 청동기와 초기철기시대의 유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에 충청권에 해당하는 아산 남성리, 대전 괴정동, 예산 동서리, 부여 합송리, 공주 봉안리, 당진 소소리에서 청동기와 초기철기시대의 유물이 대거 출토되었다. 한반도 중·남부 지역 가운데 청동기와 초기철기시대의 선진 지역은 충청 지역임을 알려주는 증거들이다. 이에 근거하여 현재 고조선과 진번 곁에 위치한 진국의 중심지를 충청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널리 지지를 받고 있다(이현혜, 1984; 권오영, 1996; 박대재, 2002). 한편 일부 학자는 앞에서 인용한 『위략』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익산 지역 준왕계의 진국 세력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전하는 진왕(辰王)에게 밀려나 경상도 지역으로 이주하여 진한의 일부 세력이 되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천관우, 1989). 한편 진국의 성격에 대해서는, 그것을 진왕과 연결시켜 삼한 지역 전체를 포괄하는 연맹체라고 보는 견해(이병도, 1976), 한강 유역에서 형성된 여러 정치세력들로 이루어진 연맹체로 이해하는 견해(노중국, 1987), 남하 중이던 진한족이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에 세운 정치집단으로 이해하는 견해(천관우, 1989), 경기·충남·전라 지역에 형성되어 있었던 정치집단군 중에서 주도적인 기능을 하던 일정 범위 내의 세력집단들로 이해하는 견해(권오영, 1996) 등이 있다. 진한이 옛 진국이라고 전하는 기록을 주목하여 고조선시대에 진국이라고 불리던 한반도 중부의 진한이 충북지방을 거쳐 경주에까지 남하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지만(천관우, 1989), 현재 학계에서는 대체로 진한과 진국을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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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마한이 가장 크며 그 종족을 함께 옹립하여 진왕으로 삼고, 목지국주 003
번역주 003)
목지국: 『翰苑』에 인용된 『魏略』, 『通典』에서는 이와 동일하게 “目支國”으로 표기하였다. 반면에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月支國”이라고 표기하였다. 일반적으로 月은 目의 오자로 보고 있다. 한편 일부 학자들은 月支國으로 이해하기도 하다. 목지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충남 직산(이병도, 1985), 인천(천관우, 1989), 전북 익산(정약용; 한진서)이라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근래에 마한 소국들을 포괄할 수 있는 중심 위치이면서도 중국과의 교류가 편리한 충남 지역에 위치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체적으로 아산만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이현혜, 1997; 이도학, 1998)와 천안 청당동유적을 그 중심지로 이해하는 견해(권오영, 1996)가 제기되었다. 반면에 일부 학자는 초기에 목지국이 전북 익산에 위치하였다가 후에 충남 예산으로 옮겼다는 견해(김정배, 1985), 초기에 목지국이 천안 직산이나 평택, 성환 일대에 위치하였다가 근초고왕 대 이후에 전남 나주로 옮겼다는 견해(최몽룡, 1986)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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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도읍으로 하여서 [진왕이] 삼한 땅 전체의 왕이 되었다. 그 여러 나라 왕들의 선조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었다주 004
번역주 004)
마한이 가장 크며 ~ 마한 종족의 사람이었다: 『삼국지』에서 “辰王은 月支國(目支國)을 다스린다.”라고 하였고, 그가 삼한 땅 전체의 왕이 되었다는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진왕을 마한인이 계승하였다는 내용은 진한 부분을 설명할 때에 보이고 있다. 종래에 위의 기록을 근거로 진왕은 삼한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로 이해한 견해도 있다. 현재 진왕의 성격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종래에 『후한서』, 「한전」의 기록에 의거하여 진왕을 삼한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로 파악하였다(이병도, 1976). 즉 진왕은 목지국을 거점으로 하여 여러 소국과의 宗主·附庸 관계를 기본으로 하면서 소국들을 대표하여 중국 군현과의 외교 교섭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이해하였던 것이다. 