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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박염부(狛染部; 고마소메베)

박염부(狛染部; 고마소메베)
 고려국(高麗國) 수모기왕(須牟祁王; 스무케와우)의 후손이다.
 
【주석】
1. 박염부(狛染部)
박염부의 씨명 가운데 박(狛; 고마)은 고구려의 국명, 염부(染部; 소메베)는 가죽 염색 일을 담당한 부민이었던 데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북방 수렵 지대에 그 근거를 가지고 발전한 나라로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는 “대인(大人)이 여우, 살쾡이, 원숭이, 희거나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갓옷을 입었다”라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어 피혁 기술이 발달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 『양로령(養老令)』 직원령(職員令) 대장성(大藏省)조에는 “박부(狛部) 6인이 여러 가지 가죽을 염색하는 일을 직장(職掌)으로 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직명에 박부(狛部)가 존재한 것으로 보아도 피혁공이 특히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증거라 볼 수 있다.
박염부는 여기에만 보인다.
2. 수모기왕(須牟祁王)
다음의 「박인(狛人)」 조에는 “고려국(고구려국) 수모기왕(須牟祁王; 스무케와우)의 후손이다”라고 적혀 있다. 수모기왕은 음운상으로 추모왕(鄒牟王)과 유사하다.
추모가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광개토왕비문이다. 비문에는 고구려를 세운 북부여(北扶餘)에서 나온 추모에 대해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녀(河伯女)의 딸이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또 광개토왕 시대에 북부여 지역에 진수하던 모두루(牟頭婁)의 묘지(墓誌)에도 “하백의 손(孫), 일월(日月)의 아들(子) 추모성왕(鄒牟聖王)은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니 천하 4방이 이 국향(國鄕)이 최고의 성스러운 곳임을 알 것이니”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신라 문무왕릉비(682년경)에는 “황룡(黃龍)을 맞아 주몽을 태우고”라고 기재되어 있다. 또 당에 항거하다가 포로로 끌려간 뒤 출사한 고구려 유민인 고을덕묘지(高乙德墓誌, 701)에도 “사해가 파도를 일으키고 순백의 태양이 정기를 내려 주니, 주몽이 태어났다”라고 하고, 천남산묘지(泉男産墓誌, 702)에도 “주몽은 해를 품고 패수에 임해 수도를 열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조에는 “성이 고씨이고 휘가 주몽이다”라고 적혀 있고, 그 분주에 “추모(鄒牟), 중해(衆解)”라고 기재되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에도 그의 아버지는 “추모(鄒牟) 혹은 주몽(朱蒙)”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서기』 천지천황(天智天皇) 7년(668) 10월조에는 “고(구)려의 중모왕(仲牟王; 추모오우)이 처음 나라를 세울 때”라고 하여 고구려의 시조를 중모왕이라고 기재하였다. 『신찬성씨록』 우경 제번(하) 「장배련(長背連)」 조에는 추모의 분주에 “일명 주몽(朱蒙; 스무)”이라고 적혀 있다. 또 산성국 제번 「고정조(高井造)」 조에도 “고(구)려국주 추모왕(鄒牟王; 스무와우)”이라고 적혀 있다. 『신찬성씨록』 에는 추모를 일명 주몽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추모왕에 대해서는 우경 제번(하) 「장배련(長背連)」 조(902) 추모(鄒牟) 참조.
박염부는 여기에만 보인다. 박염부씨가 조상이라 주장하는 수모기왕(須牟祁王)과 추모왕이 음은 유사하지만 수모기왕 자체가 고구려의 왕명으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박염부씨가 세운 조상이 의심스럽고 수모기왕과 박염부씨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근거가 「고기」와 「구전」 등에 존재하지 않아 미정잡성에 기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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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염부(狛染部; 고마소메베) 자료번호 : ss.k_0003_0010_0120_0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