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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산업유산, 왜곡의 현장과 은폐된 진실

김성수

살인 폭탄이 터졌니
김성수 | 1943년 미쓰비시 나가사키조선소로 강제동원 | 2007.3.29. 구술
김성수 씨는 1925년생으로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에서 태어났고, 남해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일본으로 건너와 1938년부터 오무타의 과자점인 삼우당(三友堂)에서 일하며 야간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1943년 8월, 나가사키조선소로 징용되었고 일본인과 함께 일본에 살던 조선인 300명 정도가 동원되었습니다. 기바치기숙사에 들어가 1개월 동안 정신교육과 군사훈련을 받고 철판 접합부에 구멍을 뚫고 구운 압정을 박아 넣는 리벳(rivet) 작업을 했습니다. 그러다 몸이 안 좋아서 현도공(lofted drawing)으로 배치되었습니다. 한반도 북부에서 1,500명 정도가 대량으로 나가사키조선소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마루야마기숙사로 옮겨졌습니다. 8월 9일 원폭이 투하되어 일본이 항복할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한국 삼천포로 가는 배에 3명이 타고 돌아왔습니다.
 
『내 몸에 새겨진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강제동원 피해자의 원폭체험』,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2008, 296~317쪽
 
 
김성수(金成洙)_남. 85세.
 
  • 일자
  • 내용
  • 1925.11.14.
  • 경남 산청군 시천면 천평리에서 출생.
  • 1943.8.
  •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 소재 미쓰비시(三菱)중공업 나가사키(長崎)조선소로 동원됨.
  • 1945.8.
  • 해방 후 귀국.



어르신 본적은 경남 남해였네요?


예. 남해 거서 지금은 초등학교제. 그때 내가 다닐 때는 보통학교거든. 3월 20일인가 졸업을 하고, 일본 오무타(大牟田)로 갔습니다.


오무타로 가셨어요?


예. 그기 과자집이거든. 삼우당(三友堂)이라고 과자집인데, 그 집이 오무타시내에서는 과자집으로서는 최고 컸어요.


학교에서 추천을 받으신 건가요?


학교서 추천을 받은 게 아이고, 내 선배 한 분이 자기 외삼촌이 오무타 시에 과자집에 있었어. 이 집이 아이고 다른 집에 있었는데. 이 사람이 일로 부지런히 하고 양심적으로 해놓으니깐‘우리집에도 니 같은 아 하나 좀 구해주라’이래 됐는기라, 삼우당주인이. 그리 선배가 낼로 추천을 한기라. 추천해놓으니깐, 일본에서 바로 초청을 허면 즉시에 일본에 들어갔어요.


그땐 맘대로 못 들어가죠?


그땐 저 여행증이라고 있어가지고, 그기 없으면 연락선 안 태워줬어요. 그래 안하면 뭐 어선이나 이런 거 타고 밀항했지, 정식으로는 못 들어갔다고. 그래 가지고서 졸업하고 집에 열흘도 없었어. 4월 며칟날 내가 일본을 오무타에….


몇 년 정도가 될까요? 그 해는?


내가 25년생이니깐, 어~ 31년이가? 6년이니깐… 아이다. 어허허. 여덟 살에 학교를 들어가서 6년 졸업하고 나왔으니깐, 내가 열네 살 땐가베.


그럼 1938년이 되겠네요? 어르신 혼자서 가신 거예요?


같이 거 가가지고. 그 집에 들어간 동기가, 그 집에 규칙이 어떻게 돼가 있나하면, 일단 과자집에 딱 들어가면은 점방에서 3~4년을 근무를 해야 돼. 왜 그러냐 하면은 그때는 좀 돈 있는 사람들은 전화만 하면 자전차로 배달로 해줬어요. ‘무슨 과자 천원, 십원어치 가 오이라’이러면 딱 해가지고 그 집에 배달을 해줘요. 이랬는데….


배달을 해줘요?


내는 거서 왜 빠졌나 하면, 한국에서 일본말 배웠다 아닙니까.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는데 첫 번째 일본을 딱 들어가노니깐, 암만 한국에서 일본말로 배웠지만은 일본사람 그치는(같이는) 능숙 안 했단 말입니다. 안 하제, 또 지방도 잘 모르제.


그렇지요. 지리를 모르니깐.


모르제. 그 점방의 위신 문제다 이래가지고, 주인이 공장에다 바로 내를여줬는기라.‘ 공장에가서3년일하다가능숙하면, 점방나와서한3년근무를해라’이래됐는기라.


그 공장에서는 과자를 구워내는 거예요?


예. 공장에 직원들이 한 15명이 있었어. 아~ 컸어요. 그때 규모로서는 참 컸습니다. 그래가 거 들어가서 인자 만날 그릇 씻고, 과자 굽고 하는기제. 첫번째 들어간 놈이 뭐 있어? 청소하고 이러니깐 한 일년…. 내가 집이 있나 뭐가 있나. 한 달에 첫 공일하고 셋째 공일하고 놀았거든요. 놀아도 일본에 있는 아들(아이들)은 전부 저그집에 다 갔부는기라. 내 혼자 남아요. 어허허허. 내 혼자 남아가지고서 밥 먹고 이러는데. 그때 내가 하루 놀면 돈을 50전쓱 줬어. 50전, 그때 돈으로. 요시(지금의) 500원짜리지. 그걸 받으면 아침밥 먹고 인자 극장에 가는기야. 극장에 가면 조조할인, 할인이 있어. 조조할인이 있어가지고 50전그트면, 10전이면 들어가는기라. 그러면 그것보고 나오면 점심때 되면 우동집에 가서 우동 사 먹으면, 한 10전이나. 그러면 한 30전 남아요. 그것가지고 또 용돈도 하고.


용돈도 하고?


그래가 한 일년 하니깐, 나는 뭐 아무 잡념도 안 가지고 딱 부지런히만 했거든. 열심히 했어요. 어데 갈 때가 있나 뭐 이라니깐, 우리 주인이 참 내를 잘 봤는기라. 부지런하다고. 꾀도 안 내제 이라니깐.
그러자 저 파라오(팔라우)라고, 저~ 남방에 파라오 군도라고 있습니다. 아실란가 모르지만. 파라오 군도에 영사관이 있었는데 그 영사가 우리집에 와가지고 과자를 사가지고 갔는기라요. 카스테라만쥬라 카는 과자를 사가 갔는데. 그래가 돈만 주고가고 부쳐달라 했는기라, 우편으로. 그니깐 그때는 배로 갔거든. 배로 가니깐 한달 갔단 말입니다. 갔는데 받아보니깐 바로 여서 구운 과자와 거서 받아먹는 과자가 똑 맛이 같다고 편지가 왔더라고. 편지가 오니깐 우리 주인이 딱 받아보고 공장 가 왔더라고. 편지로.


