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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성씨록』 제23권에 이르기를...]

『성씨록』 제23권에 이르기를, 아지왕(阿智王; 아치와우)은 예전천황(譽田天皇; 호무타노스메라리코토)[시호는 응신(應神; 오우진)이다.]의 시대에 본국의 난을 피하여, 어머니 및 처자, 모제인 천흥덕(迁興德)과 일곱 성의 한인(漢人; 아야히토)을 이끌고 귀화하였다. 일곱 성의 첫 번째는 단(段; 단)[고기(古記)에는 단광공(段光公; 단쿠와우코우), 자는 부등(富等; 후토)이라고 하였다. 어떤 책에서는 원성(員姓)이라고 하였다.]이다. 이는 고향촌주(高向村主; 다카무쿠노스구리), 고향사(高向史; 다카무쿠노후히토), 고향조사(高向調使; 다카무쿠노츠키츠카히), 평수(評首; 고호리노오비토), 민사주수(民使主首; 다미츠카히노오비토)등의 조상이다. 다음은 이성(李姓)이라고 한다. 이는 형부사(刑部史; 오사카베노후히토)의 조상이다. 다음은 조곽성(皂郭姓; 사우쿠와쿠세이)이라고 한다. 이는 판합부수(坂合部首; 사카히베노오비토), 좌대수(佐大首; 사타노오비토) 등의 조상이다. 다음은 주성(朱姓; 슈우세이)이라고 한다. 이는 소시(小市; 워치), 좌나의(佐奈宜; 사나케)의 조상이다. 다음은 다성(多姓; 다세이)이라고 한다. 이는 회전조사(檜前調使; 히노쿠마노츠키노츠카히) 등의 조상이다. 다음은 조성(皂姓; 사우세이)이라고 한다. 이는 대화국(大和國; 야마토노쿠니) 우태군(宇太郡; 우다노코호리) 좌파다촌추(佐波多村主; 사하타노스구리), 장번부(長幡部; 나가하타베) 등의 조상이다. 다음은 고성(高姓; 가우세이)이라고 한다. 이는 회전촌주(檜前村主; 히노쿠마노스구리)의 조상이다.
천황이 이들이 온 뜻을 긍휼하게 여겨 아지왕이라고 이름짓고, 사주(使主; 오미)로 삼았다. 대화국 회전군의 마을을 주어 살도록 하였다. 이때 아지사주(阿智使主; 아치노오미)가 아뢰기를, “신이 입조할 때 원래 같이 살던 사람들이 이미 흩어졌는데, 지금 듣건대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나라에 있다고 합니다. 바라옵건대 사람을 보내 불러오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천황이 곧 사신을 보내어 불러오게 하였다. 대초료천황(大鷦鷯天皇; 오사자키노스메라미코토)[시호는 인덕(仁德; 닌토쿠)이다.] 시대에 온 마을이 따라왔다. 지금의 고향촌추(高向村主; 가카무쿠노스구리), 서파다촌주(西波多村主; 가후치노하타노스구리), 평방촌주(平方村主; 히라카타노스구리), 석촌촌주(石村村主; 이하레노스구리), 포파촌주(飽波村主; 아쿠나미노스구리), 위촌촌주(危寸村主; 도노키노스구리), 장야촌주(長野村主; 나가노노스구리), 비가촌주(俾加村主; 히카노스구리), 모소산촌주(茅沼山村主; 치누노야마노스구리), 고궁촌주(高宮村主; 다카미야노스구리), 대석촌주(大石村主; 오이시노스구리), 비조촌주(飛鳥村主; 아스카노스구리), 서대우촌주(西大友村主; 가후치노오토모노스구리), 장전촌주(長田村主; 나가타노스구리), 금부촌주(錦部村主; 니시코리노스구리), 전촌촌주(田村村主; 다무라노스구리), 인해촌주(忍海村主; 오시누미노스구리), 좌미촌주(佐味村主; 사비노스구리), 상원촌주(桑原村主; 구하하라노스구리), 백조촌주(白鳥村主; 시라토리노스구리), 액전촌주(額田村主; 누카타노스구리), 모좌촌주(牟佐村主; 무사노스구리), 갑하촌주(甲賀村主; 가후카노스구리), 안작촌주(鞍作村主; 구라츠쿠리노스구리), 파마촌주(播磨村主; 하리마노스구리), 한인촌주(漢人村主; 아야히토노스구리), 금래촌주(今來村主; 이마키노스구리), 석촌촌주(石寸村主; 이하키노스구리), 금작촌주(金作村主; 가나츠쿠리노스구리), 미장취각촌주(尾張吹角村主; 워하리노후에노스구리) 등은 그 후예이다.
그때 아지왕이 아뢰기를, “금래군(今來郡; 이마키노코호리)을 세우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후에 고쳐서 고시군(高市郡; 다케치노코호리)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람이 아주 많고 살 땅은 좁아서, 다시 여러 지역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섭진(攝津; 세츠츠), 삼하(參河; 미카하), 근강(近江; 아후미), 파마(播磨; 하리마), 아파(阿波; 아하) 등의 한인촌주(漢人村主; 아야히토노스구리)가 이들이다.
 
【주석】
1. 성씨록제입삼권왈(姓氏錄第廿三卷曰)
이 일문은, 〈판상계도(坂上系圖)〉 아지왕(阿智王)조에 인용된 것으로, 『신찬성씨록』 우경 제번(상) 「판상대숙녜(坂上大宿禰)」 조의 일문이다. 현재의 초본(抄本)에는, “후한 영제의 아들 연왕에서 나왔다(出自後漢靈帝男延王也.)”라고만 되어 있다.
2. 아지왕(阿智王)
아지사주(阿智使主)라고도 한다. 아지왕에 대해서는 좌경(左京) 제번(상) 「목진기촌(木津忌寸)」 조(755) 아지사주(阿智使主) 참조.
