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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한원

미인이 오손[국]으로 시집가니, 울면서 전구의 풍속을 대하였고,

미인이 오손[국]으로 시집가니, 울면서 전구의 풍속을 대하였고,
『한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오손국 대곤미주 001
각주 001)
『史記』에서는 昆莫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漢書』에서는 昆莫·昆靡가 혼용되고 있다. 顔師古는 昆莫을 昆彌라고 표기하게 된 연유에 대해서, 昆莫에서 昆을 취하고 獵驕靡에서 靡를 취했기 때문이며, 彌와 靡는 音이 서로 같아서 후일 昆彌와 昆靡가 통용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大’昆靡라는 칭호가 사용된 것은 甘露 元年(전53) 漢이 烏孫을 分治하면서 大·小 昆靡의 구분이 생겨났기 때문이다(동북아역사재단 편, 앞의 책, 4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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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도읍은 적곡성주 002
각주 002)
余太山은 이 말이 고대 중국의 少昊의 거처인 暘谷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즉 暘은 ‘밝다’는 뜻으로 동쪽 골짜기에 해가 뜨면서 밝아지기 때문에 暘谷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이것이 곧 赤谷과 같으며, 위치상으로는 이식 쿨 호 동남쪽 나린(Narin)河 상류역에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淸代의 徐松 역시 이 말을 意譯으로 간주하여 악수(Aqsu) 북쪽의 北鹽이라는 산이 붉은색이기 때문에 ‘赤谷’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Hulsewe는 赤谷이라는 말은 意譯이라기보다는 音譯일 가능성 이 높은 것으로 보았다(동북아역사재단 편, 앞의 책, 4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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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장안과의 거리가 8천 900리이다. 동쪽으로는 흉노와, 서북쪽으로는 강거와, 서쪽으로는 대완과, 남쪽으로는 성곽이 있는 여러 나라들과 서로 접해 있다. 본래 변방의 땅이었다. 무제가 장건에게 금과 비단을 가지고 가서 하사하게 했다. 원봉 연간(기원전 110~기원전 105)에 강도왕 건의 딸 세군을 공주로 삼아 [오손왕에게] 시집을 보내고,주 003
각주 003)
『漢書』 「匈奴傳上」에는 “한나라의 사신 楊信이 匈奴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 당시 한나라는 동쪽으로 濊貉과 朝鮮을 정벌하여 郡으로 만들고, 또한 서쪽으로는 酒泉郡을 설치하여 胡와 羌 사이의 교통로를 隔絶시켰으며, 더 서쪽으로 月氏·大夏와 교통하여 翁主를 烏孫王의 妻로 삼게 함으로써 匈奴 西方의 援國들을 분열시켰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로 미루어볼 때 楊信이 흉노에 사신으로 간 元封 4년(전107)년에는 이미 細君이 烏孫으로 시집을 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余太山 참조(동북아역사재단 편, 앞의 책, 4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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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와 의복 등 황실의 물건을 하사했다. [오손의] 곤막은 늙었으며, [공주와] 언어가 통하지 않아, 공주는 슬퍼하여 스스로 노래를 지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의 집에서는 나를 하늘 끝으로 시집보내어 멀리 이국 오손왕에게 맡겼다네. 궁려를 집으로 삼고 모포를 담장으로 삼으며, 고기를 밥으로 여기고 유즙을 국으로 삼았네. 항상 고향을 생각하는 그리움에 속마음은 상하니, 원컨대 누런 고니가 되어 고향에나 돌아가고파.’
 
