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사대문궤

성지(聖旨)에 따라 요새를 설치하여 침범을 방어하고 군대를 조련하는 등에 관하여 조선국왕이 경략병부(經略兵部)에 보낸 자문(咨文)

17. 本國査報修險運粮練兵仍開胡沈二官勞積咨
  • 발신자
    조선국왕
  • 발송일
    1594년 2월 18일(음)(만력 22년 2월 18일)
발신: 조선국왕
사유: 험지를 수리하고 군량을 운반하며 병사를 훈련시키는 등의 일입니다.
 
[조선국왕] 의정부(議政府) 좌의정(左議政) 윤두수(尹斗壽)의 장계를 받았습니다.
[윤두수] 신이 광해군(光海君)을 수행하여 전주부(全州府)에 도착했습니다. 곧바로 호조판서(戶曹判書) 한준(韓準), 병조판서(兵曹判書) 이항복(李恒福), 공조판서(工曹判書) 김명원(金命原)으로 하여금 응당 시행해야 할 일들을 일자를 당겨 완료하게 하고, 신은 바로 경상도 일대로 가서 밤을 지새우며 독려했습니다. 올해 정월, 각기 다른 날짜에 김명원 (등)이 각각 올린 정(呈)을 차례대로 받았습니다.
[김명원] 요새를 설치하는 사안만은 왜적이 여전히 변경에 머물러 있는 탓에 단지 내지[腹裏]에 있는 곳만 적절히 헤아려 수축하여 복병(伏兵)을 설치하였고, 그 나머지 군량과 조련 등의 사안은 한준과 이항복이 또한 모두 조악하게나마 완료했다고 고해 왔습니다.
[윤두수] 이를 받고 이제 각 관원이 올린 정(呈)의 사안들은 뒤에 열거해 두었습니다. 이에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
하나. 호조판서 한준으로 하여금 경략병부의 위관(委官)인 참장(參將) 호택(胡澤)과 경력(經歷) 심사현(沈思賢)의 분부를 준행하여 검찰사(檢察使) 이산보(李山甫) 등과 함께 전라도와 충청도 그리고 경상도의 안동부(安東府)‧영천군(榮川郡)‧봉화현(奉化縣)의 말먹이와 군량을 날마다 운반하여 각 영에서 쓰게 했습니다. 인력이 조잔하고 세량(稅粮)으로 낼 것도 부족하여 간신히 공급하였을 뿐, 쌓아 두지는 못했습니다.
하나. 병조판서 이항복으로 하여금 위관인 참장 호택과 경력 심사현의 분부를 준행하여 도순찰사(都巡察使) 권율(權慄) 등과 함께 조선군[麗兵]을 선발하였으며, 총병 유정의 군전에 보내고 (다시) 각 영으로 나누어 파견하여 조련하고 가르치게 했더니 요즘 기초적인 제식 동작에는 날로 법도가 잡혀 가고 있습니다.
하나. 공조판서 김명원으로 하여금 위관인 참장 호택과 경력 심사현을 따라서 경주(慶州)‧전주(全州)‧남원(南原) 등처로 가서 성곽을 수축하고 망루(望樓)‧적대(敵臺)를 추가로 설치하였으며 또 해자를 새로 팠습니다. 삼가(三嘉)‧팔거(八莒) 등처에는 험지에 의거하여 영채를 세웠습니다. 또 조령(鳥嶺)‧죽령(竹嶺)‧소조령(小鳥嶺)‧추풍령(秋豐嶺)의 각처에는 적대를 설치했습니다. 인력이 충분하지 못해서 관성(關城)을 겹겹이 쌓지는 못하고 단지 매복할 군병을 설치하여 좁은 목[隘口]을 차단하였습니다. 각기 설치할 방수(防守)에 쓸 병기(兵器)와 화포(火砲)는 본조(本曹)주 001
각주 001)
여기서 본조(本曹)는 공조(工曹)이다. 본 문서에서 최흡은 공조정랑으로 나타나지만, 『선조실록』에는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나타난다. 『宣祖實錄』 卷45, 宣祖 26年(1593) 閏11月 戊戌(18日).
닫기
의 정랑(正郎) 최흡(崔洽) 등과 함께 재료를 수습하여 힘을 다해 두들겨 만들고 이미 군전으로 날라 두어서 적절히 사용하게 했습니다.
하나.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의 장관(將官)주 002
각주 002)
아래에서 백사림은 김해부사(金海府使), 김태허는 울산군수(蔚山郡守)임이 확인된다.
닫기
백사림(白士霖)‧김태허(金太虛)주 003
각주 003)
