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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동이전

백제의 성립과 제도, 풍속

백제는 그 선조가 아마도 마한에 속한 나라로서 부여의 별종주 001
번역주 001)
夫餘之别種 : 대개 ‘부여에서 파생된 종족’ 정도로 해석한다. 중국 사서 가운데 『魏書』·『周書』·『隋書』·『北史』·『舊唐書』·『新唐書』 등 북조 계통 사서에서는 백제가 고구려 또는 부여 계통이라고 설명하였으며, 『梁書』·『南史』·『梁職貢圖』 등 남조 계통 사서에서는 백제가 마한에 속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북조 계통 사서는 백제의 공식 외교문서에 근거하였고, 남조 계통 사서는 『삼국지』·『후한서』의 삼한 인식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유원재, 1993). 백제가 부여에서 파생되었다는 생각은 온조를 비롯한 건국 주체 세력이 부여 출신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472년 백제 개로왕이 北魏로 보낸 表에서 “백제 왕실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로부터 나왔다.”고 한 기록(『위서』·『삼국사기』), 비류·온조가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인 優台의 아들이라는 건국설화, 백제 왕실의 성씨가 부여씨이며 538년 泗沘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南扶餘로 바꾼 점, 한강 유역의 토광묘를 부여문화와 관련짓는 고고학적 견해(강인구, 1989) 등이 있다. 그러나 현재 학계의 통설은 백제가 고구려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이다. 온조가 고구려 시조 주몽의 아들이라는 건국설화, “백제는 고구려에서 나왔다.”는 『수서』의 기록, 백제 왕릉 구역으로 추정되는 석촌동고분군의 돌무지무덤(積石塚)은 고구려 양식이라는 고고학적 견해(김원룡 외, 1989 ; 이현혜, 1991 ; 임영진, 1994) 등이 주요 근거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주몽이 북부여 출신이고 백제의 온조가 졸본부여(고구려) 출신이라는 건국설화의 상징성을 감안하면 부여와 고구려를 굳이 구별하기보다 백제를 ‘부여·고구려 계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안정적인 듯하다. 백제가 부여와의 관련성을 강조한 것은 고구려와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동부여마저 고구려에게 멸망하는 5세기 이후이기 때문이다(정재윤, 200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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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데, 구태주 002
번역주 002)
仇台 : 『수서』 백제전에도 “동명의 후손 구태가 대방의 옛 땅에서 백제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삼국유사』 등 국내 사서에는 沸流와 溫祚만 나오고 구태 이야기는 전혀 없다. 『속일본기』·『신찬성씨록』 등 일본 사서에는 백제 시조를 都慕라고 하였다. 구태와 관련해서는 ① 구태를 온조와 같은 인물로 보는 견해(임기환, 1998 ; 박찬규, 2003) ② 비류의 아버지인 우태와 연결시키는 견해(천관우, 1976b), ③ ‘台’를 ‘이’로 읽어 백제 고이왕과 같은 사람으로 실질적 건국자라고 하는 견해(이병도, 1976 ; 유원재, 1993), ④ 부여계 인물로 보는 견해(이홍직, 1971 ; 王信民, 1986 ; 김병곤, 2007), ⑤ 백제의 부여 계승 의식 및 6세기 왕실의 신성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견해(정재윤, 2008a)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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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사람이 처음에 대방에서 나라를 세웠다. 그래서 그 땅은 경계가 동쪽으로 신라에 닿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접하고, 서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에까지 이르며, 동서 450리, 남북 900여 리이다. 도읍은 고마성주 003
번역주 003)
固麻城 : 당시의 왕성인 泗沘城을 가리킨다. ‘고마’라는 이름이 한글 ‘곰’을 한자로 나타낸 것이라면 웅진성(지금의 공주)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지만, 뒤이어 나오는 5방 중 북방을 웅진성이라고 하였으므로 여기의 고마성은 사비시대의 왕성임을 알 수 있다. ① 『양서』의 “왕이 다스리는 성을 固麻라고 한다.”는 기록을 수용한 것이라는 견해(박현숙, 2007), ② 『수서』에 나오는 居拔城이 당시의 백제 왕성인 사비성을 뜻하므로 고마성도 ‘왕성’ 또는 ‘대성’을 뜻하는 고유명사라는 견해(坂元義種, 1978a) 등이 있다. 찬자가 이름을 잘못 기재했다고 보는 견해(이홍직, 1971)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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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며, 그 바깥에 다시 5방주 004
번역주 004)
五方 : 백제 사비시대의 지방통치조직 가운데 하나였던 동·서·남·북·중 5개의 방으로서 郡-城보다 높은 단위의 군사행정 거점이었다. 『수서』에 “5방에는 각각 方領 1인과 方佐 2인이 있다. 방에는 10郡이 있고 군에는 장수가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북사』에는 “方領 1명과 方佐 2명이 있으며 병사 700~1, 200명을 거느린다.”는 기록이 있다. 『한원』에는 『괄지지』를 인용해 “方마다 郡을 관리하는데, 많은 것은 10개에 이르고 작은 것은 6~7개이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근거로 방-군-성 체제를 설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5방제는 웅진시기 또는 사비 천도 무렵에 성립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노중국, 1988 ; 김영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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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으니, 중방은 고사성,주 005
번역주 005)
古沙城 : 백제 5방 중 하나인 中方의 거점성으로서 흔히 전북 고부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今西龍, 1934 ; 천관우, 1979 ; 천관우 1989 ; 박현숙, 1998). 구체적으로 ① 정읍시 영원면의 금사동산성(전영래, 1995), ② 부안의 두승산성(今西龍, 1934) 또는 ③ 위금암산성(전영래, 1995 ; 노도양, 1980) 등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지만, 기록 속의 중방성 크기 및 입지·축성법 등과 달라 ④ 정읍의 인근 지역까지 범위를 넓혀 조사해야 한다는 견해(서정석, 2002)도 있다. 『한원』에 인용된 『괄지지』에 따르면, 중방성은 사비 도성에서 남쪽으로 260리 떨어져 있으며, 성의 둘레는 150步였다고 한다. 1보를 5척으로 계산할 경우 약 690m, 1보를 6척으로 계산할 경우 약 828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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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은 득안성,주 006
번역주 006)
得安城 : 백제 5방 중 하나인 東方의 거점성으로서 대개 충남 논산시 은진 일대에 있었다고 추정한다(今西龍, 1934 ; 이병도, 1977 ; 천관우, 1989). 은진 지역에는 매화산성과 달이산성이 있는데, 흔히 매화산성을 동방성에 비정한다(박현숙, 1996 ; 김영심, 1999 ; 서정석, 2002). 한편, 논산의 황산성을 득안성으로 추정하고(성주탁, 1975), 계백의 5,000결사대가 동방에 배속된 지방군이며(강종원, 2000), 계백은 동방령이었다는 견해(지원구, 2007)도 있다. 『한원』에 인용된 『괄지지』에 따르면 동방성은 사비 도성의 동남쪽 100리에 있고, 성벽 둘레는 1리(1,650m)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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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은 구지하성,주 007
번역주 007)
久知下城 : 백제 5방 중 하나인 南方의 거점성으로서 『한원』에 인용된 『괄지지』에는 ‘卞城’으로 적혀 있다. 위치에 대해서는 ① 전북 금구(今西龍, 1934), ② 전북 남원(전영래, 1988 ; 곽장근, 1997 ; 김영심, 1997 ; 서정석, 2002), ③ 전남 구례(末松保和, 1949), ④ 전남 장성(이병도, 1977 ; 전준현, 1993), ⑤ 광주 또는 나주 일대(박현숙, 1998)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한원』에 인용된 『괄지지』에 사비 도성에서 남쪽으로 360리 떨어져 있으며 성벽 둘레 130보(598m 또는 720m)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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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은 도선성,주 008
번역주 008)
刀先城 : 백제 5방 중 하나인 西方의 거점성으로 『한원』에 인용된 『괄지지』에는 力光城으로 적혀 있다. 위치에 대해서는 ① 나주·영암 지역(전영래, 1988), ② 충남 예산·대흥 일대(천관우, 1989 ; 박현숙, 1996 ; 이우태, 1999), ③ 서산 지역(김영심, 1999), ④ 홍성 학성산성(서정석, 2002) 등 견해가 다양하다. 『한원』에 인용된 『괄지지』에는 서방성이 사비 도성에서 서쪽으로 350리 떨어져 있으며, 성벽 둘레 200보(920m 또는 1,104m)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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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은 웅진성주 009
번역주 009)
熊津城 : 백제 5방 중 하나인 북방의 거점성으로서 흔히 충남 공주에 비정한다. 『한원』에 인용된 『괄지지』에는 북방성이 사비 도성에서 동북쪽으로 60리 떨어져 있으며, 성벽 둘레는 1리 반(2,480m)이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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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한다.