• 참고
『漢書』 卷96 烏孫國 烏孫國 大昆彌治赤谷城 去長安八千九百里 戶十二萬 口六十三萬 勝兵十八萬八千八百人 相 大祿 左右大將二人 侯三人 大將 都尉各一人 大監二人 大吏一人 舍中大吏二人 騎君一人 東至都護治所千七百二十一里 西至康居蕃內地五千里 地莽平 多雨 寒 山多松樠 不田作種樹 隨畜逐水草 與匈奴同俗 國多馬 富人至四五千匹 民剛惡 貪(狠)[狼]無信 多寇盜 最爲彊國 故服匈奴 後盛大 取羈屬 不肯往朝會 東與匈奴 西北與康居 西與大宛 南與城郭諸國相接 本塞地也 大月氏西破走塞王 塞王南越縣度 大月氏居 其地 後烏孫昆莫擊破大月氏 大月氏徙西臣大夏 而烏孫昆莫居之 故烏孫民有塞種 大月氏種云 始張騫言烏孫 本與大月氏共在敦煌間 今烏孫雖彊大 可厚賂招 令東居故地 妻以公主 與爲昆弟 以制匈奴 語在張騫傳 武帝卽位 令騫齎金幣往 昆莫見騫如單于禮 騫大慚 謂曰 天子致賜 王不拜 則還賜 昆莫起拜 其它如故 … 匈奴聞 其與漢通 怒欲擊之 又漢使烏孫 乃出其南 抵大宛 月氏 相屬不絶 烏孫於是恐 使使獻馬 願得尙漢公主 爲昆弟 天子問羣臣 議許曰 必先內聘 然後遣女 烏孫以馬千匹聘 漢元封中 遣江都王建女細君爲公主 以妻焉 賜乘輿服御物 爲備官屬宦官侍御數百人 贈送甚盛 烏孫昆莫以爲右夫人 匈奴亦遣女妻昆莫 昆莫以爲左夫人 公主至其國 自治宮室居 歲時一再與昆莫會 置酒飮食 以幣帛賜王左右貴人 昆莫年老 語言不通 公主悲愁 自爲作歌曰 吾家嫁我兮天一方 遠託異國兮烏孫王 穹廬爲室兮旃爲牆 以肉爲食兮酪爲漿 居常土思兮心內傷 願爲黃鵠兮歸故鄕 天子聞而憐之 間歲遣使者持帷帳錦繡給遺焉

  • 각주 001)
    『史記』에서는 昆莫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漢書』에서는 昆莫·昆靡가 혼용되고 있다. 顔師古는 昆莫을 昆彌라고 표기하게 된 연유에 대해서, 昆莫에서 昆을 취하고 獵驕靡에서 靡를 취했기 때문이며, 彌와 靡는 音이 서로 같아서 후일 昆彌와 昆靡가 통용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大’昆靡라는 칭호가 사용된 것은 甘露 元年(전53) 漢이 烏孫을 分治하면서 大·小 昆靡의 구분이 생겨났기 때문이다(동북아역사재단 편, 앞의 책, 407쪽). 바로가기
  • 각주 002)
    余太山은 이 말이 고대 중국의 少昊의 거처인 暘谷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즉 暘은 ‘밝다’는 뜻으로 동쪽 골짜기에 해가 뜨면서 밝아지기 때문에 暘谷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이것이 곧 赤谷과 같으며, 위치상으로는 이식 쿨 호 동남쪽 나린(Narin)河 상류역에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淸代의 徐松 역시 이 말을 意譯으로 간주하여 악수(Aqsu) 북쪽의 北鹽이라는 산이 붉은색이기 때문에 ‘赤谷’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Hulsewe는 赤谷이라는 말은 意譯이라기보다는 音譯일 가능성 이 높은 것으로 보았다(동북아역사재단 편, 앞의 책, 407쪽). 바로가기
  • 각주 003)
    『漢書』 「匈奴傳上」에는 “한나라의 사신 楊信이 匈奴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 당시 한나라는 동쪽으로 濊貉과 朝鮮을 정벌하여 郡으로 만들고, 또한 서쪽으로는 酒泉郡을 설치하여 胡와 羌 사이의 교통로를 隔絶시켰으며, 더 서쪽으로 月氏·大夏와 교통하여 翁主를 烏孫王의 妻로 삼게 함으로써 匈奴 西方의 援國들을 분열시켰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로 미루어볼 때 楊信이 흉노에 사신으로 간 元封 4년(전107)년에는 이미 細君이 烏孫으로 시집을 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余太山 참조(동북아역사재단 편, 앞의 책, 413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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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이 오손[국]으로 시집가니, 울면서 전구의 풍속을 대하였고, 자료번호 : hw.k_0002_0130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