공장에 가지고 왔더라고요? 편지를?


이런 편지가 왔다. 이거는 누구 공이 아니라 내가 과자로 딱 정식으로 구웠기 때문에 이게 변질이 안 됐다. 그래가지고서 그때 돈 1원, 월급 담달부터 올리주드란께. 첫 번째 가서 내가 4원 받았거든. 4원 받았는데 5원 받다가 나중에 그 특별 보너스로 1원 더 붙여가 6원 받았어.


돈 받은 거 집에다 부치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집에 부쳤어요.


집에 부쳤어요? 집은 뭐 하고 계셨어요?


농사지었는데, 우리 소농하지.


그래도 학교도 보내주시고 하셨네요?


그러니깐 근근이 밥은 먹었지요. 하하하.


어르신 형제분들은 어떻게 되세요?


4형제.


4형제 중에 어르신은 몇 번째에요?


두 번쨉니다.


큰형님은 그때 당시에는?


그때 일본 탄광에 왔더라고. 첫 번째는 징용을 안 오고 모집으로 왔더라고. 그기 한 전쟁났을 무렵에.


그러면 어르신이 과자집에 가고 난 다음에 온 거네요? 전쟁나고 나서?


예. 편지가 왔는데… 그래가[형님이] 지리를 잘 모르니깐 내가 가니깐, 탄광에 노무과장이 있더라고. 노무과장이 있음도록 내를 딱 보더니 저그 회사에 있자 그기라. 그 개인 탄광이라. 이래 큰 주식[회사] 아이고 개인 탄광인데, 노무과장이 내를 보고‘내하고 같이 일함서로(일하면서) 한국에 가서 종업원도 모집해오고 같이 있자’는 기라.


어르신을 그렇게 스카우트 하려고 그랬네요?


그래 돼갖고. 그때 내는 그기 문제가 아이라, 형님 보러 갔는데. 허허허. [형님을] 빼가 올라고.


빼내오려는 판인데?


예예. 내가 있을 수 있나요. 그래 안 한다 거든. 그래가 형님 빼돌렸제.


그 탄광은 조그만 탄광이었어요?


조그만한 탄광이요.


탄광 이름은 기억 안 나세요?


그때 그 이름은 내가 기억이 잘 안 납니다. 그래가 여서 오도록 해 가지고서, 기차를 타고 오도록 이래 했어요.


그럼 그 탄광은 후쿠오카(福岡縣)에 있는 건가요? 구마모토(熊本縣)에 있는 탄광이에요?


사가(佐賀縣).


사가현에?


예. 그래 있는데, 한 일년 남짓 하니깐 주인이 낼로 부르더라고. 부르는데‘니 야간중학에 가서 공부를 좀 하면 어떻겠노’이라더라고.


그건 형님 만나러 가기 전 얘기에요? 형님이 일본에 왔다는 얘기 듣기 전에?


예. [과자집에 간지] 일년 지내고서. 그래‘야간 중학교 가서 공부 좀 하면 어떻겠노’이래. 어이구~ 거 얼매나 고마운지, 가겠다 지. 가겠다카니깐, 그래 야간중학교를…. 우리집 주인이 그 오무타시 상공회의소 회장을 한 분입니다.


그 사람 이름 혹시 아세요?


고무다 가쓰유끼라고, 일본인인데 상공회의소 회장을 했어.


삼우당 제과는 일본말로 어떻게 발음하나요?


‘산유도(三友堂)’. 바로 시청 앞에 있어. 지금 하는가 안 하는가 내가 그걸 모르겠습니다. 그래가 야간에 3년 다녔습니다. 오무타 고등청년학교, 거 3년 다녔어. 그때는 첫 번째 전쟁 일어나가지고는 일본 기세가 좋아가지고, 우리집 주인이 내 한번 부르더라고. ‘니 내가 보르네오 말이지. 보르네오에 설탕공장을 설립할라고 갈 생각이 있는데, 니 따라갈래?’이래 묻더라고. 그래서 가겠다 거든. 그러니 좋다 카드라고. 그랬는데 조금 정비해샀고 했는데, 도로 역전 되는기라. 인자 미영군(米英軍)이 자꾸 반격을 해가 오니깐, 자꾸 막 오히려 요쪽 일본군이 인자 패전이 자꾸 돼가니깐 고마 포기했대요. 포기하고. 설탕이 있어야 과자를 만들제. 그래가 과자공장이 완전히 폐지됐부렀습니다. 설탕이고 뭐, 그때 밀가루가 어디 있노. 그러니깐 일도 없어지자, 인제 징용 영장이 나왔는기라.


학교 다니는 동안에 탄광에도 갔다오셨다면서요?


거는 화학공장에 근로보국대라고 해갖고 학생들이 가서, 석탄 그거 이 곳배에 실어주고 하는.


얼마정도 갔다오셨어요?


일주일. 미쓰이(三井) 화학공장, 그 오무타 시에. 거서 일하는 사람들은, 화학만지는 사람들은 고무장갑을 찌고 있어도 시내 나오면 이 사람들이 손이, 손바닥이 누럽니다. 요시그트면 아주 마~ 공해라 이래가지고서 [회사가] 절단 났을기야. 근데 그때는 그렇게 몰랐는가 우쨌는고 딱 표가 납니다. 화학공장 거게 취업한 사람들은 여 손바닥이 누래요.
나가사키(長崎)역 전경


언제쯤 징용되신 거예요?


어… 45년에 해방됐지요? 43년에.


어르신한테 징용장이 왔어요?


종이가 와. 요만한 종이에 요다 빨간줄이 하나 딱. 그래 가지고서 본적 쓰고 이름 쓰고 이래 가지고서 나가사끼(長崎縣)에, 나가사끼 역에 몇 날 몇 시꺼정 도착해라 카는.