왕의 성은 부여씨이며 어라하주 010
번역주 010)
於羅瑕 : 백제에서 왕을 가리키던 말로서, 흔히 북방계 언어로 추정한다. ‘於羅’는 ‘慰禮·廣州·溫祚·百濟’와 같은 뜻을 지닌 ‘누릿·온누릿’ 또는 ‘알’을 가리키고 ‘瑕’는 극존칭 접미사이므로 어라하는 ‘누릿님’ 또는 ‘온누릿님’이라는 견해(도수희, 1972 ; 1973), ‘於羅’는 ‘大’를 뜻하는 ‘엄니·욱리·아리’와 관련 있고 ‘하’는 부여·고구려에서 족장을 가리키는 ‘加’와 관계가 있으므로 ‘어라하’는 ‘大族長’을 가리킨다는 견해(김방한, 1983)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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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부르고, 백성들은 건길지주 011
번역주 011)
鞬吉支 : 백제에서 왕을 가리키던 말로서, 흔히 남방계 언어로 추정한다. ① 鞬은 ‘한·큰’, 吉支는 ‘貴人’을 뜻한다는 견해(이병도, 1971), ② 鞬은 ‘加·邯·熊·金·玄’ 등과 같으며 ‘神’ 또는 ‘韓·干’처럼 ‘크다’는 뜻이고 ‘吉支’는 ‘귀인’을 뜻하므로 ‘神君님·나라님’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견해(도수희, 1972 ; 1973) 등이 있다. 어라하와 건길지는 백제 주민 계층이 복합적이라는 사실과 각각 귀족층의 북방계(부여계) 언어와 평민층의 남방계(韓系) 토착 언어를 대표한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어느 시기나 지배층의 용어와 일반민의 용어에는 큰 차이가 있었던 만큼 굳이 북방계 언어와 남방계 토착 언어의 차이를 반영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견해(김수경, 1989)도 있다. ‘길지’를 신라 관등의 하나일 吉士와 연계하여 일본식 음 ‘키시(キシ, 君)’로 읽고 왕을 일컫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노중국, 201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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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부르는데, 중국말로 모두 왕이다. [왕의] 아내는 어륙주 012
번역주 012)
於陸 : 백제에서 왕비를 가리키던 말로서, 왕을 가리키는 어라하와 짝을 이룬 말이다. 『일본서기』의 훈독에는 백제 왕비를 ‘oriku’ 또는 ‘oruku’로 읽은 대목이 있는데, 이에 따라 ‘於’를 ‘ori’ 또는 ‘oru’로 읽고 ‘어라하’의 ‘어라’와 마찬가지로 ‘크다[大]’ 는 뜻으로 해석해서 ‘大夫人·大后·大妃’로 풀이하기도 한다(김방한,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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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부르니 중국말로 왕비이다. 벼슬에는 16품주 013
번역주 013)
十六品 : 백제 관등이 16품까지 있으며 각각 옷과 허리띠 색깔이 다르다는 내용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27년조의 내용과 거의 같다. 『삼국사기』 내용을 그대로 믿어 백제가 3세기 중엽에 16관등제와 의관제를 정비했다고 보기도 한다(이종욱, 1990). 그러나 중국 사서 중 7세기 전반에 편찬된 『주서』의 기록과 『삼국사기』 고이왕 27년 기록이 거의 같은 데다 5~6세기를 다룬 『송서』·『남제서』·『위서』·『양서』 등에는 16관등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고 『삼국사기』에서도 고이왕 이후 관등 수여 기사가 나오지 않으므로 고이왕 27년조 기록은 6~7세기의 사실을 소급해 적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노중국, 1988)도 있다. 학계의 통설은 관등이 단계적으로 정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고이왕 때 관등제의 기본 골격인 솔계 관제가 제정되었다는 견해(노태돈, 1977), 고이왕 때 좌평·솔계·덕계뿐 아니라 좌군·진무·극우의 하위 관등도 설치되었다는 견해(노중국, 1988), 고이왕 때 솔계 상위 관등과 좌군·진무·극우 등의 하위 관등을 설치하고 근초고왕 때 솔계 5관등, 덕계 5관등으로 나누었으며 성왕 때 문독· 무독을 추가했다는 견해(박현숙, 2005), 근초고왕 때 덕계 관등이 성립하였고 동성왕 무렵 16관등제가 완비되었다는 견해(김영심, 2007), 근초고왕 때 솔계 관등 및 하위 관등을 설치하였고, 5세기 중엽 덕계 관등 설치를 거쳐 성왕 때 16관등으로 완비되었다는 견해(김기섭, 2000) 등 해석이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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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다. 좌평주 014
번역주 014)
左平 : 백제의 벼슬 등급을 나타내는 16관등 중 제1품으로서, 『주서』·『수서』·『북사』에는 ‘左平’, 『구당서』·『신당서』 및 『삼국사기』에는 ‘佐平’, 『통전』·『통지』에는 ‘左率’로 적혀 있다. 원래는 신분과 벼슬의 등급만 표시하는 관등이었으나, 점차 구체적인 업무를 가진 관직으로도 쓰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이왕 27년(260)에 6좌평을 16관등제와 함께 처음 설치하였으며, 좌평은 자주색 옷을 입고 銀花로 冠을 장식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이왕이 이제껏 군사·행정 업무를 주관하던 左輔·右輔 대신 새로 좌평 벼슬을 만듦으로써 귀족 및 지방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좌평이라는 이름은 『周禮』에 나오는 6官 가운데 가장 높은 정무관인 夏官 司馬의 임무 “왕을 도와 나라를 다스린다(以佐王, 平邦國).”에서 따왔으며 좌평을 처음 설치한 시기는 5세기 후반이라는 견해도 있다(이기동, 1990). 그런데 『주서』·『북사』·『한원』 등에는 백제의 좌평이 5명이라고 적혀 있어서 『구당서』·『신당서』의 6좌평과 다르다. 이 때문에 『주서』가 편찬된 7세기 전반까지는 백제 좌평이 5명 이었다가 7세기 중엽에 6좌평으로 바뀌었으며, 『삼국사기』의 고이왕 때 6좌평 기사는 나중에 일어난 일을 잘못 소급시켜 기록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김기섭, 2000). 이처럼 좌평에 대한 학자들의 시각이 다양한 것은 좌평이 백제의 정치·경제·군사·행정· 문화·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가장 높은 지위의 벼슬이었던 데 비해 그 실체를 자세히 알려주는 기록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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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명은 1품, 달솔주 015
번역주 015)
達率 : 『수서』·『책부원구』에는 ‘大率’로 적혀 있다. ‘달솔’은 ‘크다’는 뜻의 백제어를 소리 나는 대로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고, ‘대솔’은 뜻을 살펴 한자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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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명은 2품, 은솔은 3품, 덕솔은 4품, 한솔주 016
번역주 016)
扞率 : 『수서』·『북사』 등의 판본에 따라 ‘杅率’ 또는 ‘杆率’로 달리 적혀 있기도 하다. 『삼국사기』와 『통전』에는 ‘扞率’로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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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5품, 나솔은 6품이다. 6품 이상은 관을 은꽃으로 장식한다.주 017
번역주 017)
冠飾銀華 : 은꽃은 주로 사비시대 석실분에서 출토된 銀製 관꾸미개[冠飾]를 가리킨다. 얇은 은판을 길게 오리고 한쪽 끝을 꽃봉오리 모양으로 만든 뒤 은판을 세로로 접어 단면을 ‘∧’ 모양으로 만들어서 모자 앞쪽에 꽂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줄기 양쪽에 곁가지가 1~2개씩 붙은 것과 전혀 없는 것으로 형태가 나뉘는데, 곁가지는 성별이나 위계의 차이를 반영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부여 능안골·염창리·하황리 고분군, 논산 육곡리7호분, 남원 척문리고분, 나주 복암리3호분, 익산 미륵사지서탑 등지에서 출토되었다(국립부여박물관, 2005 ; 이한상, 2009). 『구당서』 백제전에 “왕은 검은 비단관을 금꽃으로 장식하고, 벼슬아치들은 은꽃으로 관을 장식한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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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은 7품으로 자줏빛 띠(紫帶)를 두르고, 시덕은 8품으로 검은 띠(皂帶)를 두른다. 고덕은 9품으로 붉은 띠(赤帶)를 두르고, 이덕주 018
번역주 018)
李德 : 판본에 따라 ‘季德’으로 쓰기도 한다. 『수서』 백제전에는 ‘李德’으로 적혀 있고, 『삼국사기』에는 ‘季德’으로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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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10품으로 푸른 띠(靑帶)주 019
번역주 019)
靑帶 : 푸른색, 곧 녹색 허리띠를 가리킨다. 조선시대에 코발트 염료가 수입되기 전에는 靑色이 녹색(green)을 가리켰으나 조선 후기부터 점차 파란색(blue)을 가리키는 쪽으로 바뀌었다. 고대 그림 및 벽화 속의 청룡은 모두 녹색으로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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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두른다. 대덕은 11품, 문독은 12품이며, 모두 누른 띠(黃帶)를 두른다. 무독은 13품, 좌군은 14품, 진무는 15품, 극우는 16품이다. 모두 흰 띠(白帶)주 020
번역주 020)
白帶 : 흰색 허리띠이다. 『구당서』와 『삼국사기』에는 백제왕이 “흰색 허리띠를 두른다.”고 적혀 있는데, 이때의 흰색 허리띠는 素帶 또는 素皮帶로서 白帶와는 다른 글자이다. 재질 및 색감 차이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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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두른다. 은솔부터 아래로는 관원에 정해진 인원수가 없다. 각각 거느리는 관청이 있어서 여러 업무를 나누어 맡는데, 내관주 021
번역주 021)
內官 : 백제 궁중의 여러 업무를 맡은 관부를 아우른 이름으로 12부로 구성되었다. 흔히 백제 관부를 내관 12부에 외관 10부를 더해 22부사라고 부른다. 22부가 설치된 시기에 대해서는 동성왕 말년, 무령왕 21년~성왕대, 성왕대 등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사비 천도 이후 완비된 것으로 본다. 내관은 주로 궁중과 왕실의 사무를 담당하는 관청인데, 국가의 일반적인 정무를 담당하는 외관보다 부서가 더 많은 이유를 당시 국가 운영이 왕실 업무 위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내관 12부의 명칭과 기능은 다음 표와 같이 추정한다(정동준, 2013).
