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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고지련(古志連; 고시노무라지)

고지련(古志連; 고시노무라지)
 문숙녜(文宿禰; 후미노스쿠네)와 조상이 같으며 왕인(王仁; 와니)의 후손이다.
 
【주석】
1. 고지련(古志連)
고지련씨는 하내국(河內國) 제번(諸蕃) 「고지련(高志連)」 조에도 게재되어 있다.
 고지(古志; 고시)라는 씨명은 대화국(大和國) 고시군(高市郡) 판합촌(坂合村) 월(越; 고시)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현재 나량현(奈良縣) 고시군(高市郡) 명일향촌(明日香村) 월(越) 지역이다. 고지(古志)는 고지(高志)라고도 표기된다.
『속일본기』 천평신호(天平神護) 2년(766) 12월 을유조에 “화천국(和泉國) 사람 외종5위하 고지비등약자마려(高志毗登若子麻呂; 고시비토와코마로) 등 53인에게 고지련(高志連)이라는 성을 내렸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766년 12월에 고지비등약자마려 등이 연 성을 받기 전의 옛 성은 비등(毗登; 히토)이다. 비등이라는 성은 일본의 귀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기피하는 습관에 의거해 생긴 성이다. 천평승보(天平勝寶) 9년(757) 5월에 천황과 황후, 등원겸족(藤原鎌足; 후리와라노카마타리), 등원불비등(藤原不比等; 후지와라노후히토)의 이름을 성명(姓名)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성으로 사용되던 수(首; 오비토, 성무천황의 이름)와 사(史; 후히토, 불비등의 이름)는 ‘비등(毗登; 히토)’으로 개정되었다.
고지사 일족으로는 『행기보살전(行基菩薩傳)』 에 고지사양(高志史羊)의 분주에 좌타지(佐陀智)라고도 부른다고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고지사라는 씨성을 가지고 양(羊; 히츠지)이라 불린 인물이 좌타지(佐陀智; 사다치)로도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행기의 사리를 묻은 「대승정사리병기(大僧正舍利甁記)」 에는 “법휘(法諱)는 법행(法行)이다. 행기(行基)라고도 한다. 약사사(藥師寺)의 승려로 속성(俗性)은 고지씨(高志氏)이며, 행기의 아버지의 휘는 재지(才智; 사이치)이고, 행기는 재지의 장자이다”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고지사양이 곧 재지이며, 행기의 아버지임을 알 수 있다. 또 대판부(大阪府) 계시(堺市) 중구(中區) 토탑정(土塔町)에 있는 대야사지 토탑 유적에서 기와 기진자(寄進者)의 인명이 새겨진 기와 명문이 다수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 이름이 빠진 고지사(‘高志史某’)가 화천국 고지사씨 일족일 것으로 추정된다.
고지련씨는 고지련으로 개성한 고지련약자마려(高志連若子麻呂)가 있다.
* 행기(行基)
천지천황(天智天皇) 7년(668)에 태어나 천평(天平) 21년(749)에 죽은 나량 시대의 고승이다. 677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아버지 고지재지(古志才智)와 어머니 봉전고이비매(蜂田古爾比賣)의 장자로, 하내국(뒤에 화천국) 대조군(大鳥郡)에서 태어났다. 왕인(王仁)의 후손 서문씨(西文氏)의 지족(枝族)인 고지씨(高志氏) 출신이다. 생가는 행기에 의해 가원사(家原寺)로 개조되었다. 이곳은 현재 대판부(大阪府) 계시(堺市) 가원사정(家原寺町)에 해당된다. 불교의 민중 포교 활동이 금지되어 있던 시대에 금령을 깨고 기내(畿內)를 중심으로 호족과 일반민을 가리지 않고 폭넓게 불법을 전파하였다. 또한 도장과 사원의 건립뿐만 아니라, 도로의 개수, 교량 가설, 저수지 설치, 곤궁한 자를 위한 보시옥(布施屋) 등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동대사(東大寺) 대불(大佛) 조영 때는 실질적인 건립 책임자로 초빙되어 백성들에게 협력을 구하였고, 성무천황(聖武天皇)에게 보살계를 주어 대승정, 대보살의 호를 받았다.
* 『행기보살전(行基菩薩傳)』
평안(平安) 시대 말기에 기술된 것으로 추정되며 저자는 알 수 없다. 행기의 생년, 태어난 곳, 가계, 출가,학문 연구, 수행, 조사(造寺), 수행, 농업, 교통관계 시설 조영, 성무천황과의 관계, 대승정(大僧正)의 보임,입멸, 장송 등에 관한 내용을 편년체로 기록하였다.
* 「대승정사리병기(大僧正舍利甁記)」
당초제사(唐招提寺)에 전해지는 『죽림사략기(竹林寺略記)』 에는 행기묘가 문력(文曆) 2년(1235)에 발굴되었으며, 팔각석통(八角石筒) 안에 은통(銀筒)이 들어 있고 그 안에 ‘행기보살유신사리지병(行基菩薩遺身舍利之甁)’이라는 은으로 만든 표찰을 붙인 은제사리병(銀製舍利甁)이 봉안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행기의 사리를 담은 은통에는 309자로 이루어진 「대승정사리병기」 가 새겨져 있다. 거기에는 행기가 천평 21년(749)에 우경(右京)의 관원사(菅原寺) 혹은 희광사(喜光寺)에서 절명하여 생구산(生駒山) 동쪽 기슭에서 화장하여 죽림사 경내에 안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죽림사는 현재 나량현(奈良縣) 생구시(生駒市) 유리정(有里町)에 있는 사원이다.
2. 문숙녜(文宿禰)
문숙녜에 대해서는 좌경(左京) 제번(상) 「문숙녜(文宿禰)」 조(745) 참조.
3. 왕인(王仁)
나량 시대의 백제계 고승 행기(行基)의 묘지명인 「대승상사리병기(大僧上舍利甁記) 혹은 행기묘지동판(行基墓誌銅版)」 에는 행기의 “세속에서의 성이 고지이고, 본래 백제 왕자 왕이(王爾)의 후손이다”라고 적혀 있다. 또 『속일본기』 에 기재된 행기의 졸전에도 “속성이 고지씨이며 화천국 사람이다”라고 적혀 있다. 천평 21년(749)에 죽은 행기의 묘지에 묻혀 있던 「대승상사리병기」 는 현재 왕인의 출신에 관해 기록한 가장 오래된 자료이다. 천평 21년(749) 행기의 제자 진성(眞成; 신조)이 쓴 것으로 행기의 전기 중 가장 빨리 성립된 것이다. ‘왕이(王爾)’와 ‘왕인(王仁)’은 한자를 일본어로 읽을 때 ‘와니’로 발음되므로 동일 인물로 이해된다. 왕인에 관해서는 좌경 제번(상) 「무생숙녜」 조(747) 왕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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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련(古志連; 고시노무라지) 자료번호 : ss.k_0003_0010_005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