한편 여기에 나오는 진왕은 한강 유역에 정착한 백제국의 왕으로 보고, 변진조에 나오는 진왕은 신라왕으로 보는 견해(천관우, 1976; 문창로, 1997)도 있다. 대개 여기에 언급된 진왕은 마한연맹체의 장(長)이며, 그 치소(治所), 즉 목지국을 마한의 領導國으로 본다. 이 진왕을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 진(辰) 지역(금강 중· 하류 유역)을 통치하던 역사적 존재라고 한정하여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박대재, 2002). 이 밖에 진왕이 諸韓國首長의 상호관계를 조정하면서 대(對)중국 교섭을 수행해나가는 대외적 대표로서 목지국의 신지와 동일한 장소를 치소로 하는 별도의 왕인데, 3세기 초에 요동의 公孫氏가 중국 대외교역에 정통한 마한인을 시켜서 진왕으로 임명하고 그 지위를 세습시킨 것이라고 보는 견해(武田幸男, 1995·1996; 윤선태, 2001)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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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한 사람들은 농사와 양잠을 알았으며, 겸포를 짰다. 큰 밤이 생산되는데, 크기가 배와 같았다. 꼬리가 긴 닭이 있으니, 그 길이가 다섯 자나 되었다. 읍락이 뒤섞여 있었고주 005
번역주 005)
邑落雜居: 읍락의 경계가 犬牙相으로 뒤섞여 있는 모습을 전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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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성곽이 없었다. 움집(土室)을 짓는데, 모양이 마치 무덤과 같았으며 출입문은 위에 있었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줄 몰랐으며, 어른과 어린이, 남녀를 분별하는 예절이 없었다. 금과 보화[寶], 비단과 모직물[錦罽]을 귀하다고 여기지 않고, 소와 말을 탈 줄 몰랐다. 오직 구슬만을 귀중하게 여겨서 옷에다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에다 걸고 귀에 달아 늘어뜨렸다. 대개 모두 맨머리에 상투를 드러냈으며주 006
번역주 006)
原註 魁頭는 科頭와 같다. 머리카락을 틀어 말아 올챙이 모양으로 묶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紒의 음은 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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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로 도포를 만들어 입고, 짚신을 신었다주 007
번역주 007)
原註 集解: 惠棟이 말하기를, “魏志(『삼국지』, 「위서」)에서는 짚신과 蹻蹋을 신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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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람들은 씩씩하고 용감하였다. 소년 중에 건물을 짓느라고 힘을 쓰는 자가 있는데, 밧줄로 등가죽을 관통하여, 큰 나무를 매어 달아 소리를 지르니, [사람들이 이를] 건장하다고 여겼다. 항상 오월에 파종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무리를 지어서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춤을 출 때, 매번 수십 명의 사람들이 서로 줄을 서서 땅을 밟으며 장단을 맞추었다주 008
번역주 008)
原註 惠棟이 말하기를, “魏志(『삼국지』, 「위서」)에서는 ‘땅을 밟고 몸을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손과 발이 서로 잘 어울렸는데, 그 리듬이 마치 [중국의] 鐸舞와 흡사함이 있었다.’고 이르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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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에 농사일을 끝마친 다음에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여러 국읍(國邑)마다 한 사람이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였는데, 그 사람을 천군(天君)이라고 불렀다. 또한 소도(蘇塗)를 세웠는데, 큰 나무를 세우고, 거기에 방울과 북을 매달아놓고 귀신을 섬겼다주 009
번역주 009)
原註 魏志(『삼국지』, 「위서」)에 이르기를 “여러 나라마다 別邑이 있는데, 이를 소도라고 하였다. 여러 도망자들이 그곳으로 들어가면 모두 돌려보내지 않았다. 소도의 의미는 浮屠의 그것과 유사하였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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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남쪽의 경계는 왜와 가까워서 또한 문신한 사람들이 있었다.
