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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야이치 수집 고구려 와전에 관하여

  • 저필자
    藤井和夫
아이즈 야이치의 패전 이전 수집 자료에는 다수의 와전(瓦塼)류가 포함되어 있다. 아이즈 야이치는 약간의 유머를 섞어 자칭 ‘와박사(瓦博士)’라고 말할 정도로 정열을 쏟아 광범위한 와전류를 수집했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植田重雄 ,1971, 166쪽). 아이즈 야이치의 컬렉션에는 한반도 관계의 자료도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특히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와전류가 많다. 한반도 와전관계품은 1936년에 아이즈 야이치가 작성한 『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에 고구려·백제·신라가, 제7책에는 신라가 기재되어 있다. 고구려 와전을 포함해 다른 와전의 입수경위에 관한 내용은 『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아이즈 야이치의 수필 중에 컬렉션의 고와(古瓦)에 관해 적은 다음의 두개의 문장이 있다. 하나는 탈고일이 ‘昭和九年二月二十四日(1934년 2월 24일)’로
나는 최근에 조선의 어느 방면에서 파편과 함께이기는 하지만 옛 신라시대의 고와를 400개 정도 구입했다. 지금까지 내 수중에 있던 일본이나 중국의 고와 200개를 더하면 600개 정도가 된다. 이 또한 나로서는 동양미술사 연구의 표본으로 전혀 도락삼매(道樂三昧)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나 일단 이것도 하나의 수집이라고 한다면 수집일 것이다.주 001
각주 001)
이 당시 구입한 것으로 생각되는 신라 와전은 輕部慈恩에게서 입수한 것이다. 이 와전에는 채집지마다 1~14까지의 한자 숫자가 묵서되어 있는데 채집지가 몇 곳으로 구별되어 있었던 것 같고, 일부에는 숫자 이외에도 채집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輕部慈恩은 會津八一의 요구에 응해 일시에 대량의 와전을 채집, 사굴했기 때문에 혼란을 피할 목적으로 채집, 사굴지마다 번호를 부여해 분류한 후 會津八一에 매각했던 것에 會津八一 등이 주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 輕部慈恩은 1925년에 早稻田大學 文學部를 졸업하고 同年 3월에 평양숭실전문학교로 부임해 1927년 1월에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고, 1940년경에는 대전의 대동여자학교로 옮겼으며 1943년에는 강경여자중학교에 교장으로 부임했다. 이 와중에 많은 고분의 도굴을 행해 “최고로 악질적인 도굴꾼이요, 유물 약탈자였다”(李龜烈, 1973, 191쪽)라고 평가되고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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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津八一, 1934a)라고 하였다.
 
圖 6_한자 숫자 주기(注記) 신라와(新羅瓦) [1]
圖 6_한자 숫자 주기(注記) 신라와(新羅瓦) [2]
또 다른 하나는 설명하고 있는 날이 ‘昭和九年十月廿六日(1934. 10.26)’로
명기(明器) 수집 다음에 내가 가장 힘쓰고 있는 것은 고와이다. 일본 야마토[大和]지방의 사원과 각지의 국분사(國分寺) 등에서 발굴된 것을 합쳐서 250~260개, 중국 진한시대의 것이 10여 개, 한반도에서는 고구려의 것이 약 40개, 백제·신라의 것을 합쳐 460개, 합계 700여 점의 고와를 내가 가지고 있다. (會津八一 1934b)라고 적고 있다.
 
가나자와 구니오[金澤邦夫]에 따르면 ‘한반도의 여러 방면에서’ 매입했다고 하는 것은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에게서 구입한 것이라고 한다.주 002
각주 002)
加藤諄도 “일본의 200점은 제쳐두고라도 한반도 기와의 대다수는 가루베[輕部] 씨에게 신세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이 정도로 고루 갖춘다는 것은 대단한 열의를 필요로 한다”(加藤諄, 1974, 107・108쪽)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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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澤邦夫, 2006, 89쪽).
이 당시에 입수한 것으로 생각되는 신라 와전에는 ‘九’를 제외한 ‘一’에서 ‘十四’까지의 숫자가 묵서되어 있다(圖 6). 이 숫자는 아이즈 야이치의 글씨 이외에도 ‘七’, ‘八’과 같이 다른 누구의 글씨인지 불명확한 것도 있다. 이러한 아이즈 야이치의 글씨가 아닌 것은, 글자체로 본다면 와전의 정리를 도왔던 다키구치 히로시[瀧口宏]의 것일 가능성이 높으나 한 글자로 된 한자 숫자이므로 일단 여기서는 단언하지 않기로 한다.
이 한자 숫자는 출토지를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과 대비해 보면 ‘一’은 월성(月城), ‘二’는 흥륜사(興輪寺), ‘三’은 천군리(千軍里), ‘四’는 보문사(普門寺), ‘五’는 황룡사(皇龍寺), ‘六’은 남산(南山), ‘七’은 임해전(臨海殿), ‘八’은 사천왕사(四天王寺), ‘十’은 북군리(北軍里), ‘十一’은 나원사(羅原寺), ‘十二’는 분황사(芬皇寺), ‘十三’은 창림사(昌林寺), ‘十四’는 고선사(高仙寺)로 보인다.