원문에는 ‘김대허(金大虛)’로 표기되어 있으나 ‘김태허(金太虛)’를 지칭한다.
닫기
에게 명령을 전(轉)하여 모두 병부(兵部) 자문 안의 뜻과 위관인 참장 호택과 경력 심사현의 분부를 준행하여, 좌도의 왜적 주둔지인 울산(蔚山)‧동래(東萊)‧기장(機張)‧부산포(釜山浦)‧서생포(西生浦)‧임랑포(林郎浦)와 우도의 창원(昌原)‧김해(金海)‧거제(巨濟)‧웅천(熊川) 등처에 재주가 좋고 똑똑한 사람들을 나누어 파견하여 다량의 면사첩(免死帖)을 가지고 걸인의 행색으로 분장시켜 적영(賊營)에 몰래 들어가 본국의 위협을 받아 구류된 남녀를 불러오게 하였는데, 각처에서 전후로 청무인(聽撫人)이 모두 4,156명입니다. 이후에도 되돌아오는 자가 있으면 모두 별도로 무휼(撫恤)을 더하여 초무(招撫)하여 돌아오게 하는 길을 넓히도록 하겠습니다.
[조선국왕] 갖추어 온 장계를 받고 조사해 보건대, 앞서 작년 윤11월 초8일에 귀부(貴部)의 자문을 받았습니다.
[송응창] 속국(屬國)을 이미 수복했다는 등의 사안에 대한 병부의 자문을 받았습니다.
[병부] 병부에서 올릴 제(題)에 대한 직방청리사(職方淸吏司)의 안정(案呈)은 다음과 같습니다.
[직방청리사] 본부가 보낸 문서는 경략시랑 송(응창)이 전사(前事)주 004
각주 004)
본 문서의 사안인 ‘爲修險運粮練兵等事’를 가리킨다.
닫기
에 대해 자문한 것이었습니다. 자문에서 말한 것을 보니, 선유한 칙서안에 「배신 윤두수(尹斗壽)와 윤근수(尹根壽)를 아울러 오로지 독려하게 하고 광해군 성(姓) 휘(諱)를 도와서 전라도와 경상도로 나가 머물면서 총독(總督)하게 하며, 호조판서 한준, 병조판서 이항복, 공조판서 김명원과 국왕이 전에 군량을 마련하라고 차출했던 이조판서 이산보(李山甫)에게 모두 나누어 관장한 업무를 살펴서 서둘러 군량을 운반하고 군병을 조련하며 요새를 수축하되 기한을 정하여 완성하도록 힘쓰게 하십시오. 만약 배신들이 태만하게 풀어진다면 경략의 추궁을 받을 것입니다.」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살피건대 자문에서 논한 사리가 제(題)로 청할 만합니다. 특별히 엄한 성지를 내리시어 국왕과 배신들을 엄히 독려하여 각기 맡은 직분을 살펴서 말먹이와 군량을 운반하고 병마(兵馬)를 조련하며 무기를 제조하고 험한 요새를 수선하여 제때 헤아려 정돈케 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본부에서 예부로 자문을 보내어 파견한 행인(行人) 사헌(司憲)에게 전(轉)하여 가지고 가서 직접(면전에서) 유시하게 하고 경략 아문에도 자문을 보내어 일체로 알려야 할 것입니다.
[병부] 만력 21년 11월 초3일에 태자태보 본부(병부) 상서 석(石)주 005
각주 005)
석성(石星, 1537~1599)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의 병부상서(兵部尙書)였다.
닫기
이 갖추어 아뢴 제에 대한 성지(聖旨)를 받들었습니다.
[만력제] 그리하라. 그 의논한 바는 즉시 행인을 파견하여 조선왕에게 직접 유시하여 책임지고 성취하게 하라. 주본(奏本) 안에 거론된 왕자‧배신들은 전라도 등을 독솔하여 무기를 대대적으로 수선하고 다시 방어에 힘쓰라. 우리 군대가 철수한 뒤로 다시 청한 것은 따르지 말라.
[병부] 이와 같이 공경히 받들어 자문을 갖추어 보냅니다.
[송응창] 이에 마땅히 자문을 보내니, 번거롭더라도 본부에서 올린 제에 대해 받든 명지(明旨)의 사리를 살펴서 해당 관할 배신으로 하여금 공경히 준행하게[欽遵] 하십시오.
