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동이전

마한(馬韓)의 성립과 풍속

주 001
번역주 001)
東夷 : 중국이 주로 동방 지역에 위치한 이민족을 낮추어 일컫던 명칭이다. 중국 정사에서 사방의 이민족을 東夷·西戎·南蠻·北狄으로 부른 것은 『삼국지』부터이다. 후한대 허신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東夷의 ‘夷’자를 ‘大’와 ‘弓’의 合字로 보고 중국인이 활을 잘 쏘는 동쪽의 종족을 동이라고 불렀다는 주장이 있다. 동이는 『후한서』 권85, 열전 동이전 序에 “王制云 東方曰夷 夷者柢也 言仁而好生 萬物柢地而出”이라 하여 동쪽을 뜻하는 말이다. 夷에는 畎夷·于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의 9종이 있다고 한다(『후한서』 권85, 열전 동이전 序).
닫기
한에는 세 가지 종[족]이 있는데, 하나는 마한이고, 또 하나는 진한이며, 또 다른 하나는 변한이다. 진한은 대방[군]주 002
번역주 002)
帶方[郡] : 대방군은 후한 말 요동태수 公孫度의 영향하에 들어간 이후 그 뒤를 이은 公孫康이 강성해진 한과 예를 견제하고자 204년 屯有縣 이남의 荒地에 낙랑 남부도위 관할 7개 현을 대방군으로 개편하였다. 이후 낙랑군과 대방군의 지배권이 公孫淵의 치세인 237~239년에 曹魏로 귀속되고, 다시 그것을 계승한 서진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와 백제가 세력을 떨치면서 계속 이 두 군을 압박해오자 두 군의 세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이리하여 고구려 미천왕은 313년 낙랑군을 먼저 통합하였고, 이듬해 대방군을 병합하였다. 이로써 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 군현은 422년 만에 한반도에서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대방군의 위치는 다소 논란이 있지만 현재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 지역을 치소로 하였다. 이는 황해도 봉산군 석성리 성터에서 발견된 후한과 서진대에 걸친 명문 기와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리원역 부근의 한 고분에서 “帶方太守 張撫夷”라는 명문이 새겨진 塼이 발견되었고(이기백·이기동, 1982), 그 밖에 ‘光和五年’, ‘泰始七年’ 등 명문이 새겨진 기와들이 출토됨으로써 이곳이 대방군의 군치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닫기
의 남쪽에 있으며,주 003
번역주 003)
辰韓在帶方南 : 『진서』의 편찬자는 진한을 삼한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 것 같다. 진한이 대방의 남쪽에 있었다는 기사는 우리 학계에서 경상도 지방에 있었다는 통설과 사뭇 다르기 때문에 잘못된 기사로 보인다. 『삼국지』 한전에는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으로 기술된 걸로 보아 『진서』에서는 韓이 辰韓으로 잘못 기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진서』의 편찬 과정에서 『삼국지』 한전 관련 기사를 그대로 인용하는 데 오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삼국지』의 “辰韓者古之辰國也”가 『진서』에서는 탈락된 점에 주목하여 ‘辰韓’이 ‘辰’과 ‘韓’을 병렬된 의미로 보는 견해(신현웅, 2005)도 있다.
닫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짓는다.주 004
번역주 004)
韓種有三 … 東西以海爲限 : 이 기사는 『삼국지』 한전 머리 부분을 축약하고 순서만 바꾸어 서술한 것으로 『진서』 마한전이 『삼국지』 동이전 한전 기사를 저본으로 하였음을 보여준다.
닫기
마한[의 사람들]은 산과 바다 사이에 살고 있으며, 성곽은 없다.주 005
번역주 005)
無城郭 : 본서 마한전의 “國中有所調役 及起築城隍 … 終日讙呼力作 不以爲痛” 기사를 마한에서 성곽 축조를 시사해주는 기사로 볼 때 앞뒤가 안 맞는 면이 있다. 『삼국지』 진한과 변진전에는 城柵이 있다고 하여 마한 기사와도 상치된다. 삼한의 성책 또는 성곽은 무문토기시대 이래 목책과 환호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중국 군현과의 접촉을 통해 토성에 대한 지식이 알려지면서 토루를 쌓아 목책을 보강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고학 자료상으로는 마한이나 진·변한 모두에 성곽 시설이 존재한 것으로 나타난다. 전북 부안에서는 토성유적이 있는 것으로 보고된 바 있고(전영래, 1975), 진·변한 지역의 경우 김해 봉황대유적, 대구 달성유적, 양산패총, 창원 가음정동 당산패총 등에서 목책과 환호시설이 확인되었다. 서울의 풍납토성은 3세기 말 전후 시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성곽의 축조가 한반도 중부 이남에서 처음 나타난 사상 최대의 토목공사였기 때문에 이 과정을 목격한 중국인의 경험이 채록되었을 것으로 추론하는 견해(권오영, 2013)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 기록된 자료의 채록 시점과 지역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닫기
모두 56개의 작은 나라가 있다.주 006
번역주 006)
小國五十六所 : 『삼국지』 한전에는 50여 국이라 하면서 55개국이 기록되어 있는 데 반해 『후한서』 한전에는 54개국으로 되어 있다. 『진서』의 56개 소국은 『진서』나 『후한서』를 참조하지 않고 “凡有小國五十六”이라고 한 『한원』에 인용된 『위략』 기사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진서』 마한전는 『삼국지』 한전을 저본으로 하면서도 일부 『위략』 기사를 참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삼한의 국가 수가 당시의 실태를 표시하는 실수가 아니라 찬자가 易數를 빌어 꾸민 것으로 보는 견해(村山正雄, 1976)도 있다.
닫기
큰 나라는 1만 호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인데, 각각 거수[수장층]가 있다.
