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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선비가 한나라를 침입하여 노략질하니 한나라가 장국(張國), 경엽(耿曄) 등을 보내 격파함

  • 국가
    선비(鮮卑)
순제 영건원년(永建元年; 126) 가을에 선비[대인] 기지건대군(代郡)을 침입하여 노략질하였는데, [대군]태수(代郡太守) 이초(李超)가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주 001
각주 001)
원문은 “順帝永建元年秋, 鮮卑其至鞬寇代郡, 太守李超戰死.”인데, 『三國志』에서는 “順帝時, 復入塞, 殺代郡太守.”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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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해(영건 2년; 127) 봄에 중랑장 장국(張國) 주 002
각주 002)
張國: 출신지역과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後漢 順帝시기에 활약했던 武將이다. 左校尉, 中郞將, 使匈奴中郞將 등을 역임하였으며, 匈奴와 鮮卑·烏丸 등 북방 유목민들과의 전투에 참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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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사(從事)주 003
각주 003)
從事: 中郞將과 校尉의 屬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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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하여금 남선우의 보병과 기병 만여 인을 지휘하여 요새를 나가게 하여 선비를 격파하고 치중(輜重)주 004
각주 004)
輜重: 군량, 의복, 무기 등 전쟁에 사용되는 물자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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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여 종(種)을 노획하였다.주 005
각주 005)
원문은 “明年春, 中郎將張國遣從事將南單于兵步騎萬餘人出塞, 擊破之, 獲其資重二千餘種.”인데, 『三國志』에서는 “漢遣黎陽營兵屯中山, 緣邊郡兵屯塞下, 調五營弩帥令教戰射, 南單于將步騎萬餘人助漢擊卻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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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요동선비 6천여 기가 또 요동[군]현도[군](玄菟郡) 주 006
각주 006)
玄菟郡: 前漢 武帝가 滄海郡을 설치한 濊貊의 땅에 설치하였는데, 압록강 중류지역과 渾江(佟佳江) 유역에 있었다. 治所는 高句麗縣이었다. 전82년에 임둔군을 통합하였다. 전75년경 治所인 高句麗縣을 현재 遼寧省 渾河 상류의 興京과 老城 등지로 옮겼다. 高句麗 太祖王시기 治所를 다시 현재의 撫順으로 옮겼다. 이후 高句麗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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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침입하여 약탈하였는데, 오환교위 경엽이 변경의 제군(諸郡) 병사들과 오환 솔중왕[의 군대]를 징발하여 요새를 나가 요동선비를 공격하여 수백여 인의 수급을 베었고, 포로(生口)· 소·말과 각종 물품과 기구(器具)를 대량으로 노획하였다. 이에 선비는 종중(種衆)주 007
각주 007)
種衆: 동일한 種族의 무리, 혹은 군중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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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 인을 이끌고 요동군을 찾아가 항복을 청하였다.주 008
각주 008)
원문은 “時遼東鮮卑六千餘騎亦寇遼東玄菟, 烏桓校尉耿曄發緣邊諸郡兵及烏桓率眾王出塞擊之, 斬首數百級, 大獲其生口牛馬什物, 鮮卑乃率種眾三萬人詣遼東乞降.”인데, 『三國志』에서는 “後烏丸校尉耿曄將率衆王出塞擊鮮卑, 多斬首虜, 於是鮮卑三萬餘落, 詣遼東降.”이라고 하였다. 『三國志』에서는 이 구절 뒤에 匈奴의 餘種 10만여 落이 遼東으로 와서 흩어져 살았는데 스스로를 鮮卑兵이라고 불렀다(“匈奴及北單于遁逃後, 餘種十餘萬落, 詣遼東雜處, 皆自號鮮卑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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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건] 3년(128)과 4년(129)에 선비는 어양[군]삭방[군](朔方郡) 주 009
각주 009)
朔方郡: 前漢 元朔 2년(전127)에 설치하였다. 治所는 朔方縣(현재 內蒙古 杭錦旗 북쪽)이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內蒙古 河套 서북부와 後套지역에 해당한다. 後漢時代 臨戎(현재 內蒙古自治區磴口 북쪽)으로 治所를 옮겼다. 後漢末年에 한때 없앴다. 後漢時代 匈奴 南單于가 이곳에 部衆을 나누어 주둔시켜 後漢의 북변 방어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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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자주 침략하여 약탈하였다. [영건] 6년(131) 가을에 경엽은 사마(司馬)주 010
각주 010)
司馬: 漢代 刺史와 將軍府의 屬吏였으며 주로 軍事와 관련된 사무를 담당하였다. 魏晉南北朝時代에는 東宮·王府·公府·軍府의 僚屬이며, 府內의 兵仗 등의 사무를 관장하였으며, 지위는 長史의 아래였다. 官品은 府主의 지위에 따라 결정되어 5品부터 8品 사이였다. 南北朝時代 世族子弟들이 주로 司馬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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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보내 오환병[胡兵] 수천 인을 지휘하여 요새를 나가 선비를 공격하게 하여 격파하였다. [같은 해] 겨울에 어양 태수는 또 오환의 군대를 보내 선비를 공격하게 하여 8백 인의 수급을 베었고 소와 말, 생구를 포획하였다. 오환의 호인(豪人)인 부수관(扶漱官)은 용감하고 늠름하여 선비와 전쟁할 때마다 자주 적을 무너뜨렸는데, [조정에서는] ‘솔중군(率衆君)’이란 칭호를 하사하였다.주 011