표 1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와전부 고구려 와전(瓦磚之部 高句麗瓦磚) 초록
『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第六册
瓦磚之部
高句麗瓦磚
高一鐙瓦平壤府外東大院里
高二
高三
高四
高五
高六
高七鐙瓦平川里
高八
高九
高十
高十一
高十二
高十三
高十四 酒岩山
高十五鐙瓦酒岩山
高十六
高十七
高十八
高十九 淸五里
高廿
高廿一
高廿二鐙瓦安鶴宮
高廿三
高廿四
高廿五鐙瓦平壤
高廿六鐙瓦平壤柳町
高廿七
高廿八
高廿九
高卅
高卅一
高卅二鐙瓦平壤府外永濟橋附近
高卅三鐙瓦
高卅四
高卅五
高卅六
高三七鐙瓦土城里
高三八
高三九牝瓦土城里
高四◯
高四一
高四二
高四三
高四四
高四五鐙瓦 (模)
高四六宇瓦 (模)安鶴宮
以上昭和十一年二月一日現在
高四七
高四八
高四九
高五◯
高五一
圖 7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瓦磚之部 高句麗瓦磚’ [1]
圖 7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瓦磚之部 高句麗瓦磚’ [2]
圖 7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瓦磚之部 高句麗瓦磚’ [3]
圖 7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瓦磚之部 高句麗瓦磚’ [4]
圖 7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瓦磚之部 高句麗瓦磚’ [5]
圖 7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瓦磚之部 高句麗瓦磚’ [6]
圖 7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瓦磚之部 高句麗瓦磚’ [7]
圖 7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瓦磚之部 高句麗瓦磚’ [8]
圖 7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瓦磚之部 高句麗瓦磚’ [9]
圖 8_『昭和拾壱年以後早稻田大學東洋美術陳列室會津八一氏蒐集品目錄』 고구려와 부분
『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과 제7책에 따르면 소화 11년(1936) 2월 1일 현재로 고구려 와전의 수량은 46점, 백제 와전의 수량은 85점, 신라 와전의 수량은 525점이다. 이에 따르면 아이즈 컬렉션의 한반도 고와전(古瓦塼)의 상당 부분은 1934년에 입수한 것이 된다.
하지만 고구려 와전에 관해서 『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에는 ‘소화 11년(1936) 2월 1일 현재’라는 기재 뒤에 5점의 번호가 추가되어 있다(圖 7, 표1). 더욱이 『昭和拾壱年以後早稻田大學東洋美術陳列室會津八一氏蒐集品目錄』에도 4점이 기재되어 있으므로(圖 8, 표 2) 전부 있다고 가정한다면 모조품을 포함해 55점이 남아 있지 않으면 안 되나 현재 아이즈야이치기념박물관에 고구려 기와로 등록되어 있는 것은 모조품 1점을 포함해 47점이다. 다만 여기서 말한 전부가 고구려 와전이 아니고 고구려의 고지(故地)에서 채집・사굴한 후대의 것으로 생각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 기와의 많은 수에는 아이즈 야이치의 손에 의해 『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의 등록번호가 적색으로 주기되어 있고 출토지가 묵서되어 있다.
모조품은 『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에 ‘高四六 宇瓦(模) 安鶴宮’이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현재의 소장 No. K28-13(圖 9의 ②)에 해당한다. 이것은 암막새 파편의 복제품으로 원자료를 형뜨기한 후 석고를 부어 제작한 후 채색한 것이다. 이 원래의 자료는 일제강점기에 수집되어 현재 동경대학에 소장되어 있는 전안학궁지출토품(傳安鶴宮址出土品)이라고 추정되는데 이는 圖 9에서 예시한 바와 같이 양자는 문양, 크기, 파손 부분까지 전부 동일한 점에서 기인한다.
표 2_『昭和拾壱年以後早稻田大學東洋美術陳列室會津八一氏蒐集品目錄』 초록
昭和拾壱年以後早稻田大學東洋美術陳列室會津八一氏蒐集品目錄
(六)瓦甎
284.漢西神甎五◯·◯◯
285.漢双龍甎五◯·◯◯
286.單干和親十二字甎一◯◯·◯◯
287.龍文元康甎二◯·◯◯
291.長樂未央十二字甎四五·◯◯
293.咸康五年甎一五·◯◯
297.永康元年甎一◯·◯◯
299.唐華淸宮甎四◯·◯◯
300.新羅花文方甎五◯·◯◯
302.張使君甎一◯·◯◯
308.饕餮文半瓦一五·◯◯
316.秦羽陽萬歲瓦一五·◯◯
317.秦閭瓦二◯·◯◯
322.漢長生無極瓦一五·◯◯
324.漢幷天下瓦一◯·◯◯
326.千秋萬歲瓦 (漢)一◯·◯◯
329.長生未央瓦 (漢)一◯·◯◯
330.雙獸文瓦 (漢)四◯·◯◯
331.白虎文瓦 (漢)四◯·◯◯
337.蕨手文瓦 (漢)一五·◯◯
340.長樂未央瓦 (漢)一◯·◯◯
348.支那牡瓦 (綠秞)二·◯◯
352.法輪寺井甎二◯·◯◯
353.朝鮮宇瓦四·◯◯
362.慶州單弁鐙瓦(寄 赠)
363.渤海國鐙瓦(寄 赠)
364.渤海國宇瓦(寄 赠)
365.慶州望德寺甎(寄 赠)
366.公州西穴寺鐙瓦(寄 赠)
367.慶州望德寺甎(寄 赠)
368.公州宋山里蓮花文甎 (中方)(寄 赠)
