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건이 오손과 형제맹약(연맹)을 맺으면 대하(大夏) 등도 신(臣)으로 삼을 수 있다고 말하자 천자가 옳게 여기며 장건을 중낭장에 배수함
그 이후로 천자께서는 여러 차례 장건에게 대하와 같은 나라에 대해서 물으셨다. 장건은 이미 후작[侯]을 상실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주 001“신(臣)이 흉노 가운데 머물 때 곤막(昆莫)주 002이라 불리우는 오손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곤막의 부친은 흉노의 서쪽 변경에서 소국(小國)[의 군장]이었습니다. 흉노가 그 부친을 공격하여 죽였는데,주 003
각주 003)
[그때] 곤막이 태어나 들에 버려졌습니다. 까마귀가 고기를 물고 그 위를 날아다녔고주 004늑대가 가서 그에게 젖을 먹였습니다. 선우가 기이하게 생각하고 신령스럽다고 여겨서 그를 거두어서 키웠습니다. 그가 장성하자 군대를 지휘케 하였고 여러 차례 공을 세우자, 선우는 그 부친의 백성을 다시 곤막에게 주고 서역에서 오랫동안 수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곤막은 그 백성을 거두어 길러서 주변의 소읍들을 공격했고, 활을 당길 만한 사람 수만 명에게 전투하는 법을 익히도록 했습니다.주 005匈奴攻殺其父 : 『漢書』에는 昆莫의 아버지의 이름이 難兜靡(nân-təu-mjie)이고, 烏孫의 原住地가 敦煌과 祁連 사이, 즉 河西回廊이었으며, 오손을 공격한 세력도 흉노가 아니라 大月氏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難兜靡를 살해한 장본인이 누구냐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도 갈라져 있는 상황이다. 이 문제는 『史記』 「大宛列傳」과 『漢書』 「張騫·李廣利傳』의 상호관계와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섣불리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Hulsewé 1979 : 214 ~ 215 ; 孟凡人 1985 : 1 ~ 18 ; 王炳華 1993 : 255 ~ 260 참조.
각주 005)
선우가 죽자 곤막은 이에 그 무리를 이끌고 멀리 옮겨 가서, 중립(中立)을 유지한 채 흉노에 조회(朝會)하러 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흉노가 기습병[奇兵]을 보내어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곤막을] 신령스럽게 여기고 멀리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흉노는] 그를 신속(羈屬)시키기만 할 뿐 크게 공격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선우가 한나라로 인하여 새로이 곤경에 처하게 되고, 예전 혼야왕의 땅도 텅 비어 아무도 없습니다. 만이(蠻夷)의 풍속은 한나라의 재물을 탐하는 것이니, 지금이야말로 [이를 활용할] 시기입니다.주 006오손에게 많은 물자를 주어서 동쪽으로 초치하여 옛 혼야왕의 땅에 거주케 하고 한나라와 형제맹약을 맺자고 한다면, 이 같은 상황으로 보아 [오손은] 마땅히 청종할 것이고, 그가 청종한다면 이는 흉노의 오른팔[右臂]을 끊는 셈이 됩니다. 이렇게 오손과 연맹한다면 그 서쪽에 있는 대하 등의 무리도 모두 초치하여 외신(外臣)으로 삼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천자께서는 이를 옳다고 하면서 장건을 중랑장(中郞將)주 007으로 배수하였다. 그에게 300명을 지휘케 하고 그 각각에게 말 2필을 주었으며, 또한 우양(牛羊) 약 만 마리, 막대한 값어치의 금과 비단을 주었다. 절(節)을 지참한 부사(副使)들 여러 명을 도로 사정이 허락하는 한 다른 이웃 나라로 파견토록 하였다.『漢書』 「張騫·李廣利傳」에는 “그때 月氏는 이미 匈奴에게 격파되었고 서쪽으로 塞王을 공격하였다. 塞王이 南走하여 멀리 이주하니 月氏가 그 땅에 거주하였다. 昆莫이 장성한 뒤 單于에게 父怨을 갚게 해 달라고 청하였고, 마침내 서쪽으로 大月氏를 공파하였다. 大月氏는 다시 西走하여 大夏의 땅으로 이주하였고, 昆莫은 그 무리를 빼앗고 그곳에 머물렀다. 군대가 점차 강해져서 單于가 사망하게 되자 다시 匈奴에 入朝하지 않으려 하였다.”라고 되어 있어 『史記』 「大宛列傳」과는 내용을 달리하고 있다. 그런데 앞서 지적했듯이 『漢書』을 믿는다면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이 재구성될 것이다. 즉, 처음에 月氏가 烏孫을 격파하여 昆莫, 즉 어린 太子가 흉노에 망명하였고, 후일 月氏가 匈奴의 공격을 받아 西遷하여 塞(Saka)을 공격하자 塞은 南走했고 月氏가 그 땅을 차지했다. 그런데 昆莫이 장성하여 匈奴의 지원을 받아 大月氏를 공격했고, 이에 大月氏는 西走하여 大夏의 땅으로 이주하고 烏孫이 대신 그 지역을 차지한 것이다.
- 각주 001)
-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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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3)
匈奴攻殺其父 : 『漢書』에는 昆莫의 아버지의 이름이 難兜靡(nân-təu-mjie)이고, 烏孫의 原住地가 敦煌과 祁連 사이, 즉 河西回廊이었으며, 오손을 공격한 세력도 흉노가 아니라 大月氏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難兜靡를 살해한 장본인이 누구냐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도 갈라져 있는 상황이다. 이 문제는 『史記』 「大宛列傳」과 『漢書』 「張騫·李廣利傳』의 상호관계와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섣불리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Hulsewé 1979 : 214 ~ 215 ; 孟凡人 1985 : 1 ~ 18 ; 王炳華 1993 : 255 ~ 260 참조.
-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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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5)
『漢書』 「張騫·李廣利傳」에는 “그때 月氏는 이미 匈奴에게 격파되었고 서쪽으로 塞王을 공격하였다. 塞王이 南走하여 멀리 이주하니 月氏가 그 땅에 거주하였다. 昆莫이 장성한 뒤 單于에게 父怨을 갚게 해 달라고 청하였고, 마침내 서쪽으로 大月氏를 공파하였다. 大月氏는 다시 西走하여 大夏의 땅으로 이주하였고, 昆莫은 그 무리를 빼앗고 그곳에 머물렀다. 군대가 점차 강해져서 單于가 사망하게 되자 다시 匈奴에 入朝하지 않으려 하였다.”라고 되어 있어 『史記』 「大宛列傳」과는 내용을 달리하고 있다. 그런데 앞서 지적했듯이 『漢書』을 믿는다면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이 재구성될 것이다. 즉, 처음에 月氏가 烏孫을 격파하여 昆莫, 즉 어린 太子가 흉노에 망명하였고, 후일 月氏가 匈奴의 공격을 받아 西遷하여 塞(Saka)을 공격하자 塞은 南走했고 月氏가 그 땅을 차지했다. 그런데 昆莫이 장성하여 匈奴의 지원을 받아 大月氏를 공격했고, 이에 大月氏는 西走하여 大夏의 땅으로 이주하고 烏孫이 대신 그 지역을 차지한 것이다.
- 각주 006)
- 각주 007)
색인어
- 이름
- 장건, 장건, 장건
- 지명
- 대하,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