진한의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의 유망민들이 고된 부역을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오니, 마한이 동쪽 경계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고 하였다. 그들은 나라를 방, 활을 호(弧), 도적을 구(寇), 술잔 돌리는 것을 행상(行觴)이라고 부르며, 서로 부르기를 도(徒)라고 하였으니주 010
번역주 010)
原註 先謙이 말하기를, “魏志(『삼국지』, 「위서」)에서는 앞에 ‘皆’자가 있다고 이르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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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의 말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혹 진한(秦韓)이라고도 부른다. 성책, 가옥이 있다. 여러 작은 별읍에는 각기 거수가 존재하였는데, 큰 자는 신지라고 부르고, 다음은 험측, 그 다음은 번지주 011
번역주 011)
번지: 『삼국지』에는 「樊濊」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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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은 살해주 012
번역주 012)
原註 惠棟이 말하기를, “魏志(『삼국지』, 「위서」)에서는 ‘樊穢’로 쓰여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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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은 읍차라고 불렀다주 013
번역주 013)
原註 모두 官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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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지는 비옥하며, 오곡을 심기에 알맞았다. 누에치기를 할 줄 알며, 겸포를 짰다. 소와 말이 끄는 수레를 탔다. 시집가고 장가드는 것을 예절에 맞게 하며, 길가는 사람들은 길을 양보하였다. 나라에 철이 생산되는데, 예, 왜, 마한 등에서 모두 와서 사갔다. 무릇 사고 팔 때 모두 철을 화폐로 삼았다주 014
번역주 014)
原註 先謙이 말하기를, “官本에서는 質을 貿라고 기술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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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속은 노래 부르고 춤추며, 술 마시고, 북 치고 큰 고(瑟) 타기를 좋아하였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그 머리를 편편하게 하고자 하여서 모두 돌로서 머리를 눌렀다주 015
번역주 015)
原註 扁의 음은 補와 典의 反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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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진은 진한과 뒤섞여 있었다. 성곽과 의복은 모두 [진한과] 같았으나 언어와 풍속에 차이가 있었다. 그 사람의 형체는 키가 크고 건장하며, 머리카락이 아름답고 의복이 매우 청결하였다. 그리고 형법이 매우 엄격하였다. 그 나라는 왜와 가까이 있어서 문신을 한 자들이 자못 있었다.
처음에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격파당하매, 이에 그 나머지 무리 수천 인을 데리고 바닷길로 도망하여 마한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주 016
번역주 016)
原註 惠棟이 말하기를, “魏志(『삼국지』, 「위서」)에서 ‘그의 아들 및 친척으로 나라에 머무른 자들은 이로 인하여 거짓으로 韓氏를 칭하였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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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의 후손이 끊어지자, 마한 사람들이 스스로 왕에 올라 진왕이 되었다주 017
번역주 017)
準後滅絶, 馬韓人復自立爲辰王: 『삼국지』에는 준왕의 후손이 끊겼다는 언급만 나오고 마한 사람이 진왕이 되었다는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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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무 20년(44) 한의 염사주 018
번역주 018)
염사: 염사읍의 위치에 대해서는 종래에 충남 아산시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고(이병도, 1976), 이밖에 마한 지역으로 보는 견해(栗原朋信, 1978; 山尾幸久, 1982) 경남 김해의 구야국으로 보는 견해(정중환, 1973; 백승충, 1989), 마산·창원 방면에 위치하였다고 보는 견해(西本昌弘, 1989; 연민수, 2003), 낙동강 하류 동안 지역에 위치하였다고 보는 새로운 견해(이부오, 2001)가 제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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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소마시 등이 낙랑에 이르러 공물을 바쳤다주 019
번역주 019)
건무 20년 ~ 공물을 바쳤다: 이와 유사한 내용으로서 『삼국지』에 廉斯鑡와 관련된 일화가 전하고 있다.
原註 염사는 읍의 명칭이다. 諟의 음은 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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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무제가 소마시를 한염사읍군주 020
번역주 020)
한염사읍군: 여기서 邑君은 일반적으로 國邑의 臣智級에게 수여한 관작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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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봉하고, 낙랑군에 복속케 하여 철마다 조공하도록 하였다. 영제의 말기에 한과 예가 모두 강성해져서 군현이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주 021
번역주 021)
原註 先謙이 말하기를, “官本에서는 州를 郡으로 썼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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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들이 난리에 고통스러워서 한으로 도망해 들어간 자가 많았다.
마한 서쪽의 섬 가운데 주호국이 있다. 그 사람들은 키가 작고 왜소하며주 022
번역주 022)
原註 沈欽韓이 말하기를, “魏志(『삼국지』, 「위서」)에는 人 다음에 ‘差’자가 더 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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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를 밀고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었는데, 상의만 입고 하의는 입지 않았다. 소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였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에서 물건을 사고팔았다.
