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고분의 발견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발견은 1902년경에 강서 군수가 강서 대묘와 강서 중묘를 발굴한 것에서 시작되나 상세한 것은 불명확하며 구체적인 발견 경위를 알 수 있는 것은 1905년부터이다. 도쿄미술학교 일본화선과(日本畵選科) 생도였던 오타 후쿠조(太田福藏)
주 001는 1905년에 제15사단 제58연대 제3대대에 배속되어 평양에 갔다. 그 후 진남포(鎭南浦), 강서에 파견되어 강서에서 8개월 간 체재하였다. 오타는 고미술(古美術)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지역 사람에게서 근교에 고분이 3기가 있다는 것을 듣고 이것을 발굴하기로 하였다. 이미 강서 군수가 1902년 강서 대묘와 강서 중묘를 발굴했다는 것을 지역 주민에게들은 때였다. 발굴을 시작한 3일 후인 1905년 11월 28일에는 강서 대묘의 석실 내에 들어갈 수 있었다. 촛불을 밝혀 내부를 관찰하고 3시간 정도에 걸쳐 벽화를 스케치하였다. 혼자 들어가면 도굴의 의심을 살까 염려하여 지역 주민들과 함께 석실 내 유물을 찾았으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강서 중묘의 석실 안에도 들어가 네 벽과 천장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주 002강서 대묘, 중묘, 소묘 세 개의 큰 분묘가 있는 이 지역은 삼묘리(三墓里)로 불리며 옛날부터 왕후의 고분으로 여겨 매년 군수가 제사를 지내 왔다고 한다. 강서에 살던 오카무라 코이치(岡村幸一)는 군수 이우영(李宇榮)의 신뢰를 얻어 1906년 자비로 강서 대묘와 강서 중묘를 발굴하여 벽화 문양을 확인하였다. 그 때 석실 입구의 석비 파편은 오카무라가 소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 003그 후 세키노 다다스는 1919년 고적 조사를 개시하여 평양에 체재하는 동안 같은 지역의 시라카와 쇼지(白川正治)로부터 강서에 3기의 큰 고분이 있다는 것을 보고받았다. 그 해에는 조사를 할 수 없었고, 1911년 고적 조사에서 강서로 가서 하루동안 고분을 견학하였다. 그 때 예전 군수의 발굴에 참가하였던 지역 주민들로부터 네 벽은 돌로 쌓았고 내부에 벽화가 있으나 부장품은 없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것으로 세키노는 이 고분들이 고구려 시대의 것이라 추정하였다. 세키노 다다스는 그 해 12월 도쿄에 돌아와 도쿄미술학교에서 강의를 하였고 당시 생도였던 오타 후쿠조가 1905년에 그린 강서의 고분 벽화 스케치를 보게 되었다. 이 그림으로 고구려 시대의 고분이라는 것이 더욱 명확해졌다.
주 004
주 001는 1905년에 제15사단 제58연대 제3대대에 배속되어 평양에 갔다. 그 후 진남포(鎭南浦), 강서에 파견되어 강서에서 8개월 간 체재하였다. 오타는 고미술(古美術)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지역 사람에게서 근교에 고분이 3기가 있다는 것을 듣고 이것을 발굴하기로 하였다. 이미 강서 군수가 1902년 강서 대묘와 강서 중묘를 발굴했다는 것을 지역 주민에게들은 때였다. 발굴을 시작한 3일 후인 1905년 11월 28일에는 강서 대묘의 석실 내에 들어갈 수 있었다. 촛불을 밝혀 내부를 관찰하고 3시간 정도에 걸쳐 벽화를 스케치하였다. 혼자 들어가면 도굴의 의심을 살까 염려하여 지역 주민들과 함께 석실 내 유물을 찾았으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강서 중묘의 석실 안에도 들어가 네 벽과 천장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주 002강서 대묘, 중묘, 소묘 세 개의 큰 분묘가 있는 이 지역은 삼묘리(三墓里)로 불리며 옛날부터 왕후의 고분으로 여겨 매년 군수가 제사를 지내 왔다고 한다. 강서에 살던 오카무라 코이치(岡村幸一)는 군수 이우영(李宇榮)의 신뢰를 얻어 1906년 자비로 강서 대묘와 강서 중묘를 발굴하여 벽화 문양을 확인하였다. 그 때 석실 입구의 석비 파편은 오카무라가 소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 003그 후 세키노 다다스는 1919년 고적 조사를 개시하여 평양에 체재하는 동안 같은 지역의 시라카와 쇼지(白川正治)로부터 강서에 3기의 큰 고분이 있다는 것을 보고받았다. 그 해에는 조사를 할 수 없었고, 1911년 고적 조사에서 강서로 가서 하루동안 고분을 견학하였다. 그 때 예전 군수의 발굴에 참가하였던 지역 주민들로부터 네 벽은 돌로 쌓았고 내부에 벽화가 있으나 부장품은 없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것으로 세키노는 이 고분들이 고구려 시대의 것이라 추정하였다. 세키노 다다스는 그 해 12월 도쿄에 돌아와 도쿄미술학교에서 강의를 하였고 당시 생도였던 오타 후쿠조가 1905년에 그린 강서의 고분 벽화 스케치를 보게 되었다. 이 그림으로 고구려 시대의 고분이라는 것이 더욱 명확해졌다.
주 004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