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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비조강본궁을 짓고 길야궁도 만듦 / 고구려, 백제, 신라가 사신을 보냄

이 해에 비조강본(岡本;오카모토)에 새로 궁전 지을 터주 001
번역주 001)
서명천황의 岡本宮이 있었던 곳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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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정하였다. 이때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사신을 파견하여 조를 바쳤다. 그래서 감색 장막주 002
번역주 002)
『養老令』 軍防令 備戎具條에서 「凡兵士. 每火. 紺布幕一口.」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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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궁전 터에 치고 향응을 베풀었다. 마침내 궁전을 세우고 천황이 옮겨갔다주 003
번역주 003)
제명천황 4년 11월조에서는 ‘궁전을 조영하는 장정’이라고 적고 있으므로 이후 여러 해 동안 궁전 조영이 계속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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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 후비조강본궁(後飛鳥岡本宮;노치노아스카노오카모토노미야)이라 불렀다주 004
번역주 004)
『日本書紀』에서는 서명천황을 飛鳥岡本宮天皇, 제명천황을 後飛鳥岡本宮天皇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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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신령(田身嶺;타무노미네)주 005
번역주 005)
多武峰은 현재 奈良縣 櫻井市 남쪽에 있는 산이다. 『日本書紀』 지통천황 7년 9월조에서는 ‘多武嶺’이라고 적고 있다. 제명천황대의 토목 공사 기사는 왜국이 당의 침공에 대비해 아스카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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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정상에 담주 006
번역주 006)
『日本書紀』에서 산에 돌로 담을 쌓은 사례로는 天智天皇 6년 11월 是月條의 ‘倭國高安城’, 동 천황 4년 8월조의 長門國의 성, 筑紫國의 大野城과 椽城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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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둘러쳤다[田身은 산 이름이다. 타무(大務)라고 읽는다.]. 또 산의 정상에 있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槻樹] 근처에 높은 망루주 007
번역주 007)
원문은 觀이다. 외부나 먼 곳을 보기 위해 宮門의 좌우에 설치한 높은 대이다. 觀을 道觀, 즉 도교의 사원으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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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세우고, 양규궁(兩槻宮;후타츠키노미야)주 008
번역주 008)
『大和志』에서는 ‘多武峰의 서북쪽에 根槻(네츠키)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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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불렀다. 또한 천궁(天宮;아마츠미야)주 009
번역주 009)
도교사상에 의거한 命名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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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도 불렀다. 당시 (천황은) 토목 공사를 좋아하여 수공(水工)에게 수로를 파게 하였다. 수로는 향산(香山;카구야마)의 서쪽에서 석상산(石上山;이소노카미노야마)주 010
번역주 010)
山邊郡 石上鄕(현재 奈良縣 天理市 石上町) 부근의 산이라는 설과 飛鳥 주변의 산이라는 설이 있다. 『日本書紀』 履中天皇 4년 10월조에 보이는 「堀石上溝.」라는 기사는 제명천황대의 사실을 소급하여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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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렀다. 석상산의 돌을 2백 척의 배에 싣고 강을 따라 내려가 궁전의 동쪽 산으로 운반하여 돌을 쌓아 담을 만들었다주 011
번역주 011)
平成 4년(1992) 奈良縣 高市郡 明日香村 大字岡의 酒船石遺蹟이 있는 구릉 중턱에서 砂巖을 잘라 4단으로 쌓아 올린 돌담이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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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사람들이 “미친 수로다. 이것을 만드는 데 인부주 012
번역주 012)
공사에 동원된 인부가 3만 혹은 7만이라는 말은 延人員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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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여 명이 고생하였으며, 담장을 쌓느라고 인부 7만여 명이 고생하였다. 궁전 짓는 데 쓸 목재가 썩고 산의 정상이 훼손되었다.”라고 비난하였다. 또 “돌로 담을 쌓더라도 쌓자마자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라고 저주하였다[계획한대로 완성하기 전에 이러한 비방을 한 것이 아닐까.]. 또 길야궁(吉野宮;요시노노미야)주 013
번역주 013)
『日本書紀』 應神天皇 19년 10월조, 雄略天皇 2년 10월조와 同 4년 8월조 등에 ‘吉野宮行幸’에 관한 기사가 보인다. 奈良縣 吉野郡 吉野町 宮瀧의 吉野川 우측 대지 위에서 7세기 후반의 건물과 정원 유적이 출토되어 길야궁의 유력한 후보지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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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만들었다. 서해사(西海使)주 014
번역주 014)
이 기사와 제명천황 3년 시세조에서는 백제에 파견된 사신을 ‘서해사’라고 부르고 있지만, 효덕천황 백치 원년 7월조에서는 당에 파견한 사신 중에서 북로, 즉 한반도를 경유한 사신을 ‘西海使’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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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백련고승(佐伯連栲繩;사헤키노무라지타쿠나와)주 015