여기에 그럼 본적도 써 있다고 그러는데, 본적은 조선 본적이 써 있어요?


예. 거게. 일본에 있으면 요시 그트면 외사과(外事課)지. 한번 쓱 조사를 옵니다, 경찰서서. 이 사람이 여게 거주를 하나, 잘 근무를 하나 조사를 하러 옵니다. 그때 그기 고등형사과… 일년에 한번 정도 와가지고 조사해가 갑니다. 그니깐 조사 환하제 뭐. 이 사람 본적이 어디다, 지금 어디 있다 카는 걸 알고 있으니깐 딱 저게 나와. 그래가지고 나가사끼 역 광장에 몇 날 몇 시꺼정 도착해라카는 통지가 있었어. 끌고 가는 것도 아이고 내가 차비 내가지고 거 도착해야 돼.


안 가면은 어떻게 되나요?


안 가면, 그때는 붙들리면 총동원령이거든. 총동원령 이래 가지고서 징용을 얼매에, 벌금 얼매. 딱 그기 나오는데.


그게 1943년이라는 걸 어르신은 어떻게 기억하셨어요?


내가 학교 3년 수료하고나자 야간이 없어졌거든. 와 그러냐하면 저녁으로 등화관제를 허고 이래가지고서 전쟁은 이미 안 된다 카는 걸 알고 있었어. 알아요 다. 그때부터는 일본사람들도 대략 말은 안 해도 각오를 한기라. 배급주고 뭐하고. 식량도 다 저거하고. 뭐이 먹을 게 없는데. 사 먹을라 해도 먹을 게 없고.


그래서 그 연도를 기억하시는 거예요?


예. 그래가지고 나가사끼 광장에 딱 모이면 인자 미쓰보시(三菱) 조선소에서 직원들이 나와요. 전부 인솔을 해 가. 인솔 해가지고 시내에 기숙사가 있어. 기숙사가 있는데 집을 어떻게 지었나하면, 과거에 그기 방직 공장이라. 방직 공장인데, 집이 이래가 있으면 중간에다 전부 칸을 메워가지고 1층, 2층을 맨들어가지고. 올라가는 거는 나무로 이래 세워놓고 나무로 하나쓱 못을 박아가지고 타고 올라가게 해놨어. 거서 한달 우리가 교육을 받았어요.


거기 모인 사람들은 다 조선사람이에요? 일본사람이에요?


내가 [교육]받을 때는 그때 조선사람이 300명 갔거든. 1차에.


1차에? 거기 모인 사람들이 조선사람들?


예.


일본사람들도 있었어요?


예. 있었어.


일본사람도 있었는데, 조선사람들만 세어보니 한 300명 정도?


300명. 딱 300명이요.


조선에서 온 사람도 있어요? 아니면 일본에 있던 조선사람들만 모였어요?


인제 이기… 미쓰비시 조선소가 우리 한국사람을 갖다가 징용을 뽑아야 하겠는데, 한국사람들 심리도 모르것제. 에… 교육을 시켜보면 어떻게 있는가. 우리가 저 시험, 시범자라. 그러니깐 일본서 일본말도 좀 능숙하고, 학벌도 조금 있고 이런 사람만 300명을 뽑았어. 전국에서. 구주(九州)에서.


그러면 일본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뽑았던 거네요?


그냥 현지에 일본에 있는 [조선] 사람으로서 300명을 뽑아온기라. 그래 한 달로 우리가 교육을 받았거든요. 군사훈련도 받고. 요시 그트면 학자들이제. 학자들이 나와가지고 강의도 하고.‘ 지금 우리나라가 전장(전쟁)을 하고 있는데 어떤 목적으로 한다. 세계를 앞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전쟁을 극복해야 한다’는 거. 정신수행이라.


일본사람들도 같이 교육을 받았겠네요?


같이 받아요.


기숙사에서도 일본사람들과 같이 생활했나요?


같이 안 자고 따로 하고. 우리는 우리대로. 한국사람들 심리를 탐지하는기라. 어떤 행동을 하는가, 교육하면 얼마나 이 사람들이 인식이 가는가. 이런 거를 전부 그 사람들이 말은 안 해도… 부소장이라 카는 사람, 나가사끼 조선소 소장이 제일 어른이고, 그 밑에 있는 부소장이라 카는 분이 직접 우리한테 와가지고 면담을 해. 첫 번째 딱 가니깐 한 달 교육 받는데 두 번 딱 면담을 해요.


개인 면담이 아니라 전체 면담인가요?


예. 전체.


보통 무슨 얘기를 하던가요?


그니깐 우리 조선소 와가지고 여러분들이 기분이 어떠냐. 우리 조선소는 동양에서 최고가는 조선손데, 과거에 전쟁 안 났을거 그트면 한국사람이라 카는 거는 도저히 생각을 안 했다.


한국사람이 와서 일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아주 동양 최고다?


채용을 안 했다. 안 했는데, 지금은 우리가 내선일체. 일본하고 한국하고 그때는 내선일체였거든?‘ 나이센잇따이(內鮮一體)’니깐, 우리가 이것을 극복해서 이 전쟁을 이겨나가야 한다 카는 걸, 너희들은 우리 회사에 온 걸 큰 영광으로 생각해라 이러는데.


그런 이야기를 쭉 해 주는 거예요?


예. 그런 얘기.


어르신들도 조금 기분이 들떠서 열심히 배우고 그랬겠네요? 한 달 동안?


그 사람들이 아주 뭐, 내막은 저 사람들 심리는 좀 다르겠지만 외부적으로는 아주 우리를 선동해가지고 일본사람 같이 자기네들이 구별없이 대우한다 카는 걸, 언제라도 저거 한다고.
그래 인자 한달 교육 받으면, 각 직장으로 구별이 돼요. 근데 기술 계통에는 한 사람도 안 했다고. 전부가 위험한 데. 배로 건조하는데 뭘 하냐하면은, 조립하는데 구레인(크레인)을 가지고서 철판을 가지고 오면 조립합니다. 그 참 위험합니다. 그때는 줄만 달아가지고서 구레인이 이래 끌고 다녔거든, 철판을. 그러면 철판이 여 있으면 철판을 한개 요래 갖다 붙일라 하면은 조금이라도 한 20미터, 30미터(m) 우에서 운전수가 보고서 삭~ 갖다가 붙여도, 진동이 조금만 쎄도 진동이 팍 나가지고 까딱하면 사람 떨어집니다.