3. 예전천황(譽田天皇)
『일본서기』 응신천황(應神天皇) 20년 9월조에 “왜한직(倭漢直)의 조상 아지사주(阿知使主)와 그 아들 도가사주(都加使主)가 그 당류(黨類) 17현을 이끌고 내귀(來歸)하였다(倭漢直祖阿知使主, 其子都加使主, 竝率己之黨類十七縣, 而來歸焉.)”고 하였다. 『속일본기』연력(延曆) 4년 6월 계유조에서는 “우위사독(右衛士督) 종3위 겸 하총수(下總守) 판산대기촌예전마려(坂上大忌寸苅田麻呂) 등이 표를 올려 아뢰기를, ‘신들은 본래 후한 영제의 증손 아지왕(阿智王)의 후손입니다. 한이 멸망하고 위(魏)가 서자 아지왕은 신성한 소의 가르침에 따라 나와서 대방으로 갔습니다. 곧 상서로운 보대를 얻었는데 그 모습이 궁성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국읍을 세우고 사람들을 길렀습니다.’라고 하였다. 후에 부형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동쪽 나라에 성스러운 군주가 있다고 하니 어찌 귀화하여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이곳에 오래 머문다면 멸망을 당할까 두렵다.’라고 하고, 곧 모제인 천흥덕(迁興德) 및 일곱 성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귀화하였다. 곧 예전천황이 천하를 다스릴 때이다(右衛士督從三位兼下總守坂上大忌寸田苅麻呂等上表言, 臣等本是後漢靈帝之曾孫阿智王之後也. 漢祚遷魏. 阿智王因神牛教, 出行帶方, 忽得寶帶瑞. 其像似宮城. 爱建國邑, 育其人庶, 後召父兄告曰. 吾聞. 東國有聖主. 何不歸從乎. 若久居此處, 恐取覆滅. 卽携母弟迁興德及七姓民. 歸化來朝. 是則譽田天皇治天下之御世也.)”라고 하여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4. 천흥덕(迁興德)
『속일본기』 연력(延曆) 4년 6월 계유조에 아지왕의 모제(母弟)로 이름이 보인다. 『속일본기』 의 사본에 따라서 천(迁)이 오(迕)나 우(迂)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5. 단(段) [고기단광공자부등일운원성(古記段光公字富等一云員姓)]
우경 제번(하) 「군수(郡首)」 조(854)에는 “단성부공, 다른 이름은 부등(富等)이다(段姓夫公, 一名作富等.)”라고 하였다. 또한 고향촌주(高向村主)와 조상이 같으며, 단성부공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단광공(段光公)과 단부공(段夫公)의 ‘광(光)’과 ‘부(夫)’는 한자가 유사하므로, 어느 한쪽이 오자로 생각된다.
한편 부등(富等)이라는 자(字)는 보덕공(寶德公)과 유사하다. 우경 제번(하) 「운제련(雲梯連)」 조에 “고향촌주와 조상이 같다. 종보덕공의 후손이다(高向村主同祖. 宗寶德公之後也.)”라거나, 산성국 제번 「민사수(民使首)」 조에 “고향촌주와 조상이 같다. 보덕공의 후손이다”라고 한 것 등에서 보덕공이 보인다. 또한 미정잡성(未定雜姓) 산성국(山城國)「혈태촌주(穴太村主)」 조에 “조씨 보덕공의 후손이다(曹氏寶德公之後也.)”라고 하였으므로, 본문의 원성(員姓)은 조성(曹姓)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
6. 고향촌주(高向村主)
우경 제번(하) 「고향촌주(高向村主)」 조(852)에 위무제(魏武帝)의 태자(太子) 문제(文帝)로부터 나왔다고 하였다.
7. 고향사(高向史)
고향(高向; 다카무쿠)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하내국(河內國) 금부군(錦部郡) 금부향(錦部鄕) 고향촌(高向村)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의 대판부(大阪府) 하내장야시(河內長野市) 고향(高向)이다.
고향사의 원래 성은 한인(漢人)이다. 한인이라는 성을 쓴 인물로는 고향한인현리(高向漢人玄理, 『일본서기』 推古 16년 9월 신이조 등)가 있으며, 사(史)로 성이 바뀐 이후의 인물로는 고향한인현리가 성을 바꾼 고향사현리(高向史玄理, 『일본서기』 孝德 즉위전기 皇極 4년 6월 경술조 등)를 비롯하여, 고향비등진립(高向毗登眞立, 神護景雲 3년 9월 11일부 「香山藥師寺鎭三綱牒」, 『대일본고문서』5-703 등), 고향사공수(高向史公守, 『類聚國史』99, 叙位, 天長 4년 정월 갑신조)가 있다.
고향사현리는 『일본서기』 추고(推古) 16년 9월 신사조에서 당객(唐客) 배세청(裴世淸)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다시 소야매자신(小野妹子臣)을 대사(大使)로 삼고, 이때 학생 왜한복인(倭漢福因) 고향한인현리(高向漢人玄理) 등 8인을 함께 보냈다고 하였다. 서명(舒明) 12년 10월 을해조에 대당 학문승 청안(淸安)과 학생 고향한인현리가 신라를 거쳐서 돌아왔다고 하였다. 효덕천황(孝德天皇) 즉위전기(卽位前紀), 황극(皇極) 4년 6월경술조에 사문(沙門) 민법사(旻法師)와 고향사현리를 국박사(國博士)로 삼았다는 내용이 보이고, 대화(大化) 2년 9월조에서는 소덕(小德) 고향박사흑마려(高向博士黑麻呂)의 이름이 현리(玄理)라고 하였다. 대화 3년 시세(是歲)조에서는 신라가 상신(上臣) 대아찬(大阿湌) 김춘추(金春秋) 등을 보내므로, 박사(博士) 고향흑마려(高向黑麻呂)와 소산중(小山中) 중신련압웅(中臣連押熊)을 보내 응대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대화 5년 2월 시월(是月)조에는 박사 고향현리와 승려 민에게 명하여 팔성백관(八省百官)을 설치하도록 하였으며, 백치(白雉) 5년 2월에 대금상(大錦上) 고향사현리(高向史玄理)를 대당압사(大唐押使)로 삼아 신라도(新羅道)를 따라 당에 조공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고향비등진립(高向毗登眞立)은 섭진직(攝津職) 동생군(東生郡)의 주장(主帳)이다. 고향사공수(高向史公守)는 『유취국사(類聚國史)』(권제99, 叙位, 천장 4년 정월 갑신조)에 순찰사(巡察使)의 보고에 따라 군사(郡司)들에게 관위(冠位)를 올려 주었는데, 정6위상 고향사공수와 미노숙녜청정(美努宿禰淸貞)에게 외종5위하를 내렸다는 내용이 보인다. 공수 역시 섭진국 동생군의 군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8. 고향조사(高向調使)
씨명 중에서 고향(高向)은 율령제하의 하내국(河內國) 금부군(錦部郡) 금부향(錦部鄕) 고향촌(高向村)이라는 지명에서 온 것이고, 조사(調使)는 조(調)의 징수를 담당하는 관리라는 뜻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고향조사씨 일족으로는 고향조사만려(高向調使万呂, 天平勝寶 2년 8월 28일부 「조동사사해(造東大寺司解)」, 『대일본고문서』 25-134)가 있다. 조사씨(調使氏)에 대해서는 회전조사(檜前調使) 항목 참조.
9. 평수(評首)
군수(郡首; 고호리노오비토)와 같다. 우경 제번(하) 「군수(郡首)」 조에서 “고향촌주(高向村主)와 조상이 같다. 단성부공(段姓夫公)[다른 이름은 부등(富等)이라고 한다.]의 후손이다.”라고 하였다.