373.高句麗鐙瓦三·◯◯
374.高句麗鐙瓦二·◯◯
375.高句麗鐙瓦 二·◯◯
376.高句麗鐙瓦(平川里) 三·◯◯
以上昭和十五年八月十六日現在
圖 9_일제강점기 수집 안학궁지 출토 암막새
圖 9_일제강점기 수집 안학궁지 출토 암막새 모조품
이 모조품에 관해서도 그 내역이 목록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가능성 있는 입수경위는 와세다대학 문학부 동양사학과 출신으로 와세다대학에 재학할 당시부터 아이즈 야이치와 교류가 있었던 고마이 가즈치카[駒井和愛]를 경유했던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고마이 가즈치카는 1927년부터 도쿄제국대학의 조수로 근무하고 있었고 아이즈 야이치의 자택에도 가끔 방문해 아이즈 컬렉션 중의 고고학 관계 자료의 내용에 관해서 숙지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아이즈 야이치의 요청으로 고마이 가즈치카가 아이즈 컬렉션에 유사한 물건이 없는 도쿄제국대학 소장의 암막새의 모조품을 제작해 아이즈 야이치에 기증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기타, 기와 이외에도 고구려 유물로서 『昭和拾壱年以後早稻田大學東洋美術陳列室會津八一氏蒐集品目錄』에 기재되어 있는 장무이묘(張撫夷墓) 전이 2점 있다. 동 목록에 ‘301./百濟張敞墓甎/一/二〇・〇〇’, ‘302./張使君甎/一/一〇・〇〇’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들이다. 목록으로 인해 당시 전자는 20엔 후자는 10엔에 구입된 것을 알 수 있다. ‘百濟張敞墓甎’은 현 소장 No.K022-1이고 , ‘張使君甎’은 현 소장 No.C014-3이다.
‘百濟張敞墓甎’은 상면에 ‘鳳山郡嵋山面烏江洞都塚甎槨所用甎/銘曰使君帯方大守張撫塼/明治四十四年十月二十五日堀出’라고 적혀 있고, 명문이 적혀 있는 면의 반대쪽에는 ‘今ヨリ凡千七百五十年/百濟大守張敞墓所用(지금부터 대략 1750년/ 백제태수장창묘소용)’이라고 같은 글씨로 적색으로 주기되어 있다. 圖 10은 조선총독부촉탁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가 1911년에 장무이묘(당시에는 都塚으로 불림)를 조사할 당시에 친구인 구로다 다이조[黑田泰造] 앞으로 보낸 그림엽서이다. ‘明治44年(1911)10月24日’자 소인이 찍힌 10월 23일자 그림엽서에 ‘오늘부터 3, 4일간 이곳의 미야코즈카(都塚)을 조사할 예정’이라고 적고 있다. 주기된 ‘明治四十四年十月二十五日’은 야쓰이 세이이쓰의 장무이묘 조사의 하루에 해당하는 날로서 소장된 전은 바로 그때에 발굴한 것이 된다.주 003
각주 003)
이 그림엽서는 山本俊介(財團法人 高麗美術館) 씨의 소장품으로 일본 京都市에 있는 財團法人 高麗美術館에서 2010년 8월 21일부터 10월 17일에 걸쳐 실시된 특별기획전 “ ‘사진엽서’ 속에서 보는 조선민속-100년 전의 시공 여행(1900-1945년)(「写真絵はがき」中の朝鮮民俗-100年前への時空の旅[1900-1945年])”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다(山本俊介他, 2010). 그 전문을 아래에 옮겨 적어 둔다.
「黑田泰造宛谷井濟一絵葉書」
消印 明治44年10月24日
表面
福岡縣、八幡製鉄所、銑鉄部 黑田泰造様
黄海道沙里院 宮本旅館 て 谷井済一
平城附近の調査を了し、関野博士と暫く分れて小生及通訳は当地下車、昨日は載寧 て四百年前の 古建築物を発見、本日より三四日間当地の都塚調査の筈、多分千六七百年前の塚の樣に考へられ申候早々敬具
裏面
当地此頃は晴天続きにて史蹟調査には好都合なれど空気の乾燥致すには閉口、今後は京城、大邱を 経て、慶州方面へ出動、来月五日に釜山へ出づる筈 付御用の節は 「釜山大池旅館留置」に願上候、 六日夜釜山発帰東の考 て候、
十月廿三日夜
沙里院の温突 て斉一

(상기 번역)
「黑田泰造 宛의 谷井濟一 그림엽서」
소인 明治 44년 10월 24일
앞면
후쿠오카현, 야와타제철소, 선철부 黑田泰造님께
황해도 사리원 宮本여관에서 谷井済一
평성 부근의 조사를 완료한 후 関野 박사와 바로 헤어져 저와 통역은 여기에 하차했습니다. 어제는 재령 부근에서 400년 전의 고 건축물을 발견했습니다. 오늘부터 3, 4일간은 이곳의 都塚을 조사할 예정입니다. 대략 1600~1700년 전의 무덤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敬具
뒷면
이곳은 요즈음 맑은 날씨가 계속되어 사적조사에는 매우 적합하다고 할 것이나 공기가 건조함에는 질렸습니다. 지금부터는 경성, 대구를 경유해 경주 방면으로 출동한 후 다음 달 5일에는 부산에 이를 예정으로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부산 大池여관 유치’ 로 우편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6일 저녁에 부산에서 출발해 동경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0월 23일 저녁
사리원의 온돌바닥에서 斉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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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의 세월이 흐린 뒤에 아이즈 야이치가 입수한 것이다.