관사명白南雲鬼頭淸明武田幸男黑田達也盧重國金周成梁起錫金起燮姜鐘元金壽泰李文基鄭東俊
19331978198019851988199019912000200220032003ㆍ20052008
前內部미상宣納사무국왕近侍왕명출납왕명 출납
국왕 근시
왕명 출납
국정 총괄
국왕 근시왕명 출납
왕실 총괄
국왕 근시
왕명 출납
좌동좌동
왕실 총괄
국왕 근시
왕명 출납
穀部식량 조제,
御料地 경작
곡류 관리곡물 공선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
어료지 경작
곡물 출납
肉部목축 관리供膳육류 공선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
왕실목장 관리
공선
內椋部삼국 포로왕실 창고內倉 재정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
(왕실재정)
왕실창고
外椋部국외 포로국용 창고外倉 재정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
(국가재정)
국용창고
馬部군마 관리御馬 관리廐馬ㆍ乘物자동어마 관리좌동좌동왕실 말ㆍ수레 관리어마 관리좌동좌동
왕실목장 관리
어마ㆍ승물
刀部무기 제조무구도검ㆍ무구국왕 호위도검 제작, 관리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 병기고 관리군기류 관리
→국왕 호위
功德部佛事 공양불교 사원좌동왕족 관리?불교사원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불교
藥部약초 조달약초약물ㆍ의료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御醫좌동제약ㆍ의료,
약재 조달
어의ㆍ제약
木部연료 조달조영목공 건조장식 관계토목공사좌동토목ㆍ건축좌동토목공사좌동토목ㆍ건축왕실 건축
法部의식예의좌동왕족 관리의례ㆍ의장좌동의례의례ㆍ의장의례좌동율령 업무왕족 관리,
궁내의례
後宮部미상후궁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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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전내부주 022
번역주 022)
前內部 :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왕명을 출납하는 일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內省과 비슷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武田幸男, 1980 ; 노중국, 1988). 내관 중에서 전내부를 상위 관사로 파악한 견해(이문기, 2005)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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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부주 023
번역주 023)
穀部 : 왕실에 곡물을 공급하던 부서로 보인다. 곡부와 육부를 모두 생필품을 공급하던 관사로 파악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중국이나 신라에서도 생필품을 공급하는 관사가 최상위 행정관사였던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만큼 곡부는 ‘조세로서의 곡물 출납을 관리’했다는 견해(정동준, 2013)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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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부주 024
번역주 024)
肉部 : 왕실에 고기류를 공급하던 부서로 보인다. 『북사』·『한원』·『통지』에는 ‘內部’로 적혀 있다. 이에 따라 육부가 『주서』에만 보이므로 내부를 잘못 쓴 것일 수 있다는 견해(정동준, 2013)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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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경부주 025
번역주 025)
內椋部 : 『한원』에는 內椋部, 『삼국사기』 직관지에는 內 部로 적혀 있다. 원문은 內掠部이지만 이에 따라 내경부로 교감한다. 왕실 창고와 물품 출납을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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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경부주 026
번역주 026)
外椋部 : 『한원』에는 外椋部, 『삼국사기』 직관지에는 外 部로 적혀 있다. 원문은 外掠部이지만 이에 따라 외경부로 교감한다. 창고와 물품 출납 업무를 담당한 것으로 보이는데, 본래 외관에 속한 것을 잘못 기입했다고 보는 견해(武田幸男, 1980)가 있으며, 왕실 창고의 소재지에 따라 내경·외경으로 나눈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노중국, 1988). 2008년에 충남 부여군 쌍북리에서 ‘外椋部’명 목간이 출토된 바 있다(박태우,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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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부주 027
번역주 027)
馬部 : 왕실의 말과 수레 등을 관리한 부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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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부주 028
번역주 028)
刀部 : 흔히 무기를 제작하고 관리한 부서로 보지만, 그 기능을 확대하여 국왕 호위까지 담당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정동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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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부주 029
번역주 029)
功德部 : 왕실의 불교 관련 업무를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사원 건축, 승려 관리, 불경 번역 등의 업무를 상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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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부주 030
번역주 030)
藥部 : 약을 제조하고 처방한 부서로 보인다. 왕실의 어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본다(노중국,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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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부주 031
번역주 031)
木部 : 왕실 건축을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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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부주 032
번역주 032)
法部 : 왕실의 예법과 의례·의장을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고대에는 禮와 法을 엄격히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에 착안하여 왕족 등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사법 처리에 관여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정동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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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관부주 033
번역주 033)
後官部 : 후궁을 관리한 부서로 보인다. 『북사』 백제전과 『책부원구』에는 ‘後宮部’로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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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다. 외관주 034
번역주 034)
外官 : 국가의 일반적인 정무를 담당한 관부를 아우른 이름으로 모두 10개의 부서로 구성되었다. 내관 12부와 함께 흔히 22부사로 불린다. 외관 10부의 명칭과 기능은 다음 표와 같이 추정한다(정동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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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사군부주 035
번역주 035)
司軍部 : 중앙과 지방의 군사업무를 담당한 부서로서, 명칭은 北周의 관부 이름을 모방한 것인데, 『주례(周禮)』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이기동, 1990). 신라의 兵部처럼 일찍부터 설치한 관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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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부주 036
번역주 036)
司徒部 : 교육 및 의례 관계 업무를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주례』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주례』에는 地官 司徒가 예로써 백성을 교화한다는 내용이 있으며, 漢나라 때에는 丞相을 大司徒로 고쳐 부르면서 大司馬(太尉)·大司空(御史大夫)과 함께 三公이라고 하였다. 나중에 대사도에서 ‘대’자를 떼버리고 단지 ‘사도’라고만 일컬었다. 후대의 6조 제도에서 禮部尙書를 속칭 大司徒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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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부주 037
번역주 037)
司空部 : 토목 및 재정 관계 업무를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주례』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주례』에는 冬官으로 나온다. 후대의 6조 제도에서 工部尙書를 속칭 大司空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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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구부주 038
번역주 038)
司寇部 : 형벌 업무를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주례』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주례』에는 秋官으로 나온다. 후대의 6조 제도에서 刑部尙書를 속칭 大司寇라고 하였다. 신라 司正府처럼 관리의 규찰까지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김기섭,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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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구부주 039
번역주 039)
點口部 : 호구 파악 및 노동력 징발을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사신을 보내 가야 지역에 살던 백제 도망자들을 찾아내 백제 호적에 올렸다는 『일본서기』 계체기 3년조의 기록을 바탕으로 무령왕 때 이미 점구부에 해당하는 기구가 있었다는 견해(정재윤, 2007), 성왕 때 설치하였다는 견해(노중국, 200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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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부주 040
번역주 040)
客部 : 외교 및 사신 접대 업무를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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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사부주 041
번역주 041)
外舍部 : 관료의 인사 업무를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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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주 042
번역주 042)
綢部 : 흔히 직물 제조 및 기술자 관리의 생산 관련 부서로 보거나 견직물을 비롯한 각종 직물을 징수하는 공납 관련 부서로 본다. 국가의 일반 서무를 관장한 외관의 하나였으므로 생산과 공납을 겸했을 개연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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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관부주 043
번역주 043)
日官部 : 천문·기상·점복을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백제 초기에 꿈과 자연을 살펴 길흉을 예단하던 日者가 醫博士·易博士·曆博士 등의 박사제도로 이어지고 사비시대의 일관부로 발전했다는 견해(장인성, 2001)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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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부주 044
번역주 044)
都市部 : 상업과 교역 및 시장 업무를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사비 천도 이후에 새 수도에 상설시장을 설치하고 이를 관리하기 위해 기구를 설치했다고 보는 견해(노중국, 2003)도 있다. 『북사』에는 ‘市部’로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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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다. 도읍에 1만 가가 있어서 나누어 5부주 045
번역주 045)
五部 : 백제 왕도에 설치한 5개의 행정구역이다. 『수서』 백제전에 “왕도는 5부로 되어 있고, 부에는 5巷이 있으며, 士人들이 산다.”는 기록이 있어 部-巷 행정체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31년에 남부·북부를 설치하고 33년에 동부·서부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주서』의 상부·하부·전부·후부와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5부제 실시 시기와 관련해서는 ① 사비시대에 설치되었다는 견해(今西龍, 1934), ② 웅진시대에 5부제의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견해(김철준, 1975 ; 성주탁, 1982 ; 노중국, 1988 ; 김영심, 1990) 등이 있다. 또한 5부의 범위에 대해서는 ① 사비 도성 내부를 구획한 것이라는 견해(田中俊明, 1990), ② 사비 도성 내부의 지배세력 거주지인 5부와 도성 외곽 지역 서민들의 생활공간을 상정하는 견해(김영심, 1990) 등이 있다. 5부에 각각 500명의 군사가 있고, 달솔이 책임자였다는 기록은 5부제가 행정 편제일 뿐 아니라 軍管區 성격도 지녔다는 것이며(武田幸男, 1980), 『일본서기』에 실린 백제 인명을 분석해보면 사비 천도 이후에 眞氏는 前部, 科野氏는 上部, 汶氏는 下部, 木刕氏는 中部에 일정하게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지배세력뿐 아니라 도성의 일반민까지도 巷이라는 구획으로 편제함으로써 왕도 방위와 노동력 징발 및 수취의 단위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김영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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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만들었으니 상부·전부· 중부·하부·후부라고 하며 군사 500명을 거느린다. 5방에는 각각 방령주 046
번역주 046)
方領 : 사비시대 백제의 지방통치체제인 方-郡-城 체제의 가장 상위기관인 方의 책임자로는 達率이 임명되었다. 『일본서기』 欽明紀 2년조 및 5년조의 ‘城方’과 ‘東方領’, 『삼국사기』 신라본기 武烈王 7년조의 ‘熊津方領’ 등이 모두 방령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방령은 700~1, 200명 규모의 군사를 통솔하였다. 『한원』의 “5방이 있는데 중국의 都督과 같다.”는 기록에 따라 방령이 최고 군사관이었으며 방을 설치한 배경에 군사적 목적이 강했다고 보기도 한다(김영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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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1명씩 두는데, 달솔이 맡게 한다. 군에는 장이 3명 있고,주 047
번역주 047)
군에는 장이 3명 있다 : 『수서』에는 인원수가 나오지 않고, 오직 ‘有郡長’으로 적혀 있다. 복암리 출토 목간에는 ‘郡佐’가 새겨진 목간이 출토되어 방좌처럼 군장을 보좌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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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솔이 맡게 한다. 방은 군사 1,200명 이하 700명 이상을 거느린다. 성 안팎의 백성과 여러 작은 성은 모두 나뉘어 예속한다.