10. 민사주수(民使主首)
민사수(民使首)와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산성국 제번 「민사수(民使首)」 조에 “고향촌주(高向村主)와 조상이 같다. 보덕공(寶德公)의 후손이다”라고 하였다.
11. 이성(李姓)
『당서(唐書)』 「재상세계표(宰相世系表)」 에 “이씨는 영이라는 성에서 나왔다(李氏出自嬴姓.)”라는 내용이 보인다. 또한 오제(五帝)의 한 사람인 순(舜)의 시대에 대리(大理)라는 관직에 있었던 고요(皐陶)의 자손이 대대로 대리에 임명되었고, 대리의 리(理)를 리(李)로 고쳐 성으로 삼았다는 전설이 있다.
12. 형부사(刑部史)
형부(刑部)라는 씨명은, 윤공천황(允恭天皇)의 황후로 전하는 인판대중희(忍坂大中姬, 忍坂之木中津比賣命)의 명대부(名代部)였던 형부의 반조씨족(伴造氏族)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형부사(刑部史)라는 씨족의 인명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섭진국 제번 「형부」조(1024)에 “오국 사람 이모의미에서 나왔다(出自吳國人李牟意彌也.)”라고 한 형부조와 동족으로 생각된다.
13. 조곽성(皂郭姓)
조곽성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조성(皂姓) 항목 참조.
14. 판합부수(坂合部首)
판합부(坂合部; 사카이베)라는 씨명은 경부(境部), 계부(堺部)라고도 표기하며, 수(首)는 경계의 획정을 담당한 판합부의 반조씨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섭진국 황별 「판합부(坂合部)」 조(233)에 “윤공천황 때 각 지역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지를 만들어 세웠다. 그래서 판합부련이라는 성을 내렸다(允恭天皇御世, 造立國境之標, 因賜姓坂合部連.)”라는 전승은 판합부(坂合部)라는 씨명에서 조작된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씨명의 연원을 판단하는 데 참고가 된다.
판합부수씨(坂合部首氏) 일족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판합부수씨에는 황별 씨족도 있어서, 대화국 황별 「판합부수」 조(220)에 “아배조신과 조상이 같다. 대언명의 후손이다(阿倍朝臣同祖. 大彦命之後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판합부수씨에 대해서는 「판합부수」 조 및 섭진국 황별 「판합부(坂合部)」 조(233) 참조.
15. 좌대수(佐大首)
좌대라는 씨명은 좌태(佐太; 사타)로도 표기하며, 율령제하의 하내국(河內國) 표전군(表田郡) 좌태향(佐太鄕), 즉 현재의 대판부(大阪府) 수구시(守口市) 좌태(佐太) 일대의 지명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좌대수 일족의 인명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이 좌대수씨가 후에 기촌(忌寸)이 되었다가 다시 숙녜(宿禰)가 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기촌과 숙녜라는 성을 가진 좌태씨의 원래 성은 직이므로 좌대수와는 다른 계통일 것이다. 원래 성이 기촌인 좌태숙녜씨(佐太宿禰氏)에 대해서는 우경 제번(상) 「좌태숙녜(佐太宿禰)」 조 참조. 또한 좌태국인(佐太國人, 弘仁 11년 10월 17일부 「大和國川原寺牒」 『平安遺文』 1-31)은 좌태숙녜(佐太宿禰) 일족일 것이다.
16. 주성(朱姓)
주성에 대해서는 오제(五帝)의 한 사람인 전욱(顓頊)의 후예가 주(周)나라 때 주국(邾國, 山東省 鄒縣 동남부)에 봉해졌으므로 주(朱)라는 성을 갖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17. 소시(小市)
소시(小市; 워치)라는 씨명은 월지(越智; 워치)라고도 표기하며, 율령제하의 대화국(大和國) 고시군(高市郡) 월지읍(越智邑), 즉 현재의 나량현(奈良縣) 고시군(高市郡) 고취정(高取町) 월지(越智)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소시 일족의 인명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으나, 월지고길(越智高吉, 長保 원년 12월 11일부 「東大寺返抄」 『平安遺文』 9-3495)이 일족일 가능성이 있다.
18. 좌내의(佐奈宜)
좌내의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하내국(河內國) 약강군(若江郡) 좌내의리(佐奈宜里), 즉 현재의 대판부(大阪府) 팔미시(八尾市) 삽천(澁川) 일대의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좌내 일족의 인명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19. 다성(多姓)
다(多)라는 성의 어원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일본영이기(日本靈異記)』 상권에 “대황후천황의 시대에 백제의 선사가 있었는데, 이름이 다라상이었다. 고시군 관내의 법기산사에 거주하였다(大皇后天皇之代, 有百濟禪師曰, 名多羅常. 住高市郡部內法器山寺.)”라고 하여 다라상이 보인다.
20. 회전조사(檜前調使)
회전(檜前; 히노쿠마)은 율령제하의 대화국(大和國) 고시군(高市郡) 회전향(檜前鄕), 즉 현재의 나량현(奈良縣) 고시군(高市郡) 명일향촌(明日香村) 회전(檜前)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과 관련이 있고, 조사(調使)는 조(調)의 징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회전조사씨 일족으로는, 회전조사안마려(檜前調使案麻呂, 『內證佛法相承血脈譜』 大日本國 大安寺 行表和上條), 회전조사백호(檜前調使百戶, 상동) 등이 있다.
회전조사안마려는 대화국(大和國) 갈상군(葛上郡) 고궁향(高宮鄕)의 호주인 대초위상(大初位上)의 관위를 가지고 있었다. 백호는 그의 아들로, 승려 이름은 행표(行表)이다. 홍인(弘仁) 10년 12월 5일에 찬정된 『내증불법상승혈맥보(內證佛法相承血脈譜)』 의 「대일본국대안사행표화상보(大日本國大安寺行表和上譜)」 에 “ 「행표화상도연(行表和上度緣)」을 살펴보니, 승려 행표는 (중략) 그는 천황을 받들기 위하여 천평(天平) 13년 12월 14일의 칙에 따라 출가하였고, 사주(師主)는 대안사의 당나라 승려 도선(道璿)이라고 하였다.연력(延曆) 13년의 「방주장(房主帳)」 에서는 전등법사위(傳燈法師位)라는 승위(僧位)를 가진 행표는 나이가 73세이며 법랍은 52세이고, 천평 15년 3월 29일에 흥복사(興福寺)북창원(北倉院)에서 수계하였다고 하였다. 연력 2년 정월 20일자 「최징도연안(最澄度緣案)」 에도 대국사전등법사위행표(大國師傳燈法師位行表)가 보인다(『平安遺文』8-3188).또한 『부상략기(扶桑略記)』 천평 15년 계미 3월 29일조에도 대안사(大安寺) 전등법사위행표(傳燈法師位行表)가 흥복사 북원(北院)에서 수계하였는데, 나이는 73세이고 법랍은 52세이며 사주는 대안사 당나라 승려 도선이라는 내용이 보인다. 『원형석서(元亨釋書)』권제16 원잡십지일조(願雜十之一條)에 승려 행표는 화주(和州) 갈상군(葛上郡) 사람인데 근주(近州)의 강사(講師)가 되었고 도선 선사의 선요(禪要)를 받았다고 하였다.