논한다. “옛날 기자가 쇠망하는 은나라의 운수를 피하여 조선 땅으로 피난하였다. 처음에는 그 나라의 풍속에 대하여 들은 바가 없었으나, 팔조의 규약을 시행함에 미쳐 사람들에게 금하는 것을 알게 하였더니, 마침내 그 읍락에서 음란한 행동과 도둑이 없어져서 밤에도 문을 닫아걸지 않았으며주 023
번역주 023)
原註 扃은 關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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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고하고 천박한 풍습을 바꾸어 관대하고 간략한 법에 나아가게 한 것이 수백 년이나 지났다. 그런 까닭에 동이의 전체가 온유하고 삼가는 것으로 교화되어 다른 세 방향에 [있는 나라들의] 풍속과 다르게 되었다. 진실로 정교가 창달되면 도의가 있게 마련이다. 중니가 분연히 구이에 가서 가히 살려고 하였더니, 혹자가 그곳은 더러운 곳이 아닌가 하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가 거처하고 있으니 어찌 [그곳이] 더럽다고 하겠는가.’라고 한 것도 나름 어떠한 까닭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 뒤 드디어 [중국과] 장사를 하며 접하게 되고, 점차 상국과 교역하였다. 그런데 연나라 사람 위만이 그들의 풍속을 어지럽히자주 024
번역주 024)
原註 擾는 亂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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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그들도] 따라서 경박해져서 차이가 있게 되었다. 노자가 말하기를, ‘법령이 점점 늘어날수록 도적도 많이 생긴다.’고 하였다. 기자가 법조문을 간략하게 하고 신의를 가지고 [나라를 다스린 것은] 성현의 법을 만든 근본을 얻었다고 하겠다.”
찬한다. “우이에 살았으니, 곧 양곡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산과 바다에 사는 것을 아홉 종족으로 구분하였도다. 진나라 말년에 나라가 혼란해지자, 연나라 사람들이 난리를 피하여 와서주 025
번역주 025)
原註 衛滿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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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하의 풍속이 섞여 근본이 경박해졌다. 마침내 한과 통하게 되어주 026
번역주 026)
原註 위만이 朝鮮에 들어와서 華夏의 풍속이 서로 섞였다. 또한 경박한 근본을 교화하여 마침내 漢과 통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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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득히 멀리서 통역을 통하여 교류하매, 혹은 복속도 하고 혹은 배반도 하는구나.”주 027
번역주 027)
原註 偏은 遠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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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주 001)
    原註 王會汾이 말하기를, “晉書와 梁書의 두 책에서는, 모두 弁韓으로 적었는데, 마땅히 따라 고쳐야 한다.”고 하였다. 이하에서는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다.’고 이르렀는데, 弁辰 또한 弁韓의 訛傳이다. 惠棟이 말하기를, “魏志(「魏書」, 「東夷傳」)에는 弁韓이라고 적혀 있다.”고 하였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2)
    진국: 『삼국지』에는 단지 “진한은 옛 辰國이다.”라고만 표현하였다. 종래에 위의 기록을 근거로 한강 유역 이남 지역에서는 하나의 문화적인 통일성을 가진 정치체로서 辰國이 존재하였다가 위만조선의 멸망 이후 유이민이 진국사회로 들어오면서 그것이 삼한으로 분립하였다고 본 견해가 있었다(이현혜, 1984). 진국의 실체에 대해서 사료의 해석과 그 성격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史記』, 「朝鮮列傳」에 나오는 “眞番旁衆國”[武英殿本·金陵局本]이라는 표현이 주목된다. 반면에 일본 교토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百納本 등에서는 이를 “眞番旁辰國”이라고 달리 표기하고 있다. 진번의 위치에 대하여 논란이 분분하지만, 황해도 일대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다. 전자의 판본을 따르면, 한강 유역과 그 이남 지역에 衆國, 즉 여러 나라[國]가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후자의 판본을 따르면, 그 지역에 위만조선과 병립하였던 진국이라고 불리는 하나의 국가체가 존재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기원 1세기 후반경에 班固가 찬술한 『漢書』, 「朝鮮傳」에는 “眞番과 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려고 하였다.”고 전하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서 인용한 『위략』에는 “(우거왕 때에) 朝鮮相 歷谿卿이 右渠에게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으로 갔다.”고 전한다. 후한시대의 반고와 위나라 사람인 魚豢이 고조선 멸망 이전에 진번 또는 고조선 곁에 진국이 존재하였다고 이해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眞番旁辰國’이 옳은 표기였을 것이다(이현혜, 1984). 아마도 후대에 이것을 교감하는 과정에서 辰國을 衆國으로 잘못 표기하면서 혼란이 발생한 것이 아닐까 한다.