[마한의] 풍속은 기강이 없으며, 엎드려 절하는 예가 없다. [사람들은] 흙으로 만든 집을 지어 거주하는데, 그 형태는 무덤과 같다.주 007
번역주 007)
居處作土室 形如冢 : 『후한서』 한전 및 『삼국지』 한전에도 유사한 기록이 보인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居處作草屋土室 形如冢 其戶在上 擧家共在中 無長幼男女之別”이라 하여 풀로 이은 지붕에 흙방[土室]으로 된 가옥에서 살았다고 한다. 『진서』에서는 『삼국지』의 ‘居處作草屋土室’에서 ‘草屋’을 뺐는데, 이는 원기사 내용을 충실히 따르되 원자료의 문제점이 발견되는 경우는 자구를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일종의 찬술상의 원칙에 의한 결과로 보인다(신현웅, 2005). 그런데 가옥의 외형이 무덤과 같다는 것인지 아니면 내부가 무덤과 같다는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그리고 ‘其戶向上’을 窓이 있는 것으로 본 견해(손진태, 1948)가 있으나, 출입구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처럼 마한의 주거지 특징은 ‘토실’이며, 출입구는 위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토실을 공주 장선리유적의 주거 유구와 관련시켜(충남발전연구원, 2003) 일반적인 수혈주거지가 아니라 평면 원형 단면 플라스크형의 지하식 수혈로 보는 견해(이훈·강종원, 2001)가 대두되었다. 이에 대해 삼한의 취락에서 수혈주거지가 플라스크형의 수혈보다 훨씬 많이 발견된다는 점, 플라스코형 수혈이 마한만의 고유한 구조물이 아니라는 점, 삼한 단계의 주거지 중에서 충청도·전라도·경상도 지역에서 출입구가 횡 방향으로 된 것이 많지 않다는 점 등을 들어 반론을 제기하는 견해(권오영, 2013)가 있다.
닫기
그 출입문은 위를 향하고 있다. 온 가족이 함께 그 중에 살고 있는데,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다.
소나 말을 타는 것을 알지 못하며,주 008
번역주 008)
不知乘牛馬 : 진·변한 지역에는 소와 말을 타는 습속이 있다는 『삼국지』 한전의 기사와 상반된다. 이러한 차이를 진·변한의 기마 습속과 관련시켜 보는 견해(신현웅, 2003)가 있다. 우리나라 원삼국시대의 마구류는 車馬具로서 3세기 말에 해당하는 충주 금릉동 78-1호묘 출토 2孔式 재갈인 표비 등이 있다. 그렇지만 마한 지역에서 騎乘用 마구류가 출토된 예는 아직 없다. 백제 권역에서 騎乘用 마구류가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다소 편년상의 차이는 있지만 4세기 전반부터이며 선비계 재갈과 고삐[표비(鑣轡)]를 수용하면서 기마문화가 시작되었다. 청주 봉명동 C-31호 출토 轡는 4세기 2/4분기 또는 중엽으로 편년되어 백제권 지역에서 가장 시기적으로 빠르다(류창환, 2004).
닫기
가축을 기르는 것은 다만 장례를 치르는 데 쓰기 위해서이다. [마한의] 습속에는 금·은·비단·모직물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고, 옥구슬을 귀중하게 여겨서,주 009
번역주 009)
而貴瓔珠 :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는 삼한 시기의 유적에서 금은 제품이 출토된 예가 아직 없지만 곡옥 종류는 기록대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삼한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장신구는 대부분 작은 유리나 마노로 만든 구슬이며, 낙동강 유역에서는 수정체 구슬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 구슬들은 이식이나 경식으로 사용된 점이 확인된다(권오영, 2013). 이러한 작은 구슬은 영어의 beads에 해당되며 『삼국지』에서는 瓔珠로 기록해놓았다. 중국은 분묘유적에서 玉이 출토되며 부여와 고구려는 비단이나 금이고, 일본은 돌이나 조개가 중심인 데 비하여 삼한의 분묘에서는 다량의 구슬이 출토되고 있어 이런 기록이 남긴 것이 아닐까 한다.
닫기
[옥구슬을] 옷에 꿰매거나 혹은 머리를 장식하거나 귀에 매다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그 [나라의] 남자는 머리를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 놓으며,주 010
번역주 010)
科頭露紒 : ‘紒’는 상투를 뜻한다. 모자를 쓰지 않고 상투를 드러내놓는 것을 말한다. 결혼을 하거나 관례를 올릴 때 상투를 하는데, 이는 머리카락을 올려 빗어 정수리 위에서 틀어 감아 삐죽하게 맨 것이다. 여기에 동곳을 꽂아 고정시킨 다음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망건을 썼다. 상투의 확실한 모습은 고구려 고분벽화, 신라 도제 기마인물상에 잘 나타나 있다. 남자가 성인 대접을 받으려면 결혼을 하여 상투를 틀었다. 위만이 연나라에서 고조선으로 망명해 올 때 오랑캐 옷을 입고 상투를 틀었다는 기사가 참고된다.
닫기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
[그 나라 사람들의] 성질은 용감하고 굳세다. 나라에 부역이 있거나, 성황을 수축할 때에는 용감하고 건강한 젊은 사람들이 모두 등가죽을 뚫고, [거기에] 굵은 새끼줄로 꿰어 막대기로 그 줄을 흔들며 하루종일 소리를 지르면서 힘껏 일하는데, [이를] 고통이라고 여기지 않는다.주 011
번역주 011)
國中有所調役 … 終日讙呼力作 不以爲痛 : 이 기사를 성년식을 위한 집단 시련으로 보는 견해(三品彰英, 1943)나, 지게를 사용하여 공동 노동을 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59)가 있지만, 마한의 경우 집단적이고 농경의례적인 성격을 가진 노동 행위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송화섭, 2006).
닫기
활·방패·창·노를 잘 쓰며,주 012
번역주 012)
善用弓楯矛櫓 : 이 기사는 『삼국지』나 『후한서』 한전에는 없는 독자적인 것으로, 『진서』의 찬술 경향으로 볼 때 이례적이다. 『삼국지』 한전 변진전에 “便步戰 兵仗與馬韓同” 기사를 간접적으로 원용한 것으로 보이나 마한 병장기의 이름과 종류가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고, 또한 보병전의 전술과 형태를 간접적으로 시사해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국가의 성장 수준을 파악하기 위한 척도로 전쟁 능력의 수준을 들고 있는데 기마전술에 능한 부여나 고구려에 비해 마한·옥저·동예 등은 주로 보병에 의존한 것으로 보아 그만큼 상대적으로 낙후된 사회로 보고 있다(김철준, 1981).