회전(檜前)이 붙지 않은 조사씨(調使氏)에는 수성(首姓)과 성이 없는 씨족이 있다. 조사수씨(調使首氏) 일족으로는 조사수난파만려(調使首難波万呂, 天平勝寶 5년 8월 10일부 「大納言藤原家牒」 4-97 등), 조사수(調使首, 闕名, 연월일 미상 『萬葉集』 13-3339)가 있으며, 조사씨에는 조사가령(調使家令, 天平寶字 4년 3월 21일부 「道守德太理啓」, 『대일본고문서』4-415), 조사행우(調使行友, 長元 八年 六月 十六日 「看督長見不注進狀」 『平安遺文』 2-703 등)가 있다. 조사씨에는 고향(高向)이 앞에 붙은 씨족이 있으므로, 이러한 조사수씨나 조사씨가 회전조사씨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고향조사씨에 대해서는 앞의 고향조사 항목 참조. 『속일본기』 보귀(寶龜) 원년 7월 기축조에 “금량대목동인의 아들 추마려등68인에게 회전과 조사부라는 성을 내렸다(今良大目東人子秋麻呂等六十八人賜姓檜前 …調使部.)”라고 한기사에는 조사부라는 씨명이 보인다.
21. 조성(皂姓)
중국의 25사에 조(皂)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명사(明史)』 권142에 조기장(皂旗張)이 보일 뿐이다.
22. 대화국우태군(大和國宇太郡)
우태군(宇太郡)은 토전군(菟田郡), 우타군(宇陁郡), 우타군(宇陀郡)으로도 표기한다. 이른 시기에는 토전현(菟田縣)으로 나타난다. 『일본서기』 신무(神武) 즉위전기(卽位前紀)무오년 8월 을미조에서 형활(兄猾)과 제활(弟猾)을 불러오게 하였는데 이 두 사람은 토전현(菟田縣)의 괴수(魁帥)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에서 토전군이 처음 보이는 것은 『일본서기』 황극(皇極) 3년 3월조인데, “왜국(倭國)이 보고하기를 최근에 토전군 사람 압판직(押坂直, 이름이 빠졌다)이 동자를 데리고 눈 위에 놀다가 토전산(菟田山)에 올라 보라색 버섯이 눈 속에서 자란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우태군은 현재의 나량현(奈良縣) 우타군(宇陀郡)이다.
23. 좌파다촌주(佐波多村主)
좌파다(佐波多)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대화국(大和國) 우타군(宇陁郡) 소번장(篠幡莊), 즉 현재의 나량현(奈良縣) 우타시(宇陀市) 진원(榛原) 소번(筱幡; 시노바타 혹은 사사하타)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진원(榛原) 산변(山邊)에는 지금도 소전신사(篠畑神社, 사사하타진자)가 있다. 좌파다촌주 일족의 이름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24. 장번부(長幡部)
장번부라는 씨명은 『상륙국풍토기(常陸國風土記)』 구자군(久慈郡)조 장번부의 원조(遠祖) 다저명(多氐命)과 관련된 전승에서 “그가 짓는 옷은 저절로 옷이 되어 재봉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를 내번이라고 한다(其所織服. 自成衣裳. 更無裁縫, 謂之內幡.)”라고 한 내번(內幡) 혹은 전복(全服)을 짜는 부(部)의 명칭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장번부는 전국적으로 설치되었으므로 장번부씨도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었을 것이다. 『상륙국풍토기』 에서 상륙국의 태전향(太田鄕)에 장번부(長幡部)의 신사가 있다는 사실을언급하고있으며, 『고사기』 개화천황단(開化天皇段)에서는신대근왕(神大根王)이 삼야국(三野國)의 국조(國造)인데 장번부련(長幡部連)의 조상이라고 하였다.
25. 고성(高姓)
고성에 대해서는 주(周)나라 때 제(齊)의 여상(呂尙)의 자손이 고(高, 山東省禹城縣 西南部) 지역에 봉해졌다는 전승이 있다.
26. 회전촌주(檜前村主)
회전(檜前)이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대화국(大和國) 고시군(高市郡) 회전향(檜前鄕), 즉 현재의 나량현(奈良縣) 고시군(高市郡) 명일향촌(明日香村) 회전 일대의 지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우경 제번(상) 「회전촌주(檜前村主)」 조에 한(漢) 고조(高祖)의 아들 제왕(齊王) 비(肥)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회전촌주씨 일족으로는 회전촌주도마려(檜前村主稻麻呂, 天平 9년 「但馬國正稅帳」, 『대일본고문서』 2-60), 회전촌주가도자(檜前村主家刀自, 天平寶字 6년 2월 1일 「增壹阿含經卷十跋語」 『寧樂遺文』 下-633), 회전촌주아고마려(檜前村主阿古麻呂, 「優婆塞貢進解」, 『대일본고문서』25-93)가 있다. 회전촌주에 대해서는 우경 제번(상) 「회전촌주」 조(832)참조.
27. 천황(天皇), 사주(使主)
천황은 예전천황(譽田天皇, 應神)이다. 사주(使主)는 한반도에서 사용되던 경칭으로 생각되며, 일본에서는 성(姓)이 되었다. 『일본서기』 현종천황(顯宗天皇) 즉위전기(卽位前紀)에서 사주(使主)를 ‘어미(於瀰; 오미)’라고 읽는다고 하였다.
28. 대화국회전군향(大和國檜前郡鄕)
『속일본기』 보귀(寶龜) 3년 4월 경오조에 선조인 아지사주(阿智使主)가 경도풍명궁어우천황(輕島豐明宮御宇天皇)의 시대에 17현의 인부(人夫)를 이끌고 귀화하자, 천황이 고시군(高市郡) 회전촌(檜前村)에 살게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전읍마려전기(田邑麻呂傳記)』 에서는 후한(後漢) 광무황제(光武皇帝)의 19대손 효령황제(孝靈皇帝)의 13대 아지왕(阿智王)이 응신천황 26년에 같은 성 100명을 이끌고 한조(漢朝)를 나와 본조(本朝)에 들어왔고 대화국(大和國) 회전(檜前)의 땅에 살게 되었다고 하였다. 회전군향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흠명천황(欽明天皇) 7년 7월조에서 천원민직궁(川原民直宮)이 회전읍(槍前邑) 사람이라고 하였다.
