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정(相單程)의 노략을 막고 이사(夷司)를 설치한 뒤 여러 만이가 평정됨
광무제(光武帝)가 중흥하였을 때 무릉의 만이들이 갑자기 번성하였다.주 001건무(建武) 23년(47) 정부(精夫), 상단정(相單程) 등이 좁고 험악한 지형에 의지하여 군현을 크게 노략질하였다. 이에 무위장군(武威將軍)주 002
유상(劉尙)
주 003을 보내 남군(南郡), 장사(長沙), 무릉(武陵)에서 병사 만 여인을 징발하여, 배를 타고 원수(沅水)
주 004를 거슬러 무계(武谿)
주 005에 들어가 이들을 공격하였다. 유상은 적을 가벼이 여겨 깊고 험한 곳으로 들어가자, 산이 깊고 물 흐름이 빨라 배들이 더 나아갈 수 없었다. 만씨(蠻氏)주 006들은 유상이 식량이 적고 멀리 들어왔으며, 또 길을 잘 모른다는 것을 알고, 끝까지 험악한 지역에 모여 방어하였다. 유상이 식량이 떨어져 철군하자, 만들은 길을 따라가며 싸움을 걸었다. 유상의 군대는 크게 패하여 모두 수몰되었다. [건무(建武)] 24년(48) 상단정 등이 임원(臨沅)
주 007에 쳐들어 오자, [朝廷에서는] 알자(謁者)주 008
이숭(李嵩),주 009중산 태수(中山太守) 마성(馬成)
주 010
각주 010)
을 보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듬해 봄주 011에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주 012馬成: 南陽 棘陽人으로 縣吏에서 출발하여 光武帝가 潁川을 장악하고 있을 때 그 휘하로 들어가, 주로 江淮지역과 西北邊의 토벌에 참여하여 光武帝정권의 안정에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平舒侯로 봉해졌는데, 建武14년 北邊의 안정을 도모하여 현재 河北省 定縣에 위치한 中山太守로 보임하였는데, 建武 24년 갑자기 남쪽 武陵蠻의 토벌에 투입되었으나 별 공이 없었다. 『後漢書』 卷22 「馬成傳」에 立傳되어 있다. 갑자기 蠻夷지역과 별 관계가 없는 謁者 李崇과 馬成을 함께 파견한 것은 당시 특별한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각주 012)
중랑장(中郞將)주 013
유광(劉匡), 마무(馬武), 손영(孫永)
주 014등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임원에 이르러 이들을 격파하게 하였다. 단정 등은 굶주려 항복을 청하였다. 마침 마원이 병들어 죽자, 알자 종균(宗均)
주 015伏波將軍 馬援: 伏波將軍은 常置되어 고정된 임무가 맡는 관직이 아니라, 파견된 將軍府의 위상을 나타내는 雜號將軍이었다. 漢武帝 元鼎 5년(전112) 南越王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路博德을 처음으로 伏波將軍으로 임명하였다. 光武帝 建武 17년 徵側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虎賁中郞將 馬援을 伏波將軍으로 임명하여 이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建武 23년 武陵蠻의 반란에 武威將軍 劉尙과 中山太守 馬成이 연이어 출병하였으나 진압에 실패하자, 伏波將軍 馬援은 年老하다는 이유로 만류하는 光武帝를 압박하여 끝내 출병하였지만 도중에 사망하고 만다. 『後漢書』 卷24, 「馬援傳」으로 立傳되어 있다. 특히, 馬援은 자신의 활동을 路博德의 업적과 연관시키고 있어 그가 伏波將軍이라는 칭호의 계승자임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伏波將軍이 고정된 임무가 부여된 것은 아니지만 南越, 南蠻를 평정하는 장군으로서의 의식과 전통이 계승되는 것으로 보인다.
