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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루(挹婁)의 특성과 문화

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이다주 001
번역주 001)
문헌기록에 숙신이란 명칭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史記』와 『春秋左氏傳』이다. 이른바 古肅愼이다. 『後漢書』와 『三國志』 등 후대의 문헌에서는 읍루를 古肅愼과 관련해서 설명하였다. 다음의 사료가 참고된다. 『後漢書』 권70, 鄭孔荀列傳60 孔融. “操討烏桓 建安十二年也 又嘲之曰 大將軍遠征 蕭條海外 昔肅愼不貢楛矢 國語曰 昔武王剋商 通于九夷百蠻 於是肅愼氏貢楛矢石砮 其長尺有咫 肅愼國記曰 肅愼氏 其地在夫餘國北 東濱大海 魏略曰 挹婁一名肅愼氏.”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러한 후대의 인식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原註 集解: 沈欽韓이 말하였다. 『元史』, 「地理志」에서 “瀋陽路는 본래 挹婁의 옛 땅이고, 또한 開元路는 옛 肅愼의 땅이다.”라고 하였다. 『通典』에서는 “그 나라가 不咸山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晉나라에서는 肅愼으로, 北魏에서는 勿吉로, 隋나라에서는 靺鞨로 불렀다. 『一統志』에서는 “長白山[白頭山]이 吉林 鳥喇城 동남쪽에 있는데, 옛 이름이 不咸山이다. 지금의 奉天府 鐵嶺縣과 承德縣 및 寧古塔과 黑龍江이 모두 挹婁國의 땅이었다. 挹婁의 옛 성이 지금의 鐵嶺 남쪽 60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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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천여 리에 있는데, 동쪽은 큰 바다에 닿고, 남쪽은 북옥저와 접하였으며,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주 002
번역주 002)
原註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魏書』 〈물길국〉조에서 “和龍에서 북쪽으로 300여 리 떨어진 곳에 善玉山이 있다. 이 산 북쪽으로 13일을 가면 祁黎山이 나온다. 또 북쪽으로 7일을 가면 如洛環水에 이르는데, 물은 너비가 한 리 조금 더 된다. 〈살펴보건대, 즉 弱水이다.〉 또 북쪽으로 15일을 가면 太魯水가 나온다. 또 동북쪽으로 18일을 가면 그 나라에 이른다. 나라 안에 큰 강이 흐르는데, 너비가 세 리 조금 더 된다. 강 이름이 速末水이다.”라고 하였다. 〈『遼史』에서는 “聖宗 太平 4년에 조서를 내려 鴨子河를 混同江으로 바꾸도록 했다.”고 한다. 『一統志』에서는 “長白山에서 나오는데, 즉 옛 栗末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東夷考略』에서 이르기를, “混同江은 북쪽으로 灰扒夷의 땅을 지나는데, 일명 灰扒江이라 하고, [混同江은 또] 兀喇夷의 땅을 지나는데, 일명 兀喇江이라 한다. [混同江은] 또 북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르러 서쪽으로 굽이돌아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니, 통칭으로 鳥龍江이라 한다.”고 하였다.〉 『唐書』, 「北狄傳」에 “黑水靺鞨은 肅愼의 땅에 거주한다.”고 하였다. 〈『明統志』에서는 “黑龍江이 開原城의 북쪽으로 2천 5백 리 거리에 있고, 北山에서 원출하는데, 黑水靺鞨이 옛날에 이 땅에서 거주했다.”고 하였다.〉 동쪽은 바닷가이고, 서쪽은 突厥에 속하며, 남쪽은 高麗이고, 북쪽은 室韋이다. 그들 부락 중에서 우두머리 부락은 粟末部라고 부르는데, 가장 남쪽에 있고, 太白山〈즉 長白山이다.〉에 이어져 있으며, 粟末水에 의지하여 산다. 동북쪽에 汨昢部가 있고, 그 다음은 安居骨部가 있으며, 더 동쪽으로 가면 拂涅部가 있고, 서북쪽에는 黑水部가 있으며, 粟末部의 동쪽에는 白山部가 있는데, 黑水에서 가장 북쪽에 거주한다. 渤海는 본래 粟末靺鞨인데, [그 왕은] 성씨가 大氏이다. 