그 의복이 남자는 대략 고려와 같다. 조정에서 절할 때나 제사지낼 때에는 관 양쪽 곁에 새 깃털을 달고, 전쟁할 때에는 달지 않는다.주 048
번역주 048)
戎事則不 : 조정의 조회에 참석하거나 제사지내는 일은 좋은 일[吉事]이므로 모자에 새 깃털을 달지만,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나쁜 일[凶事]이므로 모자에 새 깃털을 달지 않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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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서 절하는 예절은 두 손으로 땅을 짚어 공경을 나타낸다. 부인은 도포를 입는데 소매가 조금 크다. 처녀는 머리카락을 묶어 머리 뒤에서부터 한 갈래로 늘어뜨려 꾸미고, 시집간 여자는 나누어 두 갈래로 만든다. 무기로는 활과 화살, 칼과 창이 있다. 풍속에 말 타고 활 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아울러 옛날 책과 역사책을 좋아하며, 뛰어난 자는 자못 글을 읽거나 지을 줄 알고, 또 음양오행을 안다. 송나라 원가력주 049
번역주 049)
元嘉曆 :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 宋나라의 何承天이 文帝 元嘉 20년(443)에 만든 역법이다. 백제가 원가력을 썼다는 사실은 『주서』의 기록 외에도 『수서』와 『북사』의 기록, 그리고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원가력은 나중에 百濟僧으로 일본에서 僧正의 직위에 오른 觀勒이 일본으로 가지고 가서 처음 시행한 것으로 알려졌다(이병도,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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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쓰므로 인월주 050
번역주 050)
寅月 : 12支 가운데 세 번째인 虎=寅에 해당하는 달. 지금의 음력 정월을 달리 부른 이름이다. 중국 夏나라가 인월을 1년의 첫 달로 삼았으나, 商나라는 丑月을 첫 달로 삼았고, 周나라는 子月을 첫 달로 삼았으며, 秦나라는 亥月을 첫 달로 삼았다가 漢 무제 때부터 다시 인월을 첫 달로 삼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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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해의 첫 달로 삼고 또한 의약과 점괘, 점치는 기술을 잘 안다. 투호,주 051
번역주 051)
投壺 : 일정한 거리에 항아리[壺]를 두고 편을 갈라 화살을 던져 넣어 승패를 가리는 전통놀이이다. 기원전 10세기경 중국 周나라 때 시작하였고 당나라 때 특히 유행했는데, 한국에는 삼국시대에 전해졌다고 한다(문영현, 1975). 『수서』 백제전에 같은 내용이 있으며,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에도 투호에 대한 기록이 있어 투호가 일찍부터 성행한 놀이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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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포주 052
번역주 052)
樗蒲 : 나무로 만든 주사위를 던져서 승패를 가리는 놀이로, 윷놀이와 비슷한 것으로 전해진다. 『수서』와 『북사』에도 같은 내용이 있어 적어도 6세기 중엽에는 백제에서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저포와 윷놀이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성병희, 1990). 또한 『북사』와 『태평어람』에는 부여에 저포·악삭 등의 놀이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유래를 삼국시대 이전으로 소급할 수도 있다(박장영,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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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잡다한 놀이가 있지만 장기와 바둑을 더 좋아한다. 중과 비구니, 절과 탑은 매우 많으나 도사는 없다.주 053
번역주 053)
無道士 : 백제에 정식으로 도교가 전래된 사실을 전하는 기록은 없으나, 근초고왕 때 백제군이 도망하는 고구려군을 쫓아 수곡성까지 갔을 때 장수 莫古解가 태자 근구수에게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도덕경』의 한 구절을 인용해 진격을 만류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하므로 4세기 중엽 이전에 도가사상이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사기』에는 무왕 35년(634) 왕경에 宮南池를 만들 때 못 속에 섬을 만들고 이를 신선이 사는 方丈仙山에 비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도교를 백제의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만들려는 시도로 보기도 한다(장인성, 2001). 백제의 와전 중에 이른바 山景甎을 신선사상 내지 도교의 영향으로 보며, 무왕 때 일본으로 건너간 승려 觀勒이 遁甲과 方術 등 도교적인 雜術을 전해주었다는 기록에 따라 백제에 도교사상 또는 도교 문물이 성행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통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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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과 세금은 베·명주·삼베 및 쌀 등으로 내는데, 그해가 풍년인지 흉년인지를 헤아려 차등을 두어 거둔다. 그 형벌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전쟁에서 군대를 물러나게 한 자와 살인한 자는 목을 베어 죽이고, 도둑질한 자는 유배시키고 훔친 물건의 2배를 징수한다. 부인으로서 간통한 자는 몰수하여 남편 집의 노비로 삼는다. 시집가거나 장가가는 예절은 대략 중국의 풍속과 같다.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 3년간 상복을 입고 나머지 친척은 장례가 끝나자마자 벗는다. 토지와 밭은 지대가 낮고 습하며 기후가 따뜻하다. 오곡과 뭇 과일, 채소와 술, 반찬, 약품 따위는 대개 중국과 같다. 다만 낙타·당나귀·노새·양·거위·오리 등은 없다. 그 왕은 4계절의 중간 달에 하늘과 5제의 신에게 제사지내고,주 054
번역주 054)
其王以四仲之月祭天及五帝之神 : 『수서』에 “每以四仲之月 王祭天及五帝之神”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 잡지 제사에도 같은 내용이 전한다. 五帝신앙에 대해서는 오제를 天神으로 이해하면서 동방의 蒼帝, 남방의 赤帝, 중앙의 黃帝, 서방의 白帝, 북방의 黑帝 등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이병도, 1977 ; 차용걸, 1978 ; 井上秀雄, 1986 ; 서영대, 2000). 오제신앙의 기원에 대해서는 ① 오행사상과 관련시킨 견해(이병도, 1977 ; 정경희, 1988 ; 양기석, 1990a), ② 도교적 신격이라는 견해(井上秀雄, 1986), ③ 『주례』의 정치이념을 수용하는 과정에 성립된 신격이라는 견해(이기동, 1990), ④ 백제의 오제는 地神이며 토착신이라는 견해(김두진, 1990 ; 유원재, 1994b ; 최광식, 1999) 등이 있다. 또한 백제 오제신앙의 배경에 대해서는 ① 백제의 5방제와 결부시켜 현실정치를 정당화한 것이라는 견해(차용걸, 1978), ② 제의를 통해 백제왕을 중앙에서 천하를 다스리는 존재로 부각시키려 했다는 견해(양기석, 1990a), ③ 6세기 중엽 남조 양나라에서 오제신앙을 수용해 왕권의 우월성을 확보하고 귀족들의 지위를 인정하려는 왕권과 귀족세력 간 타협의 산물이라는 견해(서영대, 200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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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해마다 네 번 시조 구태의 사당에 제사지낸다.주 055
번역주 055)
又每歲四祠其始祖仇台之廟 : 『수서』에 “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 歲四祠之”라는 비슷한 기록이 있다. 백제가 사비시대에 구태를 시조로 모신 이유에 대해서는 ① 백제가 고구려에게 밀려 웅진으로 천도하고 부여도 고구려에게 병합되자 동명묘를 부활시키는 대신 새로운 부여계 신격으로 구태묘를 세웠다는 견해(이도학, 1995), ② 구태묘는 백제 왕실의 시조를 모시는 도성 내의 종묘적 성격을 띤다는 견해(유원재, 1993), ③ 육후로부터 종묘제를 배워 부여왕 위구태를 시국자로 설정하고 구태묘를 종묘로 자리매김했다는 견해(김병곤, 2007), ④ 무령왕 직계의 배타적 왕족의식이 형성되면서 구태를 시조로 삼아 왕실의 종묘에서 위덕왕 때부터 정기적으로 제사지냈다는 견해(양기석, 1990b ; 박찬규, 1994), ⑤ 무령왕부터 시작한 골족의식이 성왕을 거치면서 소가계 우월의식으로 발전해 구태시조관념이 되었다는 견해(정재윤, 2008a)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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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송·제·양이 양자강 동쪽에 웅거하고 후위가 중원에 자리잡은 때부터 모두 사신을 보내 번을 칭하며 봉작을 받았다. 제씨가 중국 동부를 차지하니 그 왕 융주 056
번역주 056)
隆 : 백제 제25대 무령왕의 諱이다. 무령왕[隆]은 성왕[明]의 아버지이자 위덕왕[昌]의 할아버지이다. 그러므로 ‘융의 아들 창’이라는 말은 틀린 것이다. “明이 죽고 아들 昌이 왕위에 올랐다.”는 내용을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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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사신을 보냈다. 융이 죽고 아들 창주 057
번역주 057)
昌 : 백제 27대 위덕왕(525~598)으로 성왕의 맏아들이다. 555~598년에 재위하였다. 554년에 태자이던 위덕왕이 신라와의 전쟁을 주도하다가 관산성전투에서 아버지 성왕과 군사 3만여 명이 몰살당한 사건 때문에 지배세력 내에 갈등이 생겨 위덕왕이 즉위하는 데 3년의 공위가 있었으며(노중국, 1988), 557년에야 공식적으로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고 한다(김주성, 2000). 그래서 한동안 귀족들이 국정 운영을 주도하였으며 무왕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왕권이 강화되었다고 보는가 하면(노중국, 1988 ; 김주성, 1991 ; 김병남, 2004), 집권 초기 일시적으로 왕권이 약했으나 성왕의 정책을 계승하고 전쟁과 대외교류, 불교사원 조영 및 불사리신앙을 통하여 왕권강화를 이루었다는 견해(양기석, 1990a ; 김수태, 1988)도 있다. 위덕왕은 기존의 南朝 중심 외교에서 탈피하여 北齊·北周와 교섭함으로써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려 하였다. 그리하여 570년에 북제로부터 ‘使持節侍中 車騎大將軍 帶方郡公 百濟王’ 관작을 받았으며 571년에는 ‘使持節都督 東靑州諸軍事 東靑州刺史’에 책봉되었다. 그 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경축사절을 보내는 등 기민한 외교를 펼쳤으며, 왜국에 대해서도 불교문화와 기술, 인력을 파견하는 등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복원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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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왕위에 올랐다. 건덕 6년(577) [북]제가 멸망하자 창이 비로소 사신을 보내 지역 특산물을 바쳤다. 선정 원년(578) 또 사신을 보내와서 [공물을] 바쳤다.

