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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의 등장과 국제정세의 변동

1. 수나라의 등장과 국제정세의 변동

7세기에 본격화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은 수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534년에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 후 북중국에서의 상쟁은 북제와 북주의 다툼으로 이어지다가 575년에 북주가 북제를 정복함으로써 종식되었다. 북주에 의한 북중국의 통일로 다시금 동아시아의 정세는 변동이 예상되었다. 그런데 북주 내부에서 정권의 교체가 일어났다. 581년에 양견(楊堅)이 한족 관료들의 지지 위에서 북주 정권을 탈취하여 수(隋)를 건국하였다.
문제(文帝)는 즉위한 후 인심을 수습하고 통치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부역을 경감하고 법령을 간소화하였으며 여러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러한 체제 정비에 따라 수의 국력은 급속히 강해졌으며, 이는 곧 대외적인 팽창으로 이어졌다. 588년에 수문제는 강남을 통일하기 위하여 50여 만명의 대군을 출동시켜 이듬해 진을 정복하였다. 수에 의한 진의 병합은 당시의 국제질서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 세력이 통일되어 그 강력한 힘이 외부로 뻗쳐나갈 경우, 이제까지의 다원적인 국제질서는 급속히 변동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588년 수에 의한 중국의 통일은 주변 여러 나라를 긴장시켰다. 수 건국 초기에 한때 수와 충돌하던 토욕혼은 진의 멸망 소식을 접하자, 먼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기고 조공을 바치면서 수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토욕혼은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있는 서방의 요충이기 때문에, 이 지역에 대한 수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609년 수양제의 정벌로 토욕혼은 수에 복속되고 말았다.
또 중국의 최대 적대세력인 북아시아 초원세력인 돌궐도 수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돌궐은 등장 이후 북주와 북제의 대립·상쟁을 이용하여 급속히 세력을 키워갔다. 그 후 북주가 북중국을 통일한 후에도 돌궐은 북주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늦추지 않았으며, 이에 북주는 579년에 천금공주(千金公主)를 타발가한(他鉢可汗)에게 시집보내는 등 돌궐과 우호관계를 맺기에 급급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수는 건국 후부터 돌궐에 대하여 강경책을 구사하였다. 수는 581년에 북방에 장성을 축조하여 돌궐의 침입에 대비하는 한편 돌궐의 사발략가한(沙鉢略可汗)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수의 예우에 분노한 사발략가한은 영주자사 고보녕(高寶寧)과 통모하여 582년과 583년에 거듭 수를 침공하였으나 격퇴되고 말았다. 그런데 당시 돌궐 내부에서는 소가한(小可汗)들의 분열과 권력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돌궐의 내분을 이용한 수의 이간책이 주효하여 결국 583년에는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었고, 수는 동돌궐을 공격하였다. 세력이 급격히 위축된 동돌궐은 결국 수에 칭신하며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이후에도 돌궐에 대한 수의 이간책은 계속되어, 수는 사발략가한의 아들인 도람가한(都藍可汗)에 대항하는 계민가한(啓民可汗)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결국 도람가한 세력은 자멸하고 말았으며, 599년에는 서돌궐에 쫓긴 계민가한이 수에 내항하였다. 이에 다시 동돌궐에 대한 대규모 정벌을 시도하여 내몽고 사막으로 내쫓았으며, 내항한 동돌궐 잔여세력을 복속시켰다.
