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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고려(高麗)

#고려(高麗)
황문련(黃文連; 기후미노무라지)
 고려국(高麗國) 사람 구사기왕(久斯祁王)의 후손이다.
 
【주석】
1. 황문련(黃文連)
『일본서기』 추고기(推古紀) 12년(604) 9월조에는 “처음으로 황서화사(黃書畫師)와 산배화사(山背畫師)를 정하였다”라고 하여 고구려계 화공 집단을 설치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황문련(黃文連, 黃書連)은 그림을 업으로 하는 씨족으로, 604년에 여러 사원들의 불상을 그리기 위해 둔 황서화사를 통솔하던 씨족으로 생각된다. 동 천무(天武) 12년(683) 9월조에는 황문조(黃文造) 등에게 연(連) 성을 주었다고 하여 조(造)에서 연(連)으로 개성했음을 알 수 있다.
황문련의 일족으로는 황서조본실(黃書造本實)이 있다. 『일본서기』 천지기(天智紀) 10년(664) 3월조에 황서조본실이 수얼(水臬, 측량 기구)을 바쳤다고 한다. 동 지통기(持統紀)8년(694) 2월조에는 황서련본실(黃書連本實)에게 주전사(鑄錢司)의 직에 보임한 사실이 보인다. 『속일본기』 경운(慶雲) 4년(707) 6월에 빈궁(殯宮)의 사무에 종사하였고, 동 10월조에는 ‘어장사(御裝司)’에 임명되어 천황의 장례, 의식과 관련된 업무에 종사하였다. 또한 약사사(藥師寺) 소장의 「불족석기(佛足石記)」 에 “일본사인(日本使人) 황서본실(黃書本實)이 대당국 보광사(普光寺)에서 불족적도(佛足跡圖) 2개를 모사해 왔는데 우경(右京) 4조 1방의 선원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황서본실의 입당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일본서기』 천지기(天智紀) 8년(669)에 보이는 하내직경(河內直鯨)이 견당사로 파견되었을 때에 동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황서본실은 궁중의 행사, 건축의 측량, 제작, 회화, 불교 등 당의 최신 학문과 기술을 습득했다고 보인다. 황서씨 일족은 화공으로서 법륭사 금당 벽화, 고송총고분(高松塚古墳) 벽화, 기토라고분 벽화 등 당대 주요 조형물의 제작에 참여한 인물로도 추정되고 있다.
황문조대반(黄文造大伴)에 대해서는 『속일본기』 대보(大寶) 원년(701) 7월조에는 새로 제정한 대보령 공봉(功封)조의 규정에 따라 임신의 난 후 공신들에게 준 봉공 중에서 그 4분의 1을 자식에게 상속시킨다는 내용 중에 황문조대반의 이름이 보인다. 동 화동(和銅) 3년(710) 10월조에는 “정5위상 황문련대반(黃文連大伴)이 사망하였다. 정4위하로 추증되고 조부(弔賻)를 내렸는데, 임신년의 공에 따른 것이다”라고 한다. 또 동 영귀(靈龜) 2년(716) 4월조에는 “임신년 공신인 정4위하 황문련대반의 자식 종7위상 갱마려(粳麻呂)에게 전지를 내렸다”라고 한다. 게다가 동 천평보자(天平寶字) 원년(757) 12월조에는 정4위하 황문련대반에게 공전(功田) 8정을 내렸는데, 대보령에 의거하여 중공(中功)에 해당되어 자손 2대에 걸쳐 상속한다”라고 하여 임신난의 공신에 대한 국가의 예우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황문련비(黄文連備)에 대해서는 『속일본기』 문무(文武) 4년(700) 6월조에 대보율령을 제정하는 데 참여한 공로로 녹(祿)을 받았다. 또 『회풍조』 에는 “주세두(主稅頭) 종5위하 황문련비(黃文連備), 1수(首)[나이는 50이다.]”라고 하여 시문을 싣고 있다.
황문련흑인(黃文連黑人)에 대해서는 천평승보(天平勝寶) 9년(757) 4월 7일부의 (『대일본고문서』 13-219)에 산배국(山背國) 구세군(久世郡) 구세향(久世鄕)의 호주인 황문련을마려(黃文連乙麻呂)의 호구(戶口)라고 기록하고 있다. 황문련을마려는 천평보자 2년 2월 24일부의 「화공사이(畫工司移)」(『대일본고문서』 4-260)에 “정7위상 행영사(行令史) 황문련을만려(黃文連乙万呂)”라고 서명하고 있듯이 그는 화공사령사(畫工司令史)였다. 또 산배국(山背國) 구세군인(久世郡人)으로 화공사 화부(畫部)였던 황문삼전(黃文三田)(『대일본고문서』 4-259)도 황문련씨의 일족이다.
황문련씨 중에 화공사에 관계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이 씨족의 선조가 황서화사의 반조씨족이었던 데에서 기인한다. 『성덕태자전력』 추고 12년(604) 12월조에 황문화사 등 성덕태자가 제 사찰을 장엄하게 하기 위해 화공 집단을 설치하고 과역의 면제와 영원히 ‘명업(名業)’이 되도록 하였다는 전승을 남기고 있다. 이 밖에도 평성궁 출토 목간에도 약협국(若狹國) 삼방군(三方郡) 죽전리(竹田里)의 낭인이었던 황문오백상(黃文五百相)이 나오고(奈良國立文化財硏究所, 1974, 『平城宮木簡』 2), 영귀 2년명 목간에도 소초위하 황문자로(黃文子老)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奈良國立文化財硏究所, 1967, 『平城宮發掘調査出土木簡槪報』 4).
2. 구사기왕(久斯祁王)
이 인명은 기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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