각주 015)
이 항복을 모두 받아들였다. 이들을 위해 이사(吏司)주 016를 설치하자 여러 만들이 마침내 평정되었다.宗均: 원문에는 ‘宗均’이라 되어 있으나, 『後漢書』 권41에서는 ‘宋均’이라는 이름으로 열전에 수록되어 있으며, 『後漢紀』에서도 ‘宋均’으로 적고 있다. 이에 대해 『資治通鑑』 胡三省注에서는 宋均의 원래 성은 ‘宗’으로 ‘宋’이라고 한 것은 잘못 전해진 채로 기록된 것이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41에 立傳되어 武陵蠻 토벌과정과 宋均의 활동이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宋均은 원래 中書謁者로 있을 때 武威將軍 劉常이 武陵蠻에게 위기에 처하자, 이를 구하기 위해 江夏에서 軍士를 징집하는 임무를 띄고 파견되었다. 나중에 馬援이 출병하였을 때는 監軍으로 동행하였다. 馬援 역시 현장에서 사망하자, 나머지 장군들과 군사를 수습하고 허위로 伏波司馬 呂種을 沅陵令으로 임명하여 가짜 詔書를 가지고 蠻夷에 들어가 은혜와 신뢰를 보이니, 蠻夷들이 자신의 君長을 베고 항복하였다고 한다. 宋均은 이를 받아들이고, 이어서 황제에게 허위로 詔書를 꾸민 것에 대해 죄를 청하여 용서를 받았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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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0)
馬成: 南陽 棘陽人으로 縣吏에서 출발하여 光武帝가 潁川을 장악하고 있을 때 그 휘하로 들어가, 주로 江淮지역과 西北邊의 토벌에 참여하여 光武帝정권의 안정에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平舒侯로 봉해졌는데, 建武14년 北邊의 안정을 도모하여 현재 河北省 定縣에 위치한 中山太守로 보임하였는데, 建武 24년 갑자기 남쪽 武陵蠻의 토벌에 투입되었으나 별 공이 없었다. 『後漢書』 卷22 「馬成傳」에 立傳되어 있다. 갑자기 蠻夷지역과 별 관계가 없는 謁者 李崇과 馬成을 함께 파견한 것은 당시 특별한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 각주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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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2)
伏波將軍 馬援: 伏波將軍은 常置되어 고정된 임무가 맡는 관직이 아니라, 파견된 將軍府의 위상을 나타내는 雜號將軍이었다. 漢武帝 元鼎 5년(전112) 南越王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路博德을 처음으로 伏波將軍으로 임명하였다. 光武帝 建武 17년 徵側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虎賁中郞將 馬援을 伏波將軍으로 임명하여 이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建武 23년 武陵蠻의 반란에 武威將軍 劉尙과 中山太守 馬成이 연이어 출병하였으나 진압에 실패하자, 伏波將軍 馬援은 年老하다는 이유로 만류하는 光武帝를 압박하여 끝내 출병하였지만 도중에 사망하고 만다. 『後漢書』 卷24, 「馬援傳」으로 立傳되어 있다. 특히, 馬援은 자신의 활동을 路博德의 업적과 연관시키고 있어 그가 伏波將軍이라는 칭호의 계승자임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伏波將軍이 고정된 임무가 부여된 것은 아니지만 南越, 南蠻를 평정하는 장군으로서의 의식과 전통이 계승되는 것으로 보인다.
- 각주 013)
- 각주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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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5)
宗均: 원문에는 ‘宗均’이라 되어 있으나, 『後漢書』 권41에서는 ‘宋均’이라는 이름으로 열전에 수록되어 있으며, 『後漢紀』에서도 ‘宋均’으로 적고 있다. 이에 대해 『資治通鑑』 胡三省注에서는 宋均의 원래 성은 ‘宗’으로 ‘宋’이라고 한 것은 잘못 전해진 채로 기록된 것이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41에 立傳되어 武陵蠻 토벌과정과 宋均의 활동이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宋均은 원래 中書謁者로 있을 때 武威將軍 劉常이 武陵蠻에게 위기에 처하자, 이를 구하기 위해 江夏에서 軍士를 징집하는 임무를 띄고 파견되었다. 나중에 馬援이 출병하였을 때는 監軍으로 동행하였다. 馬援 역시 현장에서 사망하자, 나머지 장군들과 군사를 수습하고 허위로 伏波司馬 呂種을 沅陵令으로 임명하여 가짜 詔書를 가지고 蠻夷에 들어가 은혜와 신뢰를 보이니, 蠻夷들이 자신의 君長을 베고 항복하였다고 한다. 宋均은 이를 받아들이고, 이어서 황제에게 허위로 詔書를 꾸민 것에 대해 죄를 청하여 용서를 받았다.
- 각주 016)
색인어
- 이름
- 광무제(光武帝), 상단정(相單程), 유상(劉尙), 유상, 유상, 유상, 유상, 상단정, 이숭(李嵩), 마성(馬成), 마원(馬援), 유광(劉匡), 마무(馬武), 손영(孫永), 단정, 마원, 종균(宗均)
- 지명
- 무릉, 남군(南郡), 장사(長沙), 무릉(武陵), 원수(沅水), 무계(武谿), 임원(臨沅), 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