이렇게 수는 건국 이후 서역의 토욕혼과 북방의 돌궐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으로 그리 대외적인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599년에 동돌궐을 복속시킨 이후에는 현실적으로 대외적인 두통거리는 거의 사라진 셈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경우 백제와 신라의 존재는 처음부터 수의 관심 밖이었다. 백제는 581년 수의 건국 직후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수가 진을 병합한 후에는 적극적으로 수와의 교섭을 모색하고자 노력하였다. 예컨데 수가 중국을 통일한 해에 수의 군선이 백제의 탐모라국(耽牟羅國)에 표류하자, 백제는 이를 정중히 수에 송환하고 이와 함께 진의 병합을 축하하는 사절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이에 수는 백제에 대해 매년의 입공을 면제해 주겠다는 등 유연한 자세를 보였는데, 이는 후술하듯이 고구려에 대해 수 문제의 국서를 보내어 번신(蕃臣)의 절차를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였던 강경한 자세와 비교된다. 한편 신라는 594년에야 처음으로 수와 외교관계를 맺었으나, 고구려의 대신라 공세가 강화되면서 611년에 걸사표를 보내는 등 수와의 교섭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와같이 수왕조에 의해 중국과 북방세력이 통합되고, 또한 한반도의 백제와 신라도 수왕조의 구심력을 쫓아 수와 연결됨으로써 삼국 간의 상쟁에 중국세력이 침투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물론 수대에는 이러한 현상이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백제와 신라가 수왕조와의 교섭에 적극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수는 백제나 신라를 대고구려정책에 이용하려는 외교 전략을 구사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보다 백제와 신라가 지리적으로 수와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아 현실적인 위협이 되지 않은 점이 주된 이유겠지만, 북조의 전통을 계승한 수왕조로서는 과거 북조와 교섭이 적었던 백제나 신라에 대해 기본적인 인식이 마련되지 않았던 점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수에 의한 중원의 통일로 이제까지 남북조의 분열구조 위에서 전개하여 온 고구려의 외교 전략은 깨지게 되었다. 고구려는 곧바로 수의 침입에 대한 군사적 대비를 갖추는 한편 전통적인 외교 방식인 조공·책봉제에 의한 외교 교섭도 재개하였다. 그러나 590년에 고구려에 보낸 수 문제(文帝)의 국서는 고구려에 대한 수의 변화된 인식을 잘 보여준다. 즉 피책봉국으로서의 고구려의 태도에 대한 수의 불만을 거론하고 있는데,주 137
각주 137)
“왕은 해마다 사신을 보내와 조공을 바치며 번부(藩附)라고 일컫기는 하지만 성의를 다하지 않고 있소. (중략) 번신의 예절을 지키고 조정의 정전(正典)을 받들어 스스로 그대 나라를 교화시키고 남의 나라를 거스리지 않는다면, 길이 부귀를 누릴 것이며, 진실로 짐의 마음에 드는 일이오(하략).”(『隋書』 권81, 高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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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남북조시기의 책봉조공관계와는 다른 새로운 책봉·조공관계를 설정하려는 수의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남북조와 고구려·백제가 맺고 있는 책봉·조공관계는 외교형식상 일정한 보편성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다양한 층위와 내용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책봉국과 피책봉국의 상호관계만이 아니라 책봉국과 피책봉국 각각이 갖는 서로 다른 전략과 인식에 의해 규정된 결과였다. 고구려의 경우 남북조 양국과 모두 책봉·조공관계를 맺게 되지만, 그 내용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특히 고구려는 북위에 대해 당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지속적인 조공관계를 유지하지만, 조공을 국가간 신속관계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북위에서도 이러한 고구려의 태도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으며, 특히 동북방에서 고구려에게만 책봉호를 주었는데, 이는 곧 고구려 세력권을 보장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원의 통일세력으로서의 수왕조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국제질서를 요구하였다. 특히 수왕조가 삼국의 왕에게 부여한 책봉호의 구성을 보면 남북조 시대에 주변 제국가의 현실적 지배력을 상호 인정하던 책봉·조공관계의 성격이 변모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주 138
각주 138)
수가 건국 직후 주변국에 수여한 책봉호의 구성을 보면, 고구려 평원왕은 ‘大將軍·遼東郡公’, 백제 위덕왕은 ‘上開府儀同三司·帶方郡公’ 이라는 책봉호를 각각 수여 받았다. 隋가 백제나 고구려에 수여한 책봉호는 훈관과 작호로 구성되어 있을 뿐, 남북조시대 내내 책봉호의 구성요소였던, 군사권의 위상과 범위를 나타내는 持節號·將軍號·都督諸軍事號 등은 보이지 않으며, 특히 고구려의 경우 독자 세력권을 상징하는 東夷校尉를 수여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현상에 보듯이 조공·책봉제를 둘러싸고 고구려와 수의 입장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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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바로 중국중심의 일원적 국제질서의 수립이었다.