닫기
비록 싸우거나 전쟁을 하더라도 상대가 굴복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주 013
번역주 013)
雖有鬪爭攻戰 而貴相屈服 : 이 구절은 전혀 새로운 내용으로 그 출전 근거를 알 수 없는 매우 독자적인 기사이다. 而貴相屈服은 “ 굴복하는 것을 서로 귀히 여긴다 ”(정중환, 1980)는 의미로 해석된다.
닫기
[마한의] 습속은 귀신을 믿어 항상 5월에 씨를 뿌리는 작업을 마친 뒤 떼지어 노래하고 춤추며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10월에 이르러 농사를 마친 뒤에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한다.주 014
번역주 014)
俗信鬼神 … 亦如之 : 마한의 토착적인 세시풍속으로는 5월과 10월에 행하는 농경의례를 들 수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전에 따르면 5월에 씨를 뿌린 뒤 행해지는 기풍제와 10월에 추수가 끝난 뒤 행해지는 추수감사제가 당시 가장 큰 농업축제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때에는 수많은 사람이 음주가무를 즐기고 주야 무휴로 농경의례를 치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5월 파종제와 10월 추수제는 마한 벼농사 농경의례가 정착해 있었음을 말해주고, 세시풍속이 연례행사로 행해졌음을 보여준다. 삼한에서 거행되는 농경의례가 내용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는지 또는 천신과 지신 두 계통이 습합된 형태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전에 의하면 이때 수십 명이 서로 동작을 맞추어 땅을 밟으면서 몸을 낮추었다 올리는 동작의 춤을 추었고, 가락은 탁무를 닮았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지신에 대한 제의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있다(三品彰英, 1973). 이처럼 마한에 지신신앙이 남아 있다는 것은 북방 지역과 구별되는 고유한 생산과 문화 기반이 따로 존속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닫기
[각 나라의] 국읍(國邑)주 015
번역주 015)
國邑 :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주민이 거주하는 취락집단을 가리키는 용어로 국읍·읍락·별읍 등의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읍락은 자연촌락과는 구별되는 일반 취락을 뜻하며, 그 규모가 대략 500호 이상, 1, 000호 미만(이현혜, 1997)이나, 직경 10km 정도(문창로, 2000)로 추정된다. 국읍은 삼한 소국의 중심이 되는 읍락을 뜻하며 상대적으로 세력이 강하거나 중심 기능을 가진 대읍락을 지칭한다(이현혜, 1984). 국읍의 지배자[主帥]는 臣智 등으로 불렸으며 유력한 소국의 신지들은 각종의 優號를 붙여 정치적 권위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국읍의 지배자는 재분배와 잉여생산물의 보관 등을 위한 경제적 기능, 외부 세력과의 전쟁과 방어를 위한 군사적 기능, 그리고 천군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기능을 가지고 있던 단위 정치체[國]의 중심지인 것으로 이해된다(권오영, 1996). 그러나 읍락의 독자성이 강한 대신 국읍과 읍락의 상대적인 세력 격차가 크지 않아 『삼국지』 동이전 한전에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 無拜之禮”라고 한 것에서 보듯이 국읍이 읍락을 완전히 제어하지는 못하는 한계를 가졌다.
닫기
에는 각각 한 사람을 세워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천군(天君)주 016
번역주 016)
天君 :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으로 국읍의 종교적 지도자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主帥와 함께 각각 종교와 정치를 담당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현혜, 1984)와 초기에는 정치적 지배자와 제사장을 겸하였으나(김정배, 1978), 후기에 이르러 제정분리가 진행되면서 주수의 권한이 강화되는 대신 천군은 종교적 직능만을 담당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송화섭, 1994). 이 제사의식의 목적은 정치·경제의 중심지인 국읍의 주도하에 초읍락적인 신을 제사지냄으로써 읍락 간의 결속을 다짐하여 국읍 지배자가 가진 정치권력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된다(김두진, 1985). 이 점 때문에 삼한을 국가 단계로 보지 않고 과도기 단계인 Chiedom 단계로 보는 견해(최광식, 2006)가 있다.
닫기
이라고 부른다. 또 별읍(別邑)주 017
번역주 017)
別邑 : 별읍은 소국의 일부로 통합되지 않고 독립된 정치집단으로 존속하고 있었던 개별 읍락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러한 소규모의 독립적인 정치집단이 많이 있었다. 이를 ‘蘇塗’라고 불렀는데 국읍의 천군이 주재하는 천신제사와는 별도로 무당이 토착적인 귀신제사를 행하고 있었다(최광식, 1994). 이처럼 별읍은 신앙적으로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일반 읍락과 마찬가지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정치적으로 국읍의 통제를 받으며 그 영역 안에 속해 있었다(문창로, 2000). 반면 별읍을 독자적인 정치집단이 아닌 제천의식을 거행하는 성역 또는 祭場으로 보는 견해(송화섭, 2006)도 있다.
닫기
을 설치하여 이름을 소도(蘇塗)주 018
번역주 018)
蘇塗 : 삼한시대에 각국에 별읍을 소도라 이름하였는데 큰 나무를 세워 북과 방울을 달아 놓고 귀신을 섬겼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곳으로 도망가면 잡아가지 못했으며 소도를 세운 뜻은 불교와 같으나 선악의 기준이 서로 다르다고 하였다. 소도에 대해서는 고대사회에서 태양 숭배의 제단인 ‘수두’로 이해한 견해(신채호, 1948), 읍락 간의 경계선 내지는 수호신을 모시는 ‘솟대’라는 견해(손진태, 1948)가 있지만, 두 용어 모두 농촌의 민간신앙에서는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현재는 ① 삼한의 천군이 있는 곳인 동시에 봄과 가을에 걸쳐 천군이 농경의례를 거행하는 곳이라는 견해(김정배, 1986), ② 소도신앙은 읍락 단위의 부락제에서 발전한 것으로 소국 성립 이후 여러 읍락에서 거행되던 개별적인 제사행위를 하나로 묶은 것으로 보는 견해(김두진, 1985 ; 문창로, 2017), ③ 마한의 소도는 별읍에서 행하는 제천의식으로 그 제장을 소도라 하였으며, 그 제장에서 행해지는 소도의식은 불교의식과 흡사한 종교의례로 보는 견해(송화섭, 2006) 등이 있다. 그러나 소도신앙이 청동기문화 단계 이래의 토착신앙을 계승한 측면이 있지만 소도에서 숭배되는 귀신이 어떤 종류의 신이었는지, 그 주관자와 천군과의 관계가 어떠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있다.