‘百濟張敞墓甎’의 ‘所藏 No.K022’은 아이즈야이치기념박물관의 분류상, 백제 자료로 추정되는 자료에 부여된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발굴 당시 혹은 그다지 멀지 않은 시점에 행해진 것으로 생각되는 적색의 주기가 ‘百濟大守張敞墓所用’으로 적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 전은 구입 당시에는 백제의 전으로 오인되어 분류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圖 10_야쓰이 세이이쓰가 구로다 다이조에게 보낸 그림엽서, 명치 44년(1911) 10월 23일부 [1]
圖 10_야쓰이 세이이쓰가 구로다 다이조에게 보낸 그림엽서, 명치 44년(1911) 10월 23일부 [2]
圖 11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瓦磚之部 百濟瓦磚 (1-1)
圖 11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瓦磚之部 百濟瓦磚 (1-2)
圖 11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瓦磚之部 百濟瓦磚 (1-3)
圖 11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瓦磚之部 百濟瓦磚 (1-4)
圖 11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瓦磚之部 百濟瓦磚 (1-5)
圖 11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瓦磚之部 百濟瓦磚 (1-6)
圖 12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瓦磚之部 百濟瓦磚 (2-1)
圖 12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瓦磚之部 百濟瓦磚 (2-2)
圖 12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瓦磚之部 百濟瓦磚 (2-3)
圖 12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瓦磚之部 百濟瓦磚 (2-4)
또한 ‘所藏 No.C014’은 아이즈야이치기념박물관의 분류상, 중국 자료로 보이는 것에 부여되는 것이다. 이것은 장무이묘 출토 전의 명문에서 보이는 ‘帶方太守張撫夷’에 의해 대방군 시대의 것으로서 ‘戊’, ‘申’의 간지를 288년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戊申’은 동진(東晋) 목제(穆帝) 영화(永和) 4년(348년)으로 생각되므로(岡崎敬, 1964; 田村晃一, 1993; 鄭仁盛, 2010), 본고에서는 ‘고구려 와전’의 하나로 다루기로 한다.
『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에는 백제 와전 85점이 기재되어 있다(圖 11, 12). 이 85점의 백제 와전 중에는 고구려 와전과 같이 백제의 것이 아닌, 백제의 고지(故地)에서 채집·사굴한 통일신라기의 기와도 포함되어 있으나 이것들도 백제 와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중 10점에 가루베 지온의 소장표가 붙어 있다. 10점 중 9점이 『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에
  ‘百13 鐙瓦’(現所藏 No.K030-37) (圖13)
  ‘百16 鐙瓦 新光寺’(現所藏 No.K029-38) (圖14)
  ‘百18 鐙瓦 新光寺’(現所藏 No.K030-13) (圖15)
  ‘百19 鐙瓦 新光寺’(現所藏 No.K029-25) (圖16)
  ‘百22 宇瓦 新光寺’(現所藏 No.K030-5) (圖17)
  ‘百62 鐙瓦 西穴寺’(現所藏 No.K030-38) (圖18)
  ‘百73 宇瓦 舟尾寺址’(現所藏 No.K030-11) (圖19)
  ‘百74 宇瓦 大通寺址’(現所藏 No.K030-32) (圖20)
  ‘百76 牝瓦 安國寺址’(現所藏 No.K030-29) (圖21)
로 기재되어 있다.
‘中方銘塼’(現所藏 No.K030-17)(圖 22)은 『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은데 『昭和拾壱年以後早稻田大學東洋美術陳列室會津八一氏蒐集品目錄(소화십일년이후조도전대학동양미술진열실회진팔일씨수집품목록)』 소재의 ‘No.368/公州宋山里蓮花文甎(中方)’(圖 23)에 해당할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연화문’이 보이지 않으므로 다른 것으로 해 두는 것이 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백제 와전에 붙어 있는 가루베 지온의 소장표에 기재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百13’(現所藏 No.K030-37)에는 ‘品名/, 發掘地/公州, 時日/昭和十年六月二二(?)日, 輕部所藏品’,
  ‘百16’(現所藏 No.K029-38)에는 ‘品名/, 發掘地/公州新光寺, 時日/昭和十年六月六□[日], 輕部所藏□[品]’,
  ‘百18’(現所藏 No.K030-13)에는 ‘品名/, 發掘地/公州新光寺, 時日/昭和十年六月廿三日, 輕部所藏品’,
  ‘百19’(現所藏 No.K029-25)에는 ‘品名/, 發掘地/□□[公州]新光寺, 時日/昭和十年五月十九□[日], 輕□[部]所藏□[品]’,
  ‘百22’(現所藏 No.K030-5)에는 ‘品名/, 發掘地/公州新光寺, 時日/昭和十年六月二日, 輕部所藏品’,
  ‘百62’(現所藏 No.K030-38)에는 ‘品名/鐙□[瓦],發掘地/公州西穴寺址, 時日/昭和五年四月 日, 輕部所藏品’,
  ‘百73’(現所藏 No.K030-11)에는 ‘品名/, 發掘地/公州舟尾寺址, 時日/昭和七年八月 日, 輕部所藏品’,
  ‘百74’(現所藏 No.K030-32)에는 ‘品名/宇瓦, 發掘地/公州大通寺址, 時日/昭和七年五月十五日, 輕部所藏品’,
  ‘百76’(現所藏 No.K030-29)에는 ‘品名/安國寺銘入, 發掘地/安国寺址, 時日/昭和八年五月二二日, 輕部 所藏品’,
  ‘中方銘塼’(現所藏 No.K030-17)에는 ‘品名/塼 中方銘入, 發掘地/公州宋山里, 時日/昭和七年八月 日, 輕部所藏品’
그리고 『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2책의 1쪽에는 ‘支那古明器泥像之部, 古陶磁之部, 玉器之部, 古銅鐵之部, 玩具之部’라고 적혀 있다. 여기에는 한대(漢代)의 명기(明器)에서 시작해 송대(宋代)까지의 중국 도자기류나 한반도 삼국시대의 토기, 고려・조선의 도자기, 중남미의 토기, 그리스의 토기 등 다양한 자료가 등재되어 있다.