29. 고향촌주(高向村主)
고향촌주에 대해서는 우경 제번(하) 「고향촌주(高向村主)」 조(852) 참조.
30. 서파다촌주(西波多村主)
서파다(西波多)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하내국(河內國) 자전군(茨田郡) 번다향(幡多鄕), 즉 현재의 대판부(大阪府) 침옥천시(寢屋川市) 진(秦; 하타)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서파다촌주라는 씨성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31. 평방촌주(平方村主)
평방(平方; 히라가타)이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하내국(河內國) 자전군(茨田郡) 매방읍(枚方邑), 즉 현재의 대판부(大阪府) 매방시(枚方市) 매방(枚方; 히라가타)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평방촌주라는 씨성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32. 석촌촌주(石村村主)
석촌(石村)이라는 씨명은 반여(磐余)라고도 표기하며, 율령제하의 대화국(大和國) 십시군(十市郡) 반여촌(磐余村), 즉 현재의 나량현(奈良縣) 앵정시(櫻井市) 및 강원시(橿原市)일대를 뜻하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석촌촌주 일족으로는 석촌촌주석순(石村村主石循, 『속일본기』 天平寶字 8년 9월 임자조 등), 석촌촌주압승(石村村主押繩, 『속일본기』天平神護 원년 4월 정해조) 등이 있다. 『속일본기』 에 따르면 좌경인(左京人) 외위장감(外衛將監) 종5위하 석촌촌주석순 등 3인과 삼하국(參河國) 벽해군(碧海郡) 사람 종8위상 석촌촌주압승 등 9인에게 판상기촌(坂上忌寸)이라는 성을 내렸다고 하였다.
판상기촌씨가 된 이후의 인물로는 석촌촌주석순(石村村主石循)이 씨성을 바꾼 판상기촌석순(坂上忌寸石循), 석순의 아들인 판상기촌씨성(坂上忌寸氏成, 寶龜 10년 윤5월 1일「大般若波羅蜜多經卷第百七十六奧書」 6-601), 판상기촌추수(坂上忌寸秋穗, 상동)가 있다. 석촌촌주압승에 대해서는 [일문23] 성씨록왈조(姓氏錄曰條)의 삼하국(參河國) 판상기촌(坂上忌寸) 항목 참조.
33. 포파촌주(飽波村主)
포파(飽波; 아쿠나미)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대화국(大和國) 평군군(平群郡) 포파향(飽波鄕), 즉 현재의 나량현(奈良縣) 생구군(生駒郡) 안도촌(安堵村)의 지명과 관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포파촌주씨 일족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34. 위촌촌주(危寸村主)
위촌(危寸)이라는 씨명은 토촌(兔寸; 도노키)을 잘못 옮겨 쓴 것이고, 원래 토촌촌주(兔寸村主, 도노키노스구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토촌이라면 이 씨명은, 율령제하의 화천국(和泉國) 대조군(大鳥郡) 등내기(等乃伎; 도노키), 현재의 대판부(大阪府) 고석시(高石市) 부목(富木; 도노키)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고사기』 인덕천황단(仁德天皇段)에 “이 시대에 토촌하(兔寸河; 도노키가와)의 서쪽에 큰 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에 아침 햇살이 비치면 그림자가 담로도(淡路島)에 이르고, 저녁 햇살이 비치면 그 그림자가 고안산(高安山)을 넘었다”라고 하였다. 『파마국풍토기(播磨國風土記)』 찬용군(讚容郡) 중천리(中川里)조에, “하내국(河內國) 토촌촌(兔寸村)”이 보인다. 또한 『연희식(延喜式)』 신명장(神名帳)의 화천국(和泉國) 대도군(大鳥郡)조에 등내기신사(等乃伎神社)가 실려 있다. 위촌촌주라는 씨성을 가진 인물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35. 장야촌주(長野村主)
장야(長野)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하내국(河內國) 지기군(志紀郡) 장야향(長野鄕), 즉현재의 대판부(大阪府) 등정사시(藤井寺市) 장야(長野)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야촌주라는 씨성을 가진 인물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우경 제번(상) 「장야련(長野連)」 조 및 하내국 제번 「장야련(長野連)」 조에서 산전숙녜(山田宿禰)와 조상이 같으며 충의(忠意)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므로 동족관계라고 생각된다.
36. 비가촌주(俾加村主)
비가(俾加)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대화국(大和國) 갈상군(葛上郡) 피통(避筒), 즉 현재의 나량현(奈良縣) 어소시(御所市) 조처(朝妻)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가촌주라는 씨성을 가진 인물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37. 모소산촌주(茅沼山村主)
모소산(茅沼山)이라는 씨명은, 『일본서기』 안한천황(安閑天皇) 원년 1월 갑자조에 모소산둔창(茅沼山屯倉)의 모소산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모소산은 현재의 대판부(大阪府) 천좌야시(泉佐野市) 상지향(上之鄕) 부근의 지명이다. 모소산촌주라는 씨성을 가진 인물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38. 고궁촌주(高宮村主)
고궁(高宮)이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대화국(大和國) 갈상군(葛上郡) 고궁향(高宮鄕), 즉 현재의 나량현(奈良縣) 어소시(御所市) 서좌미(西佐味) 부근의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고궁촌주라는 씨성을 가진 인물로는 고궁촌주전사(高宮村主田使, 『속일본기』 延曆 3년 7월 계미조), 고궁촌주진목산(高宮村主眞木山, 『속일본기』 延曆 3년 7월 계미조) 등이 있다.
『속일본기』 연력(延曆) 3년 7월 계미조에서 우소사(右少史) 정6위상 고궁촌주전사와 진목산에게 춘원련(春原連)이라는 성을 내렸다고 하였다. 또한 연력 4년 3월 갑인에는 정6위상 춘원련전사(春原連田使), 종7위하 진목산 등이 고촌기촌(高村忌寸)으로 개성되었다. 『일본후기(日本後紀)』홍인(弘仁) 2년 윤12월 정사(丁已)에서는 우경인(右京人)종5위상 고촌기촌전사(高村忌寸田使)와 종5위하 고촌기촌진목산 등에게 숙녜(宿禰)라는 성을 내렸다고 하였다. 고촌숙녜(高村宿禰)에 대해서는 우경 제번(상) 「고촌숙녜」 조(827) 참조.