닫기
라고 하는데,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단다. 그 소도의 뜻은 마치 서역의 부도(浮屠)와 비슷한 면이 있지만주 019
번역주 019)
其蘇塗之義 … 而所行善惡有異 : 소도를 설치한 뜻이 부도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浮屠는 불교를 지칭한다. 소도는 죄를 지은 자를 심판하여 형벌을 가하거나 죄를 면할 수 있도록 교화하고 선행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불교의 목적이 교화에 있듯이 소도를 설치하는 목적도 교화에 있었다. 陳壽가 『삼국지』를 찬술한 3세기 후반 중국의 부도는 악행을 제어하고 선행을 권장하는 수행불교적 성격이 강하였다. 진수가 마한의 소도를 부도와 흡사한 것으로 본 것은 부도가 중국의 고유신앙과 교섭하였듯이 마한의 소도 또한 귀신을 숭배하는 민간신앙과 천신신앙이 융합된 종교의례였음을 파악한 것이다(송화섭, 2006). 『삼국지』 한전의 소도 기사가 중국의 초전불교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면 『진서』 마한전의 것은 서역불교와 결부시키고 있어 차이가 있다.
닫기
행한 것의 좋고 나쁜 점에는 [서역과] 차이가 있다.
[서진의] 무제 태강 원년(280)과 2년(281)에 그 왕이 자주 사신을 파견주 020
번역주 020)
마한으로 추정되는 나라의 대중국 교섭 사료는 아래와 같다.276년 : 東夷八國歸化(2월) 東夷十七國內附(7월)(『晉書』 권3, 帝紀3 世祖 武帝).
277년 : 西北雜虜及鮮卑匈奴五溪蠻夷東夷三國前後十餘輩 各帥種人部落內附 (是歲)馬韓來(『晉書』 馬韓傳).
278년 : 東夷六國來獻(3월) 東夷九國內附(是歲) 馬韓請內附(『晉書』 馬韓傳).
280년 : 東夷十國歸化(6월) 東夷十國朝獻(7월) 馬韓主頻遣使入貢方物(『晉書』 馬韓傳).
281년 : 東夷五國來獻(3월) 東夷五國來附(6월) 馬韓主頻遣使入貢方物(『晉書』 馬韓傳).
282년 : 東夷二十九國歸化 獻其方物(9월) 東夷馬韓新彌諸國 依山大海 去州四千餘里 歷世未附者二十餘國 竝遣使朝獻(『晉書』 권36 張華傳).
286년 : 東夷十一國內附(8월) 馬韓等十一國遣使來獻 (是歲)馬韓至(『晉書』 馬韓傳).
287년 : 東夷二國內附(8월) 馬韓至(『晉書』 馬韓傳).
288년 : 東夷七國詣校尉內附(9월)(『晉書』 권3, 帝紀3 武帝).
289년 : 東夷十一國內附(5월) 東夷絶遠三十餘國內獻 (是歲)馬韓至(『晉書』 馬韓傳).
290년 : 東夷七國朝貢(2월) 馬韓詣東夷校尉何龕上獻(『晉書』 馬韓傳).
291년 : 東夷十七國 南夷二十四部並詣校尉內附(『晉書』 권4 帝紀4 孝惠帝).
동이 제국과 서진과의 교섭 기사는 무제의 재위 기간인 함령·태강(275~289) 연간에 집중되어 있다. 무제대는 조위에게 선양을 받고 오를 멸망시켜 서진 역사에서 전성을 이룬 시기였다. 동아시아 정세도 점차 안정되어가는 추세 속에서 주변 여러 나라와 교류도 활발하였다. 동이 제국 중에서 서진과 교섭을 전개한 주체는 누구인가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는데, 백제를 중심으로 한 마한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59 ; 천관우, 1989), 마한으로 보는 견해(이도학, 1995 ; 윤용구, 2014), 백제로 보는 견해(김수태, 1998)가 있다. 반면 『진서』 張華傳에 등장하는 282년 신미제국의 조공 사실을 기점으로 이를 분리해 보는 입장도 있다. 먼저 신미제국의 등장 이전은 백제(노중국, 1990), 건마국(유원재, 1994), 목지국과 백제의 복수 파견으로 보는 견해(권오영, 1996)가 있다. 다음으로 신미제국의 등장 이후에는 신미국(노중국, 1990 ; 유원재, 1994), 백제국과 신미국이 복수로 활동한 것으로 보거나(이현혜, 1997), 영산강 유역의 집단으로 보는 견해(권오영, 1996 ; 전진국, 2017)가 있다. 이처럼 3세기 후반 마한과 서진과의 교류는 백제를 포함한 마한 제국의 개별적이며 독자적인 교류였기 때문에 그 주체를 오로지 백제만으로 상정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닫기
하여 토산물을 바쳤고, [태강] 7년(286)·8년(287)·10년(289)에도 자주 왔다. 태희 원년(290)에는 동이교위(東夷校尉)주 021
번역주 021)
東夷校尉 : 校尉는 전한대에 설치된 이래 후한대와 서진대에도 계승되었다. 주변 민족을 통할하기 위한 관직으로 운영되었는데 祿秩은 2, 000석이었다. 동이교위는 중국 왕조가 주변의 이민족을 통제, 관리하기 위해 3세기경 西晉이 설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역할은 무엇보다 동이 제국 및 여러 민족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거나 이 지역에 대한 자국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한 무력행사 및 외교관계 업무를 담당하였다(이주현, 2000). 이에 대해서는 『진서』 동이 부여국조 참조. 동이교위의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① 漢대설(『후한서』 백관지), ② 曹魏대에 공손씨 정권에서 설치한 것으로 보는 견해(『진서』 지리지 평주 ; 이주현, 2000), ③ 조위의 공손씨 멸망 직후 설치설(程尼娜, 2004) 등이 있으나, 대체로 서진 시기에 실질적인 기능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張國慶, 1989 ; 三岐良章, 2000 ; 윤용구, 2005). 사마염이 282~305년에 여러 이민족 통어관을 설치하고, 286년 하감이 부여를 복국시키고 모용외를 격파하면서 동이교위의 권위가 보다 확고해졌다. 동이교위의 역할과 기능 또한 시기에 따라 변화한 것으로 파악된다. 4세기 이후 중국 내부에 혼란한 상황이 지속되자 동이교위는 현지의 유력자에게 위임된 형태로 운용되었다. 이는 당시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가던 선비족에 대한 견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5호 16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전연에서 자체적으로 집권자의 측근에게 동이교위를 임명하여 직할지 내로 내속해 온 이민족을 통제하고자 하였으며, 외부의 동이족을 실질적으로 통제하고자 하는 목적은 아니었다. 5세기 북위에서 설치한 동이교위는 營州 내 이민족과 거란·고막해 등 시라무렌강 유역의 유목민족을 통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요하 이동 지역 제국에 대한 통제권은 東夷中郞將에게 위임되었다. 이후 고구려가 시라무렌강 유역으로까지 세력을 확대하자 동이교위의 지위는 일시적으로 고구려에 계승되었다. 이후 당이 영주에 동이교위를 설치하여 기능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실제적인 동이 지역에 대한 통제는 고구려 멸망 이후에야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윤용구, 2005).