목록에는 입수 경위에 관한 기재가 없지만 여기에 속해 있는 백제 토기에 관해서는 그 내역을 알 수 있다.
이 백제 토기는 ‘二二三 百濟陶壺 一’, ‘二二四 百濟三脚盒子 一’, ‘二二五 百濟陶壺 一’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二二三’은 현 소장 No.T023,
  ‘二二四’은 현 소장 No.T024・T025,
  ‘二二五’는 현 소장 No.T026이다.
‘二二四’는 『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2책에 ‘百濟三脚盒子 一’이라고 세트로 기재되어 있으나 원래 세트로 되어 있던 것이 아니다. 현 소장 No.는 삼족토기가 No.T024, 뚜껑이 No.T025이다.
이 백제 토기에 붙어 있는 소장표의 기재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장 No.T023(圖 24)에는 ‘品名/百濟陶器, 發掘地/公州, 時日/昭和七年八月 日, 輕部所藏品’,
  소장 No.T024(圖 25)에는 ‘品名/土器, 發掘地/公州, 時日/昭和六年 月 日, 公州公立高等普通學校’,
  소장 No.T025(圖 26)에는 ‘品名/土器, 發掘地/公州, 時日/昭和七年四月 日, 輕部所藏品’,
  소장 No.T026(圖 27)에는 ‘品名/百濟陶器, 發掘地/公州, 時日/昭和五年五月 日, 輕部所藏品’이라고 되어 있어서 전술한 백제 와전과 같이 가루베 지온에 의해 아이즈 컬렉션에 흘러 들어간 것을 알 수 있다.
圖 13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百13 鐙瓦’ [1]
圖 13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百13 鐙瓦’ [2]
圖 14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百16 鐙瓦 新光寺’ [1]
圖 14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百16 鐙瓦 新光寺’ [2]
圖 15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百18 鐙瓦 新光寺’ [1]
圖 15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百18 鐙瓦 新光寺’ [2]
圖 16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百19 鐙瓦 新光寺’ [1]
圖 16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百19 鐙瓦 新光寺’ [2]
圖 17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百22 宇瓦 新光寺’ [1]
圖 17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百22 宇瓦 新光寺’ [2]
圖 18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百62 鐙瓦 西穴寺’ [1]
圖 18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百62 鐙瓦 西穴寺’ [2]
圖 19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百73 宇瓦 舟尾寺址’ [1]
圖 19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百73 宇瓦 舟尾寺址’ [2]
圖 20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百74 宇瓦 大通寺址’ [1]
圖 20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百74 宇瓦 大通寺址’ [2]
圖 21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百76 牝瓦 安國寺址’ [1]
圖 21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6책 ‘百76 牝瓦 安國寺址’ [2]
圖 22_‘中方銘塼’ [1]
圖 22_‘中方銘塼’ [2]
圖 22_‘中方銘塼’ [3]
圖 23_『昭和拾壱年以後早稻田大學東洋美術陳列室會津八一氏蒐集品目錄』 ‘公州宋山里蓮花文甎’ 부분
圖 24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2책 ‘二二三 百濟陶壺’ [1]
圖 24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2책 ‘二二三 百濟陶壺’ [2]
백제 와전과 백제 토기에 붙어 있는 가루베 지온 소장표에 날짜가 소화 8년(1933)까지의 것은 1934년에 아이즈 야이치가 매입한 것 중에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야 한다. 1934년 이후의 것은 ‘소화 10년’(1935)의 6월 이전의 것으로 한정된다. 1935년 7월, 아이즈 야이치는 후일 세계적으로 저명한 판화가가 되는 무나카타 시코[棟方志功]와 처음으로 만나고 있다. 이는 가루베 지온의 도쿄부(東京府, 現 東京都) 나카노구[中野區] 야마토쵸[大和町]에 있던 집에서의 일이다(會津八一, 1939).