高句麗가 멸망당한 후, 무리를 이끌고 挹婁의 東牟山에서 [나라를] 보전하였다. 唐나라 睿宗 先天 중에 大祚榮을 渤海郡王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비로소 靺鞨이라는 호칭을 버리고 오로지 渤海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후에 遼나라가 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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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역은 산이 많고 험준하다. 사람의 생김새는 부여인과 흡사하지만, 언어는 서로 다르다. 오곡과 마포가 있으며, 적옥과 좋은 담비가 산출된다. 군장(君長)이 없고, 읍락마다 각각 대인(大人)이 있다주 003
번역주 003)
無君長: 『진서』 권97, 열전67 동이 숙신씨. ‘父子世爲君長’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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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림 속에서 거주하는데, 그 지방 기후가 매우 추워서 항상 굴속에서 사는데주 004
번역주 004)
原註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北史』에서 ‘深未怛室韋는 겨울에 혈거 생활을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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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의] 깊이가 깊은 것을 귀하게 여겨서 대가(大家)는 아홉 계단에 이른다주 005
번역주 005)
읍루의 거주: 수혈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에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石鏃과 毒矢를 사용하는 점 등이 Aleuts, Chuckchee, Korvak, Giliyak 등의 이른바 고아시아족의 풍속과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三上次男, 1966). 반드시 읍루의 종족적 계통을 나타내는 고유한 특성으로 볼 수는 없다. 다만 읍루의 후예로 여겨지는 여진족·만주족의 언어와 고아시아족의 언어가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읍루를 고아시아족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보기도 한다(和田淸,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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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돼지 기르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 고기는 먹고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겨울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그 두께를 몇 푼이나 되게 하여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에는 알몸에다 한 자 정도의 베 조각으로 앞뒤만 가리고 다닌다. 사람들은 냄새가 나고 더럽고도 불결한데, 측간을 가운데에 만들어 놓고, 그 둘레에 모여 산다. 한나라 이후 부여에 신속(臣屬)하였다. 종족의 숫자는 비록 적지만 용력이 있는 자가 많고, 험한 산중에 산다. 또한 활을 잘 쏘아서 사람의 눈을 맞출 수 있다. 활의 길이는 네 자[尺] 정도인데, 그 위력은 쇠뇌[弩]와 같다. 화살대로는 싸리나무를 쓰는데, 그 길이는 한 자 여덟 치나 된다. 청석(靑石)으로 화살촉을 만들고, 촉에는 모두 독약을 바르기 때문에 사람을 맞추면 바로 죽는다주 006