닫기
하감(何龕)에게 와서 [공물을] 바쳤다. 함령 3년(277)에 다시 왔으며,주 022
번역주 022)
原註 각주 : 「함녕은 태강과 태희 앞에 세워진 연호인데, 본전에서는 선후가 서로 바뀌었다.」
닫기
이듬해(278)에 또 귀부하기를 청하였다.

  • 번역주 001)
    東夷 : 중국이 주로 동방 지역에 위치한 이민족을 낮추어 일컫던 명칭이다. 중국 정사에서 사방의 이민족을 東夷·西戎·南蠻·北狄으로 부른 것은 『삼국지』부터이다. 후한대 허신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東夷의 ‘夷’자를 ‘大’와 ‘弓’의 合字로 보고 중국인이 활을 잘 쏘는 동쪽의 종족을 동이라고 불렀다는 주장이 있다. 동이는 『후한서』 권85, 열전 동이전 序에 “王制云 東方曰夷 夷者柢也 言仁而好生 萬物柢地而出”이라 하여 동쪽을 뜻하는 말이다. 夷에는 畎夷·于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의 9종이 있다고 한다(『후한서』 권85, 열전 동이전 序). 바로가기
  • 번역주 002)
    帶方[郡] : 대방군은 후한 말 요동태수 公孫度의 영향하에 들어간 이후 그 뒤를 이은 公孫康이 강성해진 한과 예를 견제하고자 204년 屯有縣 이남의 荒地에 낙랑 남부도위 관할 7개 현을 대방군으로 개편하였다. 이후 낙랑군과 대방군의 지배권이 公孫淵의 치세인 237~239년에 曹魏로 귀속되고, 다시 그것을 계승한 서진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와 백제가 세력을 떨치면서 계속 이 두 군을 압박해오자 두 군의 세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이리하여 고구려 미천왕은 313년 낙랑군을 먼저 통합하였고, 이듬해 대방군을 병합하였다. 이로써 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 군현은 422년 만에 한반도에서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대방군의 위치는 다소 논란이 있지만 현재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 지역을 치소로 하였다. 이는 황해도 봉산군 석성리 성터에서 발견된 후한과 서진대에 걸친 명문 기와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리원역 부근의 한 고분에서 “帶方太守 張撫夷”라는 명문이 새겨진 塼이 발견되었고(이기백·이기동, 1982), 그 밖에 ‘光和五年’, ‘泰始七年’ 등 명문이 새겨진 기와들이 출토됨으로써 이곳이 대방군의 군치임을 뒷받침하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辰韓在帶方南 : 『진서』의 편찬자는 진한을 삼한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 것 같다. 진한이 대방의 남쪽에 있었다는 기사는 우리 학계에서 경상도 지방에 있었다는 통설과 사뭇 다르기 때문에 잘못된 기사로 보인다. 『삼국지』 한전에는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으로 기술된 걸로 보아 『진서』에서는 韓이 辰韓으로 잘못 기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진서』의 편찬 과정에서 『삼국지』 한전 관련 기사를 그대로 인용하는 데 오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삼국지』의 “辰韓者古之辰國也”가 『진서』에서는 탈락된 점에 주목하여 ‘辰韓’이 ‘辰’과 ‘韓’을 병렬된 의미로 보는 견해(신현웅, 2005)도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4)
    韓種有三 … 東西以海爲限 : 이 기사는 『삼국지』 한전 머리 부분을 축약하고 순서만 바꾸어 서술한 것으로 『진서』 마한전이 『삼국지』 동이전 한전 기사를 저본으로 하였음을 보여준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5)
    無城郭 : 본서 마한전의 “國中有所調役 及起築城隍 … 終日讙呼力作 不以爲痛” 기사를 마한에서 성곽 축조를 시사해주는 기사로 볼 때 앞뒤가 안 맞는 면이 있다. 『삼국지』 진한과 변진전에는 城柵이 있다고 하여 마한 기사와도 상치된다. 삼한의 성책 또는 성곽은 무문토기시대 이래 목책과 환호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중국 군현과의 접촉을 통해 토성에 대한 지식이 알려지면서 토루를 쌓아 목책을 보강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고학 자료상으로는 마한이나 진·변한 모두에 성곽 시설이 존재한 것으로 나타난다. 전북 부안에서는 토성유적이 있는 것으로 보고된 바 있고(전영래, 1975), 진·변한 지역의 경우 김해 봉황대유적, 대구 달성유적, 양산패총, 창원 가음정동 당산패총 등에서 목책과 환호시설이 확인되었다. 서울의 풍납토성은 3세기 말 전후 시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성곽의 축조가 한반도 중부 이남에서 처음 나타난 사상 최대의 토목공사였기 때문에 이 과정을 목격한 중국인의 경험이 채록되었을 것으로 추론하는 견해(권오영, 2013)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 기록된 자료의 채록 시점과 지역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小國五十六所 : 『삼국지』 한전에는 50여 국이라 하면서 55개국이 기록되어 있는 데 반해 『후한서』 한전에는 54개국으로 되어 있다. 『진서』의 56개 소국은 『진서』나 『후한서』를 참조하지 않고 “凡有小國五十六”이라고 한 『한원』에 인용된 『위략』 기사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진서』 마한전는 『삼국지』 한전을 저본으로 하면서도 일부 『위략』 기사를 참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삼한의 국가 수가 당시의 실태를 표시하는 실수가 아니라 찬자가 易數를 빌어 꾸민 것으로 보는 견해(村山正雄, 1976)도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居處作土室 形如冢 : 『후한서』 한전 및 『삼국지』 한전에도 유사한 기록이 보인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居處作草屋土室 形如冢 其戶在上 擧家共在中 無長幼男女之別”이라 하여 풀로 이은 지붕에 흙방[土室]으로 된 가옥에서 살았다고 한다. 『진서』에서는 『삼국지』의 ‘居處作草屋土室’에서 ‘草屋’을 뺐는데, 이는 원기사 내용을 충실히 따르되 원자료의 문제점이 발견되는 경우는 자구를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일종의 찬술상의 원칙에 의한 결과로 보인다(신현웅, 2005). 