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성무(柴成務) 등을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고 조서를 내림
호부낭중(戶部郎中)주 001 시성무(柴成務),주 002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郎)주 003 조화성(趙化成)주 004으로 하여금 고려로 사신 가고 좌정언(左正言)주 005 송호(宋鎬),주 006 우정언(右正言)주 007 왕세칙(王世則)주 008으로 하여금 교주(交州)주 009
각주 009)
에 사신으로 가서 왕치와 여환(黎桓)주 010交州 : 交趾의 별칭. 베트남 고대왕국을 일컫는다. 중국사서에는 『尙書 』「堯典」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南交라고 지칭하고 있다. 향후 『墨子』, 『淮南子』, 『史記 』등에서 交阯 혹은 交趾를 언급하기 시작한다. 前漢 때 南越王 趙佗가 처음으로 交趾郡을 설치했다. 漢 武帝 元鼎 6年(B.C. 111)에는 무제의 팽창정책으로 漢나라로 완전 귀속되었다. 관할지역은 지금의 베트남 북부 일대였다. 後漢 獻帝 建安 8年(203)에는 交州刺史가 설치되는데 治所는 廣信縣(지금의 廣西省 梧州市)이었다. 삼국시대에는 吳가 이 지역을 交州와 廣州로 나누어 통치했는데 관할지역은 지금의 廣西省 欽州 지구, 廣東省 雷州半島 일대와 베트남의 北部와 中部 지역이다. 隋代에 잠시 폐지했다가 唐 高祖 武德 5年(622)에 다시 설치되는데 治所는 交趾縣(베트남 하노이시 서북부)이었다. 당대 후반기 이래 당의 지배체제가 이완되면서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는데, 오대시기에 紅江 유역의 토착세력이었던 응오꾸엔(NgoQuyen)이 南漢의 침략을 저지하고 939년 마침내 새로운 왕조를 세워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약 반세기 간의 혼란기를 거쳐서 마침내 최초의 장기왕조인 리(Ly, 李) 왕조(1009∼1225)가 건립되었는데 중국측의 책봉을 받고 주로 安南이나 交趾로 불렸지만 베트남의 왕들은 스스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다이비엣(大越)이라는 국명을 통해 인도차이나 반도의 강자로 군림하며 독자적인 조공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각주 010)
에게 은혜를 더한 제서를 내려주게 했다.黎桓 : 950∼1005, 재위 980∼1005. 베트남 前黎朝(980∼1009)의 건국주. 愛州 출신으로서 어려서 부모와 사별하고 동족인 黎觀察의 양자가 되었다. 장성해서 丁朝에 출사하여 승진을 거듭한 끝에 최고 무직인 十道將軍이 되었다. 丁部領 사후 攝政으로서 실권을 장악하였다가, 980년 宋朝의 침공 때 士卒에게 추대되어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 후 권력 장악 과정에서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던 丁部領의 황후 楊氏를 자신의 황후로 삼았다. 宋의 원정을 격퇴한 다음에는 남방의 참파를 원정하여 그 수도를 함락시키고 도성과 종묘를 파괴했다. 참파는 이후 베트남의 위협을 피하여 수도를 인드라푸라(Indrapura)로부터 남방의 비자야(Vijaya, 오늘날의 빈 딘)로 옮기게 된다. 이렇게 남북으로 대외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내치에 전념했다. 984년 도읍인 華閭에 웅장한 궁궐을 건축하고 베트남 최초의 화폐인 天福이란 동전을 만들어 통용시켰다. 986년에는 軍制를 개혁하여 장정 중에서 특히 강건한 자를 선발하여 황제의 친위군으로 삼았다. 前黎朝는 그의 사후 극심한 동요 속에서 1009년 멸망했다.