번역주 006)
原註 集解: 惠棟이 말하길, “『肅愼國記』에서 ‘石山이 나라 동북쪽에 있는데, 이를 취할 때면 반드시 먼저 신에게 기도한다. 그 돌이 날카로워 쇠를 뚫는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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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 타는 것에 익숙하고, 노략질하는 것을 좋아하므로 이웃 나라가 꺼리고 걱정거리로 여겼으나,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동이(東夷)나 부여는 먹고 마실 때 대개 조두(俎豆)를주 007
번역주 007)
原註 集解: 劉攽이 말하길, “‘東夷 夫餘, 飮食類此, 皆有俎豆’의 글을 살펴보면, ‘此’자가 하나 많다.”고 하였다. 沈欽韓이 말하길, “夫餘는 晋나라 때도 여전히 그 나라를 보존했다.”고 하였다. 『晋書』에서 太康 6년에 “[夫餘는] 慕容廆에게 습격받아 격파당하였다. 그 왕 依慮는 자살하고, 자제들은 沃沮로 달아났다. 다음 해에 夫餘의 다음 왕인 依羅가 東夷校尉 何龕에게 사신을 보내어 백성을 이끌고 돌아가 옛 나라를 다시 세우려 하니 [도와달라고 하였다.] 晋나라 말에 이르러 비로소 百濟가 있었다.”고 하였다. 『魏書』에서 이르길, “百濟는 그 선조가 夫餘에서 왔다.”고 하였다. 『南史』와 『北史』에서는 모두 ‘[夫餘]가 馬韓의 일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北史』에서는 “東明이 夫餘에 이르러 왕이 되었는데, [왕위가] 仇台에 이르렀고 [仇台는] 신의가 돈독하여 처음 帶方의 땅에 나라를 세웠다. [이때] 遼東의 公孫度이 그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그의 나라는] 드디어 東夷 중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三國志』, 「魏志」의 夫餘에 관한 일화이다.〉 “당초 百家가 바다를 건넜으므로 [나라이름을] 百濟라 했다.”고 하였다. 『隋書』에서는 “百濟가 高麗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두 사서가 서술한 바는 선계가 다 夫餘國이라는 것이다. 『三國志』, 「魏志」에서 “尉仇台가 죽자 [왕위가] 簡位·麻余·依慮에 3대에 걸쳐 계승되었다. 依慮는 나라가 망하고 자살하여 百濟의 호칭이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沈約과 姚察이 쓴 글에서는 “東晋代에 高句麗가 遼東을 침략하였고, 百濟 또한 遼西에 웅거하였다.”고 한다. 百濟가 나라를 세운 내력을 추고해보자. 마땅히 依慮가 자살하고, 자식이 沃沮로 도망가 몸을 보전했을 것이다. 이때 百家가 바다를 건넜으므로 百濟라고 호칭하였다. 晋나라 이후 百濟는 있고, 沃沮는 없으니, 가히 漢·魏代의 沃沮는 즉 六朝時代의 百濟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夫餘는 후에 또 스스로 구토를 회복하였으니, 양국이 병립하게 되었다. 〈『唐書』에서 “百濟의 왕인 扶餘璋은 여전히 扶餘를 성으로 삼고 있으니, 분명히 그 뿌리가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魏書」에서 “世宗이 使臣을 불러 보았는데, 芮弗悉은 夫餘는 勿吉에 의해 쫓겨났고, 渉羅는 百濟가 병탄한 바이니, 즉 두 나라는 병립하여 또 200년이 되었다고 하였다.” 『隋史』 등에서는 後漢 말기로 생각하여 百濟로 부르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여러 사서의 「東夷傳」에 두 나라의 원류는 다 알지 못한다. 대개 扶餘는 中國에 가는 데 통하지 않았으니, 인멸되었을 따름이다. 魏收와 宋祁는 “百濟는 夫餘의 別種이다.”라고 했는데, 대개 잘못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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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하지만, 오직 읍루만은 홀로 법도가 없으니, 법속이 [동이 중에서] 가장 기강이 없다.