39. 대석촌주(大石村主)
대석(大石)이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근강국(近江國) 율태군(栗太郡) 대석(大石), 즉 현재의 자하현(滋賀縣) 대진시(大津市) 대석중(大石中)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대석촌주라는 씨성을 가진 인물로는 대석촌주남족(大石主寸男足) 등 여러 사람이 있다. 대석촌주남족은 우경인 종8위상이라는 관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연력 2년에 대산기촌(大山忌寸)이라는 씨성을 받았다(『속일본기』 延曆 2년 4월 무신조). 대산기촌에 대해서는 우경 제번(하) 「대산기촌(大山忌寸)」 조(851) 참조. 해당 조에서는 고구숙녜(高丘宿禰)와 조상이 같으며 광릉고목(廣陵高穆)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40. 비조촌주(飛鳥村主)
비조(飛鳥)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대화국(大和國) 고시군(高市郡) 비조(飛鳥), 즉 현재의 나량현(奈良縣) 고시군(高市郡) 명일향촌(明日香村)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비조촌주(飛鳥村主)라는 씨성을 가진 인물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41. 서대우촌주(西大友村主)
서대우(西大友)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하내국(河內國) 석천군(石川郡) 대반촌(大伴村), 즉 현재의 대판부(大阪府) 부전림시(富田林市) 북대반(北大伴)·남대반(南大伴) 등의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서대우촌주라는 씨명을 가진 인물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42. 장전촌주(長田村主)
장전(長田)이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섭진국(攝津國) 팔부군(八部郡) 장전향(長田鄕), 즉 현재의 병고현(兵庫縣) 신호시(神戶市) 장전구(長田區) 일대의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장전촌주라는 씨성을 가진 인물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43. 금부촌주(錦部村主)
금부(錦部)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하내국(河內國) 금부군(錦部郡) 금부향(錦部鄕), 즉 현재의 대판부(大阪府) 부전림시(富田林市) 입산(廿山)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금부촌주에 대해서는 산성국 제번 「금부촌주(錦部村主)」 조(919)를 참조. 해당 조에서는 금부촌주와 조상이 같으며 파능지(波能志)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44. 전촌촌주(田村村主)
전촌(田村)이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하내국(河內國) 단비군(丹比郡) 전읍향(田邑鄕), 즉 현재의 대판부(大阪府) 남하내군(南河內郡) 미원정(美原町) 관생(菅生) 일대의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전촌촌주라는 씨성을 가진 인명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45. 인해촌주(忍海村主)
인해(忍海)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대화국(大和國) 인해군(忍海郡), 즉 현재의 나량현(奈良縣) 남갈성군(南葛城都) 일대의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인해촌주라는 씨성을 가진 인명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46. 좌미촌주(佐味村主)
좌미(佐味)라는 씨명은 『일본서기』 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攝政) 5년 3월 기유조에 보이는 좌미읍(佐糜邑)과 율령제하의 대화국(大和國) 갈상군(葛上郡) 좌미읍(佐味邑), 즉 현재의 나량현(奈良縣) 어소시(御所市) 갈성(葛城) 좌미(佐味)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좌미촌주라는 씨성을 가진 인명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47. 상원촌주(桑原村主)
상원(桑原)이라는 씨명은, 『일본서기』 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攝政) 5년 3월 기유조에 보이는 상원읍(桑原邑)과 율령제하의 대화국(大和國) 갈상군(葛上郡) 상원향(桑原鄕), 즉 현재의 나량현(奈良縣) 어소시(御所市) 피상(披上)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상원촌주에 대해서는 좌경(左京) 제번(상) 「상원촌주」 조(771) 참조. 해당 조에서는 한(漢) 고조(高祖) 7세손 만덕사주(萬德使主)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48. 백조촌주(白鳥村主)
백조(白鳥)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하내국(河內國) 고시군(古市郡) 백조(白鳥), 즉 현재의 대판부(大阪府) 우예야시(羽曳野市) 고시정(古市町) 부근의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백조촌주 일족으로는, 백조촌주두마려(白鳥村主頭麻呂, 『속일본기』 天平寶字 원년 5월 정묘조), 백조촌주마인(白鳥村主馬人, 『속일본기』 神護景雲 3년 6월 무술조), 백조촌주우양(白鳥村主牛養, 「堺市土塔町大野寺址出土瓦銘」 『文化史學』13-85), 백조촌주원마려(白鳥村主元麻呂, 『속일본기』 延曆 4년 정월 계묘조 등), 백조촌주(白鳥村主, 『日本紀略』 延曆 15년 4월 을해조), 백조촌주무지마(白鳥村主茂智磨, 『類聚國史』 99, 叙位, 天長 원년 정월 정사조) 등이 있다.
그들 중에서 백조촌주마인(白鳥村主馬人)은 『속일본기』 신호경운(神護景雲) 3년 6월 무술조에 우경인 정8위하 백조촌주마인(白鳥村主馬人), 백조경인(白鳥椋人), 광(廣) 등 23인에게 백원련(白原連)이라는 성을내렸다는 기사가 보인다. 백원련(白原連)이라는 씨성을 가진 인명으로는 백원련삼성(白原連三成, 『속일본기』 寶龜 2년 5월 기유조)이 있다. 또한 『일본기략』 에는 우대사인(右大舍人) 백조촌주(白鳥村主)가 우물에서 백청(白靑)을 바쳤다는 기사가 보인다(『日本紀略』 延曆 15년 4월 을해조).
백조촌주무지마(白鳥村主茂智磨)의경우는 하내국인(河內國人) 대외기(大外記) 종5위하 장잠숙녜무지마려(長岑宿禰茂智麻呂) 등 31인의 본거지를 고쳐 우경에 관부(貫附)하였다는 기사에 보이는 장잠숙녜무지마려와 동일 인물일 것이다(『續日本後紀』 天長 10년 3월계사조). 백조촌주에서 장잠숙녜(長岑宿禰)가 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천장(天長)원년(824) 정월 이후 천장 10년(833) 3월 이전이다.
장잠숙녜무지마려는, 천장 10년에 외종5위하에서 종5위하에 승서되었다(『續日本後紀』 天長 10년 11월 경오조). 그의 동생은 장잠숙녜고명(長岑宿禰高名)인데 『일본문덕천황실록(日本文德天皇實錄)』 에 그의 졸기가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우경인(右京人)으로 21세에 문장생(文章生)이 되었고, 홍인(弘仁) 20년에 식부소록(式部少錄)에 제수되었다. 승화(承和) 원년에 견당사준판관(遣唐使准判官)이 되었고, 승화 3년에 견당선 제1선에 승선하여 당나라에 갔다가 승화 6년에 귀국하였다. 이때 종5위상에 제수되고, 차시종(次侍從)이 되었다. 천안(天安) 원년에 64세로 죽었을 때 그는 정4위하 우경권대부(右京權大夫) 겸 산성수(山城守)였다(『日本文德天皇實錄』 天安 원년 9월 정유조).