“날짜는 잊어버렸으나 4, 5년 전의 일이다. 충청남도 공주에서 중학교의 선생 노릇을 하고 있는 다른 우인(友人)이, 자신이 거기서 발견한 백제 국왕의 묘에서 파낸 여러 가지 물품을 가지고 7월 휴가 때에 돌아왔다. 그걸 보기 위해 나카노구 야마토쵸의 집으로 향했다. (중략) 이윽고 발굴자의 설명을 들어가면서 동석한 4, 5명은 아주 조용히 수많은 물건들을 보았다. 이 묘는 이미 예전에 한번 도굴을 당했던 것 같은데 유물은 대부분 작은 금구(金具)의 파편이나 남경옥(南京玉) 등뿐이었으나, 그래도 그 파편의 도금한 색은 휘황찬란하게 우리들의 눈에 비쳐졌다. 방 안 가득히 늘어놓은 파편으로부터 먼 옛날 그 나라 왕궁의 생활을 조용히, 세밀히, 중간중간 넋을 잃고 마음속에 그려 봤다.”(會津八一 1939, 22·23쪽)라고 수필에 적고 있다.주 004
각주 004)
그 때 輕部慈恩이 會津八一에게 보여준 ‘백제 국왕의 무덤에서 파낸 여러 가지 물건’이 1933년 8월에 藤田亮策, 小泉顯夫, 澤俊一이 발굴조사한 송산리 제6호분에서 빼내 온 것으로 조사 이전에 도굴해 가지고 있었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
李龜烈은 많은 증언들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저술하고 있다. “제6호분을 연도(羨道) 입구의 천장께에서 곧바로 파들어가서 모든 부장품을 깨끗이 약탈해 먹은 것이 확실하다. 어떤 증언자는 그가 무덤 속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개를 집어넣었다는 내막까지 말하고 있다. ‘당시 나이 30 안팎이었던 가루베는 중학교 교사의 탈을 쓴 천하의 고얀 놈이었다’고 公州의 증언자들은 말하고 있다.그는 제가 도굴해 먹고도 그 사실을 公州 경찰서의 신고하여 완전범죄를 꾀했을 정도로 대담했다.(中略) 그리고 그때 벌써 ‘저 가루베가 아무래도 수상쩍다’는 말이 나돌았다는가 하면 얼마 후에는 일본인 수집가들 사이에서 ‘가루베 자식, 이번에 한 20만 원(圓) 벌었을 거야’ 하는 말이 공공연히 말해지고 있었다고 한다.”(李龜烈, 1973, 191・192쪽).
李龜烈이 모은 증언이 정확하다면 輕部慈恩이 송산리 제6호분에서 도굴해 획득한 주요 유물은 이미 수집가에 매각되었고 남아 있던 금동제품의 파편 등 팔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들을 동경으로 가지고 와, 교사의 가면을 쓰고 뒤에서 하고 있던 골동상의 단골이었던 會津八一에게 보여주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상세한 내막은 불명확하다.
輕部慈恩의 사적에 관해서는 최근 『가루베 지온의 백제연구』(尹龍爀, 2010)가 간행되었다. 이 책은 尹龍爀이 최근에 학술지에 발표했던 논문과 다른 연구자들의 논문 등을 편찬한 것이다. 尹龍爀의 논문에는 송산리 제6호분에 관한 輕部慈恩의 악행에 관해서는 부정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또한 有光敎一와 필자가 편찬한 『朝鮮古蹟硏究會稿』Ⅱ(公州宋山里第29號墳 高靈主山第39號墳發掘調査報告, 1933·1939)를 많이 인용하고 있으나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이에 관한 비판은 본서의 주제에 적합하지 않고 이야기가 길어지므로 일단 여기서는 다루지 않기로 하나 문제가 있는 부분이 많다는 점만을 지적해 두고 다음 기회에 심도 있게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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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和十年’(1935)의 가루베 지온의 소장표가 붙어 있는 백제 와전은 이 당시 귀국할 때에 가루베 지온이 가져와 아이즈 야이치에 매도했거나 증여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주 005
각주 005)
輕部慈恩은 자기가 채집・사굴한 자료를 매각하고 있었으나 會津컬렉션의 신라 와전의 예에서 보이듯이 그 양이 매우 많았을 것이다. 會津八一는 동양미술사의 기와에 관한 강의 중에도 ‘기와가 모여 있는 곳’으로서 東大建築學敎室, 東京帝室博物館, 京都大學建築科, 朝鮮總督府博物館 등과 함께 輕部慈恩의 이름을 올리고 있어서(會津八一, 1982a, 69쪽) 기와만으로도 매우 많은 양을 소장하고 있었던 것을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또한 會津八一의 수필을 살펴보면 輕部慈恩이 계속적으로 채집・사굴한 대량의 유물을 일본에 가져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우기 輕部慈恩은 근무처였던 公州公立高等普通學校의 소장표가 붙어 있는 자료까지도 가져오고 있다.
일찍이 필자는 有光敎一로부터 공주 송산리 제29호분의 보고서(有光敎一・藤井和夫, 2002) 작성 준비 중에 들은 바가 있는데 “輕部慈恩의 형제가 京都에서 골동점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라고 하면서 그 골동점을 통해서도 매각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輕部慈恩은 일본으로 귀환할 때 다른 일본인이 배낭 하나만 가지고 귀환선으로 고생하며 귀국한 것과 달리 돈이 있어서 어선을 전세내어 귀환했는데 그때 많은 자료를 가지고 돌아왔다”라고 말했다. 李龜烈도 여러 가지 증언을 모아 “8・15 직후, 가루베[軽部]는 江景에서 트럭 1대에다 그의 컬렉션을 몽땅 싣고 재빨리 大邱로 내뺐다. 大邱에서는 같은 악당이었던 오구라[小倉武之助]와 합류했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으로의 비밀 반출 루트를 물색할 수 있었다”(李龜烈, 1973, 192・193쪽)라고 적고 있다. 輕部慈恩이 매우 많은 양의 한반도 관련 자료를 소지하고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참고로 ‘사굴(私掘)’이라고 하는 용어에 관해서는 공주 송산리 제29호분 보고서(有光敎一・藤井和夫, 2002, 17쪽 註8)의 참조를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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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에 수록된 중국 고와전에는 출토지의 기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데 이는 골동상이나 경매에서 구입한 것에서 유래한다고 생각된다. 이에 비해 다수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와전에는 출토지가 기재되어 있다. 이는 일반적인 골동상에서의 구입품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양상이다.
