烏蠻種의 번성
각라봉(閤邏鳳)이 즉위하여, 수우(守隅)를 불러 처(妻)와 함께 하탐(河睒)
주 001에 귀의하도록 하고, 중국(中國)과 교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아타는 스스로 그 부락의 주인이 되어, 해마다 입조(入朝)하였는데, 은총과 상(賞)이 많고 두터웠다. 각라봉이 곤천성사(昆川城使) 양모리(楊牟利)를 보내 군대로 서찬(西爨)을 협박하여 호(戶) 20만을 영창성(永昌城)
주 002으로 옮겼다.주 003
각주 003)
동찬(東爨)은 말이 통하지 않고, 대부분 수풀과 골짜기를 의지하여 흩어져 살았으므로, 옮기지 않을 수 있었다.주 004이 西爨白蠻 20만 徙民說에 관하여는 異說이 많다. 즉 20여만 호나 되는 인구를 옮겼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선 영창성에 과연 약 100만이나 되는 인구를 수용할 땅이나 시설이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며, 또 이렇게 대규모의 사민 사건이 왜 「남조덕화비」에는 기록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도 그 근거의 하나로 제시되었다(段鼎周, 1994: 54). 이 ‘20餘 萬戶’ 사민에 비판적인 연구자들은 각기 ‘20여 戶’(段鼎周, 1994: 54) 혹은 ‘2,000여 호’설(尤中, 1980: 95~96)을 제기하고 있다. 사민 자체를 부정하기는 힘들겠지만, 20여만 호 사민은 확실히 과장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 정확한 숫자를 확정할 방법은 없다.
각주 004)
곡정주(曲靖州)
석성(石城)
승마(升麻)
곤천(昆川) 남북으로부터 용화(龍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군대에 의해 피폐해졌다. 일진(日進) 등의 자손은 영창성에 거주하였다. 오만종(烏蠻種)이 다시 번성하여 서찬 고지로 옮겨 살게 되었고, 봉주(峯州)
주 005와 이웃하게 되었다. [당 덕종] 정원(貞元) 연간(785~804)에 도독부(都督府)를 두어 기미주(羈縻州) 열여덟 곳을 통령하게 하였다.烏蠻의 언어와 관련하여,『蠻書』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言語의 音은 白蠻이 가장 바르고, 蒙舍蠻이 그 다음이며, 諸部落은 이들만 못했다(같지 않았다). 그러나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도 간혹 漢과 같지 않았는데, 四聲에 미치면 그 그릇된 것이 심하였다(訛重). 大事는 대부분 함께 얼굴을 맞대어 말하지 않고, 반드시 사람을 보내 가서 그 詞意를 깨닫게 한 뒤 이를 통해 결정하였다. 이를 일러 行諾이라 한다.”(『雲南志補注』卷8: 119). 이 기사는 音의 정확도를 가지고 만이들을 평가하고 있다. 白蠻이 가장 정확하고 蒙舍蠻이 그 다음이고 여타의 부락들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그 音은 漢語의 音이다. 즉 중국어를 기준으로 남중 지역의 諸 蠻夷를 한 줄로 세운 것이다. 백만이 그 음이 가장 정확함에도 불구하고, 사물을 부르는 명칭이 漢과 다르고 四聲은 전혀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白蠻이 漢字 文化에 상당히 익숙했음에도 불구하고, 口語와 文語의 불일치로 인한 한계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로 보아도 백만은 南中의 거주민 중 漢文化에 가장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내내 스스로 漢人의 자손임을 自矜하고, 5세기에 한자로 새겨진 뛰어난 비석을 남긴 爨氏 宗族의 경우 백만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났을 것이다(鄭勉,『中國古中世史硏究』, 2010: 277~278).
- 각주 001)
-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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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3)
이 西爨白蠻 20만 徙民說에 관하여는 異說이 많다. 즉 20여만 호나 되는 인구를 옮겼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선 영창성에 과연 약 100만이나 되는 인구를 수용할 땅이나 시설이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며, 또 이렇게 대규모의 사민 사건이 왜 「남조덕화비」에는 기록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도 그 근거의 하나로 제시되었다(段鼎周, 1994: 54). 이 ‘20餘 萬戶’ 사민에 비판적인 연구자들은 각기 ‘20여 戶’(段鼎周, 1994: 54) 혹은 ‘2,000여 호’설(尤中, 1980: 95~96)을 제기하고 있다. 사민 자체를 부정하기는 힘들겠지만, 20여만 호 사민은 확실히 과장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 정확한 숫자를 확정할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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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4)
烏蠻의 언어와 관련하여,『蠻書』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言語의 音은 白蠻이 가장 바르고, 蒙舍蠻이 그 다음이며, 諸部落은 이들만 못했다(같지 않았다). 그러나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도 간혹 漢과 같지 않았는데, 四聲에 미치면 그 그릇된 것이 심하였다(訛重). 大事는 대부분 함께 얼굴을 맞대어 말하지 않고, 반드시 사람을 보내 가서 그 詞意를 깨닫게 한 뒤 이를 통해 결정하였다. 이를 일러 行諾이라 한다.”(『雲南志補注』卷8: 119). 이 기사는 音의 정확도를 가지고 만이들을 평가하고 있다. 白蠻이 가장 정확하고 蒙舍蠻이 그 다음이고 여타의 부락들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그 音은 漢語의 音이다. 즉 중국어를 기준으로 남중 지역의 諸 蠻夷를 한 줄로 세운 것이다. 백만이 그 음이 가장 정확함에도 불구하고, 사물을 부르는 명칭이 漢과 다르고 四聲은 전혀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白蠻이 漢字 文化에 상당히 익숙했음에도 불구하고, 口語와 文語의 불일치로 인한 한계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로 보아도 백만은 南中의 거주민 중 漢文化에 가장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내내 스스로 漢人의 자손임을 自矜하고, 5세기에 한자로 새겨진 뛰어난 비석을 남긴 爨氏 宗族의 경우 백만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났을 것이다(鄭勉,『中國古中世史硏究』, 2010: 277~278).
- 각주 005)
색인어
- 이름
- 각라봉(閤邏鳳), 수우(守隅), 하탐(河睒), 아타, 각라봉, 양모리(楊牟利), 일진(日進), 당 덕종
- 지명
- 영창성(永昌城), 곡정주(曲靖州), 석성(石城), 승마(升麻), 곤천(昆川), 용화(龍和), 영창성, 봉주(峯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