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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판무련(板茂連; 이타모치노무라지)

판무련(板茂連; 이타모치노무라지)
 이길련(伊吉連; 이키노무라지)과 조상이 같으며, 양옹(楊雍)의 후손이다.
 
【주석】
1. 판무련(板茂連)
판무(板茂)의 씨명은 판지(板持)라고도 쓴다. 하내국(河內國) 금부군(錦部郡) 판지촌(板持村)의 지명에서 유래한다. 현재의 대판부(大阪府) 하내장야시(河內長野市) 천대전(千代田) 지역이다. 판무련의 옛 성은 사(史)이다. 『속일본기』 양로(養老) 3년(719) 5월조에 종5위하 판지사내마려(板持史內麻呂) 등 19인이 연(連)으로 개성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판무련씨 일족으로는 『속일본기』 천평승보(天平勝寶) 5년(753) 9월 무술조에 무위(無位) 판지련진조(板持連眞釣)가 1백만 전을 헌납하여 외종5위하의 관위를 주었다고 하여,거액을 내고 관위를 사는 매관매직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영집해』 학령(書學生條, 神龜 2년 3월 14일부 「太政官處分」)에 판무련안마려(板茂連安麻呂)가 나오고, 『정창원문서』 천평승보(天平勝寶) 5년(753) 9월 무술삭 「경사수필묵주문(經師受筆墨注文)」(『대일본고문』 10-45)에 판지련삼의(板持連三依) 등이 있다.
〈하내국서림사연기(河內國西琳寺緣起)〉의 「승안원년칠월사승경심[상광방]기운(承安元年七月寺僧慶深[常廣房]記云)」 에 “옛적에 백제국 왕자가 서쪽에서 와서 조정에 출사하였다. 문장 으뜸인 까닭에 문(文)을 성으로 칭하였다. 만년에 영화를 피해 불가에 들어갔다. 판무옹련(板茂翁連)의 저택에서 기거하였다. 7성의 사람들에게 물어 당사(當寺)를 지었다. 거세(巨勢), 금집(金集), 청내(淸內), 청야(淸野), 모원(茅原), 판무(板茂), 문(文) 운운”이라고 하여 서림사 건립 시의 자문인으로 7개 씨족 중에 판무씨가 보인다. 또 동 연기의 「사관사(寺官事)」 조에는 “단월(檀越)[제장(諸帳)에 많이 있다. 정야(淨野), 문(文), 판무(板茂), 무생(武生), 장(藏)]”이라는 제 씨 중에 판무씨가 보인다.
2. 이길련(伊吉連)
이길(伊吉)의 씨명은 일기(壹伎), 이기(伊岐)로도 표기하며, 일기국(壹岐國)의 지명에서 유래한다. 현재의 장기현(長岐縣) 일기군(壹岐郡)이다. 이길련의 옛 성은 후히토[史]이다. 『일본서기』 천무(天武) 12년(683) 10월조에 “……일기사(壹岐史)에게, ……연(連)을 사성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길련씨 일족으로는 『일본서기』 서명기(舒明紀) 4년(632)조에 이기사을등(伊岐史乙等)이 있으며, 대화(大化) 2년(646) 3월조에 이기사마려(伊岐史麻呂), 천무 원년 7월조에 일기사한국(壹伎史韓國)이 있고, 『속일본기』 문무(文武) 4년(700) 6월조에 이기련박득(伊岐連博得)이 있으며, 경운(慶雲) 4년 5월조에 이길련고마려(伊吉連古麻呂)가 있고, 『영집해(令集解)』 승니령(僧尼令) 「임승강(任僧綱)」 조의 화동(和銅) 4년(711) 10월 10일부에 이길련자인구의(伊吉連子人口宜) 등이 보인다. 이 외에도 목간 등 기타의 자료에도 다수 확인되고 있다.
이 중에서 이기련박득은 이길련박덕(伊吉連博德)이다. 그는 제명(齊明) 5년(659)에서 7년에 걸쳐 견당사로서 파견되었다. 천지(天智) 3년(664)에는 일본에 파견된 당사(唐使)곽무종(郭務悰)을 대재부에서 접대하였고, 동 6년에는 웅진도독부에서 보낸 당의 사절 사마법총총(司馬法聰聡)을 송사하여 귀국시켰다. 또 지통(持統) 9년(695)에는 신라에 사절로 파견되었으며, 문무(文武) 4년(700)에 직광사로 승진하여 대보율령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가 남긴 기록으로 성립 연대가 천무 12년(683) 이후로 추정되는 『이길박덕서(伊吉博德書)』 가 있다. 이 책은 이길박덕이 견당사로 파견되었을 때의 수행 기록으로 『일본서기』 백치(白雉) 5년(654) 2월조, 제명기(齊明紀) 5년(659) 2월조, 동 6년 7월조, 동 7년 8월조에 관련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선린국보기(善鄰國寶記)』 에 인용된 『해외국기(海外國記)』 에는 대을중(大乙中) 이기사박덕(伊岐史博德)이라고 인명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사(史) 성으로 되어 있다. 그가 연(連) 성을 갖기 이전에 사성(史姓)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이길련고마려(伊吉連古麻呂)는 견당사로 파견되었고(『속일본기』慶雲 4년 5월조), 이길련택마려(伊吉連宅麻呂, 雪連宅滿)는 견신라사로 보내졌다(『만엽집』 15-3644, 3688). 이길련익마려(伊吉連益麻呂)는 견고려부사(견발해사)에 임명되었다(『속일본기』 天平寶字 6년 12월조). 이길련씨 중에 외교 사절이 유독 많이 배출된 것은 문자 지식에 밝은 지식인이 많고, 해외 사정에 밝다는 점, 통역에 유리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것은 당에서 온 이길련씨뿐 아니라 백제계, 신라계 등 한반도 도래인 출신 관인 중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길련씨와 동족으로 생각되는 씨족으로 『속일본기』 천평보자 3년(759) 12월조에 일기사산수(壹岐史山守) 등 403인이 연(連) 성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3. 양옹(楊雍)
『속일본후기』 승화(承和) 2년(835) 9월조에, 하내국인 이길사풍종(伊吉史豐宗) 및 동족 12인이 자생숙녜(滋生宿禰)의 씨성을 받았으며 이들은 당인(唐人) 양옹의 7세손인 귀인(貴仁)의 후예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이길사풍종은 이길련의 지족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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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무련(板茂連; 이타모치노무라지) 자료번호 : ss.k_0003_0010_0040_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