    진국의 중심지에 대하여 현재 진번의 故地인 황해도 근처의 한강 하류 지역으로 이해하는 견해(노중국, 1987)와 전라·충청 지역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양립하고 있다. 한강 하류 지역에서는 청동기와 초기철기시대의 유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에 충청권에 해당하는 아산 남성리, 대전 괴정동, 예산 동서리, 부여 합송리, 공주 봉안리, 당진 소소리에서 청동기와 초기철기시대의 유물이 대거 출토되었다. 한반도 중·남부 지역 가운데 청동기와 초기철기시대의 선진 지역은 충청 지역임을 알려주는 증거들이다. 이에 근거하여 현재 고조선과 진번 곁에 위치한 진국의 중심지를 충청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널리 지지를 받고 있다(이현혜, 1984; 권오영, 1996; 박대재, 2002). 한편 일부 학자는 앞에서 인용한 『위략』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익산 지역 준왕계의 진국 세력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전하는 진왕(辰王)에게 밀려나 경상도 지역으로 이주하여 진한의 일부 세력이 되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천관우, 1989). 한편 진국의 성격에 대해서는, 그것을 진왕과 연결시켜 삼한 지역 전체를 포괄하는 연맹체라고 보는 견해(이병도, 1976), 한강 유역에서 형성된 여러 정치세력들로 이루어진 연맹체로 이해하는 견해(노중국, 1987), 남하 중이던 진한족이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에 세운 정치집단으로 이해하는 견해(천관우, 1989), 경기·충남·전라 지역에 형성되어 있었던 정치집단군 중에서 주도적인 기능을 하던 일정 범위 내의 세력집단들로 이해하는 견해(권오영, 1996) 등이 있다. 진한이 옛 진국이라고 전하는 기록을 주목하여 고조선시대에 진국이라고 불리던 한반도 중부의 진한이 충북지방을 거쳐 경주에까지 남하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지만(천관우, 1989), 현재 학계에서는 대체로 진한과 진국을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목지국: 『翰苑』에 인용된 『魏略』, 『通典』에서는 이와 동일하게 “目支國”으로 표기하였다. 반면에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月支國”이라고 표기하였다. 일반적으로 月은 目의 오자로 보고 있다. 한편 일부 학자들은 月支國으로 이해하기도 하다. 목지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충남 직산(이병도, 1985), 인천(천관우, 1989), 전북 익산(정약용; 한진서)이라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근래에 마한 소국들을 포괄할 수 있는 중심 위치이면서도 중국과의 교류가 편리한 충남 지역에 위치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체적으로 아산만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이현혜, 1997; 이도학, 1998)와 천안 청당동유적을 그 중심지로 이해하는 견해(권오영, 1996)가 제기되었다. 반면에 일부 학자는 초기에 목지국이 전북 익산에 위치하였다가 후에 충남 예산으로 옮겼다는 견해(김정배, 1985), 초기에 목지국이 천안 직산이나 평택, 성환 일대에 위치하였다가 근초고왕 대 이후에 전남 나주로 옮겼다는 견해(최몽룡, 1986)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4)
    마한이 가장 크며 ~ 마한 종족의 사람이었다: 『삼국지』에서 “辰王은 月支國(目支國)을 다스린다.”라고 하였고, 그가 삼한 땅 전체의 왕이 되었다는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진왕을 마한인이 계승하였다는 내용은 진한 부분을 설명할 때에 보이고 있다. 종래에 위의 기록을 근거로 진왕은 삼한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로 이해한 견해도 있다. 현재 진왕의 성격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종래에 『후한서』, 「한전」의 기록에 의거하여 진왕을 삼한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로 파악하였다(이병도, 1976). 즉 진왕은 목지국을 거점으로 하여 여러 소국과의 宗主·附庸 관계를 기본으로 하면서 소국들을 대표하여 중국 군현과의 외교 교섭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이해하였던 것이다. 한편 여기에 나오는 진왕은 한강 유역에 정착한 백제국의 왕으로 보고, 변진조에 나오는 진왕은 신라왕으로 보는 견해(천관우, 1976; 문창로, 1997)도 있다. 대개 여기에 언급된 진왕은 마한연맹체의 장(長)이며, 그 치소(治所), 즉 목지국을 마한의 領導國으로 본다. 이 진왕을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 진(辰) 지역(금강 중· 하류 유역)을 통치하던 역사적 존재라고 한정하여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박대재, 2002). 이 밖에 진왕이 諸韓國首長의 상호관계를 조정하면서 대(對)중국 교섭을 수행해나가는 대외적 대표로서 목지국의 신지와 동일한 장소를 치소로 하는 별도의 왕인데, 3세기 초에 요동의 公孫氏가 중국 대외교역에 정통한 마한인을 시켜서 진왕으로 임명하고 그 지위를 세습시킨 것이라고 보는 견해(武田幸男, 1995·1996; 윤선태, 2001)도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5)