철판 위에 사람이 탔어요?


안 타고. 갖다가 여 붙이면, 이게 지금 배를 모으고 있는데 이 철판을 갖다붙일라 카면, 이게 여서 가는 압력이 있으니깐 여 가면 딱 마주틀린다(마주친다) 말입니다. 여게 진동이 가거든. 그래 까닥하면 떨어지는 위험이 있고. 또 뭐 하냐하면 ‘카시메’라고 알겠지요? 캉캉하는 거.


가시메?


예. 이래 쇠‘보도(볼트)’로 꾸워가지고.


볼트를 딱 붙이는 거 얘기하시는 거예요?


예. 붙이는 거. 양쪽서 다다다닥 그기 일본에서 ‘카시메’라고 합니다.‘ 카지메’라고 카는긴데 그것도 위험하거든요. 양쪽서 안에 한사람 들어가고 밖에서 한 사람 있어가, 안에서 ‘보도’이걸 꾸워가지고 빨가이.


빨갛게 구워가지고?


구워가지고 딱 던지면, 받아가지고 이 안에서 요쪽 밖으로 이래 내밉니다. 내밀면, 내주고 여서 딱 박거든. 빠져 안 나가구로. 그러면 밖에서 이래 두드립니다. 기계가 다다다닥 에어로 박는데, 그니깐 조선소 가면 그 소음이 엄~청[나요]. 요시는 전부 전기용접을 하니깐 그리 안하는데 그때는 옆에 사람이 여간해도 잘 몬 알아들어요. 그러고‘아나아게’라고, 그기 한 20키로(kg) 될끼구만. 이래가 들면 묵찍합니다. 그놈 가지고 또 구녕을 내. 철판하고 철판하고 이래 마주 붙어있는데 구녕을내야,‘ 보도’가 들어가서 ‘카시메’를 하거든.


그렇죠.


그거 시키고.


‘도리쓰케’도 있었죠?


‘도리스께’해야 하고. 또‘텐게키’라고 쇠하고 쇠하고 이래 마주 터져가 있는데, 여게는 칼 그튼 걸 가지고 이 사이에다가 거 뭐라하노? 헝겊 같은 걸 뺀기질(페인트칠)을 해가지고 그 안에다 집어넣습니다. 물 안 들어오그로. 그기 제일 수월한기요.


나머지 작업들은 위험해요?


예. 용접 그튼거는 일절 우리 한국사람은 시키도 안 해. 제일 위험한 거, 그것만 시켰는데 그기 두 달 훈련을 시켜요.


그러니깐 처음에 가자마자 하는 거는, 한 달 정신교육 하고 군사훈련도 하고. 그리고 실제로 배속 받아서 두 달 교육을 받아요?


직장별로 가면 인제 두 달 교육을 받아요, 육상에서. 육상에서 두 달 배우면 인제 각 조로 노네서(나눠서) 배치가 되는 거예요. 내가 두 달 이걸 받아가지고, 그때 내가 몸무게가 한 45키로(kg)뿐이 안 나갔거든. 지금도 내가 약하다 아입니까. 45키론데, 20키로짜리 기계를 둘이서 메고 올라가가지고 배에 구녕을 뚫을라 하니깐, 몬 하것드라고.


그럼 처음에는 ‘아나아케’였어요?


예.‘ 아나아게’를 했는데, 한달 있으니깐 내가 과자집에 있다가 아는 사람인데, 다른 공장에 있던 사람인데 나까무라(中村)라 카는 사람이‘조요(徵用)’를 왔더라고. 그 사람은 일본사람인데, 그때 한 오십 살 가까이 됐어. 그래 [찾아]왔데. 그 사람이 내 주소를 알고서. 우리 한 기숙사라. 기숙사는 한 기숙산데 동이 다르거든.


기숙사 이름은 뭐예요?


기바찌(木鉢). 기바찌료(木鉢寮)라고 있어. 거 내가 있는데, 내를 찾아왔더라고. 바로 옆에 동이라. 이 사람이‘조요’로 왔는데, 그리 얘기를 하는데 자기는 현도공(現圖工)으로 왔다 카는기라. 그리 가만 이야기를 들으니깐 현도공 이거는 수월커든. 철판을 깔아놓으면, 똑 도면 그대로만 그리면 돼. 도면이 50분의 1이면, 50분의 1이 나오게 50배로 맨들어가지고 철판에다 옮기거든요. 그러면 이걸 갔다가 후울라카몬(휘려고 하면) 이걸 각도를 몇 도로 후아라하는 거, 이런 거 도면이 안나옵니까?


그렇죠. 휘어라 그러면, 휘는 각도?


그래가 휘는 그거를 각도로 해가지고 전부 쇠칼, ‘노미(のみ:끌,정)’그튼 걸 가지고 글로 팝니다. 철판에다가 김성수 그트면 김성수 이래, 쇠로 가지고서 글로 팝니다. 그리고 이 구녕 낼 때는, 이래 또 구녕 내는데다가 본또를 가지고 딱 찍어서, 것다가(거기다가) 또 구녕을 파갖고 뺀기(페인트)로 여따가(여기다가) 표시로 합니다. 그래야 찾아내제. 그러니까 ‘다가네(たがね:끌,정) 로 가지고 글도 파고, 뺀기로 가지고 글도 적고. 그래가지고서 인제 뺀기가 안 보이면 쇠를 깎아가지고 이기 뭐이라 카는 걸 표시를 합니다. 그건 육상에서 하거든. 그놈은 스리빠 신고도 해.


슬리퍼 신고도 작업을 할 수 있는 거네요?


예. 거는(거기는). 딴 데 조립하는 데는 절대로 안 됩니다.


절대로? 그 위험하죠. 그리고 철판 있으니깐 거기는 다 작업신발 신고서 할 것 아니에요?


예예. 그때 ‘지까다비(地下足袋:노동작업화)’신고. 근데 ‘아나아게’가니깐 거게 십장이, 그분이 영감인데 낼로(나를) 오라카더라고. 그때‘아나아게’로 20명이 갔거든.


20명은 다 조선사람이구요?


