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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한일관계 사료집

쇼군의 분부가 내려왔다고 하여 도이 오이노카미(土井大炊頭) 집에서 조사하는 내용

一 (상동) 3월 12일 [쇼군의] 분부가 내려왔다고 집권들이 사자를 보냈기에 도이 오이노카미(土井大炊頭)님댁으로 갔다. 이 사건으로 여러 번 엄밀한 조사를 명하시고 직접 들어보신 결과, 쓰시마노카미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자세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니 쓰시마 지배도 전과 같이 변함없이 허가한다고 명하셨다. 그리고 올해나 내년에 조선에서 통신사가 건너오도록 명하셨다고 다들 말씀하셨다. 제 말을 이해해주시고 만사를 이전처럼 수행하도록 명하여 주셔서 체면과 실리가 모두 유지되어 이국(異國)까지 들리게 되었으니 깊이 감사드리며, 통신사의 건도 분부하신대로 처리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가몬(掃部)주 001
각주 001)
가몬노카미(井伊掃部頭) 이이 나오타카(井伊直孝). 쇼군 이에미쓰의 자문으로서 다이로(大老) 격으로 막정에 참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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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필시 쓰시마 번의 가신들이 불안해하고 있을 테니 빨리 돌아가서 분부하신 대로 해야 한다. 다들 쓰시마노카미의 일이 잘 풀렸으니 보은해야 할 것이다. 빨리 돌아가라.”고 말씀하시기에 돌아왔다.

一 (三十) 동일 오이노카미(大炊頭)님이 보초로를 불러 난부(南部)주 002
각주 002)
현재 모리오카 현(盛岡縣) 모리오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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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유배형에 처한다고 하셨다. 난부 야마시로노카미(南部山城守)주 003
각주 003)
모리오카 번(盛岡藩)의 2대 번주 난부 시게나오(南部重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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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댁으로 바로 갈 것이다.
一 (상동) 동일 이즈노카미(伊豆守)님이 야나가와 부젠(柳川豊前)을 불러 쓰가루(津輕)주 004
각주 004)
현재 아오모리 현(靑森縣) 서쪽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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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유배형에 처한다고 하셨다. 쓰가루 헤이조(津輕平藏)주 005
각주 005)
히로자키 번(弘前藩: 현재 아오모리 현의 서부)의 3대 번주 쓰가루 요시노부(津輕信義). 헤이조(平藏)는 兒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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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에게 전달될 것이다. 주 006
각주 006)
막부의 심의 결과 유배형 판결을 받은 야나가와 시게오키는 히로자키 번(弘前藩)의 번주 쓰가루 요시노부에게 맡겨져, 쓰가루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33세 때이다. 히로자키 번으로 향하는 도중 시게오키는 삭발하고, 이름을 ‘素庵’으로 개명했다. 헌데 쓰가루에서의 유배생활은 죄인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잇켄 당시 시게오키의 지원 세력이었던 로주 사카이 다다카쓰(酒井忠勝), 도이 도시카쓰(土井利勝) 등의 특별한 배려에 힘입어, 무려 7명의 가신을 이끌고 쓰가루의 城下에 광대한 저택을 받아 생활했다. 초반에 있던 감시원도 곧 없어졌으며, 막부가 쓰가루씨에게 명한 분량보다 훨씬 많은 양의 쌀이 지급되었다. 번주 쓰가루씨도 시게오키의 재기(才氣)를 마음에 들어 했는지 때때로 번주 夫子가 시게오키의 저택을 방문하기도 하고, 시게오키가 번주의 城에 초대되어 함께 노오(能)를 즐기기도 했다. 시게오키는 1684년 10월, 50년에 가까운 유배생활 끝에 82세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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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상동) 같은 날 밤 마쓰오 시치에몬(松尾七右衛門)과 그 아들 一角에게 사형(死罪)을 명하셨다.

  • 각주 001)
    가몬노카미(井伊掃部頭) 이이 나오타카(井伊直孝). 쇼군 이에미쓰의 자문으로서 다이로(大老) 격으로 막정에 참여하고 있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현재 모리오카 현(盛岡縣) 모리오카 시. 바로가기
  • 각주 003)
    모리오카 번(盛岡藩)의 2대 번주 난부 시게나오(南部重直). 바로가기
  • 각주 004)
    현재 아오모리 현(靑森縣) 서쪽의 도시. 바로가기
  • 각주 005)
    히로자키 번(弘前藩: 현재 아오모리 현의 서부)의 3대 번주 쓰가루 요시노부(津輕信義). 헤이조(平藏)는 兒名. 바로가기
  • 각주 006)
    막부의 심의 결과 유배형 판결을 받은 야나가와 시게오키는 히로자키 번(弘前藩)의 번주 쓰가루 요시노부에게 맡겨져, 쓰가루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33세 때이다. 히로자키 번으로 향하는 도중 시게오키는 삭발하고, 이름을 ‘素庵’으로 개명했다. 헌데 쓰가루에서의 유배생활은 죄인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잇켄 당시 시게오키의 지원 세력이었던 로주 사카이 다다카쓰(酒井忠勝), 도이 도시카쓰(土井利勝) 등의 특별한 배려에 힘입어, 무려 7명의 가신을 이끌고 쓰가루의 城下에 광대한 저택을 받아 생활했다. 초반에 있던 감시원도 곧 없어졌으며, 막부가 쓰가루씨에게 명한 분량보다 훨씬 많은 양의 쌀이 지급되었다. 번주 쓰가루씨도 시게오키의 재기(才氣)를 마음에 들어 했는지 때때로 번주 夫子가 시게오키의 저택을 방문하기도 하고, 시게오키가 번주의 城에 초대되어 함께 노오(能)를 즐기기도 했다. 시게오키는 1684년 10월, 50년에 가까운 유배생활 끝에 82세로 타계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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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군의 분부가 내려왔다고 하여 도이 오이노카미(土井大炊頭) 집에서 조사하는 내용 자료번호 : kn.k_0001_0010_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