한편 민수(民首)로서 백조촌주(白鳥村主)와 동족임을 주장하면서 장잠숙녜라는 씨성을 인정받은 사람들이 있다. 좌경인(左京人) 종6위하 민수씨주(民首氏主)는 백조촌주와 마찬가지로 노공(魯公) 백금(伯禽)의 후손이라고 하였다(『續日本後紀』 承和 2년 10월 경자조).
49. 액전촌주(額田村主)
액전(額田; 누카타)이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대화국(大和國) 평군군(平群郡) 액전향(額田鄕), 즉 현재의 나량현(奈良縣) 대화군산시(大和郡山市) 액전부(額田部)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액전촌주에 대해서는 대화국(大和國) 제번(諸蕃) 「액전촌주(額田村主)」 조(946) 참조. 해당 조에서는 오국인(吳國人) 천국고(天國古)로부터 나왔다고 되어 있다.
50. 모좌촌주(牟佐村主)
모좌(牟佐; 무사)라는 씨명은 신협(身狹; 무사)이라고도 표기하며, 율령제하의 대화국(大和國) 고시군(高市郡) 모좌(牟佐), 즉 현재의 나량현(奈良縣) 강원시(橿原市) 견뢰(見瀬)지역을 가리키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모좌촌주라는 씨성을 가진 인물로는, 신협촌주청(身狹村主靑, 『일본서기』 雄略 2년 10월是月條 등), 모좌촌주상모(牟佐村主相摸, 『속일본기』 和銅 3년 7월 병진조), 모좌촌주(牟佐村主, 貞觀 3년 2월 25일 「紀伊國眞川鄕塑田賣券」 『平安遺文』 1-112)가 있다. 또한 모좌촌주에 대해서는 좌경 제번(하) 「모좌촌주(牟佐村主)」 조(776)를 참조. 해당 조에서는 오(吳) 손권(孫權)의 아들 고(高)로부터 나왔다고 하였다. 『연희식(延喜式)』 신명장(神名帳)에는 대화국(大和國) 고시군(高市郡)조에 모좌촌주씨의 씨사(氏社)로 생각되는 모좌신사(牟佐神社)가 보인다. 이 신사에 대해서 『화주오군신사신명장대략주해(和州五郡神社神名帳大略注解)』 에서는 구이향(久邇鄕) 모좌촌(牟佐村) 축전(築田)에 있으며, 안강천황(安康天皇)이 오사주청(吳使主靑)을 모좌촌주로 삼았는데, 이때 신령한 꿈으로 인하여 생뢰신(生雷神)을 모좌촌 축전에 모시게 되었고, 그 자손을 축부(祝部)로 삼았다고 하였다.
51. 갑하촌주(甲賀村主)
갑하(甲賀; 가후가)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하내국(河內國) 찬량군(讚良郡) 갑가향(甲可鄕), 즉 현재의 대판부(大阪府) 사조철시(四條畷市) 갑가(甲可)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갑하촌주라는 씨성을 가진 인물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52. 안작촌주(鞍作村主)
안작(鞍作)이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하내국(河內國) 삽천군(澁川郡) 안작(鞍作), 즉 현재의 대판시(大阪市) 동주길구(東住吉區) 가미(加美) 안작정(鞍作町)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안작촌주(鞍作村主)라는 씨성을 가진 인물로는, 안작촌주사마달등(鞍作村主司馬達等, 『일본서기』 敏達天皇 13년 是歲條 등), 안작촌주익인(鞍作村主益人, 『萬葉集』 6-1004 등), 안작촌주옥충매(桉作村主玉虫賣, 大寶 2년 「御野國味蜂間郡春部里戶籍」 1-10)가 있다. 안작촌주사마달등에 대해서는, 민달 13년(584)에 소아마자숙녜(蘇我馬子宿禰)가 불상 2구를 받은 다음에 사마달등과 지변직빙전(池邊直氷田)으로 하여금 수행자를 찾게 하였고, 사마달등의 딸로 당시 나이 11세였던 도(島)를 출가시켜 선신니(善信尼)라고 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세 사람이 모두 불법을 깊이 믿고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하였다(『일본서기』 敏達 14년 是歲條). 또한 숭준천황(崇峻天皇) 3년조(590)에도 안부사마달등(鞍部司馬達等)의 아들 다수내(多須奈)가 출가하여 덕제법사(德齊法師)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원흥사가람연기병류기자재장(元興寺伽藍緣起幷流記資財帳)」 에는 안사수달등(按師首達等)의 딸 사말매(斯末賣; 시마메)의 법명이 선신(善信)이라고 하였다. 『부상략기(扶桑略記)』 에는 제27대 계체(繼体) 즉위 16년(522) 임인에 대당한인(大唐漢人) 안부촌주사마달지(案部村主司馬達止)가 이해 봄 2월에 입조(入朝)하여 대화국(大和國) 고시군(高市郡) 판전원(坂田原)에 초당을 짓고 본존불을 안치하고 귀의하여 예배하였는데, 세간에서 모두 말하기를 이는 당에서 신으로 여기는 바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안작촌주사마달등(鞍作村主司馬達等)은 안부촌주사마달지(鞍部村主司馬達止)의 손자이며, 다수나(多須奈, 德齊法師)의 아들이 안작조(鞍作鳥)이다(『일본서기』 推古 13년 4월 신유삭 등). 안작조는 추고천황의 명령을 받아 장륙불을 만들었으나 완성한 불상을 불당에 넣을 수 없었는데 문을 부수지 않고 안치하였으므로, 그 공로로 대인(大仁)이라는 위계를 주고 또한 근강국(近江國) 판전군(坂田郡)에 논 20정을 주었다. 도는 그곳에 천황을 위한 금강사(金剛寺)를 지었고, 이것이 남연(南淵)의 판전니사(坂田尼寺)로 불리게 되었다(『일본서기』 推古 14년 5월 무오조). 안작다수나(鞍作多須奈)는 용명천황(用明天皇)의 창병이 심하여 임종하려고 할 때 천황을 위하여 출가하여 수도하겠으며 장륙불과 절을 짓겠다고 하였는데, 남연 판전사의 나무로 된 장륙불과 협시보살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일본서기』 用明 2년 4월 병오조).
