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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필씨(筆氏; 후데시)

필씨(筆氏; 후데시)
 연(燕)의 재상인 위만공(衛滿公)의 후손이며, 붓을 잘 만들어 관인의 신분에 올랐다. 이로 인해 필(筆; 후데)이라는 성을 받았다.
 
【주석】
1. 필씨(筆氏)
필씨라는 씨명은 붓의 제작을 담당한 씨족이었던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필씨는 여기에만 보인다.
필씨가 아닌 필모모(筆某某)라는 인명은 천평보자 6년(762) 윤 12월 29일 「고인공급역명장(雇人功給歷名帳)」(『대일본고문서』16-179)에 필남공(筆男公)과 필을공(筆乙公)이 보인다.
2. 연상국위만공(燕相國衛滿公)
연(燕)은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국명으로 전국칠웅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하북성(河北省) 북부에서 요령성(遼寧省) 서쪽 끝으로, 동북 지방 남부 일대의 중국 북변을 지배하였다. 기원전 226년에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아 연왕(燕王) 희(喜)가 요동으로 옮겨갔고, 기원전 222년에 진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상국(相國)은 중국에서 재상(宰相)을 가리키는 말이다.
위만(衛滿)은 『사기(史記)』 와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 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는 인물이다. 기원전 206년에 중국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천하를 통일한 뒤 노관(盧綰)을 연(燕)에 봉했으나, 노관이 모반해 흉노(匈奴)로 달아나자 연이 일시 혼란스러웠다. 위만은 이 틈을 타 연의 망명자 1,000여 명을 이끌고 패수(浿水)를 건너 한과 고조선의 중간 지역인 천산산맥 동쪽에서 청천강 일대에 이르는 공백 지대로 망명해 왔다. 이후 준왕(準王)의 신임을 얻어 박사(博士)에 임명되고 100리 땅을 받아 서쪽 변방을 지키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 유망민(流亡民)들과 결탁하여 자기 세력을 기른 다음, 한이 침공해 오자 수도 방어를 구실로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준왕을 쫓아내고 스스로 조선왕(朝鮮王)이라 하였다. 위만의 입국 연대는 노관이 흉노로 망명한 해(서기전 195)와 비슷하나 그의 거병과 찬탈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사기』 와 『한서』 조선전에는 이를 효혜고후(孝惠高后) 시기(기원전 194~기원전 180)라고 적고 있다.
위만과 노관의 관계에 대해 『사기』 와 『한서』 「조선전」 에 의하면 위만은 노관의 부장(副將)으로 나타나며, 국적은 연인(燕人)이라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위만이 동으로 올 때 조선 옷을 입고 상투를 틀었으며 국호를 계속 조선이라 한 점을 들어, 위만을 본래 패수(浿水) 이북의 요동 지방에 토착한 조선인 계통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연인이라는 기사 자체가 한초(漢初)의 조작이라는 관점에서 위만을 토착 고조선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위만 출자설(出自說)에 대한 논쟁은 위만조선 지배층의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로 논점이 확대되어 현재까지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필씨는 여기에만 보이므로 연의 재상인 위만공(衛滿公)의 후손이라는 주장을 증명할 만한 기록이 「고기」 나 「구전」 에 보이지 않아 『신찬성씨록』 편찬국에서 미정잡성으로 분류하여 기재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을 신뢰한다면 고조선이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 그 유민들이 남으로 이동할 때 일본 열도로 이주했을 가능성도 있다.
*창원 다호리(茶戶里) 유적 출토 붓
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다호리 유적은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주남 저수지 인근에 있다. 원삼국 시대 전기의 대표적인 집단 매장 묘역으로, 사적 제327호로 지정되어 있다. 다호리 유적 1호분에서는 붓 5점과 나무판에 글씨를 긁어서 지우는 용도로 사용된 손칼(삭도)이 출토되었다. 붓 5점은 길이가 모두 23센티미터전후로 동일하다. 중국 전국 시대부터 한대에 이르는 유적에서 출토된 붓은 필간(筆杆)의 재질이 대체로 죽질(竹質)이며, 붓털이 필간의 일단에 끼워져 있고 다른 쪽 일단은 뾰족하게 처리되어 있다. 이에 비해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붓은 필간의 재질이 죽질이 아니며 붓털이 필간의 양단에 삽입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다호리 유적 출토 붓이 중국에서 유입된 것이 아니라 다호리 지역에서 직접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붓은 기원전 1세기에 문자를 사용한 것을 보여 주는 고고학적 물증으로서 의미가 크다. 또 일본의 야요이식 토기도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일본과의 교류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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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씨(筆氏; 후데시) 자료번호 : ss.k_0003_0010_0080_0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