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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평양성

가로구획

가로구획

장안성의 외성 안에는 격자형 도로망에 의한 전면적인 가로구획(街路區劃)이 시행되었으나, 현재 외성 안의 가로구획과 도로유구는 전면 파괴되었다. 이로 인해 가로구획에 의한 방(坊)의 형태와 규모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의 문헌자료에서 그 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 한백겸(韓百謙)은 선조(宣祖) 40년(1607)에 외성 안의 가로구획 유적을 직접 조사하여 상세한 기록을 남겨 놓았는데, 이를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정미(丁未; 宣祖 40) 가을에…… 평양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기전유제(箕田遺制)를 보았다. 천맥(阡陌)이 모두 정연하게 남아 있어 파괴되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함구문(含毬門)과 정양문(正陽門) 사이의 구획이 가장 분명하였다. 그 제도는 모두 전자형(田字形)을 이루었고, 전(田)에는 4구(區)가 있고, 각 구는 모두 70묘(畝)이다. 대로(大路)의 안에서 가로로 보아도 4전8구이고, 세로로 보아도 역시 4전8구이다.주 006
각주 006)
丁未秋.… 余奉晨昏到平壤. 始得見箕田遺制. 阡陌皆存. 整然不亂. 古聖人經理疇畫. 變夷爲夏之意. 猶可想見於千載之下. … 其中含毬,正陽兩門之間. 區畫最爲分明. 其制皆爲田字形. 田有四區. 區皆七十畝. 大路之內. 橫而見之. 有四田八區. 豎而見之。亦有四田八區.
『久菴遺稿』. 上, 箕田遺制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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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종합DB
한백겸은 전자형(田字形)의 구획(坊)이 4구(區)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면서, 방을 전(田)으로, 1개의 방을 4등분한 소구획을 구(區)라고 표기하고 있다. 또한 16개의 전(田; 坊) 즉 64구가 하나의 큰 구획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와 함께 각 방과 도로의 배치 등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는 〈기전도〉(箕田圖)주 007
각주 007)
『久菴遺稿』. 上, 箕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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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종합DB를 남겨 놓았는데, 이 〈기전도〉에 그려진 방의 형태를 보면 동서로 긴 장방형의 방을 확인할 수 있으나, 또 다른 자료인『기자지』(箕子志; 1879)의 〈정전도〉(井田圖)에는 정방형으로 그려져 있어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한편 20세기 초에 들어서 일본인 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에 의해 이 유제(遺制)가 고구려의 도시유적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전자형 구획(坊)의 규모 또한 더욱 정확히 계측되었다. 그는 외성 안에 남아 있던 도로의 네 귀퉁이에 세워진 석표(石標; 法樹)의 간격을 실측하여, 이를 바탕으로 1방의 길이가 양쪽 도로폭을 포함하면 고구려척으로 600자(약 213.6m)이며, 도로의 폭을 제외하면 500자(약 178.19m)임을 확인하였다.