  • 번역주 001)
    문헌기록에 숙신이란 명칭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史記』와 『春秋左氏傳』이다. 이른바 古肅愼이다. 『後漢書』와 『三國志』 등 후대의 문헌에서는 읍루를 古肅愼과 관련해서 설명하였다. 다음의 사료가 참고된다. 『後漢書』 권70, 鄭孔荀列傳60 孔融. “操討烏桓 建安十二年也 又嘲之曰 大將軍遠征 蕭條海外 昔肅愼不貢楛矢 國語曰 昔武王剋商 通于九夷百蠻 於是肅愼氏貢楛矢石砮 其長尺有咫 肅愼國記曰 肅愼氏 其地在夫餘國北 東濱大海 魏略曰 挹婁一名肅愼氏.”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러한 후대의 인식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原註 集解: 沈欽韓이 말하였다. 『元史』, 「地理志」에서 “瀋陽路는 본래 挹婁의 옛 땅이고, 또한 開元路는 옛 肅愼의 땅이다.”라고 하였다. 『通典』에서는 “그 나라가 不咸山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晉나라에서는 肅愼으로, 北魏에서는 勿吉로, 隋나라에서는 靺鞨로 불렀다. 『一統志』에서는 “長白山[白頭山]이 吉林 鳥喇城 동남쪽에 있는데, 옛 이름이 不咸山이다. 지금의 奉天府 鐵嶺縣과 承德縣 및 寧古塔과 黑龍江이 모두 挹婁國의 땅이었다. 挹婁의 옛 성이 지금의 鐵嶺 남쪽 60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原註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魏書』 〈물길국〉조에서 “和龍에서 북쪽으로 300여 리 떨어진 곳에 善玉山이 있다. 이 산 북쪽으로 13일을 가면 祁黎山이 나온다. 또 북쪽으로 7일을 가면 如洛環水에 이르는데, 물은 너비가 한 리 조금 더 된다. 〈살펴보건대, 즉 弱水이다.〉 또 북쪽으로 15일을 가면 太魯水가 나온다. 또 동북쪽으로 18일을 가면 그 나라에 이른다. 나라 안에 큰 강이 흐르는데, 너비가 세 리 조금 더 된다. 강 이름이 速末水이다.”라고 하였다. 〈『遼史』에서는 “聖宗 太平 4년에 조서를 내려 鴨子河를 混同江으로 바꾸도록 했다.”고 한다. 『一統志』에서는 “長白山에서 나오는데, 즉 옛 栗末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東夷考略』에서 이르기를, “混同江은 북쪽으로 灰扒夷의 땅을 지나는데, 일명 灰扒江이라 하고, [混同江은 또] 兀喇夷의 땅을 지나는데, 일명 兀喇江이라 한다. [混同江은] 또 북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르러 서쪽으로 굽이돌아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니, 통칭으로 鳥龍江이라 한다.”고 하였다.〉 『唐書』, 「北狄傳」에 “黑水靺鞨은 肅愼의 땅에 거주한다.”고 하였다. 〈『明統志』에서는 “黑龍江이 開原城의 북쪽으로 2천 5백 리 거리에 있고, 北山에서 원출하는데, 黑水靺鞨이 옛날에 이 땅에서 거주했다.”고 하였다.〉 동쪽은 바닷가이고, 서쪽은 突厥에 속하며, 남쪽은 高麗이고, 북쪽은 室韋이다. 그들 부락 중에서 우두머리 부락은 粟末部라고 부르는데, 가장 남쪽에 있고, 太白山〈즉 長白山이다.〉에 이어져 있으며, 粟末水에 의지하여 산다. 동북쪽에 汨昢部가 있고, 그 다음은 安居骨部가 있으며, 더 동쪽으로 가면 拂涅部가 있고, 서북쪽에는 黑水部가 있으며, 粟末部의 동쪽에는 白山部가 있는데, 黑水에서 가장 북쪽에 거주한다. 渤海는 본래 粟末靺鞨인데, [그 왕은] 성씨가 大氏이다. 高句麗가 멸망당한 후, 무리를 이끌고 挹婁의 東牟山에서 [나라를] 보전하였다. 唐나라 睿宗 先天 중에 大祚榮을 渤海郡王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비로소 靺鞨이라는 호칭을 버리고 오로지 渤海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후에 遼나라가 멸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無君長: 『진서』 권97, 열전67 동이 숙신씨. ‘父子世爲君長’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04)