    邑落雜居: 읍락의 경계가 犬牙相으로 뒤섞여 있는 모습을 전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原註 魁頭는 科頭와 같다. 머리카락을 틀어 말아 올챙이 모양으로 묶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紒의 음은 計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原註 集解: 惠棟이 말하기를, “魏志(『삼국지』, 「위서」)에서는 짚신과 蹻蹋을 신었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原註 惠棟이 말하기를, “魏志(『삼국지』, 「위서」)에서는 ‘땅을 밟고 몸을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손과 발이 서로 잘 어울렸는데, 그 리듬이 마치 [중국의] 鐸舞와 흡사함이 있었다.’고 이르렀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9)
    原註 魏志(『삼국지』, 「위서」)에 이르기를 “여러 나라마다 別邑이 있는데, 이를 소도라고 하였다. 여러 도망자들이 그곳으로 들어가면 모두 돌려보내지 않았다. 소도의 의미는 浮屠의 그것과 유사하였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0)
    原註 先謙이 말하기를, “魏志(『삼국지』, 「위서」)에서는 앞에 ‘皆’자가 있다고 이르렀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1)
    번지: 『삼국지』에는 「樊濊」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2)
    原註 惠棟이 말하기를, “魏志(『삼국지』, 「위서」)에서는 ‘樊穢’로 쓰여 있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3)
    原註 모두 官名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14)
    原註 先謙이 말하기를, “官本에서는 質을 貿라고 기술하였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5)
    原註 扁의 음은 補와 典의 反切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16)
    原註 惠棟이 말하기를, “魏志(『삼국지』, 「위서」)에서 ‘그의 아들 및 친척으로 나라에 머무른 자들은 이로 인하여 거짓으로 韓氏를 칭하였다.’고 하였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7)
    準後滅絶, 馬韓人復自立爲辰王: 『삼국지』에는 준왕의 후손이 끊겼다는 언급만 나오고 마한 사람이 진왕이 되었다는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8)
    염사: 염사읍의 위치에 대해서는 종래에 충남 아산시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고(이병도, 1976), 이밖에 마한 지역으로 보는 견해(栗原朋信, 1978; 山尾幸久, 1982) 경남 김해의 구야국으로 보는 견해(정중환, 1973; 백승충, 1989), 마산·창원 방면에 위치하였다고 보는 견해(西本昌弘, 1989; 연민수, 2003), 낙동강 하류 동안 지역에 위치하였다고 보는 새로운 견해(이부오, 2001)가 제출되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9)
    건무 20년 ~ 공물을 바쳤다: 이와 유사한 내용으로서 『삼국지』에 廉斯鑡와 관련된 일화가 전하고 있다.
    原註 염사는 읍의 명칭이다. 諟의 음은 是이다. 바로가기
  • 번역주 020)
    한염사읍군: 여기서 邑君은 일반적으로 國邑의 臣智級에게 수여한 관작으로 추정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21)
    原註 先謙이 말하기를, “官本에서는 州를 郡으로 썼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2)
    原註 沈欽韓이 말하기를, “魏志(『삼국지』, 「위서」)에는 人 다음에 ‘差’자가 더 있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3)
    原註 扃은 關을 의미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24)
    原註 擾는 亂을 의미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25)
    原註 衛滿을 이른다.바로가기
  • 번역주 026)
    原註 위만이 朝鮮에 들어와서 華夏의 풍속이 서로 섞였다. 또한 경박한 근본을 교화하여 마침내 漢과 통하기에 이르렀다. 바로가기
  • 번역주 027)
    原註 偏은 遠을 의미한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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