  • 번역주 001)
    夫餘之别種 : 대개 ‘부여에서 파생된 종족’ 정도로 해석한다. 중국 사서 가운데 『魏書』·『周書』·『隋書』·『北史』·『舊唐書』·『新唐書』 등 북조 계통 사서에서는 백제가 고구려 또는 부여 계통이라고 설명하였으며, 『梁書』·『南史』·『梁職貢圖』 등 남조 계통 사서에서는 백제가 마한에 속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북조 계통 사서는 백제의 공식 외교문서에 근거하였고, 남조 계통 사서는 『삼국지』·『후한서』의 삼한 인식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유원재, 1993). 백제가 부여에서 파생되었다는 생각은 온조를 비롯한 건국 주체 세력이 부여 출신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472년 백제 개로왕이 北魏로 보낸 表에서 “백제 왕실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로부터 나왔다.”고 한 기록(『위서』·『삼국사기』), 비류·온조가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인 優台의 아들이라는 건국설화, 백제 왕실의 성씨가 부여씨이며 538년 泗沘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南扶餘로 바꾼 점, 한강 유역의 토광묘를 부여문화와 관련짓는 고고학적 견해(강인구, 1989) 등이 있다. 그러나 현재 학계의 통설은 백제가 고구려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이다. 온조가 고구려 시조 주몽의 아들이라는 건국설화, “백제는 고구려에서 나왔다.”는 『수서』의 기록, 백제 왕릉 구역으로 추정되는 석촌동고분군의 돌무지무덤(積石塚)은 고구려 양식이라는 고고학적 견해(김원룡 외, 1989 ; 이현혜, 1991 ; 임영진, 1994) 등이 주요 근거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주몽이 북부여 출신이고 백제의 온조가 졸본부여(고구려) 출신이라는 건국설화의 상징성을 감안하면 부여와 고구려를 굳이 구별하기보다 백제를 ‘부여·고구려 계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안정적인 듯하다. 백제가 부여와의 관련성을 강조한 것은 고구려와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동부여마저 고구려에게 멸망하는 5세기 이후이기 때문이다(정재윤, 2008a).바로가기
  • 번역주 002)
    仇台 : 『수서』 백제전에도 “동명의 후손 구태가 대방의 옛 땅에서 백제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삼국유사』 등 국내 사서에는 沸流와 溫祚만 나오고 구태 이야기는 전혀 없다. 『속일본기』·『신찬성씨록』 등 일본 사서에는 백제 시조를 都慕라고 하였다. 구태와 관련해서는 ① 구태를 온조와 같은 인물로 보는 견해(임기환, 1998 ; 박찬규, 2003) ② 비류의 아버지인 우태와 연결시키는 견해(천관우, 1976b), ③ ‘台’를 ‘이’로 읽어 백제 고이왕과 같은 사람으로 실질적 건국자라고 하는 견해(이병도, 1976 ; 유원재, 1993), ④ 부여계 인물로 보는 견해(이홍직, 1971 ; 王信民, 1986 ; 김병곤, 2007), ⑤ 백제의 부여 계승 의식 및 6세기 왕실의 신성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견해(정재윤, 2008a) 등이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3)
    固麻城 : 당시의 왕성인 泗沘城을 가리킨다. ‘고마’라는 이름이 한글 ‘곰’을 한자로 나타낸 것이라면 웅진성(지금의 공주)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지만, 뒤이어 나오는 5방 중 북방을 웅진성이라고 하였으므로 여기의 고마성은 사비시대의 왕성임을 알 수 있다. ① 『양서』의 “왕이 다스리는 성을 固麻라고 한다.”는 기록을 수용한 것이라는 견해(박현숙, 2007), ② 『수서』에 나오는 居拔城이 당시의 백제 왕성인 사비성을 뜻하므로 고마성도 ‘왕성’ 또는 ‘대성’을 뜻하는 고유명사라는 견해(坂元義種, 1978a) 등이 있다. 찬자가 이름을 잘못 기재했다고 보는 견해(이홍직, 1971)도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五方 : 백제 사비시대의 지방통치조직 가운데 하나였던 동·서·남·북·중 5개의 방으로서 郡-城보다 높은 단위의 군사행정 거점이었다. 『수서』에 “5방에는 각각 方領 1인과 方佐 2인이 있다. 방에는 10郡이 있고 군에는 장수가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북사』에는 “方領 1명과 方佐 2명이 있으며 병사 700~1, 200명을 거느린다.”는 기록이 있다. 『한원』에는 『괄지지』를 인용해 “方마다 郡을 관리하는데, 많은 것은 10개에 이르고 작은 것은 6~7개이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근거로 방-군-성 체제를 설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5방제는 웅진시기 또는 사비 천도 무렵에 성립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노중국, 1988 ; 김영심, 1990).바로가기
  • 번역주 005)
    古沙城 : 백제 5방 중 하나인 中方의 거점성으로서 흔히 전북 고부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今西龍, 1934 ; 천관우, 1979 ; 천관우 1989 ; 박현숙, 1998). 구체적으로 ① 정읍시 영원면의 금사동산성(전영래, 1995), ② 부안의 두승산성(今西龍, 1934) 또는 ③ 위금암산성(전영래, 1995 ; 노도양, 1980) 등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지만, 기록 속의 중방성 크기 및 입지·축성법 등과 달라 ④ 정읍의 인근 지역까지 범위를 넓혀 조사해야 한다는 견해(서정석, 2002)도 있다. 『한원』에 인용된 『괄지지』에 따르면, 중방성은 사비 도성에서 남쪽으로 260리 떨어져 있으며, 성의 둘레는 150步였다고 한다. 1보를 5척으로 계산할 경우 약 690m, 1보를 6척으로 계산할 경우 약 828m이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6)
    得安城 : 백제 5방 중 하나인 東方의 거점성으로서 대개 충남 논산시 은진 일대에 있었다고 추정한다(今西龍, 1934 ; 이병도, 1977 ; 천관우, 1989). 은진 지역에는 매화산성과 달이산성이 있는데, 흔히 매화산성을 동방성에 비정한다(박현숙, 1996 ; 김영심, 1999 ; 서정석, 2002). 한편, 논산의 황산성을 득안성으로 추정하고(성주탁, 1975), 계백의 5,000결사대가 동방에 배속된 지방군이며(강종원, 2000), 계백은 동방령이었다는 견해(지원구, 2007)도 있다. 『한원』에 인용된 『괄지지』에 따르면 동방성은 사비 도성의 동남쪽 100리에 있고, 성벽 둘레는 1리(1,650m)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久知下城 : 백제 5방 중 하나인 南方의 거점성으로서 『한원』에 인용된 『괄지지』에는 ‘卞城’으로 적혀 있다. 위치에 대해서는 ① 전북 금구(今西龍, 1934), ② 전북 남원(전영래, 1988 ; 곽장근, 1997 ; 김영심, 1997 ; 서정석, 2002), ③ 전남 구례(末松保和, 1949), ④ 전남 장성(이병도, 1977 ; 전준현, 1993), ⑤ 광주 또는 나주 일대(박현숙, 1998)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한원』에 인용된 『괄지지』에 사비 도성에서 남쪽으로 360리 떨어져 있으며 성벽 둘레 130보(598m 또는 720m)라는 기록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刀先城 : 백제 5방 중 하나인 西方의 거점성으로 『한원』에 인용된 『괄지지』에는 力光城으로 적혀 있다. 위치에 대해서는 ① 나주·영암 지역(전영래, 1988), ② 충남 예산·대흥 일대(천관우, 1989 ; 박현숙, 1996 ; 이우태, 1999), ③ 서산 지역(김영심, 1999), ④ 홍성 학성산성(서정석, 2002) 등 견해가 다양하다. 『한원』에 인용된 『괄지지』에는 서방성이 사비 도성에서 서쪽으로 350리 떨어져 있으며, 성벽 둘레 200보(920m 또는 1,104m)라는 기록이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9)
    熊津城 : 백제 5방 중 하나인 북방의 거점성으로서 흔히 충남 공주에 비정한다. 『한원』에 인용된 『괄지지』에는 북방성이 사비 도성에서 동북쪽으로 60리 떨어져 있으며, 성벽 둘레는 1리 반(2,480m)이라는 기록이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0)
