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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성씨록』 제11에 이르기를...]

『성씨록』 제11에 이르기를, 신호경운(神護景雲) 3년에 우대신(右大臣) 중신조신청마려(中臣朝臣淸麻呂; 나카토미노아소미키요마로)에 ‘대(大)’라는 글자를 더하여 내렸다. 그 후 연력(延曆) 16년에 택성(宅成; 야카나리) 등 48인에게 ‘대’라는 글자를 더하여 내렸다. 같은 17년에 선장(船長; 후나워사) 등 37인에게 ‘대’라는 글자를 더하여 내렸다. 나머지는 그대로 두어 중신조신이라고 하였다.(중신조신은 『신찬성씨록』 제11권에 이르기를, “금촌련은대화국성상군 춘시촌 아부련 등의 조상이다”라고 하였다.)
 
【주석】
1. 성씨록제십일운(姓氏錄第十一云)
이 일문은 『동대사요록(東大寺要錄)』 권제6, 말사장(末寺章) 제9, 대중신사(大中臣事)조 및 『제주보임(祭主補任)』 11대 대중신청마려(大中臣淸麻呂)조에서 인용되어 있는 것이다. 이조는 『신찬성씨록』 제11권 좌경(左京) 신별(상) 「대중신조신(大中臣朝臣)」 조의 일문이다. 현재의 『신찬성씨록』 발췌본에는 “등원조신과 조상이 같다.(藤原朝臣同祖.)”라는 내용이 있을 뿐이다.
2. 신호경운삼년(神護景雲三年)
『속일본기』 신호경운 3년(769) 6월 을묘조에 “조하기를, 신의 말씀 속에 대중신이라고 하였고, 중신조신청마려는 두 차례 신기관에 임명되었는데 신을 받는 데 실수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대중신조신을 사성한다고 하였다(詔曰. 神語有言大中臣, 而中臣朝臣淸麻呂, 兩度任神祇官, 供奉无失. 是以賜姓大中臣朝臣.)”라고 하여, 신호경운 3년에 중신조신청마려가 대중신이라는 씨명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신씨계도(中臣氏系圖)〉에 인용된 「연희본계(延喜本系)」 등에서는 같은 해 6월 정유의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정유는 6월 삭일(朔日)의 간지일 것이다.
또 『태자전옥림초(太子傳玉林抄)』 권제21 〈대직관어본지사(大織冠御本地事)〉에서는 “대중신본계를 살펴보니, 상반대련공이 처음으로 중신이라는 성을 받았고 중납언 의미마경의 아들 우대신 청마가 신호경운 3년에 처음으로 ‘대’라는 글자를 받아 ‘대중신경’이라고 불렀다.(案大中臣本系云, 常磐大連公, 始賜中臣姓. 中納言意美磨卿男, 右大臣淸磨, 以神護景雲三年始賜大字, 號大中臣卿, 云云.)”라고 하였다. 『공경보임(公卿補任)』 의 신호경운 3년조의 대중신청마(大中臣淸磨)에 대한 추기에도 “6월 19일에 대중신이 되었다(六月十九日爲大中臣.)”라는 내용이 있다.
3. 우대신중신조신청마려(右大臣中臣朝臣淸麻呂)
『속일본기』 천평(天平) 15년(743) 5월 계묘조에정6위상 중신조신청마려(中臣朝臣淸麻呂)에게 종5위하를 주었다는 내용이 보이고, 같은 해 6월 정유에 종5위하 중신조신청마려(中臣朝臣淸麻呂)를 신기대부(神紙大副)로 삼았으며, 천평 19년(747) 5월 병자삭조에 종5위하 중신조신청마려를 미장수(尾張守)로 삼았으며, 천평승보(天平勝寶) 3년(752) 정월 기유조에 종5위하 중신조신청마려에게 종5위상을 내렸으며, 천평승보 6년(755) 4월 경오에 종5위상 중신조신청마려를 신기대부로 삼았으며, 같은 해 7월 병오에 좌중변(左中辨), 천평보자(天平寶字) 원년(757) 5월 정묘에 정5위하, 3년 6월 경술에 정5위상, 6년(762) 정월 계미에 종4위하를 내리고, 같은 해 12월 정사에 문부대보(文部大輔) 종4위하 중신조신청마려 등으로 하여금 중궁원(中宮院)에서 칙지(勒旨)를 알리는 일을 맡도록 하였다. 그는 같은 해 12월 을사삭에는 참의(參議)가 되었고, 이후 좌대변(左大辨), 섭진대부(攝津大夫), 신기백(神祇伯), 중납언(中納言), 동궁부(東宮傅), 대납언(大納言)을 거쳐 관직이 우대신(右大臣)에 이르렀고, 관위는 정2위에 이르렀다.