[조선국왕] 이를 받고, 이어서 그달 12일에 흠차행인사행인 사헌이 본국에 와서 앞의 성지를 직접 유시하였으니, 당직(當職)은 각 배신들과 더불어 공경히 듣고서 간절한 마음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즉시 못난 자식 광해군으로 하여금 전라도 지역에 가서 여러 사무를 총관하게 하고 이어서 호조판서 한준, 병조판서 이항복, 공조판서 김명원으로 하여금 경상도 등처로 달려가서 해당 업무를 나누어 관장하게 하였으며, 모두 위관인 참장 호택과 경력 심사현의 분부를 듣게 했습니다. 또 의정부 좌의정 윤두수로 하여금 오가면서 아울러 감독하여 태만히 이완되어 일을 그르치지 못하게 하고, 일이 완료되어 각기 맡은 해당 사무가 모두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마땅히 연유를 속히 회품(回禀)하여 이를 근거로 자문으로 보고하고자 했습니다. 그 뒤로 이번에 위의 자문을 받고 살펴보니 귀부에서 소방이 잔파되어 능히 스스로 지킬 수 없음을 깊이 유념하여 위관을 뽑아서 파견하였으며, 형세를 직접 조사하게 하고 이어서 요새를 설치하여 침범을 방어하게 했습니다. 또 군대를 조련시키는 등의 일도 아울러서 거행하게 하셨습니다. 제를 전(轉)하여 받든 성지에 이르러서는 선유한 바가 엄하고도 간절하였고 모두 왜적을 막는 급무였으니, 귀부(貴部)에서 가르쳐 주시는 은혜를 보답하고자 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작년 4월에 왜적이 도성에 있을 때, 그 세력이 바야흐로 치성하였으나 참장 호택과 경력 심사현은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호랑이 굴을 드나들면서 이해(利害)를 펼쳐 말해서 왜적의 무리를 퇴각시켰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또다시 변방[荒遐]에 와서 추위와 더위를 번갈아 겪어 가면서 각각의 사안을 직접 분부하고 감독하니 그들의 현저한 공적은 더욱 마땅히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번거롭더라도 바라건대, 귀부에서는 그 두 관원에게 특별히 표창하고 격려하기를 더해 주십시오. 부지런한 노고를 낱낱이 알리고자 감히 사실대로 갖추어 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마땅히 자문을 보내니
청컨대 살펴 주십시오. 자문이 잘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이 자문을 경략병부에게 보냅니다.
 
만력 22년 2월 18일.

  • 각주 001)
    여기서 본조(本曹)는 공조(工曹)이다. 본 문서에서 최흡은 공조정랑으로 나타나지만, 『선조실록』에는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나타난다. 『宣祖實錄』 卷45, 宣祖 26年(1593) 閏11月 戊戌(18日). 바로가기
  • 각주 002)
    아래에서 백사림은 김해부사(金海府使), 김태허는 울산군수(蔚山郡守)임이 확인된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원문에는 ‘김대허(金大虛)’로 표기되어 있으나 ‘김태허(金太虛)’를 지칭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4)
    본 문서의 사안인 ‘爲修險運粮練兵等事’를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05)
    석성(石星, 1537~1599)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의 병부상서(兵部尙書)였다.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성지(聖旨)에 따라 요새를 설치하여 침범을 방어하고 군대를 조련하는 등에 관하여 조선국왕이 경략병부(經略兵部)에 보낸 자문(咨文) 자료번호 : sdmg.k_0002_0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