    於羅瑕 : 백제에서 왕을 가리키던 말로서, 흔히 북방계 언어로 추정한다. ‘於羅’는 ‘慰禮·廣州·溫祚·百濟’와 같은 뜻을 지닌 ‘누릿·온누릿’ 또는 ‘알’을 가리키고 ‘瑕’는 극존칭 접미사이므로 어라하는 ‘누릿님’ 또는 ‘온누릿님’이라는 견해(도수희, 1972 ; 1973), ‘於羅’는 ‘大’를 뜻하는 ‘엄니·욱리·아리’와 관련 있고 ‘하’는 부여·고구려에서 족장을 가리키는 ‘加’와 관계가 있으므로 ‘어라하’는 ‘大族長’을 가리킨다는 견해(김방한, 1983)도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1)
    鞬吉支 : 백제에서 왕을 가리키던 말로서, 흔히 남방계 언어로 추정한다. ① 鞬은 ‘한·큰’, 吉支는 ‘貴人’을 뜻한다는 견해(이병도, 1971), ② 鞬은 ‘加·邯·熊·金·玄’ 등과 같으며 ‘神’ 또는 ‘韓·干’처럼 ‘크다’는 뜻이고 ‘吉支’는 ‘귀인’을 뜻하므로 ‘神君님·나라님’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견해(도수희, 1972 ; 1973) 등이 있다. 어라하와 건길지는 백제 주민 계층이 복합적이라는 사실과 각각 귀족층의 북방계(부여계) 언어와 평민층의 남방계(韓系) 토착 언어를 대표한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어느 시기나 지배층의 용어와 일반민의 용어에는 큰 차이가 있었던 만큼 굳이 북방계 언어와 남방계 토착 언어의 차이를 반영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견해(김수경, 1989)도 있다. ‘길지’를 신라 관등의 하나일 吉士와 연계하여 일본식 음 ‘키시(キシ, 君)’로 읽고 왕을 일컫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노중국, 2012a).바로가기
  • 번역주 012)
    於陸 : 백제에서 왕비를 가리키던 말로서, 왕을 가리키는 어라하와 짝을 이룬 말이다. 『일본서기』의 훈독에는 백제 왕비를 ‘oriku’ 또는 ‘oruku’로 읽은 대목이 있는데, 이에 따라 ‘於’를 ‘ori’ 또는 ‘oru’로 읽고 ‘어라하’의 ‘어라’와 마찬가지로 ‘크다[大]’ 는 뜻으로 해석해서 ‘大夫人·大后·大妃’로 풀이하기도 한다(김방한, 1983).바로가기
  • 번역주 013)
    十六品 : 백제 관등이 16품까지 있으며 각각 옷과 허리띠 색깔이 다르다는 내용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27년조의 내용과 거의 같다. 『삼국사기』 내용을 그대로 믿어 백제가 3세기 중엽에 16관등제와 의관제를 정비했다고 보기도 한다(이종욱, 1990). 그러나 중국 사서 중 7세기 전반에 편찬된 『주서』의 기록과 『삼국사기』 고이왕 27년 기록이 거의 같은 데다 5~6세기를 다룬 『송서』·『남제서』·『위서』·『양서』 등에는 16관등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고 『삼국사기』에서도 고이왕 이후 관등 수여 기사가 나오지 않으므로 고이왕 27년조 기록은 6~7세기의 사실을 소급해 적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노중국, 1988)도 있다. 학계의 통설은 관등이 단계적으로 정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고이왕 때 관등제의 기본 골격인 솔계 관제가 제정되었다는 견해(노태돈, 1977), 고이왕 때 좌평·솔계·덕계뿐 아니라 좌군·진무·극우의 하위 관등도 설치되었다는 견해(노중국, 1988), 고이왕 때 솔계 상위 관등과 좌군·진무·극우 등의 하위 관등을 설치하고 근초고왕 때 솔계 5관등, 덕계 5관등으로 나누었으며 성왕 때 문독· 무독을 추가했다는 견해(박현숙, 2005), 근초고왕 때 덕계 관등이 성립하였고 동성왕 무렵 16관등제가 완비되었다는 견해(김영심, 2007), 근초고왕 때 솔계 관등 및 하위 관등을 설치하였고, 5세기 중엽 덕계 관등 설치를 거쳐 성왕 때 16관등으로 완비되었다는 견해(김기섭, 2000) 등 해석이 다양하다.바로가기
  • 번역주 014)
    左平 : 백제의 벼슬 등급을 나타내는 16관등 중 제1품으로서, 『주서』·『수서』·『북사』에는 ‘左平’, 『구당서』·『신당서』 및 『삼국사기』에는 ‘佐平’, 『통전』·『통지』에는 ‘左率’로 적혀 있다. 원래는 신분과 벼슬의 등급만 표시하는 관등이었으나, 점차 구체적인 업무를 가진 관직으로도 쓰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이왕 27년(260)에 6좌평을 16관등제와 함께 처음 설치하였으며, 좌평은 자주색 옷을 입고 銀花로 冠을 장식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이왕이 이제껏 군사·행정 업무를 주관하던 左輔·右輔 대신 새로 좌평 벼슬을 만듦으로써 귀족 및 지방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좌평이라는 이름은 『周禮』에 나오는 6官 가운데 가장 높은 정무관인 夏官 司馬의 임무 “왕을 도와 나라를 다스린다(以佐王, 平邦國).”에서 따왔으며 좌평을 처음 설치한 시기는 5세기 후반이라는 견해도 있다(이기동, 1990). 그런데 『주서』·『북사』·『한원』 등에는 백제의 좌평이 5명이라고 적혀 있어서 『구당서』·『신당서』의 6좌평과 다르다. 이 때문에 『주서』가 편찬된 7세기 전반까지는 백제 좌평이 5명 이었다가 7세기 중엽에 6좌평으로 바뀌었으며, 『삼국사기』의 고이왕 때 6좌평 기사는 나중에 일어난 일을 잘못 소급시켜 기록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김기섭, 2000). 이처럼 좌평에 대한 학자들의 시각이 다양한 것은 좌평이 백제의 정치·경제·군사·행정· 문화·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가장 높은 지위의 벼슬이었던 데 비해 그 실체를 자세히 알려주는 기록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5)
    達率 : 『수서』·『책부원구』에는 ‘大率’로 적혀 있다. ‘달솔’은 ‘크다’는 뜻의 백제어를 소리 나는 대로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고, ‘대솔’은 뜻을 살펴 한자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16)
    扞率 : 『수서』·『북사』 등의 판본에 따라 ‘杅率’ 또는 ‘杆率’로 달리 적혀 있기도 하다. 『삼국사기』와 『통전』에는 ‘扞率’로 적혀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7)
    冠飾銀華 : 은꽃은 주로 사비시대 석실분에서 출토된 銀製 관꾸미개[冠飾]를 가리킨다. 얇은 은판을 길게 오리고 한쪽 끝을 꽃봉오리 모양으로 만든 뒤 은판을 세로로 접어 단면을 ‘∧’ 모양으로 만들어서 모자 앞쪽에 꽂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줄기 양쪽에 곁가지가 1~2개씩 붙은 것과 전혀 없는 것으로 형태가 나뉘는데, 곁가지는 성별이나 위계의 차이를 반영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부여 능안골·염창리·하황리 고분군, 논산 육곡리7호분, 남원 척문리고분, 나주 복암리3호분, 익산 미륵사지서탑 등지에서 출토되었다(국립부여박물관, 2005 ; 이한상, 2009). 『구당서』 백제전에 “왕은 검은 비단관을 금꽃으로 장식하고, 벼슬아치들은 은꽃으로 관을 장식한다.”는 기록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8)
    李德 : 판본에 따라 ‘季德’으로 쓰기도 한다. 『수서』 백제전에는 ‘李德’으로 적혀 있고, 『삼국사기』에는 ‘季德’으로 적혀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9)
    靑帶 : 푸른색, 곧 녹색 허리띠를 가리킨다. 조선시대에 코발트 염료가 수입되기 전에는 靑色이 녹색(green)을 가리켰으나 조선 후기부터 점차 파란색(blue)을 가리키는 쪽으로 바뀌었다. 고대 그림 및 벽화 속의 청룡은 모두 녹색으로 그려져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20)
    白帶 : 흰색 허리띠이다. 『구당서』와 『삼국사기』에는 백제왕이 “흰색 허리띠를 두른다.”고 적혀 있는데, 이때의 흰색 허리띠는 素帶 또는 素皮帶로서 白帶와는 다른 글자이다. 재질 및 색감 차이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21)
    內官 : 백제 궁중의 여러 업무를 맡은 관부를 아우른 이름으로 12부로 구성되었다. 흔히 백제 관부를 내관 12부에 외관 10부를 더해 22부사라고 부른다. 22부가 설치된 시기에 대해서는 동성왕 말년, 무령왕 21년~성왕대, 성왕대 등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사비 천도 이후 완비된 것으로 본다. 내관은 주로 궁중과 왕실의 사무를 담당하는 관청인데, 국가의 일반적인 정무를 담당하는 외관보다 부서가 더 많은 이유를 당시 국가 운영이 왕실 업무 위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내관 12부의 명칭과 기능은 다음 표와 같이 추정한다(정동준, 2013).