따라서 수왕조가 책봉·조공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관철하려는 세계질서는 기존에 고구려나 백제가 갖고 있던 책봉·조공관과는 현저히 달라진 셈이다. 여기서 이념적으로 고구려와 수의 정면충돌이 예상된다. 하지만 남북조 시기의 책봉·조공질서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지 못하였던 신라의 경우에는 이 당시에 형성된 기왕의 조공·책봉 관계에 대한 독자의 전략이나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이 신라가 수나 당이 요구하는 중국 중심의 일원적 책봉·조공관이나 국제질서를 손쉽게 받아들이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고구려는 다시금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패권과 세력권의 재건을 도모하고 있었다. 수의 공격을 받은 돌궐 세력이 약화되자, 요해(遼海) 지역의 거란·말갈에 대해 세력 침투를 꾀하였으며, 한반도 내에서는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그중에서도 요해 지역을 둘러싸고 수와 고구려의 갈등이 증폭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요해지역이 동북아시아의 화약고와 같은 상황으로 바뀐 것도 6세기 중반 국제정세 변동의 결과였다. 552년 돌궐에 의해 격파된 유연의 잔여세력이 동진 남하하여 요하상류의 거란족을 압박하게 되면서 이 일대와 북제(北齊)의 북쪽 국경에 연쇄적인 파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553년 북제의 문선제는 거란족에 대한 대규모 친정을 감행하여 거란을 대파하여 10만여 명의 포로를 잡고, 이어서 요하 가까이 창려성(昌黎城)까지 순수하며 요해일대를 진동시켰다. 물론 북제의 이 지역 진출은 북주 및 돌궐과의 대결 때문에 단기간에 그쳤지만, 이로 인해 한때 고구려와 북제의 긴장감이 높아지기도 하였다.
그 뒤를 이어 요해일대에 세력을 뻗쳐온 것이 돌궐이었다. 돌궐의 요해지역 진출은 6세기 중엽에서 말엽까지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북제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은 거란은 이어 돌궐의 세력이 거듭 요해 지역으로 미쳐오자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면서, 돌궐의 압력을 피하려는 그 일부 세력이 고구려로 귀부해 왔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는 한때 주춤하였던 요해 일대의 경영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580년을 전후한 무렵에는 돌궐의 이계찰(利稽察) 병단을 격파하는 등 돌궐과 충돌하게 되었다.주 139
각주 139)
고구려와 돌궐의 충돌을 처음 전하는 기사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양원왕 7년(551) 추9월조의 “돌궐이 쳐들어와 신성(新城)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대를 옮겨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흘(高紇)에게 1만 군대를 보내어 이를 막게 하였다.”라는 기사이다. 요동일대에서 고구려와 돌궐세력의 충돌을 전하는 이 기사는 다른 문헌에는 전혀 전하지 않는 고구려 독자의 전승자료에 의거한 것이다. 다만 충돌사건이 일어난 시기가 양원왕 7년(551년)인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돌궐이 유연으로부터 독립한 것은 552년 이후이며, 돌궐이 동몽골지역 일대에 있던 거란을 지배하기 시작한 때가 555~557년 경이기 때문에, 요동일대에서 돌궐과 고구려의 군사적인 충돌은 빨라야 555년 무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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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역시 지방관인 토둔(吐屯)을 거란에 설치하는 등 이 지역에 대한 세력확대를 늦추지 않았다.
고구려와 돌궐의 충돌은 말갈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도 전개되었다. 6세기 중엽 이후 물길 세력이 약화되면서, 북송화강 유역에 거주하던 속말말갈(粟末靺鞨)이 두각을 나타냈다. 이 때 돌궐은 속말말갈을 지원하여 고구려 변경을 침입케 하는 한편 중국에 대한 조공 루트도 제공하였다. 또 돌궐은 속말말갈 북쪽의 실위(室韋)에도 세력을 뻗쳐 그 지역에 토둔을 설치하면서 고구려의 서북지역에 압력을 가하였다. 실위는 일찌기 고구려가 철을 수출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역이었다.