    原註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北史』에서 ‘深未怛室韋는 겨울에 혈거 생활을 한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읍루의 거주: 수혈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에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石鏃과 毒矢를 사용하는 점 등이 Aleuts, Chuckchee, Korvak, Giliyak 등의 이른바 고아시아족의 풍속과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三上次男, 1966). 반드시 읍루의 종족적 계통을 나타내는 고유한 특성으로 볼 수는 없다. 다만 읍루의 후예로 여겨지는 여진족·만주족의 언어와 고아시아족의 언어가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읍루를 고아시아족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보기도 한다(和田淸, 1955).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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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原註 集解: 惠棟이 말하길, “『肅愼國記』에서 ‘石山이 나라 동북쪽에 있는데, 이를 취할 때면 반드시 먼저 신에게 기도한다. 그 돌이 날카로워 쇠를 뚫는다.’고 하였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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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原註 集解: 劉攽이 말하길, “‘東夷 夫餘, 飮食類此, 皆有俎豆’의 글을 살펴보면, ‘此’자가 하나 많다.”고 하였다. 沈欽韓이 말하길, “夫餘는 晋나라 때도 여전히 그 나라를 보존했다.”고 하였다. 『晋書』에서 太康 6년에 “[夫餘는] 慕容廆에게 습격받아 격파당하였다. 그 왕 依慮는 자살하고, 자제들은 沃沮로 달아났다. 다음 해에 夫餘의 다음 왕인 依羅가 東夷校尉 何龕에게 사신을 보내어 백성을 이끌고 돌아가 옛 나라를 다시 세우려 하니 [도와달라고 하였다.] 晋나라 말에 이르러 비로소 百濟가 있었다.”고 하였다. 『魏書』에서 이르길, “百濟는 그 선조가 夫餘에서 왔다.”고 하였다. 『南史』와 『北史』에서는 모두 ‘[夫餘]가 馬韓의 일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北史』에서는 “東明이 夫餘에 이르러 왕이 되었는데, [왕위가] 仇台에 이르렀고 [仇台는] 신의가 돈독하여 처음 帶方의 땅에 나라를 세웠다. [이때] 遼東의 公孫度이 그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그의 나라는] 드디어 東夷 중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三國志』, 「魏志」의 夫餘에 관한 일화이다.〉 “당초 百家가 바다를 건넜으므로 [나라이름을] 百濟라 했다.”고 하였다. 『隋書』에서는 “百濟가 高麗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두 사서가 서술한 바는 선계가 다 夫餘國이라는 것이다. 『三國志』, 「魏志」에서 “尉仇台가 죽자 [왕위가] 簡位·麻余·依慮에 3대에 걸쳐 계승되었다. 依慮는 나라가 망하고 자살하여 百濟의 호칭이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沈約과 姚察이 쓴 글에서는 “東晋代에 高句麗가 遼東을 침략하였고, 百濟 또한 遼西에 웅거하였다.”고 한다. 百濟가 나라를 세운 내력을 추고해보자. 마땅히 依慮가 자살하고, 자식이 沃沮로 도망가 몸을 보전했을 것이다. 이때 百家가 바다를 건넜으므로 百濟라고 호칭하였다. 晋나라 이후 百濟는 있고, 沃沮는 없으니, 가히 漢·魏代의 沃沮는 즉 六朝時代의 百濟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夫餘는 후에 또 스스로 구토를 회복하였으니, 양국이 병립하게 되었다. 〈『唐書』에서 “百濟의 왕인 扶餘璋은 여전히 扶餘를 성으로 삼고 있으니, 분명히 그 뿌리가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魏書」에서 “世宗이 使臣을 불러 보았는데, 芮弗悉은 夫餘는 勿吉에 의해 쫓겨났고, 渉羅는 百濟가 병탄한 바이니, 즉 두 나라는 병립하여 또 200년이 되었다고 하였다.” 『隋史』 등에서는 後漢 말기로 생각하여 百濟로 부르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여러 사서의 「東夷傳」에 두 나라의 원류는 다 알지 못한다. 대개 扶餘는 中國에 가는 데 통하지 않았으니, 인멸되었을 따름이다. 魏收와 宋祁는 “百濟는 夫餘의 別種이다.”라고 했는데, 대개 잘못 얻은 것이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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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루(挹婁)의 특성과 문화 자료번호 : jd.k_0003_0075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