번역주 015)
여기에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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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계가 빠졌다.], 소산하(小山下)주 016
번역주 016)
大化 5년(649)에 제정한 관위 19계 가운데 제14위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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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길사국승(難波吉士國勝;나니하노키시쿠니카츠)주 017
번역주 017)
『日本書紀』 皇極天皇 원년(642) 2월조에 백제에 파견된 國謄吉士水鷄와 관련이 있다는 설과 무관하다는 설이 있다. 『日本書紀』 皇極天皇 원년 2월조 國謄吉士水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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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백제주 018
번역주 018)
백제는 제명천황이 등극하자마자인 665년 7월에 왜국에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이에 대한 답사가 파견된 기사는 보이지 않지만, 佐伯連栲繩 등이 백제에서 귀국하는 기사가 보이므로 이들은 적어도 655년 7월 이후부터 제명천황 2년(656) 사이에 파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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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돌아와 앵무새한 쌍을 바쳤다주 019
번역주 019)
『日本書紀』 효덕천황 大化 3년 시세조에는 신라가 공작새와 앵무새 각기 한 쌍을 보낸 기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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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본궁(岡本宮;오카모토노미야)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 번역주 001)
    서명천황의 岡本宮이 있었던 곳이라는 설이 유력하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養老令』 軍防令 備戎具條에서 「凡兵士. 每火. 紺布幕一口.」라고 적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제명천황 4년 11월조에서는 ‘궁전을 조영하는 장정’이라고 적고 있으므로 이후 여러 해 동안 궁전 조영이 계속된 것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日本書紀』에서는 서명천황을 飛鳥岡本宮天皇, 제명천황을 後飛鳥岡本宮天皇이라고 불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多武峰은 현재 奈良縣 櫻井市 남쪽에 있는 산이다. 『日本書紀』 지통천황 7년 9월조에서는 ‘多武嶺’이라고 적고 있다. 제명천황대의 토목 공사 기사는 왜국이 당의 침공에 대비해 아스카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보기도 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日本書紀』에서 산에 돌로 담을 쌓은 사례로는 天智天皇 6년 11월 是月條의 ‘倭國高安城’, 동 천황 4년 8월조의 長門國의 성, 筑紫國의 大野城과 椽城을 들 수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원문은 觀이다. 외부나 먼 곳을 보기 위해 宮門의 좌우에 설치한 높은 대이다. 觀을 道觀, 즉 도교의 사원으로 보기도 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大和志』에서는 ‘多武峰의 서북쪽에 根槻(네츠키)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고 적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9)
    도교사상에 의거한 命名일 가능성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0)
    山邊郡 石上鄕(현재 奈良縣 天理市 石上町) 부근의 산이라는 설과 飛鳥 주변의 산이라는 설이 있다. 『日本書紀』 履中天皇 4년 10월조에 보이는 「堀石上溝.」라는 기사는 제명천황대의 사실을 소급하여 기록한 것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11)
    平成 4년(1992) 奈良縣 高市郡 明日香村 大字岡의 酒船石遺蹟이 있는 구릉 중턱에서 砂巖을 잘라 4단으로 쌓아 올린 돌담이 발굴되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2)
    공사에 동원된 인부가 3만 혹은 7만이라는 말은 延人員을 가리킨다.바로가기
  • 번역주 013)
    『日本書紀』 應神天皇 19년 10월조, 雄略天皇 2년 10월조와 同 4년 8월조 등에 ‘吉野宮行幸’에 관한 기사가 보인다. 奈良縣 吉野郡 吉野町 宮瀧의 吉野川 우측 대지 위에서 7세기 후반의 건물과 정원 유적이 출토되어 길야궁의 유력한 후보지로 꼽히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4)
    이 기사와 제명천황 3년 시세조에서는 백제에 파견된 사신을 ‘서해사’라고 부르고 있지만, 효덕천황 백치 원년 7월조에서는 당에 파견한 사신 중에서 북로, 즉 한반도를 경유한 사신을 ‘西海使’라 부른다.바로가기
  • 번역주 015)
    여기에만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16)
    大化 5년(649)에 제정한 관위 19계 가운데 제14위에 해당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7)
    『日本書紀』 皇極天皇 원년(642) 2월조에 백제에 파견된 國謄吉士水鷄와 관련이 있다는 설과 무관하다는 설이 있다. 『日本書紀』 皇極天皇 원년 2월조 國謄吉士水鷄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18)
    백제는 제명천황이 등극하자마자인 665년 7월에 왜국에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이에 대한 답사가 파견된 기사는 보이지 않지만, 佐伯連栲繩 등이 백제에서 귀국하는 기사가 보이므로 이들은 적어도 655년 7월 이후부터 제명천황 2년(656) 사이에 파견된 것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19)
    『日本書紀』 효덕천황 大化 3년 시세조에는 신라가 공작새와 앵무새 각기 한 쌍을 보낸 기사가 보인다.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난파길사국승
지명
비조, 강본, 전신령, 향산, 석상산, 석상산, 좌백련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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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조강본궁을 짓고 길야궁도 만듦 / 고구려, 백제, 신라가 사신을 보냄 자료번호 : ns.k_0040_003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