    관사명白南雲鬼頭淸明武田幸男黑田達也盧重國金周成梁起錫金起燮姜鐘元金壽泰李文基鄭東俊
    19331978198019851988199019912000200220032003ㆍ20052008
    前內部미상宣納사무국왕近侍왕명출납왕명 출납
    국왕 근시
    왕명 출납
    국정 총괄
    국왕 근시왕명 출납
    왕실 총괄
    국왕 근시
    왕명 출납
    좌동좌동
    왕실 총괄
    국왕 근시
    왕명 출납
    穀部식량 조제,
    御料地 경작
    곡류 관리곡물 공선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
    어료지 경작
    곡물 출납
    肉部목축 관리供膳육류 공선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
    왕실목장 관리
    공선
    內椋部삼국 포로왕실 창고內倉 재정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
    (왕실재정)
    왕실창고
    外椋部국외 포로국용 창고外倉 재정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
    (국가재정)
    국용창고
    馬部군마 관리御馬 관리廐馬ㆍ乘物자동어마 관리좌동좌동왕실 말ㆍ수레 관리어마 관리좌동좌동
    왕실목장 관리
    어마ㆍ승물
    刀部무기 제조무구도검ㆍ무구국왕 호위도검 제작, 관리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 병기고 관리군기류 관리
    →국왕 호위
    功德部佛事 공양불교 사원좌동왕족 관리?불교사원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불교
    藥部약초 조달약초약물ㆍ의료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御醫좌동제약ㆍ의료,
    약재 조달
    어의ㆍ제약
    木部연료 조달조영목공 건조장식 관계토목공사좌동토목ㆍ건축좌동토목공사좌동토목ㆍ건축왕실 건축
    法部의식예의좌동왕족 관리의례ㆍ의장좌동의례의례ㆍ의장의례좌동율령 업무왕족 관리,
    궁내의례
    後宮部미상후궁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좌동
    바로가기
  • 번역주 022)
    前內部 :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왕명을 출납하는 일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內省과 비슷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武田幸男, 1980 ; 노중국, 1988). 내관 중에서 전내부를 상위 관사로 파악한 견해(이문기, 2005)도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3)
    穀部 : 왕실에 곡물을 공급하던 부서로 보인다. 곡부와 육부를 모두 생필품을 공급하던 관사로 파악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중국이나 신라에서도 생필품을 공급하는 관사가 최상위 행정관사였던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만큼 곡부는 ‘조세로서의 곡물 출납을 관리’했다는 견해(정동준, 2013)도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4)
    肉部 : 왕실에 고기류를 공급하던 부서로 보인다. 『북사』·『한원』·『통지』에는 ‘內部’로 적혀 있다. 이에 따라 육부가 『주서』에만 보이므로 내부를 잘못 쓴 것일 수 있다는 견해(정동준, 2013)도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5)
    內椋部 : 『한원』에는 內椋部, 『삼국사기』 직관지에는 內 部로 적혀 있다. 원문은 內掠部이지만 이에 따라 내경부로 교감한다. 왕실 창고와 물품 출납을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바로가기
  • 번역주 026)
    外椋部 : 『한원』에는 外椋部, 『삼국사기』 직관지에는 外 部로 적혀 있다. 원문은 外掠部이지만 이에 따라 외경부로 교감한다. 창고와 물품 출납 업무를 담당한 것으로 보이는데, 본래 외관에 속한 것을 잘못 기입했다고 보는 견해(武田幸男, 1980)가 있으며, 왕실 창고의 소재지에 따라 내경·외경으로 나눈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노중국, 1988). 2008년에 충남 부여군 쌍북리에서 ‘外椋部’명 목간이 출토된 바 있다(박태우, 2009).바로가기
  • 번역주 027)
    馬部 : 왕실의 말과 수레 등을 관리한 부서로 보인다. 바로가기
  • 번역주 028)
    刀部 : 흔히 무기를 제작하고 관리한 부서로 보지만, 그 기능을 확대하여 국왕 호위까지 담당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정동준, 2013).바로가기
  • 번역주 029)
    功德部 : 왕실의 불교 관련 업무를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사원 건축, 승려 관리, 불경 번역 등의 업무를 상정할 수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30)
    藥部 : 약을 제조하고 처방한 부서로 보인다. 왕실의 어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본다(노중국, 1988). 바로가기
  • 번역주 031)
    木部 : 왕실 건축을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32)
    法部 : 왕실의 예법과 의례·의장을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고대에는 禮와 法을 엄격히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에 착안하여 왕족 등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사법 처리에 관여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정동준, 2013).바로가기
  • 번역주 033)
    後官部 : 후궁을 관리한 부서로 보인다. 『북사』 백제전과 『책부원구』에는 ‘後宮部’로 적혀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34)
    外官 : 국가의 일반적인 정무를 담당한 관부를 아우른 이름으로 모두 10개의 부서로 구성되었다. 내관 12부와 함께 흔히 22부사로 불린다. 외관 10부의 명칭과 기능은 다음 표와 같이 추정한다(정동준, 2013).바로가기
  • 번역주 035)
    司軍部 : 중앙과 지방의 군사업무를 담당한 부서로서, 명칭은 北周의 관부 이름을 모방한 것인데, 『주례(周禮)』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이기동, 1990). 신라의 兵部처럼 일찍부터 설치한 관부로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36)
    司徒部 : 교육 및 의례 관계 업무를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주례』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주례』에는 地官 司徒가 예로써 백성을 교화한다는 내용이 있으며, 漢나라 때에는 丞相을 大司徒로 고쳐 부르면서 大司馬(太尉)·大司空(御史大夫)과 함께 三公이라고 하였다. 나중에 대사도에서 ‘대’자를 떼버리고 단지 ‘사도’라고만 일컬었다. 후대의 6조 제도에서 禮部尙書를 속칭 大司徒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7)
    司空部 : 토목 및 재정 관계 업무를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주례』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주례』에는 冬官으로 나온다. 후대의 6조 제도에서 工部尙書를 속칭 大司空이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8)
    司寇部 : 형벌 업무를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주례』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주례』에는 秋官으로 나온다. 후대의 6조 제도에서 刑部尙書를 속칭 大司寇라고 하였다. 신라 司正府처럼 관리의 규찰까지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김기섭, 2000).바로가기
  • 번역주 039)
    點口部 : 호구 파악 및 노동력 징발을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사신을 보내 가야 지역에 살던 백제 도망자들을 찾아내 백제 호적에 올렸다는 『일본서기』 계체기 3년조의 기록을 바탕으로 무령왕 때 이미 점구부에 해당하는 기구가 있었다는 견해(정재윤, 2007), 성왕 때 설치하였다는 견해(노중국, 2003) 등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40)
    客部 : 외교 및 사신 접대 업무를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41)
    外舍部 : 관료의 인사 업무를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42)
    綢部 : 흔히 직물 제조 및 기술자 관리의 생산 관련 부서로 보거나 견직물을 비롯한 각종 직물을 징수하는 공납 관련 부서로 본다. 국가의 일반 서무를 관장한 외관의 하나였으므로 생산과 공납을 겸했을 개연성이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43)
    日官部 : 천문·기상·점복을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백제 초기에 꿈과 자연을 살펴 길흉을 예단하던 日者가 醫博士·易博士·曆博士 등의 박사제도로 이어지고 사비시대의 일관부로 발전했다는 견해(장인성, 2001)도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44)
    都市部 : 상업과 교역 및 시장 업무를 담당한 부서로 보인다. 사비 천도 이후에 새 수도에 상설시장을 설치하고 이를 관리하기 위해 기구를 설치했다고 보는 견해(노중국, 2003)도 있다. 『북사』에는 ‘市部’로 적혀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45)