고려의 국속에 음양귀신을 믿어 자못 피하고 꺼리는 것이 많아 조정의 사신이 이를 때마다 왕치는 반드시 양월 길일을 택하여 예를 갖추고 조서를 받았다. 시성무가 객관에서 달을 넘겨 머무르다가 왕치에게 글을 보냈다. 그것을 질책하기를, “금기에 얽매이고, 점술에 구애받고, 점쟁이의 허튼 말에 현혹되어 천자의 조서를 지체하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전책(典冊)의 문장은 무당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경(書經)』주 011
각주 011)
에서 상일(上日)만 말했고, 육갑(六甲)의 원신(元辰: 길일)을 추천하지 않았으며, 『예기(禮記)』주 012에서도 중동(仲冬)을 채택하여 일양(一陽)의 좋은 시기만을 취했으니 찬란한 옛 교훈을 명확하게 헤아릴 수 있습니다. 마땅히 계획을 바꿔 속히 임금이 내린 것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치가 글을 읽고 부끄럽고 두려워하는데 때마침 장마가 그치지 않으니 이에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청했다. 시성무가 다시 글을 보내 깨우치니 왕치가 즉시 나와 명을 받았다.書經 : 五經의 하나로 중국 上古時代의 정치를 기록한 책이다. 고대에는 제도상으로 史官이 있어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치적 상황이나 사회변동, 문물제도 등을 낱낱이 문자로 기록했다고 한다. 따라서 옛날에는 그저 書라 일컬었으며 때로는 왕조의 이름을 위에 얹어 虞書, 夏書 등으로 일컫기도 했다. 孔子는 이 서를 대단히 중히 여겨 번잡한 것을 정리해 다시 편찬했다는 설이 있으며 詩와 더불어 제자들의 교육에 핵심적인 교과과정으로 삼았다. 漢代 이후 『尙書』라고 일컬었는데, 尙은 上과 통하여 ‘上代의 書’라는 뜻이라고 한다. 宋代에는 다시 『書經』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經은 經典이라는 말로 성인이 刪定한 책이라는 존중의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은 『상서』, 『서경』의 두 명칭이 통용되고 있으며 고증이 어렵고 난해한 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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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9)
交州 : 交趾의 별칭. 베트남 고대왕국을 일컫는다. 중국사서에는 『尙書 』「堯典」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南交라고 지칭하고 있다. 향후 『墨子』, 『淮南子』, 『史記 』등에서 交阯 혹은 交趾를 언급하기 시작한다. 前漢 때 南越王 趙佗가 처음으로 交趾郡을 설치했다. 漢 武帝 元鼎 6年(B.C. 111)에는 무제의 팽창정책으로 漢나라로 완전 귀속되었다. 관할지역은 지금의 베트남 북부 일대였다. 後漢 獻帝 建安 8年(203)에는 交州刺史가 설치되는데 治所는 廣信縣(지금의 廣西省 梧州市)이었다. 삼국시대에는 吳가 이 지역을 交州와 廣州로 나누어 통치했는데 관할지역은 지금의 廣西省 欽州 지구, 廣東省 雷州半島 일대와 베트남의 北部와 中部 지역이다. 隋代에 잠시 폐지했다가 唐 高祖 武德 5年(622)에 다시 설치되는데 治所는 交趾縣(베트남 하노이시 서북부)이었다. 당대 후반기 이래 당의 지배체제가 이완되면서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는데, 오대시기에 紅江 유역의 토착세력이었던 응오꾸엔(NgoQuyen)이 南漢의 침략을 저지하고 939년 마침내 새로운 왕조를 세워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약 반세기 간의 혼란기를 거쳐서 마침내 최초의 장기왕조인 리(Ly, 李) 왕조(1009∼1225)가 건립되었는데 중국측의 책봉을 받고 주로 安南이나 交趾로 불렸지만 베트남의 왕들은 스스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다이비엣(大越)이라는 국명을 통해 인도차이나 반도의 강자로 군림하며 독자적인 조공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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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0)
黎桓 : 950∼1005, 재위 980∼1005. 베트남 前黎朝(980∼1009)의 건국주. 愛州 출신으로서 어려서 부모와 사별하고 동족인 黎觀察의 양자가 되었다. 장성해서 丁朝에 출사하여 승진을 거듭한 끝에 최고 무직인 十道將軍이 되었다. 丁部領 사후 攝政으로서 실권을 장악하였다가, 980년 宋朝의 침공 때 士卒에게 추대되어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 후 권력 장악 과정에서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던 丁部領의 황후 楊氏를 자신의 황후로 삼았다. 宋의 원정을 격퇴한 다음에는 남방의 참파를 원정하여 그 수도를 함락시키고 도성과 종묘를 파괴했다. 참파는 이후 베트남의 위협을 피하여 수도를 인드라푸라(Indrapura)로부터 남방의 비자야(Vijaya, 오늘날의 빈 딘)로 옮기게 된다. 이렇게 남북으로 대외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내치에 전념했다. 984년 도읍인 華閭에 웅장한 궁궐을 건축하고 베트남 최초의 화폐인 天福이란 동전을 만들어 통용시켰다. 986년에는 軍制를 개혁하여 장정 중에서 특히 강건한 자를 선발하여 황제의 친위군으로 삼았다. 前黎朝는 그의 사후 극심한 동요 속에서 1009년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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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1)
書經 : 五經의 하나로 중국 上古時代의 정치를 기록한 책이다. 고대에는 제도상으로 史官이 있어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치적 상황이나 사회변동, 문물제도 등을 낱낱이 문자로 기록했다고 한다. 따라서 옛날에는 그저 書라 일컬었으며 때로는 왕조의 이름을 위에 얹어 虞書, 夏書 등으로 일컫기도 했다. 孔子는 이 서를 대단히 중히 여겨 번잡한 것을 정리해 다시 편찬했다는 설이 있으며 詩와 더불어 제자들의 교육에 핵심적인 교과과정으로 삼았다. 漢代 이후 『尙書』라고 일컬었는데, 尙은 上과 통하여 ‘上代의 書’라는 뜻이라고 한다. 宋代에는 다시 『書經』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經은 經典이라는 말로 성인이 刪定한 책이라는 존중의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은 『상서』, 『서경』의 두 명칭이 통용되고 있으며 고증이 어렵고 난해한 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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