그런데 가옥의 외형이 무덤과 같다는 것인지 아니면 내부가 무덤과 같다는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그리고 ‘其戶向上’을 窓이 있는 것으로 본 견해(손진태, 1948)가 있으나, 출입구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처럼 마한의 주거지 특징은 ‘토실’이며, 출입구는 위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토실을 공주 장선리유적의 주거 유구와 관련시켜(충남발전연구원, 2003) 일반적인 수혈주거지가 아니라 평면 원형 단면 플라스크형의 지하식 수혈로 보는 견해(이훈·강종원, 2001)가 대두되었다. 이에 대해 삼한의 취락에서 수혈주거지가 플라스크형의 수혈보다 훨씬 많이 발견된다는 점, 플라스코형 수혈이 마한만의 고유한 구조물이 아니라는 점, 삼한 단계의 주거지 중에서 충청도·전라도·경상도 지역에서 출입구가 횡 방향으로 된 것이 많지 않다는 점 등을 들어 반론을 제기하는 견해(권오영, 2013)가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不知乘牛馬 : 진·변한 지역에는 소와 말을 타는 습속이 있다는 『삼국지』 한전의 기사와 상반된다. 이러한 차이를 진·변한의 기마 습속과 관련시켜 보는 견해(신현웅, 2003)가 있다. 우리나라 원삼국시대의 마구류는 車馬具로서 3세기 말에 해당하는 충주 금릉동 78-1호묘 출토 2孔式 재갈인 표비 등이 있다. 그렇지만 마한 지역에서 騎乘用 마구류가 출토된 예는 아직 없다. 백제 권역에서 騎乘用 마구류가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다소 편년상의 차이는 있지만 4세기 전반부터이며 선비계 재갈과 고삐[표비(鑣轡)]를 수용하면서 기마문화가 시작되었다. 청주 봉명동 C-31호 출토 轡는 4세기 2/4분기 또는 중엽으로 편년되어 백제권 지역에서 가장 시기적으로 빠르다(류창환, 2004). 바로가기
  • 번역주 009)
    而貴瓔珠 :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는 삼한 시기의 유적에서 금은 제품이 출토된 예가 아직 없지만 곡옥 종류는 기록대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삼한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장신구는 대부분 작은 유리나 마노로 만든 구슬이며, 낙동강 유역에서는 수정체 구슬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 구슬들은 이식이나 경식으로 사용된 점이 확인된다(권오영, 2013). 이러한 작은 구슬은 영어의 beads에 해당되며 『삼국지』에서는 瓔珠로 기록해놓았다. 중국은 분묘유적에서 玉이 출토되며 부여와 고구려는 비단이나 금이고, 일본은 돌이나 조개가 중심인 데 비하여 삼한의 분묘에서는 다량의 구슬이 출토되고 있어 이런 기록이 남긴 것이 아닐까 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0)
    科頭露紒 : ‘紒’는 상투를 뜻한다. 모자를 쓰지 않고 상투를 드러내놓는 것을 말한다. 결혼을 하거나 관례를 올릴 때 상투를 하는데, 이는 머리카락을 올려 빗어 정수리 위에서 틀어 감아 삐죽하게 맨 것이다. 여기에 동곳을 꽂아 고정시킨 다음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망건을 썼다. 상투의 확실한 모습은 고구려 고분벽화, 신라 도제 기마인물상에 잘 나타나 있다. 남자가 성인 대접을 받으려면 결혼을 하여 상투를 틀었다. 위만이 연나라에서 고조선으로 망명해 올 때 오랑캐 옷을 입고 상투를 틀었다는 기사가 참고된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1)
    國中有所調役 … 終日讙呼力作 不以爲痛 : 이 기사를 성년식을 위한 집단 시련으로 보는 견해(三品彰英, 1943)나, 지게를 사용하여 공동 노동을 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59)가 있지만, 마한의 경우 집단적이고 농경의례적인 성격을 가진 노동 행위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송화섭, 2006).바로가기
  • 번역주 012)
    善用弓楯矛櫓 : 이 기사는 『삼국지』나 『후한서』 한전에는 없는 독자적인 것으로, 『진서』의 찬술 경향으로 볼 때 이례적이다. 『삼국지』 한전 변진전에 “便步戰 兵仗與馬韓同” 기사를 간접적으로 원용한 것으로 보이나 마한 병장기의 이름과 종류가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고, 또한 보병전의 전술과 형태를 간접적으로 시사해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국가의 성장 수준을 파악하기 위한 척도로 전쟁 능력의 수준을 들고 있는데 기마전술에 능한 부여나 고구려에 비해 마한·옥저·동예 등은 주로 보병에 의존한 것으로 보아 그만큼 상대적으로 낙후된 사회로 보고 있다(김철준, 1981). 바로가기
  • 번역주 013)
    雖有鬪爭攻戰 而貴相屈服 : 이 구절은 전혀 새로운 내용으로 그 출전 근거를 알 수 없는 매우 독자적인 기사이다. 而貴相屈服은 “ 굴복하는 것을 서로 귀히 여긴다 ”(정중환, 1980)는 의미로 해석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4)
    俗信鬼神 … 亦如之 : 마한의 토착적인 세시풍속으로는 5월과 10월에 행하는 농경의례를 들 수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전에 따르면 5월에 씨를 뿌린 뒤 행해지는 기풍제와 10월에 추수가 끝난 뒤 행해지는 추수감사제가 당시 가장 큰 농업축제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때에는 수많은 사람이 음주가무를 즐기고 주야 무휴로 농경의례를 치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5월 파종제와 10월 추수제는 마한 벼농사 농경의례가 정착해 있었음을 말해주고, 세시풍속이 연례행사로 행해졌음을 보여준다. 삼한에서 거행되는 농경의례가 내용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는지 또는 천신과 지신 두 계통이 습합된 형태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전에 의하면 이때 수십 명이 서로 동작을 맞추어 땅을 밟으면서 몸을 낮추었다 올리는 동작의 춤을 추었고, 가락은 탁무를 닮았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지신에 대한 제의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있다(三品彰英, 1973). 이처럼 마한에 지신신앙이 남아 있다는 것은 북방 지역과 구별되는 고유한 생산과 문화 기반이 따로 존속해 있었음을 보여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5)