그렇지. 20명이 갔는데 이 사람이 내를 쳐다보고‘이리 오라’고 카는기라. 가니깐 ‘니 과거에 뭐했노’이리 물어. 과자집에 있었다고 하니깐, ‘월급 얼매 받았노’ 그래 얼매 받았다카니깐, ‘그래 니가 여책임자로 일로 봐야겠다’카는기라. 20명을 통솔로 하라카는기라. 그 뭐 안 한다 칼 수 없는기고. 하겠다고 했제. 해가지고 인제 글로(거기로) 일로(일을) 좀 다녔어요. 다녔는데, 아~ 대서(고돼서) 몬 하겠데요. 철판보다도 이 기계가 말이야, 한 20키로(kg) 되니깐. 둘이 할 수 있을 때도 있고 혼자도 하고 했는데. 호수(호스)가 이만하면 에야호수(에어호스)가, 전부 거는 기계가 에야로 가지고 움직이기 때문에 에야로 하는데, 거 무겁습니다. 하~ 아, 몸살이 나서 들어누웠는데, 들어누우니깐 병원에 가라 카더라고. 기숙사에 있을 때, 하루는 쉬는기 용납되는데 이틀부터는 의사증명 없으면 못 놀리게 해. 그래 인제 시내 미쓰보시 병원이 있습니다.


조선소에 있는 게 아니구요?


안에도 있고, 밖에 시내에도 있고.


시내는 어디쯤에 있는 거예요? 나가사키역 근처에요?


역 근처에 있었어. 딱 가니까, 그때도 이런 카드가 돼가 있었다고. 병원에도 카드가 있는데 군의관이 대위라. 현역인데 내 카드 딱 뽑더니 그래. 내가 그때 가네모도(金本)거든. “가네모도!” “네!” 하면서 들어가니깐, 내가[김성수의 창시명:金本成洙] 성(成)자 밑에, 물가 수(洙)자 거든. 이 수(洙)자는 일본사람이 잘 안 쓰는 글입니다. 이리 쳐다보더니 내를 보고 “키사마 오끼나와까(너 오키나와 출신이야?)”이래 묻더라고. 오끼나와 출신인줄 아는 모양이라. 그래서 오끼나와 아니라고 하니깐, “그러면 어디냐”물어. 그때는‘한또(半島)’라 거든. “한또데스(반도출신입니다)”이러니까 깜짝 놀라는기라.


왜요?


‘니 그치 조선사람이 일본말 잘하는 거 처음 봤다’카는기라. 탄복을 하는기라. 내가 그때 일본 가가지고 아무 조선사람들하고 상대를 안 하고, 전부 일본사람만 상대를 했기 때문에 일본말 참 내가 잘했습니더. 자랑이 아이라. [할머니: 일본말 해서 쎄(혀)가 저래 딴 사람하고 틀리다 아인교.] 어디를 가도 내를 조선사람이라고 안 했어요. 일본놈이 마 천하없는 놈이라도. [군의관이] 깜짝 놀래더라고. “그래 어데 아파가 왔노?” “몸이 많이 피곤하다”카니깐그때 대게 많이 아픈 사람이라야 삼일, 이래 휴무를 주는데 이십일로 딱 끊어주더라고. 내를 잘 본기라. 그래가 이십일로 딱 끊어주더만은. 그래 기숙사 가니깐 깜짝 놀래는기라. 어데가 아파서 이렇게 많이 끊었냐고. 그건 말 못하는기지. 군의관이 끊어주는 기니깐 뭐. 그래 이십일 놀고 또 갔다. 만날 먹고 노는기지 인자. 이십일만에 또 가니깐, 열흘 딱 끊어주데. 한 달을 가만히 노는기제. 놀다가, 그때는 나도 체면이 있어서 가가지고서 “인자 많이 좋아졌으니깐 근무로 가겠습니다”. 이러니깐 “니 식당으로 돌려줄테니깐 식당으로 가거라”이라더라고.


그 십장한테 얘기를 한 거예요?


아니. 군의관. 군의관이 자진해서 내를 보고 말을 하더라고. 내가 알아봐줄테니 식당으로 가라고? 이 사람은 권한이 있어. 그때는 군의관이‘이 사람은 어데 가라’직권이 있어요. 딱 군위관이 써주면 가게 돼가 있어. ‘식당을 가라’그런 기라. 그래서 ‘나 식당은 안 간다’ 그러니깐, 식당가서 배부르게 잘 묵어라 그기라. [할머니: 하도 빼빼해산께(빼빼하니) 그랬는갑다]“ 나는 식당 안 가고 싶고, 현도공으로 가고 싶습니다.”이러니깐.


그때 그 과자집 나카무라씨는 벌써 와 있었구요? 현도공으로?


하모.


그 생각이 딱 들었네요?


예. 딱 현도공 써주더라고. 그래가 ‘아나아게’ 그 계가 있거든요. 계장이 있어요. 미쓰보시 조선소 계장은 대부분이 일본 동경대학 조선과 나온 사람들입니다.


엘리트들만 왔네요?


참말로 엘리트들입니다. 그 딱 갖다주니깐 ‘어, 혼또(정말)?’ 도장 딱 찍어 줘. 현도공. 현도계로 가라고. 그리 현도계 딱 가 가니깐, 고마 계장이 그 밑에 사람 부르더만은 처리하라고. 그래 현도계로 갔으니 새로 교육을 받아야 하는기라. 거 또 한 달 교육 받았지. 현도계 근무했는데 조선사람으로서는 내 혼자뿐이 없었어.


어르신은 내내 현도공으로 거기서 근무를 하신 거예요?


예. 있었어요.


거기 근무하시는 동안에 어르신은 1차였었잖아요? 300명 정도. 그 다음 얼마간 있다가 조선사람들이 오기 시작하던가요?


한 5개월 되니깐, 한국에서 첫 번째 천오백 명이 오고.


천오백 명이요?


예. 저 이북에서.


이북에서요?


예.


어디 출신들이라는 건 아세요? 이북 어디?


그 사람들하고 우리하고 대화가 안돼.


기숙사가 같지는 않았나 봐요?


그 사람들이 오자마자 우리는 기숙사를 옮겼어요.


어디로 옮기셨어요?


마루야마(丸山町)라 카는 데로. 우리가 배로 타고 댕겼거든.


마루야마는 또 어디 있어요?


그 조선소서 건너다보면 맞은편에. 배를 타고 다녀.