안작(鞍作) 및 안부(鞍部) 일족으로는, 안부현귀(鞍部賢貴, 『일본서기』 雄略 7년 是歲條), 안작복리(鞍作福利, 『일본서기』 推古 15년 7월 경술조 등), 안부덕적(鞍部德積, 『일본서기』 推古 32년 4월 임술조 등), 안작득지(鞍作得志, 『일본서기』 皇極 4년 4월 무술삭조)가 있다. 정7위상 안작마심(按作磨心)은 재주가 뛰어나 아름다운 비단을 짤 수 있었으므로, 그 자손에게 잡호(雜戶)를 면하게 하고 백원촌주(栢原村主)라는 성을 주었다(『속일본기』 和銅 6년 11월 병자조). 상원촌주라는 씨명은 대화국(大和國) 갈상군(葛上郡) 백원향(柏原鄕), 즉 현재의 나량현(奈良縣) 어소시(御所市) 백원(柏原) 일대의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53. 파마촌주(播磨村主)
파마(播磨)라는 씨명은 파마국(播磨國), 즉 현재 병고현(兵庫縣)의 일부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파마촌주라는 씨성을 가진 인물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본문에 고시군(高市郡)에 거주하는 아지왕의 후손이 많아지므로 섭진(攝津), 파마(播磨) 등의 여러 지역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는 내용처럼, 파마 지역에 거주하게 된 한인촌주(漢人村主)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파마국풍토기(播磨國風土記)』(揖保郡 枚方里 佐比岡條)에도 하내국(河內國) 자전군(茨田郡) 매방리(枚方里)의 한인(漢人)이 와서 거주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54. 한인촌주(漢人村主)
한인(漢人)이라는 씨명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기술자 집단인 한인의 통솔자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인촌주라는 씨성을 가진 인물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55. 금래촌주(今來村主)
금래(今來)라는 씨명은 대화국(大和國) 금래군(今來郡), 즉 현재의 나량현(奈良縣) 고시군(高市郡)을 가리키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금래촌주라는 씨성을 가진 인물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금래인성(今來人成, 天平寶字 2년 8월 28일부 「造東大寺司解」, 『대일본고문서』 4-294 등)도 금래촌주씨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56. 석촌촌주(石寸村主)
석촌(石寸; 이하키)이라는 씨명은 석성(石城; 이하키) 또는 반성(磐城; 이하키)이라고도 표기하며, 근강국(近江國) 율태군(栗太郡)에 있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석촌촌주라는 씨성을 가진 인물로는, 반성촌주은(磐城村主殷, 『일본서기』 天智 3년 12월 是月條), 석성촌주보겸(石城村主保兼, 天延 3년 2월 1일부 「太政官符」 『類聚符宣抄』 8 등)이 있다. 반성촌주는 근강국 율태군 사람이었다.
57. 금작촌주(金作村主)
금작(金作)이라는 씨명은 금속 가공 기술자 집단을, 촌주는 이들을 통솔하는 자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금작촌주라는 씨명을 가진 인물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금작부(金作部)라는 씨명을 가진 인물로는 금작부동인(金作部東人, 『속일본기』 養老 6년 3월 신해조), 금작부모량(金作部牟良, 『속일본기』 養老 6년 3월 신해조)이 있다. 『속일본기』 양로 6년 3월 신해조에는 이하국(伊賀國) 금작부동인, 이세국(伊勢國) 금작부모량, 인해한인안득(忍海漢人安得), 근강국(近江國) 포파한인이태수(飽波漢人伊太須), 한단야백도(韓鍛冶百島). 인해부호태수(忍海部乎太須), 단파국(丹波國) 한단야수법마려(韓鍛冶首法麻呂), 궁삭부명마려(弓削部名麻呂), 파마국(播磨國) 인해한인마려(忍海漢人麻呂)·한단야백의(韓鍛冶百依), 기이국(紀伊國) 한단야항전(韓鍛冶杭田)·전작명상(錢作名床) 등은 잡공(雜工)과 같은 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근원을 찾아가면 원래 잡호가 아니므로 공호(公戶)에 따르도록 했다는 내용이 있다.
58. 미장취각촌주(尾張吹角村主)
미장취각(尾張吹角)이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하내국(河內國) 안숙군(安宿郡) 미장향(尾張鄕), 즉 현재의 대판부(大阪府) 백원시(柏原市) 국분(國分) 부근에 거주하였던 취각(吹角, 笛) 제작 집단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미장취각촌주라는 씨성을 가진 인물은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미장국(尾張國)에 적취부(笛吹部)가 거주하였던 사실에 대해서는 하내국 신별 「적취(笛吹)」 조(667) 참조.
59. 금래군(今來郡)
금래군(今來郡; 이마키노코호리)는 율령제하의 대화국(大和國) 고시군(高市郡), 즉 현재의 나량현(奈良縣) 고시군(高市郡)이다. 『일본서기』 흠명(欽明) 7년 7월조에 왜국금래군(倭國今來郡)이 보인다.
60. 섭진(攝津)
섭진국(攝津國, 현재의 大阪府 兵庫縣의 일부)의 한인촌주(漢人村主)에 대해서는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미정잡성(未定雜姓)으로 섭진국의 천내한인(川內漢人)이 보이는데, 이들은 하내국(河內國)에 거주하던 한인의 후예이지만 섭진국의 한인촌주씨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61. 삼하(參河)
삼하국(參河國, 愛知縣의 일부)의 한인촌주(漢人村主)에 대해서는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삼하국 벽해군(碧海郡)의 한인부천창매(漢人部千倉賣, 『類聚國史』 54, 多彦, 延曆 20년 5월 甲辰條)는 한인촌주씨가 통솔하는 한인부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62. 근강(近江)
근강국(近江國)의 한인촌주(漢人村主)에 대해서는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근강국 율태군(栗太郡)의 반성촌주은(磐城村主殷)은 근강국의 한인촌주씨 일족일 것이다. 역시 근강국의 포파한인이태수(飽波漢人伊太須, 『속일본기』 養老 6년 3월 신해조)도 한인촌주씨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63. 파마(播磨)
파마국(播磨國, 兵庫縣의 일부)의 한인촌주씨(漢人村主氏)에 대해서는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파마국풍토기(播磨國風土記)』 식마군(飾磨國) 한부리(漢部里)조에 찬예국(讚藝國)의 한인(漢人) 등이 이곳으로 와서 거주하였다는 내용이 보이고, 읍보군(揖保郡) 이세야(伊勢野)조에도 의봉저수(衣縫猪手)와 한인도량(漢人刀良) 등의 조상이 이곳으로 와서 거주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읍보군 매방리(枚方里) 좌비강(佐比岡)조에도 하내국(河內國) 자전군(茨田郡) 매방리(枚方里)의 한인들이 이 산자락에 와서 살았다는 내용이 보인다.
64. 아파(阿波)
아파국(阿波國, 德島縣)의 한인촌주씨(漢人村主氏)에 대해서는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한인(漢人)이라는 씨성을 가진 인물로는 아파국(阿波國) 판야군(板野郡) 전상향(田上鄕)의 한인진의녀(漢人眞依女, 延喜 2년 「阿波國甁野郡田上鄕戶籍」 『平安遺文』 1-23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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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록』 제23권에 이르기를...] 자료번호 : ss.k_0003_0030_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