    國邑 :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주민이 거주하는 취락집단을 가리키는 용어로 국읍·읍락·별읍 등의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읍락은 자연촌락과는 구별되는 일반 취락을 뜻하며, 그 규모가 대략 500호 이상, 1, 000호 미만(이현혜, 1997)이나, 직경 10km 정도(문창로, 2000)로 추정된다. 국읍은 삼한 소국의 중심이 되는 읍락을 뜻하며 상대적으로 세력이 강하거나 중심 기능을 가진 대읍락을 지칭한다(이현혜, 1984). 국읍의 지배자[主帥]는 臣智 등으로 불렸으며 유력한 소국의 신지들은 각종의 優號를 붙여 정치적 권위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국읍의 지배자는 재분배와 잉여생산물의 보관 등을 위한 경제적 기능, 외부 세력과의 전쟁과 방어를 위한 군사적 기능, 그리고 천군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기능을 가지고 있던 단위 정치체[國]의 중심지인 것으로 이해된다(권오영, 1996). 그러나 읍락의 독자성이 강한 대신 국읍과 읍락의 상대적인 세력 격차가 크지 않아 『삼국지』 동이전 한전에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 無拜之禮”라고 한 것에서 보듯이 국읍이 읍락을 완전히 제어하지는 못하는 한계를 가졌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6)
    天君 :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으로 국읍의 종교적 지도자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主帥와 함께 각각 종교와 정치를 담당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현혜, 1984)와 초기에는 정치적 지배자와 제사장을 겸하였으나(김정배, 1978), 후기에 이르러 제정분리가 진행되면서 주수의 권한이 강화되는 대신 천군은 종교적 직능만을 담당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송화섭, 1994). 이 제사의식의 목적은 정치·경제의 중심지인 국읍의 주도하에 초읍락적인 신을 제사지냄으로써 읍락 간의 결속을 다짐하여 국읍 지배자가 가진 정치권력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된다(김두진, 1985). 이 점 때문에 삼한을 국가 단계로 보지 않고 과도기 단계인 Chiedom 단계로 보는 견해(최광식, 2006)가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7)
    別邑 : 별읍은 소국의 일부로 통합되지 않고 독립된 정치집단으로 존속하고 있었던 개별 읍락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러한 소규모의 독립적인 정치집단이 많이 있었다. 이를 ‘蘇塗’라고 불렀는데 국읍의 천군이 주재하는 천신제사와는 별도로 무당이 토착적인 귀신제사를 행하고 있었다(최광식, 1994). 이처럼 별읍은 신앙적으로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일반 읍락과 마찬가지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정치적으로 국읍의 통제를 받으며 그 영역 안에 속해 있었다(문창로, 2000). 반면 별읍을 독자적인 정치집단이 아닌 제천의식을 거행하는 성역 또는 祭場으로 보는 견해(송화섭, 2006)도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8)
    蘇塗 : 삼한시대에 각국에 별읍을 소도라 이름하였는데 큰 나무를 세워 북과 방울을 달아 놓고 귀신을 섬겼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곳으로 도망가면 잡아가지 못했으며 소도를 세운 뜻은 불교와 같으나 선악의 기준이 서로 다르다고 하였다. 소도에 대해서는 고대사회에서 태양 숭배의 제단인 ‘수두’로 이해한 견해(신채호, 1948), 읍락 간의 경계선 내지는 수호신을 모시는 ‘솟대’라는 견해(손진태, 1948)가 있지만, 두 용어 모두 농촌의 민간신앙에서는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현재는 ① 삼한의 천군이 있는 곳인 동시에 봄과 가을에 걸쳐 천군이 농경의례를 거행하는 곳이라는 견해(김정배, 1986), ② 소도신앙은 읍락 단위의 부락제에서 발전한 것으로 소국 성립 이후 여러 읍락에서 거행되던 개별적인 제사행위를 하나로 묶은 것으로 보는 견해(김두진, 1985 ; 문창로, 2017), ③ 마한의 소도는 별읍에서 행하는 제천의식으로 그 제장을 소도라 하였으며, 그 제장에서 행해지는 소도의식은 불교의식과 흡사한 종교의례로 보는 견해(송화섭, 2006) 등이 있다. 그러나 소도신앙이 청동기문화 단계 이래의 토착신앙을 계승한 측면이 있지만 소도에서 숭배되는 귀신이 어떤 종류의 신이었는지, 그 주관자와 천군과의 관계가 어떠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9)
    其蘇塗之義 … 而所行善惡有異 : 소도를 설치한 뜻이 부도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浮屠는 불교를 지칭한다. 소도는 죄를 지은 자를 심판하여 형벌을 가하거나 죄를 면할 수 있도록 교화하고 선행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불교의 목적이 교화에 있듯이 소도를 설치하는 목적도 교화에 있었다. 陳壽가 『삼국지』를 찬술한 3세기 후반 중국의 부도는 악행을 제어하고 선행을 권장하는 수행불교적 성격이 강하였다. 진수가 마한의 소도를 부도와 흡사한 것으로 본 것은 부도가 중국의 고유신앙과 교섭하였듯이 마한의 소도 또한 귀신을 숭배하는 민간신앙과 천신신앙이 융합된 종교의례였음을 파악한 것이다(송화섭, 2006). 『삼국지』 한전의 소도 기사가 중국의 초전불교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면 『진서』 마한전의 것은 서역불교와 결부시키고 있어 차이가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0)
    마한으로 추정되는 나라의 대중국 교섭 사료는 아래와 같다.276년 : 東夷八國歸化(2월) 東夷十七國內附(7월)(『晉書』 권3, 帝紀3 世祖 武帝).