제가 여기 나가사키 사진을 좀 가져와 봤는데요. 여기가 나가사키 역이구요, 여기가 조선소거든요, 배 만드는데 여기 건너편이에요?


어. 요 건너편에 있었어. 요서 배로 타고 요리.


기바치료는 어느 쪽에 있어요?


기바치료는 요쪽이지. 이 산을 넘어야 돼. 근 삼백 고지 됐어, 산이.


어르신 시내 나갈 때는 기억나세요?


시내 나가려면 기바치료서 배로 타고 나와서, 여서 요리 댕길라카면 그때 뭐 저게 없거든. 버스 같은 게 올케 없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깐 나가사끼는 얼추 교통이 배입니더. 인제 시내 나오면, 역 있는데 오면 전차 그기 교통수단이고. 허허허.


나가사키 조선소 맞은편에 있는 마루야마라는 건 마을 이름인가요? 기숙사 이름인가요?


기숙사 이름입니다. 근데 한 가지 이야기할 거는 기바치료 그러니깐 사감, 그 사람이 일본사람인데 악질이라. 다나까라고.


몇 살 정도 된 사람이에요?


그때도 한 오륙십 됐을끼야. 근데 자기 말로는 이 사람이 뭐라 했냐 하면은, 충청도에서 국민학교 교장을 했다카거든. 이 사람이 참 한국사람을 인간적으로 보질 않아요. 아주 멸시합니다. 와 그러냐 하면 기바치료 있을 때 우리는 1동에 있고 일본사람들은 2동에 있었는데, 우리 1동만 점호했지 다른 동은 점호가 없어요. 저녁으로도 점호를 하는데, 우리는 저녁마다 군대식으로 점호를 하고. 일본말로 내안잊어부립니다, 이런 말을 하더라고.‘ 동네불이 나면은 한국에 양반은 담뱃대로 뒷짐을 짓고서 불이 나도 불 끌라고 안 하고 멀리서 보고만 있다’고.‘양반은 손도 까딱 안한다’카는기라. 직접 우리를 보고 그런 얘기를 하는데, 이 사람이 참 조선사람을, 우리를 갖다가 심리적으로 괴로움을 주는기라. 그 밑에 인자 사감 밑에 동장이라고 있는데, 장교 출신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렇게 안 하더라고. 그 사감이 되게 저거하면 조금 너무한다 카는 그런 기색을 가지더라고. 또 한가지는 아프면 그 요행실(요양실)이라고 있습니다.


양호실 비슷한 게 있나 봐요?


예. 그게 가서 누웠으면 료모가 돌봐준다고.


료에서 일하는 아줌마? 료모(寮母)라고 그랬네요?


예 료모. 요시 그트면 양모라 카는거라. 일본 여잔데, 고마 늙은사람들 와서 하는데. 환자들 돌본다 카는기제. 한국사람은 잘 봐주지도 안 해요. 야~ 그렇게 차별로 하데.


그런데 조선사람들이 천오백 명 온다고 그러니깐, 거기를 비우게 한 거예요?


예. 우리가 다른 데로 갔제. 일본사람하고 전부 다.


다나카라고 하는 그 기바치료장은 그대로 있구요?


예.


어르신은 마루야마로 가서, 거기서 출퇴근 하신 거예요?


예. 배로 타고 댕겨. 기바치료라고 하는 데는 한 삼백 고진데 거를 매일 왔다갔다해야 돼요. 참 댑니다. 거 계단이 이랬어. 이런 계단. 거리가 참 대다고(고되다고). 그렇는데 우리가 거 가고나서 얼매 안 되니깐, 이북에서 왔다카드라고.


그거를 들은 거예요?


그런 소문이 나더라고. 그때는 이북이 아니고 함경도, 평안도서 왔는데. 내가 그 사람들로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내가 그때 인식을 했어. 와 그렇냐 하면 아침에 출근할 때는 장교들이 예비역 장교들이제, 우리를 관리하는데. 그 사람들이 나와. 우리 출발 할라카면 ‘고꾸로. 고꾸로(苦勞)’ 인자 ‘고상해라’


고생해라?


응. 그러고 인자 퇴근하면 ‘고꾸로 닷따’ ‘고상 많이 했다’ 이래 했는데. 아마 하루는 그 장교들이 안 나왔던 몬양이라. 그래도 내가 직접 눈으로 못 봤지만은 소문으로 그렇대요. 몇이 나와가 몇이서 장교들 뚜드려 팼다. 그런 소문이 있더라고.


이북에서 온 사람들이요?


예.


그리고 또 온 사람은 없어요?


그 뒤 자꾸 왔어요.


또 왔어요? 그건 몇 명인지 기억 안 나세요?


예. 뭐….


거기 조선소 전체는 몇 명 정도가 됐나요?


그 조선소에 종업원이 저어~ 1공장이 있고, 우리는 1공장입니다. 조선소로 배만 이래 누어내는(만드는) 제1공장이 있고. 제2공장은 뭐이냐 하면은 배로 누이가지고 바다에 내리면 그걸 끌고 가가지고서 안에 내부 [작업을] 하는데, 거는 제2공장. 거는 진짜 기술로 하는기고.


거기는 좀 떨어져 있겠네요?


조금 떨어져. 나가사끼 조선소가 이래 있으면 여게 제1공장서 제2공장꺼정 명치시대(明治時代)에 기차라 해가지고, 이래 연탄 때는 기차가 30분만에 여 왔다갔다 해요. 거 조선소 안에. 내가 제1공장에서 2공장으로 뭐 가 갈라카면, 그 기차에다 싣고서 갈 수도 있고… 얼매라도 다닐 수 있었어요.


크네요? 그러면은 그 조선소에 근무하는 사람이 몇 명 정돈가요?


한 2만명 됐어. 근데 그때 수송선을 맨들었거든요. 전부 수송선입니다. 수송선 기준이, 표준행이 만 톤입니다. 만 톤인데, 이 배를 열흘 만에 한 척쓱 놓습니다.


열흘 만에 한 척씩 만들어요? 대단하네요?