정사(正史) 이 외에도 천평 10년(738) 4월의 「상계관인력명(上階官人歷名)」 에 ‘삼하연 중신정만려(參河掾中臣淨万呂)’, 천평 15년(743) 4월 22일자 「홍복사전수장(弘福寺田數帳)」 에 ‘판관 정6위상 신기소부 겸 행식부대승 중신조신청만려(判官正六位上神祇少副兼行式部大丞中臣朝臣淸万呂)’가 보이고, 『만엽집(萬葉集)』 에는 좌중변(左中辨) 중신청마조신(中臣淸麿朝臣)이 지은 시 여러 수가 전한다.
4. 가사대자(加賜大字)
중신(中臣)이라는 씨명에 큰 대(大)라는 글자를 추가하여 대중신(大中臣)이라고 한 이유에 대하여, 『속일본기』 신호경운(神護景雲) 3년(769) 6월 을묘조에 “조하기를, 신어(神語)에 대중신(大中臣)이라는 말이 있고, 중신조신청마려는 두 차례나 신기관에 임명되어 일을 함에 잘못이 없었다. 그러므로 대중신조신이라는 성을 내린다(詔曰. 神語有言大中臣, 而中臣朝臣淸麻呂, 兩度任神祇官, 供奉无失. 是以賜姓大中臣朝臣.)”라고 한 기사가 보인다. 이 기사에서 신어에 ‘대중신’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 것은, 6월월차제(六月月次祭)에서 중신씨가 신에 바치는 축사(祝詞)나 신상제(新嘗祭)에서 바치는 축사에 보이는 대중신이라는 표현을 가리킨다.
5. 연력십육년(延曆十六年)
연력 16년(797)에 대중신이라는 씨명을 내린 것에 대해서는 〈중신씨계도(中臣氏系圖)〉에 인용된 「연희본계(延喜本系)」 중신조신허미(中臣朝臣許米)조에, 제형(齊衡) 3년(856)11월 20일 신기대부 겸 내장두(神祇大副兼內藏頭) 종5위상 중신조신일지(中臣朝臣逸志)와 소부(少副) 종5위하 중신조신비수(中臣朝臣薭守) 등이 연력 16년 10월 15일과 연력 17년 6월 26일의 칙(勅)에 의하여 대중신을 사성받았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연희본계」 대중신조신이도인(大中臣朝臣伊度人)조에서도 원경(元慶) 원년(877) 12월 25일의 사성 요청에 대하여 연력 16년 10월 15일 및 동 17년 6월 26일 두 차례의 태정관부에 의거하여 대중신이라는 성을 내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대중신이라는 성을 사성받은 것이 연력 16년 10월 15일임을 알 수 있다.
6. 택성(宅成)
중신조신택성(中臣朝臣宅成)은 보귀(寶龜) 4년(773) 정월 9일자 「대재부부(大宰府符)」및 같은 해 정월 15일자 「화기청마려고문병복부도인등해(和氣淸麻呂告文幷卜部滔人等解)」 에 주신(主神) 종7위상 중신조신택성이 보이고 또한 같은 해 정월 18일자 「우좌공지수해(宇佐公池守解)」 에도 대재부주신(大宰府主神) 종7위상 중신조신택성이라는 서명이 보인다. 『일본후기(日本後紀)』 연력 16년(797) 2월 경진조에는 종5위하 중신조신택성을 아악조(雅樂助)에 임명한 내용이 보인다. 〈중신씨계도(中臣氏系圖)〉에는 택성이 태마(泰麿)의 아들이라고 하였고, 종5위하 병고두(兵庫頭)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택성의 아들로 풍장(豐長)·풍정(豐庭)·어립마(御笠麿)·양마(養麿)가 보인다.
7. 십칠년(十七年)
연력(延曆) 17년(798)의 대중신(大中臣) 사성은 「연희본계(延喜本系)」 를 통해서 연력 17년 6월 26일임을 알 수 있다.