이에 고구려도 돌궐이 수에 격파되어 세력이 약화된 583년 이후에는 부여성 일대를 거점으로 송화강 유역으로 세력 부식을 꾀하면서 속말말갈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에 대항하던 돌지계(突地稽)가 속말말갈의 일부 세력을 이끌고 유성(柳城 : 요녕성 조양)일대까지 내려와 수에 투항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거란과 말갈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고구려와 돌궐이 각축을 벌이고 있을 때, 수왕조도 서서히 이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해 왔다. 수는 582년에 요서 지역에서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고보령(高寶寧) 세력을 복속시키면서 요해 일대에 점차 세력을 부식시키기 시작하였다. 특히 583년에 돌궐이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어 세력이 약화되자, 이듬해인 584년에 그때까지 돌궐의 지배하에 있던 거란의 일부 세력이 586년에 고구려를 등지고 수에 귀부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수 문제 말기에도 4천여 가의 거란 세력이 돌궐의 세력권을 이탈하여 수에 귀속하였다. 이처럼 고구려와 돌궐을 뒤이어 수의 세력이 거란 지역에 미치게 됨에 따라 거란 내부에는 이들 세 세력과 연결되어 서로 상쟁이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584~586년경에 고구려의 지배를 받고 있던 속말말갈의 돌지계 집단 등이 수로 귀부하고 584년에는 거란의 중심세력이 돌궐의 지배를 이탈하여 수로 귀부해 간 배경은 요해지역에서 수의 영향력이 증대되어 간 결과였다. 수왕조 초기에 이 지역에서 수의 세력확대에 힘을 쓴 자는 위예(韋藝)·위충(韋忠) 형제였다. 특히 위예는 영주총관으로 있으면서 북방민족과의 교역을 통해 경제적 부를 축적하기까지 하였다. 이는 요해지역을 둘러싼 쟁탈이 정치·군사적인 요인만이 아닌 경제적인 이득과 연관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595년에 위예가 죽자 그 뒤를 이어 동생인 위충이 영주총관이 되었는데, 그도 역시 말갈·거란을 회유 위무하여 이를 복속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요해 일대에 세력을 확대해 갔다. 더욱 593년에는 거란[契丹]·해(奚)·실위(室韋) 등 북방민족이 수에 사신을 보내는 등 수의 영향력이 날로 증대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와 수 사이에 충돌이 잦아진 듯하다. 590년에 고구려에 보낸 수 문제의 국서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수는 이 지역의 거란·말갈족에 대한 고구려의 세력 침투를 경계하고 있었다. 반대로 고구려로서도 당시 위충 등의 활동으로 인한 이 지역에서의 수의 세력 확대에 상당한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이처럼 거란·말갈에 대한 지배권 다툼이 계속되면서 고구려와 수 사이에는 소규모 군사 충돌이 거듭되었다. 영양왕의 요서 출격이 있던 전 해에도 이미 양국 사이에는 군사적 충돌이 있었다. 598년의 고구려의 요서 공격은 이러한 충돌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특히 영양왕은 요서 공격시에 말갈군을 동원하였는데, 이때의 말갈은 돌지계의 이탈 이후 고구려에 복속한 속말말갈임에 틀림없다. 이 전투는 그동안 말갈과 거란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양국 간의 쟁탈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에 대응한 수의 1차 침공 이후에도 고구려는 요해지역으로의 세력 확대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605년에는 거란이 요서의 영주(營州)를 침공하였는데, 이는 거란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 강화와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이때 수는 돌궐군을 동원하여 거란을 제압하였는데, 이 사건 역시 돌궐, 거란 등과 연결된 요해 지역 주도권 다툼의 결과였다.
한편 고구려는 수의 위협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5세기 이래의 세력권을 회복, 재구축하려고 시도하면서 다양한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다. 하나는 한반도의 백제와 신라에 대한 군사적인 공세이며, 다른 하나는 수를 견제하기 위한 왜와 돌궐에 대한 동맹을 위한 교섭이었다.