예. 거짓말이라고 칼깁니다. 이건 고정적으로 열흘 만에 한 척쓱 나가게 돼 있어요. 저게 한군데는 또 군함을 모았는데, 구축함은 한참에(한번에) 네 대를 모읍니다. 선대(船臺:선체를 건조하기 위한 조선대)라고 카는기 있는데 여기다가 만 톤은 한 대만 요리 하지만은, 구축함은 배가 작기 때문에 네 대를 한참에 여 누입니다. 그러고 항공모함을 그때 이만오천 톤을 일년 만에 만들었어요. 거 항공모함이 천성함이라 그랬어. 하늘 천자(天), 성이라고 성(城). 아마시로(天城)
각주 )
정확하게는 아마기(天城). 시즈오카현(靜岡縣) 소재 아마기산(天城山)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미쓰비시(三菱)중공업 나가사키조선소에서 1942년 10월 1일 기공하여, 1943년 10월 15일 진수, 1944년 8월 10일 준공하였다. 1945년 7월 28일 미군폭격에 의해 전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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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모함 아미기(天城). 1945년 히로시마현(廣島縣) 구레시(吳市)에 정박 중 미군의 공습으로 침수. 사진은 패전 후 점령군에 의해 촬영된 것임.


배 만들고 이러면 미군들이 폭격도 많이 하나요?


왔지. 나가사끼가 우찌 돼가 있냐하면, 항구가 요리 돼가 있거든요. 항구가 요래가 있으면 여게가 조선소입니다. 이 항구가, 들어오는데 바다가 굉장히 깁니다. 여 나가사끼 항구 들어오는데, 이 산이 여가 높으다고. 높으니깐, 비행기가 조준을 잘 몬 해요. 첫 번째 저 중국에 곤, 곤맹. 곤맹(昆明:쿤밍)이라 카는 데 거서 B-29가 들어왔다고. 밤에 폭격을 했는데, 우리 기숙사[기바치료] 우에 바로 고사포가 있었다고. 기바치료 있는데 거 고사포대가 있었는데, 거서 막 쏴니깐 우리를 보고 폭탄을 떨았는데(떨어트렸는데) 바다에 얼추 떨어졌비리. 우리 기숙사 식당이 날라가버렸다고. 불타부렸다고. 그라고 우리 동이 여 있었는데, 우리는 방공호 요쪽으로 들어가 있었거든. 여게 식당이 있었는데, 식당이 날라가면서 여하튼 마 그때 진짜 죽는 줄 알았어. 땅이 들썩, 들썩.


그 폭격은 여기 조선소 쪽으로만 온 거예요? 시내 쪽으로는 안 오고?


주로… 하지만은 그기 안 맞는갑데. 그래가 낮으로 B-29가 들어오면 우째 하냐하면은, 연합군들 포로가 있었거든 그때. 여기 조선소서 일했습니다.


몇 명 정도에요? 그 사람들은?


숫자가 제법 많았어. 많이 죽었어요. 왜 죽었냐하면 그 사람들이 우유에다가 좋은 음식만 먹고 빵 먹고 하다가, 처음에 이 사람들 데려다가 현미밥 그놈을 쪼깨쓱 줬는데 소화불량으로 다 죽었어. 그래가 안 되니깐 뭘 했냐하면은, 밀가루 쪼깨 섞고 강냉이를 섞어가지고 빵을 맨들어 미기고 했는데. 고마 영양실조 다 죽은기라. 야~ 거 참, 포로들 내 미군들 참 신사라 캅니다. 내 그트면 그렇게 압박받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 일본놈들 안 놔놨을끼야(안 놔뒀을거야). 옷이요, 전부다 떨어져가지고요. 실도 없는 몬양이라. 여 조선소 가면 가는 철사 있거든. 이런 걸 가지고 이래 집어가 입고 댕기는걸…. 참 욕 봤습니다. 노예도 그래 안 했을 끼야.


거기서 일하는 포로들과 접촉은 못하게 하나요?


미군포로들 하고 얘기하다가, 감시병이 있습니다. 해군들이 감시병을 하는데, 그 사람들한테 앵 다하면 두드려 맞아요. 근데 저네들이 담배꽁초가 요만치, 요만한 게 흘러가 있거든. 요만한기 흘러가 있으면 가다가 퍼뜩 줍습니다. 퍼뜩 주서가 종이도 올케 없거든. 그때 담배꽁초 새카만 종이 주워가지고, 담배를 요만치 질게(길게) 말아요. 말아가지고, 불이 있습니까? 불이 없으면 일본사람들 거 불 모아 놓은 데가 있거든. 거 가서 이리 절을 하고서 살짝 모르게 불로 댕겨가, 화장실에 뛰 가 가지고서 피우고 그래.


거기 근무하시는 동안에 월급은 제대로 받으셨어요?


월급은 여하튼 자기네들 규정대로는 받았어.


꼬박꼬박 어르신한테 주던가요?


예. 직접 나왔어요.


그럼 조선에서 끌려 온 사람들도 월급을 그렇게 줬을까요?


다 줬습니다. 거는 틀림없이 줬습니다.


돈 받아가지고 뭐 하셨어요?


그때는 총동원령이 내려가지고 월급이라 해도 쥐꼬리만치 밖에 안 줬어요. 아주 막 형식적으로. 회사서 그 국민저축이라 했나? 무슨 그것 한다고 회사서 일부 뗐어.


그 돈으로 뭐 하는데 쓰셨어요?