圖 25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2책 ‘二二四 百濟三脚盒子’ 삼족토기 [1]
圖 25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2책 ‘二二四 百濟三脚盒子’ 삼족토기 [2]
圖 26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2책 ‘二二四 百濟三脚盒子’ 뚜껑 [1]
圖 26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2책 ‘二二四 百濟三脚盒子’ 뚜껑 [2]
圖 27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2책 ‘二二五 百濟陶壺’ [1]
圖 27_『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 제2책 ‘二二五 百濟陶壺’ [2]
가루베 지온에게서 구입한 신라 와전에는 가루베 지온의 소장표가 전혀 없고 고구려 기와에도 그의 소장표가 붙어 있지 않다고 해도 이것으로 이 유물들을 아이즈 야이치가 다른 곳에서 구입했다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오히려 전술한 바와 같이 아이즈 야이치와 가루베 지온의 관계로 보면 아이즈 컬렉션의 신라 이외의 한반도 고와전의 대부분도 가루베 지온에게서 구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일도 철저하게 행했던 아이즈 야이치였기에 한반도 관련 와전 수집에도 가루베 지온에게 수집을 의뢰해 대량으로 모으려고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런 의뢰를 받은 가루베 지온은 경주에서 신라의 와전을 채집해 아이즈 야이치에 매각했고, 계속해서 평양 근무 시절에 채집·사굴했다고 생각되는 고구려 기와와 공주에서 채집·사굴한 백제 와전도 매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 와전에 비해 아이즈 컬렉션의 고구려 기와의 수가 적은 것은 가루베 지온의 평양 근무가 최초의 교직 취직이었고 또한 단기간이었기 때문이었고, 백제 와전이 적은 것은 가루베 지온의 연구재료로서 많은 수를 가까이 두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 각주 001)
    이 당시 구입한 것으로 생각되는 신라 와전은 輕部慈恩에게서 입수한 것이다. 이 와전에는 채집지마다 1~14까지의 한자 숫자가 묵서되어 있는데 채집지가 몇 곳으로 구별되어 있었던 것 같고, 일부에는 숫자 이외에도 채집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輕部慈恩은 會津八一의 요구에 응해 일시에 대량의 와전을 채집, 사굴했기 때문에 혼란을 피할 목적으로 채집, 사굴지마다 번호를 부여해 분류한 후 會津八一에 매각했던 것에 會津八一 등이 주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 輕部慈恩은 1925년에 早稻田大學 文學部를 졸업하고 同年 3월에 평양숭실전문학교로 부임해 1927년 1월에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고, 1940년경에는 대전의 대동여자학교로 옮겼으며 1943년에는 강경여자중학교에 교장으로 부임했다. 이 와중에 많은 고분의 도굴을 행해 “최고로 악질적인 도굴꾼이요, 유물 약탈자였다”(李龜烈, 1973, 191쪽)라고 평가되고 있는 인물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2)
    加藤諄도 “일본의 200점은 제쳐두고라도 한반도 기와의 대다수는 가루베[輕部] 씨에게 신세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이 정도로 고루 갖춘다는 것은 대단한 열의를 필요로 한다”(加藤諄, 1974, 107・108쪽)라고 적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이 그림엽서는 山本俊介(財團法人 高麗美術館) 씨의 소장품으로 일본 京都市에 있는 財團法人 高麗美術館에서 2010년 8월 21일부터 10월 17일에 걸쳐 실시된 특별기획전 “ ‘사진엽서’ 속에서 보는 조선민속-100년 전의 시공 여행(1900-1945년)(「写真絵はがき」中の朝鮮民俗-100年前への時空の旅[1900-1945年])”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다(山本俊介他, 2010). 그 전문을 아래에 옮겨 적어 둔다.