    277년 : 西北雜虜及鮮卑匈奴五溪蠻夷東夷三國前後十餘輩 各帥種人部落內附 (是歲)馬韓來(『晉書』 馬韓傳).
    278년 : 東夷六國來獻(3월) 東夷九國內附(是歲) 馬韓請內附(『晉書』 馬韓傳).
    280년 : 東夷十國歸化(6월) 東夷十國朝獻(7월) 馬韓主頻遣使入貢方物(『晉書』 馬韓傳).
    281년 : 東夷五國來獻(3월) 東夷五國來附(6월) 馬韓主頻遣使入貢方物(『晉書』 馬韓傳).
    282년 : 東夷二十九國歸化 獻其方物(9월) 東夷馬韓新彌諸國 依山大海 去州四千餘里 歷世未附者二十餘國 竝遣使朝獻(『晉書』 권36 張華傳).
    286년 : 東夷十一國內附(8월) 馬韓等十一國遣使來獻 (是歲)馬韓至(『晉書』 馬韓傳).
    287년 : 東夷二國內附(8월) 馬韓至(『晉書』 馬韓傳).
    288년 : 東夷七國詣校尉內附(9월)(『晉書』 권3, 帝紀3 武帝).
    289년 : 東夷十一國內附(5월) 東夷絶遠三十餘國內獻 (是歲)馬韓至(『晉書』 馬韓傳).
    290년 : 東夷七國朝貢(2월) 馬韓詣東夷校尉何龕上獻(『晉書』 馬韓傳).
    291년 : 東夷十七國 南夷二十四部並詣校尉內附(『晉書』 권4 帝紀4 孝惠帝).
    동이 제국과 서진과의 교섭 기사는 무제의 재위 기간인 함령·태강(275~289) 연간에 집중되어 있다. 무제대는 조위에게 선양을 받고 오를 멸망시켜 서진 역사에서 전성을 이룬 시기였다. 동아시아 정세도 점차 안정되어가는 추세 속에서 주변 여러 나라와 교류도 활발하였다. 동이 제국 중에서 서진과 교섭을 전개한 주체는 누구인가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는데, 백제를 중심으로 한 마한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59 ; 천관우, 1989), 마한으로 보는 견해(이도학, 1995 ; 윤용구, 2014), 백제로 보는 견해(김수태, 1998)가 있다. 반면 『진서』 張華傳에 등장하는 282년 신미제국의 조공 사실을 기점으로 이를 분리해 보는 입장도 있다. 먼저 신미제국의 등장 이전은 백제(노중국, 1990), 건마국(유원재, 1994), 목지국과 백제의 복수 파견으로 보는 견해(권오영, 1996)가 있다. 다음으로 신미제국의 등장 이후에는 신미국(노중국, 1990 ; 유원재, 1994), 백제국과 신미국이 복수로 활동한 것으로 보거나(이현혜, 1997), 영산강 유역의 집단으로 보는 견해(권오영, 1996 ; 전진국, 2017)가 있다. 이처럼 3세기 후반 마한과 서진과의 교류는 백제를 포함한 마한 제국의 개별적이며 독자적인 교류였기 때문에 그 주체를 오로지 백제만으로 상정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1)
    東夷校尉 : 校尉는 전한대에 설치된 이래 후한대와 서진대에도 계승되었다. 주변 민족을 통할하기 위한 관직으로 운영되었는데 祿秩은 2, 000석이었다. 동이교위는 중국 왕조가 주변의 이민족을 통제, 관리하기 위해 3세기경 西晉이 설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역할은 무엇보다 동이 제국 및 여러 민족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거나 이 지역에 대한 자국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한 무력행사 및 외교관계 업무를 담당하였다(이주현, 2000). 이에 대해서는 『진서』 동이 부여국조 참조. 동이교위의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① 漢대설(『후한서』 백관지), ② 曹魏대에 공손씨 정권에서 설치한 것으로 보는 견해(『진서』 지리지 평주 ; 이주현, 2000), ③ 조위의 공손씨 멸망 직후 설치설(程尼娜, 2004) 등이 있으나, 대체로 서진 시기에 실질적인 기능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張國慶, 1989 ; 三岐良章, 2000 ; 윤용구, 2005). 사마염이 282~305년에 여러 이민족 통어관을 설치하고, 286년 하감이 부여를 복국시키고 모용외를 격파하면서 동이교위의 권위가 보다 확고해졌다. 동이교위의 역할과 기능 또한 시기에 따라 변화한 것으로 파악된다. 4세기 이후 중국 내부에 혼란한 상황이 지속되자 동이교위는 현지의 유력자에게 위임된 형태로 운용되었다. 이는 당시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가던 선비족에 대한 견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5호 16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전연에서 자체적으로 집권자의 측근에게 동이교위를 임명하여 직할지 내로 내속해 온 이민족을 통제하고자 하였으며, 외부의 동이족을 실질적으로 통제하고자 하는 목적은 아니었다. 5세기 북위에서 설치한 동이교위는 營州 내 이민족과 거란·고막해 등 시라무렌강 유역의 유목민족을 통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요하 이동 지역 제국에 대한 통제권은 東夷中郞將에게 위임되었다. 이후 고구려가 시라무렌강 유역으로까지 세력을 확대하자 동이교위의 지위는 일시적으로 고구려에 계승되었다. 이후 당이 영주에 동이교위를 설치하여 기능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실제적인 동이 지역에 대한 통제는 고구려 멸망 이후에야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윤용구, 2005).바로가기
  • 번역주 022)
    原註 각주 : 「함녕은 태강과 태희 앞에 세워진 연호인데, 본전에서는 선후가 서로 바뀌었다.」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마한(馬韓)의 성립과 풍속 자료번호 : jd.k_0005_0097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