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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장 근대한국문서

부록 2. 국왕의 서명이나 인장이 날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1895년 9월 28일 발표된 국왕의 칙령

№214에 첨부
서울, 1895년
 
국왕의 서명이나 인장이 날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1895년 9월 28일 발표된 국왕의 칙령
 
과인이 보위에 오른 지 이미 32년이 지났다. 그러나 국가의 통치에 있어 그 어느 것도 개선된 바가 없다. 민씨 집안 출신의 왕후는 자신의 척족들을 끊임없이 과인에게 강요하여, 마침내 과인을 민씨들로 둘러싸이게 만들었다. 그들은 과인의 통찰력을 흐리게 만들었으며, 과인과 과인의 백성들 사이에 뚫지 못할 벽을 쌓아 올렸다. 또한 그들의 과인의 무지를 이용하여 백성들을 학대했으며, 법령의 해석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매관매직하여 돈벌이만 찾음으로써 국가를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백성의 폭동과 사회적 불안을 수차례에 걸쳐 야기했다. 왕후의 간계함을 과인이 몰랐던 것은 아니나, 왕후의 강력한 친족들과 그 추종자들에게 맞서 과인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그에 더하여 왕후 척족들의 전횡을 타파하기로 궁극적이고 확고하게 결정한 과인은 작년 1월 선조들에게 제사 드리는 곳주 009
번역주 009)
종묘를 말한다
닫기
을 찾아 민씨 일당이 오래도록 국정에 참여한 행위를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고 엄숙하게 약속드렸다. 과인은 왕후가 자신의 행동을 회개할 것이라 믿었으나, 그것이 실수였다. 그녀는 계속해서 제멋대로 자신의 동조자들은 입궐시켰으며, 자신의 종복에게 시킨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역시 과인의 가장 사소한 행동까지도 감시하고, 대신들의 각료회의도 염탐하도록 하명했다. 또한 마치 과인이 하명한 것처럼 하여 여러 가지 상이한 명령을 하달함으로써 군사들을 혼란에 빠뜨렸으며, 일부 부대를 해산시키기로 과인이 결정했다는 소문을 유포시켰다. 궁궐에서 발생한 폭동의 주요 원인이었던 왕후는 현재의 이런 곤란한 순간에 마치 10년 전과 동일하게 과인을 버려두고 어디론가 도주하여 피신해버렸다. 과인은 왕후를 찾기 위해 모든 대책을 다 동원했으나, 찾을 수 없었으며, 왕후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고귀한 의무를 파기한 왕후는 더 이상 자신이 지닌 최고의 직위를 유지하고 그녀의 이름을 종묘에 남겨두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과인은 자신의 과거 실수를 보상하고자 이로써 민씨의 왕후 직위를 박탈하여 상민계급의 여인 등급으로 폐서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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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2. 국왕의 서명이나 인장이 날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1895년 9월 28일 발표된 국왕의 칙령 자료번호 : kifr.d_0004_0170_0220_0020