우선 한반도 내의 정세를 보면, 고구려의 군사적인 압박으로 백제와 신라는 다시금 대수 교섭에 나서게 되었다. 백제는 607년과 611년에 수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 정벌을 요청하였으며, 신라 역시 611년에 수에 청병 사절을 보냈다. 이에 수는 백제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 정벌을 알리고, 613년에는 신라에도 사신을 보낸 바 있다. 이러한 수의 대응이 고구려 정벌에 백제나 신라를 동원하려는 외교전략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삼국간의 충돌에 중원 세력이 개입할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다음 고구려의 대돌궐과 대왜 교섭 전략을 살펴보자. 특히 고구려는 왜와의 외교관계에 적극적이었는데, 570년(영양왕 원년)부터 여러 차례 왜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당시 왜정권이 고구려와의 관계개선에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어 교섭의 지속에 실패하였다. 당시 고구려가 왜와의 교섭에 관심을 기울인 배경은 한반도 내에서 신라의 세력이 팽창하고 있던 정세 변화 때문이었다. 즉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그 배후에서 신라를 견제할 수 있는 왜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한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와 왜가 본격적인 교섭을 재개하는 시점은 595년이다. 이후 영양왕대에는 왜와의 인적물적 교류가 현저하였다. 이렇게 고구려와 수 사이에 긴장 관계가 계속되는 601~615년 기간에 고구려와 왜의 교섭이 증대하고 있음은 고구려의 대왜 교섭이 대수 전략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성덕태자의 스승이었던 고구려 승려 혜자(慧慈)는 595년부터 20년간 왜에서 활동하면서 고구려의 대왜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수의 고구려 정벌의 의중을 탐색하려는 목적에서 4차례에 걸쳐 왜의 사신이 수에 파견되었는데, 특히 607년에는 “해뜨는 곳의 천자가 해지는 곳의 천자에게 보낸다(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라는 왜왕의 국서가 수에 보내지게 되었다. 이 국서 사건은 왜를 통하여 수의 동향을 떠보려고 하였던 고구려의 외교 전략의 하나였다. 수양제도 왜의 국서 내용에 몹시 불괘함을 감추지 못했으면서도, 왜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이후 수와의 전쟁에서 고구려가 승리함으로써 왜는 고구려의 군사력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후 고구려의 대왜 교섭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고구려는 북방의 돌궐과도 제휴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607년 8월에 유림(楡林)으로 순행하고 돌궐의 계민가한에게 찾아온 수양제에게 그만 발각되고 말았다. 복속을 맹세한 돌궐의 땅에서 적대적 관계에 있던 고구려의 사신과 마주친 수양제와 군신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더욱 이 해에 다시 왜의 국서가 수에 보내짐으로써, 고구려에 대한 수의 의구심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요해지역의 말갈과 거란을 압박하고, 왜를 배후 조정하고 있으며, 게다가 무엇보다 두려운 적인 돌궐과의 연결을 도모하고 있는 고구려를 수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남겨놓을 수 없는 최후의 적으로 인식하였을 것이다.
609년에 토욕혼을 복속시켜 서쪽의 후환을 덜은 수양제에게는 더이상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612년 1월에 장문의 조서를 내리고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 정벌을 개시하였다. 이후 614년까지 매년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모두 실패하였고, 오히려 무리한 정벌이 수의 멸망을 재촉하게 되었다.

  • 각주 137)
    “왕은 해마다 사신을 보내와 조공을 바치며 번부(藩附)라고 일컫기는 하지만 성의를 다하지 않고 있소. (중략) 번신의 예절을 지키고 조정의 정전(正典)을 받들어 스스로 그대 나라를 교화시키고 남의 나라를 거스리지 않는다면, 길이 부귀를 누릴 것이며, 진실로 짐의 마음에 드는 일이오(하략).”(『隋書』 권81, 高麗傳) 바로가기
  • 각주 138)
    수가 건국 직후 주변국에 수여한 책봉호의 구성을 보면, 고구려 평원왕은 ‘大將軍·遼東郡公’, 백제 위덕왕은 ‘上開府儀同三司·帶方郡公’ 이라는 책봉호를 각각 수여 받았다. 隋가 백제나 고구려에 수여한 책봉호는 훈관과 작호로 구성되어 있을 뿐, 남북조시대 내내 책봉호의 구성요소였던, 군사권의 위상과 범위를 나타내는 持節號·將軍號·都督諸軍事號 등은 보이지 않으며, 특히 고구려의 경우 독자 세력권을 상징하는 東夷校尉를 수여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현상에 보듯이 조공·책봉제를 둘러싸고 고구려와 수의 입장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139)
    고구려와 돌궐의 충돌을 처음 전하는 기사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양원왕 7년(551) 추9월조의 “돌궐이 쳐들어와 신성(新城)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대를 옮겨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흘(高紇)에게 1만 군대를 보내어 이를 막게 하였다.”라는 기사이다. 요동일대에서 고구려와 돌궐세력의 충돌을 전하는 이 기사는 다른 문헌에는 전혀 전하지 않는 고구려 독자의 전승자료에 의거한 것이다. 다만 충돌사건이 일어난 시기가 양원왕 7년(551년)인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돌궐이 유연으로부터 독립한 것은 552년 이후이며, 돌궐이 동몽골지역 일대에 있던 거란을 지배하기 시작한 때가 555~557년 경이기 때문에, 요동일대에서 돌궐과 고구려의 군사적인 충돌은 빨라야 555년 무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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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의 등장과 국제정세의 변동 자료번호 : edeah.d_0002_0040_005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