이와 함께 1950년대에 북한에서 실제 도로의 실측치가 확인되었는데, 먼저 1953년에 중앙력사박물관의 현지조사에서 거피문을 통하는 남북대로의 석표간의 너비는 약 13.8~13.9미터로 확인되었으며, 함구문으로 통하는 남북대로의 석표간의 너비는 13.8~13.9미터로 확인되었다. 또한 1954년에 평양역 동쪽에 위치한 김책공업대학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다경문에서 고리문으로 이어지는 동서대로의 폭이 실측되었는데, 도로의 너비는 12.6~12.8미터, 좌우의 배수구 너비는 60~70센티미터로서 도로유구의 전체 너비는 13.4~14미터에 달했다.
이러한 실측자료를 바탕으로 북한학자들에 의해 가로구획에 관한 다양한 견해가 펼쳐졌다. 먼저 최희림은 한백겸의 〈기전도〉를 바탕으로 방의 동서와 남북의 비례가 10 대 7로 구획된 것으로 보면서 1구(1개의 방을 4등분한 소구획)의 동서 폭을 120미터, 남북 길이를 84미터로 보았다. 이는 현재의 중성벽(中城壁)에서부터 외성 안의 동서대로까지의 실측치를 먼저 구한 다음, 이 구간에 들어가 있는 방과 도로의 개수를 〈기전도〉에서 확인하여 산출한 것이다. 즉 〈기전도〉에 따르면 이 구간에 4개의 방(8개의 區)과 함께 중로(中路) 3개, 소로(小路) 4개가 배치되어 있으므로, 구간의 실측치인 695~700미터에서 도로폭의 합계(22.4m)를 뺀 수치를 8로 나누어 1구의 남북 길이를 산출한 것이다. 그런데 중로와 소로의 도로폭은 직접 조사된 것이 아니라 대로의 도로폭에서 산출된 것이므로, 도로폭을 제외한 1구의 길이는 가변적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리화선은 〈정전도〉와 1930년대의 〈평양시가도〉를 바탕으로 평천리(平川里) 일대의 방의 형태를 정방형으로 보았다. 그는 정방형의 방이 1930년대까지 완연히 남아 있으므로, 방의 형태를 장방형으로 그린 〈기전도〉보다는 정방형으로 그린 〈정전도〉를 더 신뢰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하였다. 이와 함께 1구의 한 변 길이는 85미터로, 1방의 한 변 길이는 170미터로 산출하였는데, 산출 원리는 실측구간만 다를 뿐 최희림에 의한 1구의 남북 길이 산출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처럼 연구자들에 따라 〈기전도〉와 〈정전도〉에 보이는 동서장방형이나 정방형 가운데 어느 하나의 형태로 방의 형태가 설정된 반면, 한인호는 장안성의 지형조건에 맞게 장방형과 정방형의 구획들이 적절히 배합된 것으로 보았다. 즉 그는 외성 안의 방 전체를 장방형으로 복원하면 정양문(正陽門) 서쪽 구간의 실측치와 맞지 않으며 정방형으로 복원하면 정양문-함구문(含毬門) 구간의 실측치와 맞지 않는다고 보면서, 정양문-함구문 구간에는 동서 장방형의 방으로 1구가 동서 120미터, 남북 84미터이며, 정양문 서쪽 구간에는 정방형의 방으로 1구의 한 변이 84미터인 것으로 보았다. 즉 최희림과 리화선의 견해를 종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일본인 연구자 가메다 히로시(龜田博)는 1910년대의 〈평양〉(平壤) 도판을 바탕으로 평천리 일대의 방의 규모를 계측하여, 동서 폭 182미터, 남북 길이 181.5미터의 정방형 방(도로폭을 제외하면 약 175m)을 산출하였다. 이 역시 〈기전도〉에 보이는 방과 도로의 수를 바탕으로 도판에서 추출한 것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고구려 장안성의 가로구획 방식을 6~8세기 동아시아 도성의 가로구획 방식과 비교·연구하여, 북위(北魏) 낙양성(洛陽城)에서 고구려 장안성, 신라 왕경, 일본 후지와라쿄(藤原京)로 이어지는 계보 관계를 밝힌 연구성과도 나오고 있다.

  • 각주 006)
    丁未秋.… 余奉晨昏到平壤. 始得見箕田遺制. 阡陌皆存. 整然不亂. 古聖人經理疇畫. 變夷爲夏之意. 猶可想見於千載之下. … 其中含毬,正陽兩門之間. 區畫最爲分明. 其制皆爲田字形. 田有四區. 區皆七十畝. 大路之內. 橫而見之. 有四田八區. 豎而見之。亦有四田八區.
    『久菴遺稿』. 上, 箕田遺制說 바로가기
  • 각주 007)
    『久菴遺稿』. 上, 箕田圖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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