저게 노는 날, 시내 나가면 우짜다가 고구마도 사 먹고. 인자 또 희한한 재미가 있어. 내가 이야기로 하면, 신까와(新川)라고 카는 사람이 진주 사람이라. 그 사람이 한국성으로 뭐인고 모르겠어. 그때 일본성으로서는 신까와라 는데. 이 사람이 사회 물정은 참 잘 알아. 저거 아부지가 일본에서 ‘함바(飯場:노동숙소)’로 했어. ‘함바’라 카는기, 노동자들 기숙사를 맨들어 가지고서, 음식 맨들어 팔고 하는 덴데. 그 조선소 가서는 내하고 제일 친했습니다.
이사람이 내를 보고 그러더라고. “가네모도 내하고 놀러가자, 노는 날” “어데 갈끄고?” “여하튼 촌으로 나가보자” 이러더라고. 그래서 하루 종일 걸어서 놀러나가도 마땅한 데도 없고. 일본촌에 가 가지고, 고구마 삶은 거 사먹고 헛방을 쳤는데. 그 뒤 또 노는 날, 그날은 또 반대 방향으로 걸어나가는기라. 한 12시간 가까이 걸었는데 ‘함바’가 있어, 진짜. 내는 그때 ‘함바’가 뭐인지도 몰랐지. “뭐이 저 함바다! 저 가보자” 그래 딱 가니깐, 아주머이(아주머니)가 그때 한오십 살 됐을기구만은. 한국 아주머이라. 근데 신까와가 뭐라 그랬냐하면 ‘아주머니, 밥 한 그릇 사먹을 때 없습니까?’ 이래 딱 물으니까,‘ 따라오라’카는기라. 따라가니깐 자기 집인 몬양이라. 그때 그 전시 때에 소 다리하고 갈비를 달아놨드라고. 그러고 막걸이를 이런 도가지(독)로 두 도가지 해서 술이 괴고 있더라고. 밥을 한 그릇 해주라 카니깐, 그래 밥을 해가지고서 한 그릇쓱하고, 소고기를 볶아주더라고. 소고기를 한 냄비 볶아가 주는데 둘이서 우쨌든간에 실컷 먹었는기라. 실컷 먹었는데, 오면서 돈을 줄라 하니깐 ‘나도 당신네 그튼 동생이 있는데 몬 받겠다. 그냥 가라.’그래서 그냥 왔다고.
인자 기숙사에 가면, 내가 거서 좀 우두머리 역할을 했습니다. 뭐 배급 그튼 거 줄 때에, 내가 좀 그래 역할로 많이 했거든. 비누 배급이 나오면 둘이 앞에 한 개 주던지, 하나 앞에 한 개 주던지, 서이(셋) 앞에 한 개 주던지. 비누 나오는 숫자로 가지고서 이거 할당을 하는데, 할당하고 나면 쪼깨 남는 게 있습니다. 비누도 그렇고, ‘지까다비’ 이것도 둘이 앞에 한 켤레 갈 때가 있고, 서이 앞에 한 켤레 갈 때도 있고 이랬는데. 그러고 쪼깨 남는 거는 내가 모아놓는기라. 모아가지고 “신까와, 우리 이거 가 가서 밥 얻어 묵자” 그래가 거게 갖다주면요, 뭐 ‘할배야~’큽니다. 좋다고. 그래가 거 우리가 한번쓱 놀러갔다고.


한 달에 몇 번 놀았어요?


한 달에 두 번. 1, 3 공일날만 놀았어.


하루 근무시간은 어떻게 되나요?


하여튼 아침에 여섯시 기상해가지고서, 밥 먹으면 바로 가야 돼.


그래서 공장에서는 몇 시까지 일해요?


공장 여섯시에 마쳐요.


여섯시에 마치고서, 식사는 그러면?


인자, 돌아와서.


점심은 어떻게 해요?


점심은 공장에서 줍니다. 공장에 식당이 있어가지고. 저게 출근부를 가지고 아마 조정을 하는 모양이라. 우리 조에 오늘 열 명 왔으면, 열 명 딱 오는데.


식사내용은 어땠어요?


그때는 전시니깐 뭐. 재수 좋은 날은 찰밥만 오는 수가 있고, 어떤 날은 그 뭐꼬 콩깻묵 밥도 나오고. 가지각색이지. 생선도 나올 때 있고.


배 불리는 드셨어요?


그때 배불리 되는교. 내는 식양[식사량]이 작으니깐 그것 가지고 견뎌내는데, 좀 먹었던 사람은 힘들어.


그렇게 근무하시다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잖아요? 원자폭탄 떨어진 날 이야기 좀 해주세요.


우리가 근무하는데, 나가사끼 조선소가 요리 있으면 우리는 여서 일로 하는 기라. 요쪽에.


육지 쪽이네요?


육지서 하는데, 나가사끼 폭탄은 여 떨어졌는기라. 여게. 나가사끼 시내.


그래서 폭탄 떨어진 날 뭐 하셨어요?


일했지 뭐. 그때 저저 공습경보가 났어. 나가지고서 방공호 들어가 있었제. 근데 나가사끼 조선소는 그 광장에다가 공습이 들어오면 포로들을 세워가지고 손을 들게 해. 비행기에서 보면 뵈라고. 너른 광장이 있는데, 포로들 전부 거 집결시켜 가지고 공습경보 해제되도록 꺼정 이 손을 들고 있게 해.


그날도 그랬어요?


그렇것지. 우리는 그쪽으로 안 갔으니깐.


그리고서 소리를 들으신 거예요?


글치. 뭐 비행기 소리도 별로 안 나니깐, 별것도 아인기다 생각했지. 일본놈들이 우리 한국사람하고 심리가 비슷합니다. 어떤 때는‘오늘 공습 안 오나…’일을 쉴라고. 하하하. 근데 방공호에 들어갔다 나오니깐 이상한 소리가 나고 그라데.


어떤 이상한 소리요?


일본사람들이 뭐 무신 아주 살인 폭탄이 터졌니, 뭐 그런 소리를 하드라고.


공장은 괜찮았어요?


아무렇지 안 해. 거리가 있어가.


그러고 난 다음에 시내에는 구경 좀 가 보셨어요?


시내? 아, 그래 가지고서 우리는 거 끝나고, 그리 건너가 가지고서. 인자 뭐 일로 하니 안하느니 이래 샀다가, 이틀만인가 사흘만인가 항복했다고 그래샀대. 그래서 신까와하고 내하고 또 하나 누니라?(또 한명 누구더라), 서이. 기바치 있는데 거 아는 사람이 있었거든. 일본사람인데, 거 가니깐 한국사람이 삼천포꺼정 나오는 배가 있더라고. 일본놈들 보고 간다온다 말도 없고 마 그냥 왔다.


어르신 나가사키 시내에 들어가지는 않았구요?


예. 안 들어갔어. 배로 바로 나왔어.


혹시 조선소에서 다친 분이나, 시내 들어가서 다친 분들은 못 보셨구요?


그런건 없고. 내 있을 때 공습을 맞아가지고 한국사람 서이가 죽었어. 거 기바치료
각주 )
앞서 소개한 배한섭의 진술 중에도 같은 내용이 있음. 배한섭 각주1)을 참조.
닫기
에서.


원자폭탄으로 돌아가신 분은 없구요?


몬 봤어.
면담일자: 2007. 3. 29.
면담자: 허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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