    五部 : 백제 왕도에 설치한 5개의 행정구역이다. 『수서』 백제전에 “왕도는 5부로 되어 있고, 부에는 5巷이 있으며, 士人들이 산다.”는 기록이 있어 部-巷 행정체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31년에 남부·북부를 설치하고 33년에 동부·서부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주서』의 상부·하부·전부·후부와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5부제 실시 시기와 관련해서는 ① 사비시대에 설치되었다는 견해(今西龍, 1934), ② 웅진시대에 5부제의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견해(김철준, 1975 ; 성주탁, 1982 ; 노중국, 1988 ; 김영심, 1990) 등이 있다. 또한 5부의 범위에 대해서는 ① 사비 도성 내부를 구획한 것이라는 견해(田中俊明, 1990), ② 사비 도성 내부의 지배세력 거주지인 5부와 도성 외곽 지역 서민들의 생활공간을 상정하는 견해(김영심, 1990) 등이 있다. 5부에 각각 500명의 군사가 있고, 달솔이 책임자였다는 기록은 5부제가 행정 편제일 뿐 아니라 軍管區 성격도 지녔다는 것이며(武田幸男, 1980), 『일본서기』에 실린 백제 인명을 분석해보면 사비 천도 이후에 眞氏는 前部, 科野氏는 上部, 汶氏는 下部, 木刕氏는 中部에 일정하게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지배세력뿐 아니라 도성의 일반민까지도 巷이라는 구획으로 편제함으로써 왕도 방위와 노동력 징발 및 수취의 단위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김영심, 1990).바로가기
  • 번역주 046)
    方領 : 사비시대 백제의 지방통치체제인 方-郡-城 체제의 가장 상위기관인 方의 책임자로는 達率이 임명되었다. 『일본서기』 欽明紀 2년조 및 5년조의 ‘城方’과 ‘東方領’, 『삼국사기』 신라본기 武烈王 7년조의 ‘熊津方領’ 등이 모두 방령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방령은 700~1, 200명 규모의 군사를 통솔하였다. 『한원』의 “5방이 있는데 중국의 都督과 같다.”는 기록에 따라 방령이 최고 군사관이었으며 방을 설치한 배경에 군사적 목적이 강했다고 보기도 한다(김영심, 1990).바로가기
  • 번역주 047)
    군에는 장이 3명 있다 : 『수서』에는 인원수가 나오지 않고, 오직 ‘有郡長’으로 적혀 있다. 복암리 출토 목간에는 ‘郡佐’가 새겨진 목간이 출토되어 방좌처럼 군장을 보좌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가기
  • 번역주 048)
    戎事則不 : 조정의 조회에 참석하거나 제사지내는 일은 좋은 일[吉事]이므로 모자에 새 깃털을 달지만,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나쁜 일[凶事]이므로 모자에 새 깃털을 달지 않는다는 뜻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49)
    元嘉曆 :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 宋나라의 何承天이 文帝 元嘉 20년(443)에 만든 역법이다. 백제가 원가력을 썼다는 사실은 『주서』의 기록 외에도 『수서』와 『북사』의 기록, 그리고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원가력은 나중에 百濟僧으로 일본에서 僧正의 직위에 오른 觀勒이 일본으로 가지고 가서 처음 시행한 것으로 알려졌다(이병도, 1976).바로가기
  • 번역주 050)
    寅月 : 12支 가운데 세 번째인 虎=寅에 해당하는 달. 지금의 음력 정월을 달리 부른 이름이다. 중국 夏나라가 인월을 1년의 첫 달로 삼았으나, 商나라는 丑月을 첫 달로 삼았고, 周나라는 子月을 첫 달로 삼았으며, 秦나라는 亥月을 첫 달로 삼았다가 漢 무제 때부터 다시 인월을 첫 달로 삼았다고 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51)
    投壺 : 일정한 거리에 항아리[壺]를 두고 편을 갈라 화살을 던져 넣어 승패를 가리는 전통놀이이다. 기원전 10세기경 중국 周나라 때 시작하였고 당나라 때 특히 유행했는데, 한국에는 삼국시대에 전해졌다고 한다(문영현, 1975). 『수서』 백제전에 같은 내용이 있으며,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에도 투호에 대한 기록이 있어 투호가 일찍부터 성행한 놀이임을 알 수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52)
    樗蒲 : 나무로 만든 주사위를 던져서 승패를 가리는 놀이로, 윷놀이와 비슷한 것으로 전해진다. 『수서』와 『북사』에도 같은 내용이 있어 적어도 6세기 중엽에는 백제에서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저포와 윷놀이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성병희, 1990). 또한 『북사』와 『태평어람』에는 부여에 저포·악삭 등의 놀이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유래를 삼국시대 이전으로 소급할 수도 있다(박장영, 2004).바로가기
  • 번역주 053)
    無道士 : 백제에 정식으로 도교가 전래된 사실을 전하는 기록은 없으나, 근초고왕 때 백제군이 도망하는 고구려군을 쫓아 수곡성까지 갔을 때 장수 莫古解가 태자 근구수에게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도덕경』의 한 구절을 인용해 진격을 만류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하므로 4세기 중엽 이전에 도가사상이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사기』에는 무왕 35년(634) 왕경에 宮南池를 만들 때 못 속에 섬을 만들고 이를 신선이 사는 方丈仙山에 비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도교를 백제의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만들려는 시도로 보기도 한다(장인성, 2001). 백제의 와전 중에 이른바 山景甎을 신선사상 내지 도교의 영향으로 보며, 무왕 때 일본으로 건너간 승려 觀勒이 遁甲과 方術 등 도교적인 雜術을 전해주었다는 기록에 따라 백제에 도교사상 또는 도교 문물이 성행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통설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54)
    其王以四仲之月祭天及五帝之神 : 『수서』에 “每以四仲之月 王祭天及五帝之神”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 잡지 제사에도 같은 내용이 전한다. 五帝신앙에 대해서는 오제를 天神으로 이해하면서 동방의 蒼帝, 남방의 赤帝, 중앙의 黃帝, 서방의 白帝, 북방의 黑帝 등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이병도, 1977 ; 차용걸, 1978 ; 井上秀雄, 1986 ; 서영대, 2000). 오제신앙의 기원에 대해서는 ① 오행사상과 관련시킨 견해(이병도, 1977 ; 정경희, 1988 ; 양기석, 1990a), ② 도교적 신격이라는 견해(井上秀雄, 1986), ③ 『주례』의 정치이념을 수용하는 과정에 성립된 신격이라는 견해(이기동, 1990), ④ 백제의 오제는 地神이며 토착신이라는 견해(김두진, 1990 ; 유원재, 1994b ; 최광식, 1999) 등이 있다. 또한 백제 오제신앙의 배경에 대해서는 ① 백제의 5방제와 결부시켜 현실정치를 정당화한 것이라는 견해(차용걸, 1978), ② 제의를 통해 백제왕을 중앙에서 천하를 다스리는 존재로 부각시키려 했다는 견해(양기석, 1990a), ③ 6세기 중엽 남조 양나라에서 오제신앙을 수용해 왕권의 우월성을 확보하고 귀족들의 지위를 인정하려는 왕권과 귀족세력 간 타협의 산물이라는 견해(서영대, 2000) 등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55)
    又每歲四祠其始祖仇台之廟 : 『수서』에 “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 歲四祠之”라는 비슷한 기록이 있다. 백제가 사비시대에 구태를 시조로 모신 이유에 대해서는 ① 백제가 고구려에게 밀려 웅진으로 천도하고 부여도 고구려에게 병합되자 동명묘를 부활시키는 대신 새로운 부여계 신격으로 구태묘를 세웠다는 견해(이도학, 1995), ② 구태묘는 백제 왕실의 시조를 모시는 도성 내의 종묘적 성격을 띤다는 견해(유원재, 1993), ③ 육후로부터 종묘제를 배워 부여왕 위구태를 시국자로 설정하고 구태묘를 종묘로 자리매김했다는 견해(김병곤, 2007), ④ 무령왕 직계의 배타적 왕족의식이 형성되면서 구태를 시조로 삼아 왕실의 종묘에서 위덕왕 때부터 정기적으로 제사지냈다는 견해(양기석, 1990b ; 박찬규, 1994), ⑤ 무령왕부터 시작한 골족의식이 성왕을 거치면서 소가계 우월의식으로 발전해 구태시조관념이 되었다는 견해(정재윤, 2008a) 등이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56)
    隆 : 백제 제25대 무령왕의 諱이다. 무령왕[隆]은 성왕[明]의 아버지이자 위덕왕[昌]의 할아버지이다. 그러므로 ‘융의 아들 창’이라는 말은 틀린 것이다. “明이 죽고 아들 昌이 왕위에 올랐다.”는 내용을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57)
    昌 : 백제 27대 위덕왕(525~598)으로 성왕의 맏아들이다. 555~598년에 재위하였다. 554년에 태자이던 위덕왕이 신라와의 전쟁을 주도하다가 관산성전투에서 아버지 성왕과 군사 3만여 명이 몰살당한 사건 때문에 지배세력 내에 갈등이 생겨 위덕왕이 즉위하는 데 3년의 공위가 있었으며(노중국, 1988), 557년에야 공식적으로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고 한다(김주성, 2000). 그래서 한동안 귀족들이 국정 운영을 주도하였으며 무왕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왕권이 강화되었다고 보는가 하면(노중국, 1988 ; 김주성, 1991 ; 김병남, 2004), 집권 초기 일시적으로 왕권이 약했으나 성왕의 정책을 계승하고 전쟁과 대외교류, 불교사원 조영 및 불사리신앙을 통하여 왕권강화를 이루었다는 견해(양기석, 1990a ; 김수태, 1988)도 있다. 위덕왕은 기존의 南朝 중심 외교에서 탈피하여 北齊·北周와 교섭함으로써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려 하였다. 그리하여 570년에 북제로부터 ‘使持節侍中 車騎大將軍 帶方郡公 百濟王’ 관작을 받았으며 571년에는 ‘使持節都督 東靑州諸軍事 東靑州刺史’에 책봉되었다. 그 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경축사절을 보내는 등 기민한 외교를 펼쳤으며, 왜국에 대해서도 불교문화와 기술, 인력을 파견하는 등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복원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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