8. 선장(船長)
여기에만 보인다.
9. 중신조신(中臣朝臣)
연력 16년과 연력 17년 이후에도 중신조신을 씨성명(氏姓名)으로 하는 인물로 중신조신도성(中臣朝臣道成, 『日本後紀』延曆 23년 6월 임자조 등), 중신조신익계(中臣朝臣益繼, 『類聚國史』 99, 叙位, 天長 8년 정월 계묘조 등), 중신조신일지(中臣朝臣逸志, 『續日本後紀』 承和 11년 정월 경인조 등), 중신조신잡수(中臣朝臣雜守, 『日本文德天皇實錄』 嘉祥 3년 6월 정묘조 등), 중신조신복성(中臣朝臣福成, 『日本三代實錄』 貞觀 2년 9월 2일 기유조 등), 중신조신판전마려(中臣朝臣坂田麻呂, 『日本三代實錄』 貞觀 4년 2월 23일 임술조 등), 중신조신이도인(中臣朝臣伊度人, 『日本三代實錄』 貞觀 8년 6월 3일 병자조 등) 등이 있다.
이들 중 중신조신복성(中臣朝臣福成)에 대해서,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정관(貞觀) 2년(860) 9월 2일 기유조에 우경인(右京人) 종8위상 중신조신복성에게 유악숙녜(惟岳宿禰)를 사성하고 우경(右京) 9조(九條) 2방(二坊)에 편부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중신씨계도(中臣氏系圖)〉에 인용된 「연희본계(延喜本系)」 에는 그가 중신이라는 성을 내세우며 관인이 되었으나, 제형(齊衡) 3년(856)에 중신씨 일족들이 동족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복성이 성을 갖게 되었고, 정관 2년(860)에 이르러 유악숙녜라는 성을 내리고 종전과 같이 우경 9조 2방에 살게 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중신조신판전마려(中臣朝臣坂田麻呂)는 『일본삼대실록』 정관 4년(861) 2월 23일 임술조에 “우경인(右京人) 정6위상 행주수령사(行主水令史) 중신조신판전마려를 사성하였는데, 대중신조신과 조상이 같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정관 12년(870) 11월 17일 을축에 석청수사(石淸水社)에 보내는 사신으로 주수우(主水佑) 정6위상 대중신조신판전마(大中臣朝臣坂田麿)를 보냈다는 내용이 보인다.
중신조신이도인(中臣朝臣伊度人)은 『일본삼대실록』 원경(元慶) 원년(877) 12월 25일 신묘조에 “우경인 종5위하 행목공조(行木工助) 중신조신이도인, 고조부 종5위하 중신조신석근(中臣朝臣石根)의 현손(玄孫) 19인에게 대중신조신이라는 성을 내렸으며, 이도인은 신기백(神祇伯) 종4위상 일지(逸志)의 아들이다”라고 하였다.
중신조신씨(中臣朝臣氏)가 연(連)이라는 성을 가지고 있던 시대의 일족으로는 중신련겸자(中臣連鎌子, 『일본서기』 欽明天皇 13년 10월조), 중신반여련(中臣磐余連, 『일본서기』敏達 14년 6월조), 중신승해련(中臣勝海連, 『일본서기』 用明天皇 2년 4월 병오조 등), 중신련국(中臣連國, 『일본서기』 推古 31년 是歲條 등), 중신련미기(中臣連彌氣, 『일본서기』 舒明 卽位前紀 등), 중신련정월(中臣連正月, 『일본서기』 大化 2년 3월 신사조), 중신련압웅(中臣連押熊, 『일본서기』 大化 3년 시세조), 중신거매련(中臣渠每連, 『일본서기』 白雉 4년 5월 임술조 등), 중신금련(中臣金連, 『일본서기』 天智 9년 3월 임오조 등), 중신련대도(中臣連大島, 『일본서기』天武天皇 10년 3월 병술조 등) 등이 있다. 중신련대도는 천무(天武)13년(684) 11월에 조신이라는 성을 받았으며, 그 이후 중신조신대도(中臣朝臣大島, 『일본서기』 持統 5년 11월 임술조 등)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중신조신(中臣朝臣) 및 대중신조신(大中臣朝臣) 일족의 인명에 대해서는 좌경 신별(상) 「대중신조신(大中臣朝臣)」 조(337)의 대중신조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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