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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태사공(太史公)의 말

  • 국가
    흉노(匈奴)
태사공이 말하였다. “공자(孔子)가 『춘추』를 지었을 때 [옛날] 은공(隱公)환공(桓公) 주 001
각주 001)
『春秋』에는 魯 隱公 元年(전722)의 일부터 기록되었다. 魯 桓公(재위 전711 ~ 전694)은 隱公의 뒤를 이어 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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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 [일어난 일들은] 명료하게 서술하였으나 [자신과 동시대인] 정공(定公)애공(哀公) 주 002
각주 002)
魯 定公(재위 전409 ~ 전495)과 魯 哀公(재위 전494 ~ 전468) 시기는 『春秋』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孔子가 살았던 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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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 [일어난 일을] 분명하지 않게 서술한 것은주 003
각주 003)
孔子는 定公과 哀公시기에 관리가 되어 『春秋』를 저술했다. 과거의 일은 꺼릴 필요가 없어 자세하게 기록하면서 자신이 살던 시대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하게 기록을 했다. 이런 기록은 司馬遷이 孔子가 『春秋』를 저술한 상황을 빗대어 자신이 當代의 일을 기록하는 것이 불가피하게 꺼리는 내용을 쓸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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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와 너무나 가까운 일의 기록이 근거 없이 칭송하거나 꺼려서 피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항간에서 흉노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들은 일시적인 권세를 얻고 싶어 하여주 004
각주 004)
“徼”은 ‘구한다’는 것으로 일시적인 권력의 寵愛를 구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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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의견이 채택되도록 아첨함으로써 [황제 또는 장군 등 의견 채택자의] 편견을 조장하고 피아(彼我)[의 정세]를 참작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장군들은주 005
각주 005)
“將率”은 樊噲, 衛靑, 霍去病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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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광대하다는 것만 믿고 기고만장했으며, 임금은 [그들의 의견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기 때문에 세운 공이 많지 못하였다. [임금]은 비록 현명한 [군주였으나 혼자서] 사업을 일으켜 성공할 수 없었으나 [임금]을 얻고서야 [비로소] 구주(九州) 주 006
각주 006)
『尙書』 「禹貢編」에 의하면 九州는 冀州, 兗州, 靑州, 徐州, 揚州, 荊州, 豫州, 梁州, 雍州이다. 이 외에도 여러 설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全中國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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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안녕하게 만들 수 있었다.주 007
각주 007)
『史記正義』에서 司馬遷이 堯가 비록 聖人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힘이 아니라 禹를 얻어 九州를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처럼, 武帝가 좋은 將軍과 宰相을 잘 고르지 못하고 小人들의 아첨에만 빠져 여러 차례 匈奴를 원정하여 백성들의 삶을 파괴한 것을 비판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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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거룩한] 성왕의 전통을 일으키고자 한다면 오직 장군이나 대신을 잘 골라 일을 맡기는 데 있도다! 오직 장군이나 대신을 잘 골라 일을 맡기는 데 있도다!”

  • 각주 001)
    『春秋』에는 魯 隱公 元年(전722)의 일부터 기록되었다. 魯 桓公(재위 전711 ~ 전694)은 隱公의 뒤를 이어 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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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魯 定公(재위 전409 ~ 전495)과 魯 哀公(재위 전494 ~ 전468) 시기는 『春秋』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孔子가 살았던 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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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孔子는 定公과 哀公시기에 관리가 되어 『春秋』를 저술했다. 과거의 일은 꺼릴 필요가 없어 자세하게 기록하면서 자신이 살던 시대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하게 기록을 했다. 이런 기록은 司馬遷이 孔子가 『春秋』를 저술한 상황을 빗대어 자신이 當代의 일을 기록하는 것이 불가피하게 꺼리는 내용을 쓸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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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徼”은 ‘구한다’는 것으로 일시적인 권력의 寵愛를 구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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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將率”은 樊噲, 衛靑, 霍去病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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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尙書』 「禹貢編」에 의하면 九州는 冀州, 兗州, 靑州, 徐州, 揚州, 荊州, 豫州, 梁州, 雍州이다. 이 외에도 여러 설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全中國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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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史記正義』에서 司馬遷이 堯가 비록 聖人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힘이 아니라 禹를 얻어 九州를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처럼, 武帝가 좋은 將軍과 宰相을 잘 고르지 못하고 小人들의 아첨에만 빠져 여러 차례 匈奴를 원정하여 백성들의 삶을 파괴한 것을 비판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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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태사공, 공자(孔子), 은공(隱公), 환공(桓公), 정공(定公), 애공(哀公), ,
지명
구주(九州)
서명
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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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공(太史公)의 말 자료번호 : jo.k_0001_0110_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