각주 011)
『三國志』에는 번역문의 “[영건] 3년과 …(중략)… 칭호를 하사하였다”라는 구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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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원문은 “順帝永建元年秋, 鮮卑其至鞬寇代郡, 太守李超戰死.”인데, 『三國志』에서는 “順帝時, 復入塞, 殺代郡太守.”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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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張國: 출신지역과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後漢 順帝시기에 활약했던 武將이다. 左校尉, 中郞將, 使匈奴中郞將 등을 역임하였으며, 匈奴와 鮮卑·烏丸 등 북방 유목민들과의 전투에 참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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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從事: 中郞將과 校尉의 屬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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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輜重: 군량, 의복, 무기 등 전쟁에 사용되는 물자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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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원문은 “明年春, 中郎將張國遣從事將南單于兵步騎萬餘人出塞, 擊破之, 獲其資重二千餘種.”인데, 『三國志』에서는 “漢遣黎陽營兵屯中山, 緣邊郡兵屯塞下, 調五營弩帥令教戰射, 南單于將步騎萬餘人助漢擊卻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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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玄菟郡: 前漢 武帝가 滄海郡을 설치한 濊貊의 땅에 설치하였는데, 압록강 중류지역과 渾江(佟佳江) 유역에 있었다. 治所는 高句麗縣이었다. 전82년에 임둔군을 통합하였다. 전75년경 治所인 高句麗縣을 현재 遼寧省 渾河 상류의 興京과 老城 등지로 옮겼다. 高句麗 太祖王시기 治所를 다시 현재의 撫順으로 옮겼다. 이후 高句麗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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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種衆: 동일한 種族의 무리, 혹은 군중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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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원문은 “時遼東鮮卑六千餘騎亦寇遼東玄菟, 烏桓校尉耿曄發緣邊諸郡兵及烏桓率眾王出塞擊之, 斬首數百級, 大獲其生口牛馬什物, 鮮卑乃率種眾三萬人詣遼東乞降.”인데, 『三國志』에서는 “後烏丸校尉耿曄將率衆王出塞擊鮮卑, 多斬首虜, 於是鮮卑三萬餘落, 詣遼東降.”이라고 하였다. 『三國志』에서는 이 구절 뒤에 匈奴의 餘種 10만여 落이 遼東으로 와서 흩어져 살았는데 스스로를 鮮卑兵이라고 불렀다(“匈奴及北單于遁逃後, 餘種十餘萬落, 詣遼東雜處, 皆自號鮮卑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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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朔方郡: 前漢 元朔 2년(전127)에 설치하였다. 治所는 朔方縣(현재 內蒙古 杭錦旗 북쪽)이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內蒙古 河套 서북부와 後套지역에 해당한다. 後漢時代 臨戎(현재 內蒙古自治區磴口 북쪽)으로 治所를 옮겼다. 後漢末年에 한때 없앴다. 後漢時代 匈奴 南單于가 이곳에 部衆을 나누어 주둔시켜 後漢의 북변 방어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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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司馬: 漢代 刺史와 將軍府의 屬吏였으며 주로 軍事와 관련된 사무를 담당하였다. 魏晉南北朝時代에는 東宮·王府·公府·軍府의 僚屬이며, 府內의 兵仗 등의 사무를 관장하였으며, 지위는 長史의 아래였다. 官品은 府主의 지위에 따라 결정되어 5品부터 8品 사이였다. 南北朝時代 世族子弟들이 주로 司馬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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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三國志』에는 번역문의 “[영건] 3년과 …(중략)… 칭호를 하사하였다”라는 구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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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순제, 기지건, 이초(李超), 장국(張國), 경엽, 경엽, 부수관(扶漱官)
지명
대군(代郡), 요동, 요동[군], 현도[군](玄菟郡), 요동, 요동군, 어양[군], 삭방[군](朔方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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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가 한나라를 침입하여 노략질하니 한나라가 장국(張國), 경엽(耿曄) 등을 보내 격파함 자료번호 : jo.k_0003_0120_0020_0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