    「黑田泰造宛谷井濟一絵葉書」
    消印 明治44年10月24日
    表面
    福岡縣、八幡製鉄所、銑鉄部 黑田泰造様
    黄海道沙里院 宮本旅館 て 谷井済一
    平城附近の調査を了し、関野博士と暫く分れて小生及通訳は当地下車、昨日は載寧 て四百年前の 古建築物を発見、本日より三四日間当地の都塚調査の筈、多分千六七百年前の塚の樣に考へられ申候早々敬具
    裏面
    当地此頃は晴天続きにて史蹟調査には好都合なれど空気の乾燥致すには閉口、今後は京城、大邱を 経て、慶州方面へ出動、来月五日に釜山へ出づる筈 付御用の節は 「釜山大池旅館留置」に願上候、 六日夜釜山発帰東の考 て候、
    十月廿三日夜
    沙里院の温突 て斉一

    (상기 번역)
    「黑田泰造 宛의 谷井濟一 그림엽서」
    소인 明治 44년 10월 24일
    앞면
    후쿠오카현, 야와타제철소, 선철부 黑田泰造님께
    황해도 사리원 宮本여관에서 谷井済一
    평성 부근의 조사를 완료한 후 関野 박사와 바로 헤어져 저와 통역은 여기에 하차했습니다. 어제는 재령 부근에서 400년 전의 고 건축물을 발견했습니다. 오늘부터 3, 4일간은 이곳의 都塚을 조사할 예정입니다. 대략 1600~1700년 전의 무덤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敬具
    뒷면
    이곳은 요즈음 맑은 날씨가 계속되어 사적조사에는 매우 적합하다고 할 것이나 공기가 건조함에는 질렸습니다. 지금부터는 경성, 대구를 경유해 경주 방면으로 출동한 후 다음 달 5일에는 부산에 이를 예정으로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부산 大池여관 유치’ 로 우편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6일 저녁에 부산에서 출발해 동경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0월 23일 저녁
    사리원의 온돌바닥에서 斉一 바로가기
  • 각주 004)
    그 때 輕部慈恩이 會津八一에게 보여준 ‘백제 국왕의 무덤에서 파낸 여러 가지 물건’이 1933년 8월에 藤田亮策, 小泉顯夫, 澤俊一이 발굴조사한 송산리 제6호분에서 빼내 온 것으로 조사 이전에 도굴해 가지고 있었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
    李龜烈은 많은 증언들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저술하고 있다. “제6호분을 연도(羨道) 입구의 천장께에서 곧바로 파들어가서 모든 부장품을 깨끗이 약탈해 먹은 것이 확실하다. 어떤 증언자는 그가 무덤 속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개를 집어넣었다는 내막까지 말하고 있다. ‘당시 나이 30 안팎이었던 가루베는 중학교 교사의 탈을 쓴 천하의 고얀 놈이었다’고 公州의 증언자들은 말하고 있다.그는 제가 도굴해 먹고도 그 사실을 公州 경찰서의 신고하여 완전범죄를 꾀했을 정도로 대담했다.(中略) 그리고 그때 벌써 ‘저 가루베가 아무래도 수상쩍다’는 말이 나돌았다는가 하면 얼마 후에는 일본인 수집가들 사이에서 ‘가루베 자식, 이번에 한 20만 원(圓) 벌었을 거야’ 하는 말이 공공연히 말해지고 있었다고 한다.”(李龜烈, 1973, 191・192쪽).
    李龜烈이 모은 증언이 정확하다면 輕部慈恩이 송산리 제6호분에서 도굴해 획득한 주요 유물은 이미 수집가에 매각되었고 남아 있던 금동제품의 파편 등 팔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들을 동경으로 가지고 와, 교사의 가면을 쓰고 뒤에서 하고 있던 골동상의 단골이었던 會津八一에게 보여주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상세한 내막은 불명확하다.
    輕部慈恩의 사적에 관해서는 최근 『가루베 지온의 백제연구』(尹龍爀, 2010)가 간행되었다. 이 책은 尹龍爀이 최근에 학술지에 발표했던 논문과 다른 연구자들의 논문 등을 편찬한 것이다. 尹龍爀의 논문에는 송산리 제6호분에 관한 輕部慈恩의 악행에 관해서는 부정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또한 有光敎一와 필자가 편찬한 『朝鮮古蹟硏究會稿』Ⅱ(公州宋山里第29號墳 高靈主山第39號墳發掘調査報告, 1933·1939)를 많이 인용하고 있으나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이에 관한 비판은 본서의 주제에 적합하지 않고 이야기가 길어지므로 일단 여기서는 다루지 않기로 하나 문제가 있는 부분이 많다는 점만을 지적해 두고 다음 기회에 심도 있게 다루고자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5)
    輕部慈恩은 자기가 채집・사굴한 자료를 매각하고 있었으나 會津컬렉션의 신라 와전의 예에서 보이듯이 그 양이 매우 많았을 것이다. 會津八一는 동양미술사의 기와에 관한 강의 중에도 ‘기와가 모여 있는 곳’으로서 東大建築學敎室, 東京帝室博物館, 京都大學建築科, 朝鮮總督府博物館 등과 함께 輕部慈恩의 이름을 올리고 있어서(會津八一, 1982a, 69쪽) 기와만으로도 매우 많은 양을 소장하고 있었던 것을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또한 會津八一의 수필을 살펴보면 輕部慈恩이 계속적으로 채집・사굴한 대량의 유물을 일본에 가져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우기 輕部慈恩은 근무처였던 公州公立高等普通學校의 소장표가 붙어 있는 자료까지도 가져오고 있다.
    일찍이 필자는 有光敎一로부터 공주 송산리 제29호분의 보고서(有光敎一・藤井和夫, 2002) 작성 준비 중에 들은 바가 있는데 “輕部慈恩의 형제가 京都에서 골동점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라고 하면서 그 골동점을 통해서도 매각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輕部慈恩은 일본으로 귀환할 때 다른 일본인이 배낭 하나만 가지고 귀환선으로 고생하며 귀국한 것과 달리 돈이 있어서 어선을 전세내어 귀환했는데 그때 많은 자료를 가지고 돌아왔다”라고 말했다. 李龜烈도 여러 가지 증언을 모아 “8・15 직후, 가루베[軽部]는 江景에서 트럭 1대에다 그의 컬렉션을 몽땅 싣고 재빨리 大邱로 내뺐다. 大邱에서는 같은 악당이었던 오구라[小倉武之助]와 합류했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으로의 비밀 반출 루트를 물색할 수 있었다”(李龜烈, 1973, 192・193쪽)라고 적고 있다. 輕部慈恩이 매우 많은 양의 한반도 관련 자료를 소지하고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참고로 ‘사굴(私掘)’이라고 하는 용어에 관해서는 공주 송산리 제29호분 보고서(有光敎一・藤井和夫, 2002, 17쪽 註8)의 참조를 요한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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